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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자료에 등록된 안달삼(安達三, 1837∼1886) - 안병택(安秉宅, 1861∼1936) 두 분 부자(父子)는 제주도 조천(朝天) 출신이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선생에게 사사하여, 전라남도 장성 그리고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에서 후학을 지도했던 분들인데, 아래의 안종수(安鍾秀, 1801~1870)공의 묘표(墓表) 기록을 보니, (구)죽산안씨 자손인 것으로 생각됨.
안달삼(安達三, 1837∼1886)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행오(行五)이고, 호는 소백(小栢)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제주도 제주시 조천(朝天)에서 태어났다. 매계(梅溪) 이한진(李漢震)을 사사하였으며, 1883년(고종 20)에는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제주에 유배 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교유하면서 도덕과 학문을 겸비한 선비로 칭찬을 받았다. 1892년 제주목사(濟州牧使) 이규원(李奎遠)에게 천거되었으나 거은(巨隱) 현상휴(玄商休)의 반대로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후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사사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장성(長城)으로 이사하였으며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아들은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어 기정진 문하에서 수학하고 전라남도 광주(光州)로 이주하여 후학들을 가르쳤다.
안병택(安秉宅, 1861∼1936)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처인(處仁)이고, 호는 부해(浮海)이고, 일명은 안택승(安宅承)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제주도 조천(朝天) 출신이다. 아버지는 안달삼(安達三)이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전라남도 장성(長城)으로 가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사사하였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장성으로 이주하였으며 기정진의 손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교유하였다. 이후 다시 전라남도 광산(光山) 하남면(河南面: 현재의 광주시 광산구)으로 이사하여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는데, 문하생으로는 《탐라기년(耽羅紀年)》의 서문을 지은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제주의 의병장인 초광 고사훈 등이 있었다. 그의 문집으로 《부해만고(浮海漫稿)》가 있다. 모두 12책이었으나 3책은 분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1476)』,『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1565)』와 조종운(趙從耘,1607~1683)의『씨족원류(氏族源流)』와 안종수(安鍾秀,1801~1870)공의 묘표(墓表) 기록을 참고하여 대략적인 가계도를 작성해보면 안전(安戩,?~1298) - 안유충(安惟忠) - 안국서(安國瑞)로 이어지는 구죽산안씨 자손입니다.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중세연구실 자료(http://khistory.korea.ac.kr/korea/genealogy.php)를 참고 바랍니다.
안전(安戩, ?~1298) - 안유충(安惟忠) - 안국서(安國瑞) - 안경(安景) - 안분(安芬) - 안중선(安仲善) - 안계성(安繼性) - 안숭수(安崇壽) - 안신(安愼) - ? - ? - ? - 안예천(安禮千) - 안시민(安時敏) - 안치완(安致完) - 안경로(安景老) - 안필련(安弼連) - 안종수(安鍾秀) - 안달삼(安達三) - 안병택(安秉宅)
노사 기정진 선생에게 사사했던 안달삼(安達三, 1837∼1886)의 청에 의해 1902년 간행된 기정진(奇正鎭, 1798~1879)선생의『노사집(蘆沙集)』27권에 실린「안종수(安鍾秀,1801~1870)공의 묘표(墓表)」기록이 있어 여기에 옮깁니다.
안군묘표(安君墓表) a_310_591c
君諱鍾秀字乃元。安氏本竹山人。簪組相承。至諱崇壽官縣監,諱愼官參奉。君十世若九世。五世祖禮千。以塾師入耽羅。仍居焉。曰時敏。曰致完。曰景老。曰弼連。高曾祖父諱也。妣金海金氏盛弼女。君生純廟辛酉。得年七十而終。君嘗欲入漢師。海上遇颶。漂入日本而還。自此不喜乘舟。有子曰達三。以君之敎。頗涉經史諸子。過海一年一度。從吾遊者五六年。以故知有君。亦嘗一書通問。君後我三歲。而不幸先我逝矣。聞其平生。奉先孝居喪毁。性度溫而嚴。不可干以非義。對後生。每以邵堯夫三品之說激厲之。處鄕黨言議。常依藍田鄕約。此皆達三所告。儘不誣其親。娶全州李昌烈女。有一男五女。男卽達三。李汝敦,金炳休,金宗興,韓宗恪,金英炳。其女壻也。葬于得富境負丙之原。後欲考君之世者。有表石在。 |
첫댓글 감사합니다....죽산안씨 산원공파 선조입니다....
노사 문인록에는 신죽산안씨로 등재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록을 찾다 보니 발견하게 되어 올린 글입니다. 저희 증조부 안태시 교장선생이 1935년 목포제일보통학교 훈도로 있을때 목포에 살던 부해 선생과 교유하셨다고 합니다. 연배가 30년 연상이라 찾아가서 여쭤보고 그러셨나 봅니다.
위에 분들은 죽산보에 등재되어 잇습니다...또한 저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산원공파입니다...가정보나 성화보 등 임진왜란 전까지도 복야공파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었는데 어찌 오늘날 소부소감공파의 지파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종손이 안팽수공으로 무후(송강 정철선생의 외조부)인지라 그 후 많은 사건(임란,병란등 )이 있어 계보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추정되는 몇 가지 기록은 있으나 산원공파에 등재된 후손이 파주와 북한에 많이 거주하니 훗날 고증을 스스로 하도록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