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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관우물터와 현덕왕후] |
단종의 불행 예언한 노비 ‘풍수 상소’ |
‘안산공단’으로 더 잘 알려진 경기 안산시 목내동 472-1번지(14블럭)에 가면 ‘일진전기’라는 회사가 있다. 이 회사 정문 바로 옆에는 관우물지라는 표석이 있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적혀 있다.
‘목내동 능 안에 있던 소능(昭陵)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를 모셨던 능이었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지 3일 만에 돌아가셨는데 세조가 단종을 죽이려 할 때 세조의 꿈에 나타나서 꾸짖자 크게 노한 세조는 현덕왕후의 관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후 현덕왕후의 관이 처음 도착한 바닷가는 뒤에 육지가 되어 우물이 생겼다. 이곳을 관이 닿았던 자리라 해서 ‘관우물’이라 불렀다.’
이 이야기가 모두 사실(史實)은 아닐지라도 세조가 단종의 어머니이자 자신에게는 형수이기도 한 현덕왕후 권씨의 무덤을 파헤쳐 없애버린 일은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런데 현덕왕후 무덤이 안산의 이 자리(소릉)로 정해질 때 이에 대해 불길한 의견을 개진한 풍수학인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이 자리가 나빠 장차 자손이 절명하리라는, 차마 임금에게 전할 수 없는 대단히 불경스러운 예언을 한다. 그러한 불행한 예언은 훗날 그대로 현실이 된다. 단종의 어머니 무덤과 풍수에 얽힌 불행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세종의 며느리 현덕왕후 권씨는 아들을 낳은 지 3일 만에 죽었다. 장손을 낳아준 권씨를 불쌍히 여긴 세종은 길지 가운데 길지를 찾으라는 명을 내린다.
그렇게 해서 정해진 곳이 안산 목내동 관우물 근처였다. 이때 전농시(제향에 쓸 곡식을 관리하던 관청) 소속의 노비 목효지(?~1455)가 세종에게 장문의 상소를 올려 그곳이 나쁜 땅이라고 아뢴다. 다음은 상소문의 요약이다.
‘주산에서 혈장(무덤 쓸 자리)으로 이어지는 산능선(내룡)이 약하고 끊어진 곳이 많아 장차 후손이 없어질까 두려우며, 청룡(무덤 왼쪽을 둘러싸는 산)이 혈장을 감싸지 못하여 특히 아들에게 불행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한 무덤의 좌향이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폐허가 된 옛 읍터나 장터는 무덤 터로 적당하지 못한데, 이곳은 안산의 고읍(古邑)이기 때문에 이 역시 금기사항을 범한 것입니다.’
이곳에 무덤을 쓰면 ‘왕손의 대가 끊긴다’는 천한 노비의 상소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오늘날 누군가가 이와 비슷한 글을 현직 대통령에게 올린다면 그 글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더구나 일개 노비의 상소라면 그저 웃어넘기고 불쏘시개로 쓰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노비의 글은 그대로 세종에게 전해진다. 글을 읽은 임금은 그날로 우의정, 예조판서, 도승지 안평대군에게 다시 살펴보되 문제점이 드러나면 다른 곳을 찾으라고 명했다. 왕명을 받은 이들은 현장을 답사하고 목효지의 주장 가운데 좌향이 잘못되었다는 점말고는 취할 것이 없다는 의견을 올린다.
조정에서는 일개 노비가 무덤 터에 대해 잘못을 알았으면 해당 관청(풍수학)이나 예조에 올려야지 함부로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고 하여 벌을 내릴 것을 청한다.
그러나 임금은 목효지를 노비 신분에서 풀어주고 풍수 공부에 전념하게 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세종이 목효지의 의견을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었다. 좌향만 조금 바꾸어 현덕왕후 권씨를 안장한다. 그곳이 바로 소릉이다.
그 후 불길한 예언대로 현덕왕후의 아들 단종은 죽음을 당하여 대가 끊겼으며, 왕후의 무덤 또한 파헤쳐졌다. 단종의 불행을 예언한 노비 풍수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신안(神眼)의 풍수 실력을 가진 그도 자신의 운명을 예측하지는 못했다. 세종대에서 단종대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왕실 풍수에 관해 발언을 해오다 수양대군의 미움을 산다.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직후인 1455년 목효지를 교수형에 처했다. 특별한 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천기를 누설한 탓이다. 그로부터 300년이 훨씬 지난 1791년 정조 임금은 목효지의 억울함을 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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