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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민주당 노무현 후보 당선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2002년
12월 19일목요일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로 치러졌다.
선거 전까지 각축전을 벌인 유력한
후보는 15대 대통령 선거에 나와 김대중
에게 패배한 제1야당 한나라당의 대표 '이회창'과 여당 새천년민주당에서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가 된 '노무현'이었다.
대선 재수생인 이회창 후보는
경험이나 세력 면에서 노무현 후보보다
대권 고지에 좀 더 유리할 것으로 점쳐
졌으나, 그 점이 오히려 발목잡기가 된
측면이 있는지 이전 대선부터 불거진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 노사모로 대표되는
네티즌의 영향력, 월드컵 4강 바람을 타고
선거 몇 달 전 갑자기 대권주자로 떠오른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쟁취 등의 영향
으로 노무현 후보가 최종 승리하게 된다.
▶2002년제16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노무현 후보 당선
▶2001년아르헨티나 비상사태 선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민 수천여명이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며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 주요 도시에서 극심한 경제난과 생활고에 시달려온 주민들이 상점을 약탈하고 관공서를 점거하는 등 폭동을 일으켜 2001년 12월 19일 저녁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페르난도 데 라 루아(Fernando de la Rua) 대통령은 앞서 18일 밤부터 본격화된 소요사태가 19일 전국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임에 따라 20일 0시부터 30일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폭동이 발생한 지역의 근로자와 빈민들에게 우선 700만페소(약 90억원) 상당의 생필품을 지급하는 긴급대책을 발표했다.
42개월째 경기침체에 시달리고 있는 아르헨티나는 국제통화기금(IMF) 지원을 받기 위해 초긴축 재정정책을 추진, 진통을 겪어왔다. 결국 경제위기와 이로 인한 소요사태의 여파로 페르난도 데 라 루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12월 20일 임기 2년을 남겨놓고 중도 사퇴했으며, 소요사태로 인해 선포한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이후 헌법 규정상 48시간 이내 임시 대통령 선출 때까지 대통령직을 자동 승계한 상·하원 의장 등을 포함, 4명의 임시 대통령이 줄줄이 물러났다. 2002년 2월 1일 아르헨티나의 새 대통령으로 페론당의 고참 정치인인 에두아르도 두알데 상원의원이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어 다섯번 째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2000년손산 캄보디아 전 총리 사망
▶1998년클린턴 美대통령 성추문관련
탄핵 결의안, 하원 본회의 통과
탄핵 결의안이 통과된 후 백악관에서
나오고 있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
▶1995년국회, 12.12 및 5.18관련자
처벌을 위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 법안`의결
▶1994년4개지역 민영 TV 방송국
가허가
▶1992년김대중, 정치일선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
김대중 민주당 후보(오른쪽)가 자신의
의원직 사퇴를 공식 선언한 뒤 당사를
떠나면서 이기택 대표, 김영배 의원 등과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1990년청룡영화상 17년 만에 부활
▶1987년세종과학기지 기공식
(남극 킹조지섬)
▶1986년소련 사하로프 박사
유배지로부터 해금
▶1984년영국·중국, 홍콩반환협정 조인
영국 대처 수상(왼쪽)과 중국 조자양 수상이
홍콩반환협정에 조인한 후 악수하고 있다.
▶1984년삼성전자 세계 최대
전자레인지 공장 준공
▶1982년지리산 등산객 50명 조난
▶1981년한국 수출실적 200억 달러 돌파
▶1980년국방부, 일반예비군
훈련 33세로 인하
▶1980년국무회의, 중앙정보부를국가
안전기획부로 개칭하는 중앙정보부법 의결
▶1980년입법회의 방송광고공사법 의결
▶1978년한국-모리타니 국교 수립
▶1975년최규하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
▶1972년유조선 Sea Star호
페르시아만서 충돌 전소
▶1968년우정연구소 신설
▶1968년대학입시 예비고사 처음 실시
▶1967년공화당의 날치기예산안통과,
야당의원들 원내농성 시작
▶1966년아시아개발은행 개점
▶1965년프랑스 대통령선거. 드골 당선
▶1962년한국-스위스 국교 수립
▶1962년NATO 정상회담1962년한국
월남 무역협정 조인
▶1960년제3대 지방의회 의원 선거
(시-읍-면의회 의원 선거) 실시
▶1959년파리서 서방4개국 수뇌회의,
흐루시초프 소련수상에 동서수뇌회담
초청장 발송
▶1955년수단, 독립 선언
▶1950년NATO 이사회, 아이젠하워
장군을 유럽통일군 사령관에 임명
▶1949년대한청년단 결성
▶1948년네덜란드, 인도네시아서
제2차 경찰행동
▶1946년월남서 반(反)프랑스
해방투쟁 발발(인도차이나전 발발)
1946년 오늘 베트남 독립동맹군이 일제 봉기, 프랑스군과의 전면전이 벌어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됩니다. 온 베트남의 산하를 휩쓴 30년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프랑스 지배아래 있던 베트남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의 비시정부 아래서 식민정권을 유지하다 일본군의 진주로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바오다이 황제가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1941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한 ‘호치민’(胡志明)은 30년간의 해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합니다. 그는 곧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 Viet Mihn)을 결성하고 유격대를 조직, 일본과 프랑스를 동시에 공격합니다.
베트민 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변변한 개인화기조차 갖추지 못했지만 식민지 조국을 당당한 독립국가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용사들이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 무렵엔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미국의 정보기관(OSS, CIA의 전신)의 지원을 받기도 했죠.
베트남에 투입되는 프랑스 외인부대원들.
지난한 협상 끝에 호치민은 프랑스로 하여금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승인하게 하는데 성공하지만, 베트남은 ‘프랑스 연방’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이었죠.
1946년 1월 베트남 전역에서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 호치민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프랑스는 국민투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2만 명을 상한선으로 못 박았던 합의를 무시하고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 병력을 15만 명으로 대폭 확충합니다.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베트민 군과 프랑스 식민지군 사이에 소규모 충돌이 계속됩니다. 그해 11월 23일, 북부의 항구 하이퐁 만(灣)에 입항하는 선박에 부과하는 관세에 관한 법적권리를 둘러싸고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의 협상이 결렬되자 프랑스군은 하이퐁에 폭격을 가해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죠.
더군다나 12월 19일 대통령 관저를 포위한 프랑스군이 베트남 민중에 의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호치민’ 대통령과 ‘보 구엔 지압’ 장군을 체포하려하니, 마침내 베트민 군이 일제히 봉기해 프랑스 군대를 공격합니다.
▶1945년임시정부 환영 전국대회 개최
▶1944년동아프리카에서 많은 화석을
발견한 케냐의 고생물학자 리차드 리키
출생
▶1932년윤봉길 의사 순국
거사 전 태극기 앞에서 폭탄을 쥐고
사진을 찍고 있는 윤봉길 의사
윤봉길 [尹奉吉, 1908.6.21~1932.12.19]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27분,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형무소. 2명의 일본군이 10m 거리에서 목표물을 향해 조준사격자세를 취하자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사형수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검안의가 절명을 확인한 시각은 13분 뒤인 7시40분. 스물다섯의 청년 윤봉길은, 장제스 중국 총통의 말마따나 ‘중국군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해내고 이렇게 숨져갔다. 분이 안 풀렸는지 일제는 시신을 인근 쓰레기하치장에 암매장한다.
8개월 전인 4월 29일 일본군은 상하이사변의 승전과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잔치인 천장절(天長節)을 기념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윤봉길도 폭탄이 든 도시락과 물통을 들고 인파속에 숨었다. “장부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를 남긴 채 고향 예산을 떠난지 벌써 2년. 폭발음과 함께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과 9사단장 등 군수뇌부 10여명이 크게 다쳤다. 자결에 실패한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돼 일본으로 압송됐다.
당초 일본군은 윤봉길을 훙커우 공원에서 공개처형하려 했으나 자칫하면 국제적인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고 그로 인해 국제여론이 비등해질 것을 우려, 일본 내 처형을 결정했다. 시신은 광복 후인 1946년 5월 순국 14년 만에 봉환돼 효창공원 묘소에 안장됐다.
▶1931년조선혁명군간부 30여명
신빈(新賓)에서 일본군에 체포됨
▶1927년장작림, 재(在)만주교포의
. 축출을 명령
▶1925년이탈리아, 독신자들에게
세금부과
▶1924년스페인 문학가 시피텔러 사망
▶1921년상표등록규칙 공포
..(1922.1.11 시행)
▶1915년프랑스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 출생
"나는 키 작은 사람들을 위해서, 뚱뚱한 사람들을 위해서, 소심한 사람들을 위해서 노래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느날 그들에게도 사랑이 찾아 올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나에게 있어 샹송과 사랑은 하나이다. 나는 사랑에 빠진 여자이다. 나는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 . 그것은 불가능 하다."
- 프랑스 샹송의 여왕 에디트 피아프(Edith Giovanna Gassion) 1915.12.19. - 1963.10.11.
길가에서 태어난 것 부터가 굴곡진 삶의 시작이었다. 3류가수였던 어머니는 그를 낳은지 두달 만에 사라졌고 곡예사 아버지는 그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다. 세 살때 걸린 각막염으로 몇년동안은 앞이 보이지도 않았고, 10대 때 낳은 딸은 두 살에 죽었다. 도대체 끝을 알 수 없는 불행과 절망의 연속이었다.노래 몇곡에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으로 그날그날 살고 있던 에디트 피아프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8세 때였다. ‘작은 참새’라는 뜻의 ‘피아프’란 이름으로 카바레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작고 초라한 외모, 그러나 청중들은 상처받은 영혼에서 울려나오는 그의 노래에 매료됐다. ‘샹송의 여왕’을 향한 출발이었다.
그는 언제나 사랑을 꿈꿨다. 사랑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럴때면 슬픔을 노래로 달랬다. 그의 삶은 자신을 사랑해 줄 남자를 찾는 여정이었다. 헤비급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이야말로 그가 느꼈던 진정한 첫 사랑이었다. 그러나 세르당 마저 비행기사고로 그의 곁을 떠나자 죽은 연인을 위해 직접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 ‘사랑의 찬가(Hymne AL'amour)’였다. 이브 몽탕과의 핑크빛 사연은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잇따른 자동차 사고와 마약 중독은 서서히 그의 몸을 망가뜨려 결국 1963년 10월11일, 48세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시간 뒤 평생의 친구였던 시인 장 콕토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조금전 피아프의 죽음에 “그녀는 방랑의 여로를 다한 배”라는 애도의 말을 남겼던 콕토였다.
일찍이 카바레의 지배인 루이 드프레에게 노래를 인정받아 그의 카바레에서 데뷔하였으나 그가 피살되자 살인혐의를 받고 은퇴를 합니다.시인 레이몽 아소,여류 작곡가 마르그리트 모노등의 격려로 다시 일어선 그녀는 1940년 J.곡토가 그녀를 위하여 쓴 희곡을 독연하여여배우로 인정받고 그녀 자신의 작사에 의한 <장밋빛인생>,<사랑의 찬가>등 히트곡 외에도 <파리의 기사>로 1951년 <파담파담>으로 1952년 디스크 대상을 받아 유명해집니다. 이브 몽탕을 사랑하여 그를 인기 연예인으로 만드는 뒷바라지를 하며 23세의 젊은 남편이 지켜보는 가운데 48년의 일생을 마칩니다.그녀는 사랑없이 살 수 없다고 하였으며 권투선수'마르쉘 세르당'을 사랑했습니다
마르셀 세르당은 유부남이였지만 그녀는 그에게 그 어떤 요구(이혼,별거)하지 않았으며 항상 진실된 사랑을 바랍니다.
1949년 뉴욕에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그녀는 마르셀 세르당에게 보고 싶다고 당장 뉴욕에 오라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보러 오는 도중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합니다.(에어 프랑스의 최초의 사고) 슬픔에 잠긴 그녀는 긴 웨이브 머리를 과감히 자르고 도저히 무대에 설 기분같지않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올라서 신들린 노래 실력을 보여줍니다.
고인이 된 마르셀 세르당을 위해 만든 노래가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입니다.
▶1911년이상설 이철호 등,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권업회 조직
▶1906년소련의 정치가겸 공산당
관료 브레즈네프 출생
▶1902년영국의 연극.영화배우
랄프 리처드슨 출생
▶1900년군악대 설치령 반포
▶1894년근대적 스키야 양식의 선구자
일본의 건축가 요시다 이소야 출생
▶1882년거문고의 명인 이수경 출생
▶1878년미국의 작가 바야드 테일러 사망
▶1877년에디슨, 납관식 축음기 고안
▶1848년영국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 사망
▶1843년소설 ‘크리스마스 캐럴’ 출간
▶1813년영국의 물리학자 토마스
앤드루스 출생
▶1714년러시아 탐험가 비투스 요나센
베링 사망
▶1036년중국 시인 소동파 출생
https://youtu.be/kAxTgdZUfgY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행디의생복블러그,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