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름 | 한 자 | 창씨 명 | 일제시기 경력 및 활동 | 8.15 이후 경력 | 처리내용 | 죄명(반민족법해당) |
송상석 | 宋相錫 | - | 경남통영,고성 경남경찰부 고등계형사,독립운동가 체포 | 목 사 | 8.12조사중 | - |
제2오류: 역사를 왜곡하고 편집한 부분
『경남노회 100년사』 p. 188 (10) 송상석 목사 부분
관련 내용은 전체적으로 상당한 부분이 미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1941년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이약신 목사와 6개월 옥고를 치르고, 황해도 황주에 피신하기도 했다고 하였으며, 1945년 평양 사동교회를 개척했으나, 공산당의 탄압으로 1946년 월남하였다고 함. 고려신학교 설립을 위해 만주 봉천에서 박형룡 박사를 밀선으로 모셔옴. 이후 고신총회가 신학에 박윤선, 신앙에 한상동, 행정에 송상석이라 부른 지도자이다.”라고 기술한 동 자료를 분석한 결과 상이한 점이 상당부분 발견되었다.
① 미국 에반겔리아대학교 신현국 총장의 큰외삼촌인 경남 웅동 출신 지수성은 평양숭실대학부 조선어과를 졸업하고, 부산진 일신여학교 교사(1924년 4월1일~1940년 3월까지.)로 근무하였다. (동래여고 Tel.(051)514-1227). 이후 황해도 황해중학교 교사(1940~1945년까지)로 근무하다가, 남하하여 진해여고 교장(1945년 9월 30일~1946년 9월 6일까지)을 역임하였다. (진해여고 Tel.(055)541-6911). 지수성 교장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황해중학교에 재직하던 1940~1945년 기간 동안, 송상석 목사는 당시 황해경찰서 고등계형사로 근무하였으며, 악명 높은 평판으로 주민들의 폭동 직전에 생명의 위협을 느껴 야반도주하여 남하한 것으로 증언하였다.(위 밑줄 부분, 특히 송 목사의 황해경찰서 근무기간은 확인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근삼 박사 부인 조영진 여사는 지수성 교장 재임 당시 진해여고 졸업반으로 1946년 9월 30일 졸업하였다. 졸업장 증서 177호. 미군정부 경상남도장관 명의 공립국립학교훈도 6급 자격증을 수여받았다.
② 지금까지는 한국기독교 역사가 중에서“송상석 목사가 1941년 신사참배 반대로 6개월 옥고를 치렀다.”는 일제시대의 재판 자료와 같은 구체적인 증거에 의한 근거를 제시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국기독교대백과사전」에 수록된 송 목사 관련 내용은 감리교신학대학교 이덕주 교수가 제공한 기록이다. 손성은 목사가 자료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덕주 교수에게 전화하여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더니, 이덕주 교수가 송 목사의 임종 직전에 병상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송상석 목사가 자기의 이력서 쪽지를 건네주어서 받았던 것을 보관하고 있다가, 그 내용을 보고「한국기독교대백과사전」수록 자료로 제공했다고 실토를 하였다. 이것은 송 목사가 임종 직전 사후를 염두에 두고 신상 털기를 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를 역사가들은 신분을 변조 세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진정한 출옥성도였다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라도 신청을 했을 법하지 않았겠느냐? 고 반문한다) 따라서 「부 ․ 경교회사연구」제58집(2015. 11.) p.24에 인용된 각주 「한국기독교대백과사전」9권:708은 픽션이며 소설이다. 어느 역사학자가 인명대백과사전을 근거로 논문의 각주를 달고, 역사를 소설같이 재미있게 기록하는 경우가 있는가? 그 의도와 신뢰성은 요동을 친다. 인명백과사전은 개인의 신상 정보를 제3자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대개 본인이 제출한 자료에 의한 근거를 가지고 사전이 출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③ 밀선을 타고 만주 봉천에서 박형룡 박사를 모셔온 것은 상당한 치적으로 인정되나, 당시는 고려신학교가 이미 개교된 이후이다.
④ 송 목사의 저서 『법정소송과 종교재판』에 의하면 신학은 박윤선, 신앙은 한상동, 정치는 송상석이라고 언급하므로 써, 자신을 정치목사로 규정했다. 고신총회가 세분을 신학, 신앙, 행정 부분의 최고라고 언급한 적은 없다.
민중공보 1946년 8월 12일 자 기사에 의하면, 송상석 목사는 통영 고성경찰서 고등계 형사이다.(국회도서관 마이크로필름, 부산일보사 자료 참고).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에 활약하고 있는 청년(해방 후 경남 경찰국장 최철용)을 비롯한 독립 운동가를 체포하여 투옥 시켰다.
내용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동 100년사의 주요내용과 미주 부분을 보면 실제 원고 작성자는 따로 있다는 점이 확신된다. 그렇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중대한 사건이 아닌가? 고신동산의 포도원을 허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비록 부끄러운 역사라고 할지라도, 그 발자취를 잠시 속일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숨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주후 2016년 10월 4일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개혁하자 고신교회!”에 부응하기위해 위 건의문을 공감한다.
한상동 기념사업회
/기념행사 준비위원장 부산노회장 양승기 목사 /동 부위원장 손성은 목사
/가족대표 한기완 장로 /학술연구위원장 이신철 교수
/대외협력위원장 이우준 前고려학원이사장 /동원홍보위원장 권경호 목사
/재정위원장 최수환 장로 /총무기획위원장 김영수 장로
/출판전산위원장 최수경 글마당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