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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p.288
이렇게 맛있는 걸 어찌 안 먹을 수 있는가?
안 먹느니 차라리 열반에 들겠다.
고발되기 전의 惡은 善이다.
나는 卵生, 胎生, 濕生, 化生을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인도하겠다.[금강경(金剛經)]
인도 마갈 제국의 소태사왕은 고기를 좋아하다가
사람까지 잡아먹었다[불설 사자 소태사왕 단육경(佛說 師子 素駄裟王 斷肉經)]
육식(肉食)은 고기를 먹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고기는 넓게는 동물성(動物性) 식품을 뜻하고, 좁게는 유제품(乳製品)을 제외한 동물성 식품을 뜻한다. 따라서 어느 경우든지 고기는 길짐승은 물론이고 날짐승, 물짐승, 물고기, 파충류, 양서류, 곤충, 벌레까지 다 포함한다.
채식(菜食)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므로, 물고기, 물짐승, 길짐승, 날짐승, 파충류, 양서류, 곤충, 거미, 벌레 등 일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채식(菜食)이란 四生(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농업과 재앙 p.288
인류는 1만 년 전에 농경(農耕)을 시작하였다. 농경 전에는 작은 가족, 씨족(氏族) 집단으로 살며 수렵채집(狩獵採集)을 하던 것이, 농경을 시작하면서 정착(停着)하게 되었고 (섭취 식물의 종류는 줄었을지 몰라도) 풍부한 먹을거리로 인구가 늘었다. (자연계에서도 사자, 호랑이, 표범, 치타, 늑대, 이리, 하이에나, 곰 등 육식동물은 수가 적다. 초식(草食)동물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남을 죽이는 건 켤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고기와 달리 곡물(穀物)은 장기간 저장(貯藏)이 가능하므로, 대장장이, 도공(陶工), 목수, 갖바치, 의복 제작자 등 여러 전문 직종이 등장하였고 계급도 등장하게 되었다. 부(富)가 축적되면서 약탈(掠奪)과 전쟁이 일어났다. (동물사냥이나 곡물 약탈이나, 남이 축적한 에너지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은 일이다) 늘어난 인구(人口)로 인하여 전쟁은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
[총, 균, 쇠]의 저자인 세계적인 인류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농업의 발명이 인류 최악의 발명이라고 한탄한다. 사실 지난 만 년간의 인류 역사를 보면 참혹한 전쟁들로 점철(點綴)되어 있다. 피가 강을 이루고 흘러 나무 공이가 떠다녔다는 동이족 치우천황과 화족 헌원 간의 탁록(涿鹿) 대전부터 시작해서, 춘추전국시대의 대량 학살, 진(秦), 한(漢), 수(隋),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靑), 중공(中共)의 통일전쟁, 그 가운데서의 분열, 혼란기의 전쟁, 일본 전국시대의 수백 명 영주(領主)들 사이의 전쟁, 그리스와 소아시아 사이의 트로이 전쟁으로 시작된 지중해 지역의 끝없는 전쟁, 중세 유럽의 나라와 나라 사이의 끊이지 않는 전쟁, 수천만 명이 학살당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 300여만 명이 살해된 이란/이라크 전쟁, 그리고 최근 두 차례의 이라크 전쟁 등 헤아릴 수 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이게 다 농업으로 비롯된 일이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농업이 초래한 안 좋은 일들이 있다. 물이 필요한 농업은 특히 논농사는 인구를 강가 평야로 집중시켰으며 이것 때문에 삼재(三災)를 호되게 당했다. 물이 넘치면 홍수로, 바람이 불면 돌개바람, 강풍, 태풍으로, 불이 나면 화재로 떼죽음을 당했다. 화전(火田) 등 농경지 확장을 위한 산림파괴는 홍수 발생을 촉진했다.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聖王 요/순(堯舜)의 최대 임무와 업적은 황하(黃河) 유역의 치산치수(治山治水)였다. 요(堯)는 실패했고 순(舜)은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순(舜)이 등용한 치수 사업 책임자 우(禹)는 치수에는 성공했으나 과로(過勞)로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고 말았다. '굶어 죽느냐 아니면 삼재로 죽느냐'라는, 인류문명 여명기(黎明期)의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災(재)는 水 자와 火 자의 결합이다. 알 수 없는 옛날부터 홍수와 화재는 모든 재앙 중에 으뜸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화산이 폭발하거나 지진이 나면 그 피해는 가중되었다.
동물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짓기 위해 소, 말 등 대형 동물을 길렀으며 잉여(剩餘) 농산물로 개, 돼지, 닭 등의 가축사육이 늘어났다. 붙박이 삶과 밀집된 거주지는 동물 질병이 사람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게 했으며, 병을 쉽게 전염시켜 콜레라, 장티푸스 등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게 했다. 어린아이들은 많은 수가 수두, 홍역, 마마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필자의 친구 할머니는 스무 명을 낳았는데 그중 열 명이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 예전에 어린아이의 죽음은 흔한 일이었다) 이 질병들의 기원은 가축 질병이다. 가축을 기르지 않은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은 가축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서 스페인 침략자들이 들여온 수두, 홍역, 마마에 걸려 인구의 반 이상이 죽어 나갔다. 아즈텍, 잉카 등 중남미제국들의 식민지화는 무력보다도 전염병에 의한 인구 급감이 사실상의 이유라는 설도 있다.
쌀, 보리, 밀 등 수확률이 좋은 단일작물로의 편중은 식물질병이나 기상이변으로 인한 가뭄, 흉년 발생 시 대량아사(大量餓死)를 초래했다. 비교적 최근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중국 사서들은 쌀이 주식(主食)인 조선과 중국의 대량아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농경이 초래한 또 하나의 비극이 있다. 비물질적(非物質的)인, 즉 정신적(精神的)인 비극이다.
수렵채집(狩獵採集) 시기에 인간은 자연과 하나였다. 농경으로 자연과 유리(遊離)된 인간은 인간들 사이에 살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의식에는 자연[하늘, 땅, 물, 바람, 산, 바위, 바다, 강, 동물, 식물]이 들어오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마음[의식(意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마음에 다른 사람의 마음이 너무 많이 들어오면, 감당할 수 없는 경우, 정신 분열증이 생겼다. 농경으로 사람 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속의 의식(意識) 수도 늘었다. 한 사람의 마음은 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사실은 수많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 공존(共存)하고 있다. 마치 인도 보리수나무와 같다. 보리수군락(群落)은 겉으로는 다른 나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땅 밑에서 뿌리로 연결된 한 나무이다. 의식의 발달은 의식을 통한 타인[의식(意識)]과의 관계의 발달이다. 이 점은 대승불교의 말나식(末那識)ㆍ아뢰야식(阿賴耶識)ㆍ무구식/아마라식(無垢識) 발견과 프로이트의 이드, 자아, 초자아 발견과 융의 집단무의식 발견에 나타나 있다)
악마가 있다면, 악마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인간을 죽이려면 하나씩 찾아가야 했는데, 이제 모여 사니 한꺼번에 다 죽일 수가 있었다. 삼재로 죽이고, 질병으로 죽이고, 전쟁으로 죽일 수 있었다. 이 모든 재앙, 즉 삼재, 질병, 전쟁에 대해서 누군가 책임질 희생양이 있어야 하니 악마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재앙은 상당 부분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일(人災)로도 볼 수 있다. 이 측면에서 악마는 더욱이 인간의 창작품이다.
과학기술의 발명, 발전이 없었으면 인류는 아직도 질병과 삼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것이다. 삼재의 주범인 수(水), 화(火), 풍(風)을 길들여 거기서 수력, 화력, 풍력 에너지를 뽑아 쓰고, 항생제(抗生劑)를 발명하여 세균성 전염병을 굴복시켰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폐병에 걸려 핏기 없는 흰 얼굴로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문학청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안면(顔面) 창백(蒼白) 문학 청년종(種)'은 지금은 다 멸종(滅種)하고 말았다. 의학 발전의 놀라운 힘이다) 실로 인류 역사는 예측하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류역사상 모든 예언서의 처참한 실패에서 보듯이 인간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신과 악마가 벌이는 우주전쟁의 大 서사시를 통해서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설명하려 했지만,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며 처참히 실패했다. 오로지 (자연, 인문, 사회) 과학기술의 발달만이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과거를 밝히고, 미래를 밝힐 것이다. 종교 경전에는 과거가 들어있지만(아득히 더 먼) 과거를 밝히지 못했고, (업데이트되지 않은 아주 먼) 과거만 들어있으므로 미래도 밝히지 못할 것이다. 그 어느 종교 경전에도 진화론(進化論)과 우주 팽창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사실에 주목하면 인간의 '종교에 관한 수만 년 미망(迷妄)'에서 깨어날 수 있다. 종교가 주는 것이 있다면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육식과 농경 p.292
수렵 채집기에는 예상외로 고기 섭취를 많이 하지 못한다. 사냥 성공률이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렵채집 지역의 인구밀도가 낮다. 농경으로 생긴 여유 작물과 볏짚, 보릿짚, 밀짚, 콩깍지, 콩잎, 콩 줄기, 옥수수 대, 쌀겨, 밀기울 등 농업부산물을 이용해 가축(家畜)을 기르게 되었다. 중국은 일찍이 농업 혁명이 일어나 일찍부터 가축을 기르게 되었다. 풍부한 음식 찌꺼기로 돼지를 길렀다.
많이 먹고 풍성히 배설한 영양가 풍부한 인분(人糞)을 먹여 키운 돼지를 '똥' 돼지라고 한다. 이 가축을 잡아먹은 것이 육식의 시작이다. 돼지도 잡아먹고, 개도 잡아먹고, 양도 잡아먹고, 닭, 오리, 거위도 잡아먹는다. 농업이 발달하지 못한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고, 그래서 잡아먹히는 동물의 절대적인 수는 물론이고 한 사람이 먹는 고기 섭취량도 적다. 농업이 발달하면서 남는 농산물을 서로 교환하기 위한 물고기를 잡는 어업이 발달한다. 일찍이 논농사 혁명이 일어난 중국, 한국, 일본과 동남아시아인들의 물고기 섭취량은 대단히 많다.
논농사의 시원지인 인도(印度)는 암소를 잡아먹지 않는데,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이론에 의하면 살려두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이익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암소는, 농경에 노동력과 운송수단을 제공하는 수소(雄)의 생산공장이니 공장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유(牛乳)는 영양가 있는 음식이며, 말린 소똥은 훌륭한 無煙(무연) 연료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 가르친 고대 힌두교 성자의 일화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처럼 암소는 수소를 낳고, 수소는 농산물을 생산하고, 농산물은 돼지를 키우고, 돼지는 인도인들에게 잡아먹혔다. 이처럼 인도와 중국 등 농경이 활발한 지역에서는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다.
반면에 농업이 발달하지 못한, 목축에 의존하던 회교도들과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못했다. 척박한 토양은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돼지에게 줄 곡물도 부족했고, 나무 열매와 식물 뿌리를 제공하는 숲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육하던 소, 염소, 양은 노동력과 우유를 제공하지만, 돼지는 고기 이외에 제공하는 것이 없는 비경제적인 동물이므로 돼지사육을 안 하는 것이 집단에 이익이다. 그래서 돼지고기 금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돼지 대신에 이들은 소, 염소, 양을 잡아먹었다.
남태평양 멜라네시아와 뉴기니의 大人 문화는 마을의 부자가 오랜 기간 모으고 기른 많은 수량의 재물과 돼지를 한꺼번에 마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의식이다. 부의 재분배정책으로 볼 수 있다. 지나치게 많이 가진 자의 '大人이라는 칭호에 대한 허영심'을 부추겨서 집단 내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집단무의식적인 제도로도 볼 수 있다. 대인이라는 칭호는, 요즘 말로는, '기부의 달인' 또는 '기부의 황제'라는 칭호이다. 대인 문화는 북아메리카 해안 지방에 살던 쾨키우틀족 등의 인디언들에게도 포틀래치potlatch-부의 사회 환원 - 문화로 나타났다.
인도는 부처님 당시에 대규모 동물 희생제의(祭儀)가 실시되었다. 부처님이 암소 500마리, 수소 500마리 등을 희생해서 큰 제사를 지내려는 왕을 설득해서 포기하게 하는 일화가 [불경]에 남아있다. 희생 제의로 살해된 고기는 그냥 버렸을까? 분명 사람들이 먹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부 성직자들은 교활하다. 누구나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발전시켜 사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자나 호랑이나 늑대를 비난할 수는 없다. 누, 노루, 사슴, 임팔라는 소질을 살려 더 빨리 다리는 기술을 개발하고, 인간은 머리와 손을 써서 총을 발명하면 될 일이다) 이는 분명 대인 문화와 같이 부의 재분배 기능을 한 것이다.
인도에서 육식 금지 문화가 생긴 것은 농업과 연관이 크다. 인도에 인구 증가와 인구집중이 일어나 도시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육식 금지가 생겼을지 의문이다. 떠돌아다니는 (종교적인) 거지집단인 사문(沙門)들을 먹일 음식은 농업 발전과 인구 증가, 인구집중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농업으로 인하여 음식이 늘고 농사에 쓰는 가축이 증가하였다. 이들을 잡아먹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농사용 가축을 잡아먹으면 농사에 지장이 생긴다. 둘째, 농산물 생산으로 먹을 음식이 충분하다. 사문들이 사람들에게 육식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무의식적인)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육식하게 되면 가축을 잡아먹어, 특히 소를 잡아먹어, 농사를 망치게 되고 그러면 제일 먼저 굶어 죽는 게 거지들인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물은 결국 죽는다. 죽은 동물은 동물 사체 처리를 담당하는 하위 카스트가 먹어 치웠다. 그러므로 어찌 됐든 농업은 사회 전체적으로 육식을 증가시켰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시골 할머니 집에서 살던 어느 해 겨울, 머슴형이 잡아 온 꿩고기 맛을 잊지 못한다. 방울방울 노란 기름이 동동 뜬 꿩고기국의 그 환상적인 맛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채식한 지 오래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이다. 머슴형이 밤에 침침한 호롱불 밑에서 정성 들여 작은 송곳으로 작은 콩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안에 싸이나(청산가리)를 조금 넣은 다음 촛농으로 구멍을 막아, 꿩이 옴 직한 곳에 두면 꿩이 먹고 중독되어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잡혔다. 바람이 불면 문풍지가 비명을 질렀고, 촛불은 불길하게 흔들렸으며, 그다음 날 꿩은 비명도 못 지르고 죽었다. 시린 하늘 아래 하얀 눈 위에서 그리고 꿩을 잡아먹은 인간들은 꿩 기름 바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예로부터 짐승이나 인간이나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 그래서 생긴 속담이 있다. '공짜 치즈는 쥐덫 위에만 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양동이에 시뻘건 액체를 담아왔다. 인근에서 도살한 소피였다. 선짓국을 끓여, 큰 숟가락을 하나씩 들고 둘러앉아, 구멍이 숭숭 뚫린 소 핏덩어리를 맛있게들 먹었다. 꿩고기든지 닭고기든지 소고기든지 한번 고기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잊을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중이 고기 맛을 보면 절간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이다.
그러므로 농사꾼들은 '저 소를 잡아먹으면 안 된다'라고 결심 또 결심했을 것이다. 맛있게 먹고 조만간 굶어 죽느냐 아니면 맛없는 곡식을 먹고 길게 사느냐,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겠지만, 갈 길은 외길로 뻔했다. 이 못 잡아먹은 고기에 대한 한은, 수십 년 전만 해도 한국인들이 입에 달고 살던, '이밥에 고깃국'이라는 말로 남아있다. 여기서 고기는 물론 쇠고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소 도살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쇠고기에 대한 갈망은, 한반도에서, 적어도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한다.
육식하는 이유 p.296
육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맛이 있어서이다. 맛이 없다면 누가 먹겠는가? 둘째는 인간이 오랜 기간 고기를 먹어왔기 때문이다. 물고기 시절까지 치면 아마 적어도 5억 년은 먹었을 것이다. 셋째는 고단백질이기 때문이다. 고기는 풍부한 단백질원이자 필수 아미노산 원이자 비타민 원이다. 혹자는 고기가 몸에 익어서 안 먹으면 허하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몸이 알아서 적응한다. 인도인들의 40%가 채식을 함에서 알 수 있듯이, 습관이 중요하다. 또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신적으로 습관을 들이기 나름이다. [불경]은 고기를 좋아하다가 사람까지 잡아먹게 된 왕의 사례를 소개한다. 인도 마갈 제국의 소태사왕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식인과 육식을 끊었다([불설 사자 소태사왕 단육경佛說師子素駄裟王斷肉經]). 습관의 무서움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일화이다.
성장기에 고기를 안 먹으면 발육이 부진하다는 주장도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성장한 후에는 안 먹으면 된다. 그럼, 육식을 전혀 하지 말라는 말이냐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는데, 모 아니면 도가 아니다. 개, 걸, 윷도 있다. 포유류를 먹지 않고 물고기를 먹는 방법도 있으며, 먹는 양을 줄이는 방법도 있다. 절대, 모두 먹거나 하나도 안 먹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다.
육식의 현실 p296
우리나라는 지난 2,000년간 불교국가였다. 그래서 국민은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스님들은 육식을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스님들의 육식이 보편화되었다. '음주 식육(飮酒食肉), 무방반야(無妨般若)'(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이 반야 지혜를 가리지 않는다) 하는 경허 스님(1849~1912)의 무애(無礙) 가풍이 한반도를 휩쓴 여파라고 한다. 그 가풍이 무르익어 성춘(盛春)의 흐드러진 벚꽃처럼 만개(滿開)하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것이다. 한국 선불교는 거의 다 경허 스님의 후손들이다.
스님들이 식당에서 고기를 먹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심지어 절에서 고기 요리를 하기도 한다. 거기에다, 산 생명에 산 채로 칼질을 해대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능지처사(陵遲處死) 형을 가한, 야만적인 회(膾)까지 먹는다. 물고기에 칼질하기 전에, 물고기 대가리를 큰 칼 측면으로 때려 기절시키기도 하지만, 해체가 끝난 후 깨어나 (몸통은 사라지고 꼬리지느러미와 뼈와 머리만 남은 채로) 접시 위에서 입을 뻥긋 뻥긋하는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아침저녁으로는 물고기를 제도한다고 목어(木魚)를 치고, 포유류를 제도한다고 북을 치고, 새를 제도한다고 운판(雲板)치고, 습생(濕生) 물고기와 태생(胎生) 포유류와 난생(卵生) 조류의 자애로운 아버지인 사생자부(四生慈父) 부처님을 큰 소리로 부르며 예불을 드린다. "정신적으로 제도는 안 해주어도 좋으니, 제발 물질적으로 잡아먹지나 말아달라"는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육식 금지가 생긴 이유 p.297
그런데 왜, 불교에는 육식 금지 계율이 생긴 것일까? 첫째, 철학적인 이유가 있다. 불교에 의하면, 모든 중생은 평등하다. 하나같이 고귀한 불성(佛性)(부처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겉은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털과 비늘로 뒤덮이고, 네발로 걸어 다니고, 배로 기어다니고, 비린내를 풍기고, 땅 위의 음식을 먹을지라도 속에는 불성이 있다. 그러므로 잡아먹을 수 없다. 둘째, 다른 종교와의 경쟁이 있다. 신을 섬기고 아트만을 믿는, 즉 유신론(有神論)과 유아론(有我論)의 베다교와 힌두교가 모든 생물은 아트만이 있다고 육식을 금지하는데, 힌두교의 대척점에 있는 무신론(無神論)과 무아론(無我論)을 믿는 불교가 육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불교와 가장 가까운 불살생의 자이나교가 육식을 금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자이나교 승려들은 미물인 곤충들조차, 모르고라도 죽일 수는 없다며 길은 비로 쓸고 다녔고, 입에는 마스크를 했다. 그러니 더욱 불교가 육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셋째, 문화적인 이유가 있다. 육식 금지는 '농경문화와 인구 증가'로 촉발된 전쟁으로 인한 살육에 대한 총체적인 반발일 수도 있다. 넷째, 윤회론이다. 힌두교이건 자이나교이건 불교이건 인도종교는 모두 윤회론을 가르친다. 인도 하면 윤회론이다. 그러니, 잘못하면 환생한 선망(先亡) 조부모, 부모, 형제, 자식, 배우자, 친척, 친구, 조상을 잡아먹는 꼴이니 육식할 수 없는 일이다.
서양철학의 아버지 플라톤도 윤회를 믿었으며 채식했다. (그가 구상한 이상 국가인 공화국에서 지배계층은 채식해야 한다). 고대 이집트에도 윤회론이 있었으며, 이집트에서 비교(秘敎)에 입문한 피타고라스가 세운 교단은 윤회를 가르쳤으며 육식을 금했다. 피타고라스는 전생을 기억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자신이 트로이 전쟁에서 전사한 영웅 에우포르부스 (Euphorbus) 라고 하며 그 이름까지 밝혔다! 다섯째, 중생에 대한 자비, 즉 사랑 때문이다. 초기 불교에 비해서 대승불교는 [범망경梵網經] 등에서 육식을 철저하게 금한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없앤다는 것이 이유이다.
대승불교는 자비를 트레이드 마크로 하므로 당연한 일이다. 내일 잡아먹을 심산이면서 오늘 사랑한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유마 거사는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라고 사자후(獅子吼)를 했다. 병문안을 온 아라한으로 대표되는 소승불교 승려들에게 한 얘기였다. "얼마나 잘못 살았으면 병이 나느냐?"라는 뉘앙스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러니 유마 거사를 하늘같이 섬기는 대승불교도들로서는, 중생의 고통을 같이하지는 못할망정 자기가 살겠다고 중생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육식의 피해 p.300
꼭 종교적인⋅철학적인 이유가 아닐지라도 육식에는 여러 가지 해로운 점이 있다.
1. 육식은 효율이 낮다. 3인분의 곡물을 소비해 1인분의 고기를 생산한다. 세 명이 먹고 살 걸 한 명만 먹는 꼴이다. 사람들이 육식을 줄이고(줄인 만큼 기부하면) 전 세계 식량문제는 다 해결된다.
2. 메탄가스는 대부분 동물 인분에서 생긴다. 동물분뇨로 인한 수질오염, 토양오염, 지하수 오염 등 환경파괴가 심각하다. 축사에서 생기는 배설물 양은 어마어마하다.
3. 육식은 각종 성인병을 유발한다. 당뇨병, 비만증, 고혈압, 혈관 협착, 심장질환, 전립선질환 등등 끝이 없다.
4. 육식은 환경파괴의 주범이다. 육식 증가로, 지구의 허파 구실을 하는 열대우림이 매년 북한 면적만큼 사라지고 있다. 목초지를 조성해서 맥도날드에 납품할 쇠고기를 만드는 것이 주요 이유이다.
5. 동물 학대를 유발한다. 지구상에는 사람 수보다 소, 돼지, 양, 닭 등 가축 수가 더 많다. 사람은 73억 명이고 가축은 214억 두(頭)이다. 소는 3년을 넘기지 않고 도축된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소)고기를 먹일 때 생기는 광우병에 걸리지 않게. 우리나라 소들은 평생 밖으로 산책 한 번 못 나가고, 좁은 우리에 갇혀 살다가 도살되어 비싼 한우고기로 팔린다.
닭은 몇 달 못 산다. 닭은 몸도 못 움직일 정도로 비좁은 일조용(一鳥用) 닭장에 갇혀 밤낮으로 죽도록 알만 낳다가 산 채로 목이 잘린다. 그 수가 年 190억 마리에 달한다! 이 숫자는, 병아리 시절에 쓸모없는 존재라고 도살당한 후 닭 사료가 되는 수평아리를 제외한 숫자이다. 수평아리는 태어나자마자, 나치에 의해서 유대인 판별을 받아 아우슈비츠 독가스실로 끌려가는 것처럼, 감별사(鑑別師)의 손에 수컷으로 판별 받아 질소 가스실로 직행해 도살당한다. 또는 산 채로 분쇄기에 들어가 으깨어진다. 그 수가 일 년에 수백억 마리에 이른다.
일조용 닭장이 좁은 이유는 한정된 공간에 닭을 최대한 많이 수용하기 위한 것과, 경비를 절약하기 위한 것이며, 한 마리씩 분리해서 사육하는 이유는 서로 쪼며 싸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닭장에는 24시간 내내 전등이 켜진다. 그래야 알을 더 많이 낳기 때문이다.
갇혀 살기는 돼지도 마찬가지이다. 가축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사형 언도를 받고, 태어나자마자 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옥중에서 자식을 낳고 사는 사형수(獸)들이다. 그런데 자식은 낳아도 결혼은 없다! 주사기로 정액을 주입해 인공수정으로 임신을 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먹는 고기는 모두 아비 없는 호래자식들이다.
북한 강제수용소와 소련 강제수용소는 잔혹함으로 악명 높지만, 가축은 더 심한 대접을 받는다. 죽도록 우유만 생산하고, 알만 낳다가 순식간에 죽임을 당한다. 해마다 자그마치 100억 마리의 가축이 도살된다. (가축들이 운동을 못 하게 가두어 키우는 데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래야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고기가 부드럽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맛이다! 맛! 맛이 문제이다!) 지구는 동물들의 아우슈비츠이다. 우리가 육식을 많이 할수록 아우슈비츠 수용소행 동물들이 늘어난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사생사부(四生慈父)(모든 동물의 자애로운 아버지)라고 아침저녁으로 독송을 하는 것은 위선(僞善)이다.
6. 정신분열증을 유발한다. 건성건성 불교를 믿으면 모를까. 심각하게 믿기 시작하면, 중생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잡아먹어야 하니, 정신 분열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으면 말 다르고 행동 다른 (종교적) 위선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부분적인 육신 허용이 생긴 이유 p.302
그런데 여러 가지 안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 삼정육(三淨肉)(자기를 위해 잡는 것을 보지 않은 고기, 자기를 위해 잡는 소리를 듣지 않은 고기, 자기를 위해 잡았다는 의심이 들지 않는 고기)이라고 조건부로 육식을 허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얻어먹는 주제에 음식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다. 감지덕지하고 먹을 일이다. 빌어먹는 출가자 주제에 음식을 보시하는 재가자들에게 "이 음식 안 된다, 저 음식 안 된다. 이 음식 달라, 저 음식 달라"고 하며 지나치게 부담을 줄 수는 없다는 현실적인 고려로 인하여, (고기가 들어있을지라도) 주는 대로 받아먹게 한 것이다. 일부 전승에 의하면 부처님도 돼지고기를 드셨으며, 마하가섭은 사람고기도 드셨다. 그는 문둥병자의 공양을 받는 중에 발우에 떨어진 문둥병자 손가락을 먹었다.
기독교 [구약]의 야훼 하나님은 자기에게 바치는 동물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며 족히 84,000가지는 됨 직한 규정을 [모세오경] 가운데 [레위기]에 적어놓았다. 예를 들어 [레위기] 22장에 의하면, 야훼는 자기에게 바치는 동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눈이 먼 것, 종기가 나거나 습진에 걸린 것, 비루먹은 것, 그리고 고환이 상했거나 치였거나 터졌거나 베임을 당한 것은 자기에게 바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런 것은 너희들 몫이라고 한다. '야훼 하나님이 (또는 야훼를 판 제사장들이) 동물 고환도 먹었다'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에 비하면 3가지 고기만 허용한 부처님은 얼마나 실용적이고 자비로운 분인가! 그것도 고기의 종류와 품질을 따지지 않고, '먹는 사람을 위해 잡은 것인가 아닌가?'하는 도살 의도만 문제 삼으셨다! 사두! 사두!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찬탄의 소리가 아니 나올 수 없다!
둘째, 산에서 수행하다가 혹은 여행 중에 마을은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승려들이 산에서, 길에서 죽은 짐승을 보면 먹어도 좋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답이다. 산 사람 목숨이 중하지, 죽은 동물 사체가 중요할 리는 만무하다. 예수님 말씀대로,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됨에 따라 발생하는 가지가지 상황을 각기 자기 유리할 대로 해석해서 그렇지, 그 근본 뜻을 헤아리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육식 금지의 근본 뜻은 살생을 조장(助長)하지 않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고기 섭취를 반으로 줄이면, 살생이 반으로 줄어들 것은 명확하다. 종교인들은 남들보다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부처님이 삼정육을 정하기 이전의 부처님 마음을 헤아리고 느껴야 한다. 선정을 닦으면 자신의 행위 뒤에 숨어있는, 의식에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적인, 미세하고 미묘한 의도를 알아차리게 된다. 각자 남의 눈치를 안 보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 모든 선(善)의 출발이다. 선은 앞뒤 가리지 않고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인의 마음 자세이자, 인류 종교 역사를 관통하는 불변의 법칙이다.
종교와 관계없이 성립하는 황금률만 따라도 행복은 절로 온다. 성인들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하려고 출세하신 것이 아니건만,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옭아맨다. 불교인들은 계금취견 (戒禁取見-그릇된 계율이나 금지 조항을 바른 것으로 간주하여 거기에 집착하는 견해) 이란 타 종교 교리를 말한다고 큰소리치며 굳게 믿지만, 불합리하고 미신적인 헛소리는 (대소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종교에 관계없이 다 계금취견이다. 인류 역사에서 등잔 밑이 밝은 적은 절대 없다. 특히 종교의 역사가 유별나게 그렇다.
육식의 모순 : 참나와 불성을 잡아먹는다. p.304
모든 생물에 참나(眞我)와 불성(佛性)이 있다면서 왜 잡아먹는가? 만약 지능이 모자라서라면, 인간도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은 잡아먹어도 되는가? 정신 박약아(精神薄弱兒)와 지진아(遲進兒)는 잡아먹어도 되는가? 전교 꼴등은 학교에서 잡아먹고, 수능 꼴등은 전 국민이 잡아먹어도 되는가? 부처님이 동물 해골 더미를 가리키며 "긴긴 윤회 중에 저들은 다 한 번쯤은 우리 부모였다, 그러므로 동물을 잡아먹지 말라"라고 하셨다. 할 수 없이 먹는다 해도, "되도록 육식하지 말자"라고 "육식을 줄이자"라고 캠페인을 벌여야 하지 않겠는가!
식인종의 나라에 가서 전법을 할 때 사람고기를 주면 먹을 것인가? 사람을 사육해서 잡아먹는 것을 알면서도 먹을 것인가? 인육을 안 먹어도 좋다는 선택권이 있어도 그리할 것인가? 밥과 김치만 먹으면 뭐가 문제인가?
우리나라 불교인들이 하는 "동물은 모두 참나가 있다"는 주장은 말뿐이다. 오히려 "동물은 영혼이 없다"라고 믿는 서양인들이 동물을 더 보호한다. 많은 경우에 고상한 철학은 정신적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이 아니라 행을 보라"고 하셨다. 동물 입장에서는 "우린 참나는 없어도 좋으니, 제발 먹기 위해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할 게 분명하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동물은 (무한 번의) '참나+살해' 세트와 (무한 번의) '無참나+善終' 세트, 둘 중 어느 걸 택할까? 당신이라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할까? 자비심의 대보살 산티데바(687~763)의 글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을 읽어보라.
지금 한국불교는 '웰빙 불교'로 전락하고 있다. 뜻(철학)도 행(行)도 무사안일로 흐르고 있다. 독재정권에 빌붙어 잘사나, 세속에 빌붙어 잘사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참다운 종교인이라면 둘 사이에 차이를 못 느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남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최고 권력을 버리고, 그리고 호화 주택과, 갖가지 고기로 만든 산해진미와, 가볍고 부드러운 옷과, 포근한 잠자리와, 귀여운 아들과, 아름다운 처와 첩들을 버리고 출가했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아름다운 우리 '말'인 '참나'만 남고, 나머지 '행'과 '뜻'은 다 사라졌다. 철학도 사라졌다. 속인들과 외도의 머리를 '꽝' 쳐서 멍하게 충격을 줄 '행'도 '말'도 '뜻'도 다 사라졌다. 오히려 과거보다 못해진 지 오래다. 조계종 국회인 종회에서는 승려 간에 막말이 난무하고, 조계사 경내에서는 승려 간에 폭력이 벌어진다. 같은 승려들끼리 남의 재물을 빼앗겠다고 도박을 벌인다. 고위 승려들이 해외 원정도박도 다닌다. 이 모든 일이 육식과 관련이 없을까? 육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동물을 죽이고 그 몸을 빼앗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모든 의식이 있는 생명체는 부처님 성품이 있다)을 말할 때, 거기 중생들 사이에 차별이 있는가? 만약 차별을 둔다면 인간은 天人(하늘나라의 사람) 아래이다. 그럼, 인간이 동물을 잡아먹듯이, 천인이 인간을 잡아먹어도 되는가? 일부 불교도는 천인은 외계인이라고 주장한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 차별을 둔다면, 인간과 초고등 외계인들 사이에도 차별이 생긴다. 차별을 둔다면, 누구에게나 있다는 참나와 불성을 부인해야 한다. 동물도 '참나'를, '불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면서 잡아먹는다면, 인간을 잡아먹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동물을 직접 죽여서 잡아먹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사 먹으면, 반드시 잡아 파는 사람이 생긴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고기섭취를 줄여야 한다.
자기 개를 사랑하는 사람은 개고기를 안 먹는다. 안 그러면 자기 개 보기에 미안할 것이다. 농부들은 자기 소를, 팔면 팔았지, 잡아먹지는 못했다. 같이 농사를 지으며, 송아지 받아주며, 정이 들었는데 차마 잡아먹을 수 없었다. 이것은 지금도 인도 농부들에 의해서 지켜진다. 인도주의의 발로이다. 불교인들은 힌두교를 온갖 우스꽝스러운 신을 믿는다고 무시하지만, 그 행에 있어서는, 최소한 육식문제에 있어서는, 불교가 더 문제이다. 절 앞에는 고깃집이 즐비하고, 절 계곡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그것도 불교 신자들이 벌이는 일이다!
어느 날 고등 우주 외계인의 침략을 당해 인간이 식육용 동물로 전락하면 어쩔까? 그 초고등 생물들인 외계인들이 타방불(他方佛) (다른 세계의 부처)을 섬기는 불교 신자들이었다면? 그리고 자기들끼리 육식을 금하느냐 마느냐로 토론했다면, 게다가 그 육식이 대부분 사람고기라면? 그러다 결국 '잡아먹어도 무방하다'라고 결론이 나서, 사람 대표가 우리도 당신들처럼 불성이 있으니 잡아먹지 말아 달라고 '중국 식당의 산 채로 뇌가 열린 원숭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어도, 잡아먹었다면? "얘들이 시끄럽게 짖네" 하면서...,
식인을 금하는 것은 인육에 신비한 아트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맛을 들이면 사람을 죽일까 봐' '맛에 중독되면 살아있는 사람을 보고 침을 흐르릴까 봐' '맛에 눈이 멀어 인권에 대한 학대가 일어날까 봐' 그러는 것이다. 요즈음 가끔 식인 뉴스가 나는 걸 보면 그렇다. 사람을 죽여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 요리해 먹는 흉악범들이 있다. 불교에서 육식을 금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체는 다 평등하다는 철학에 기반한 것이다.
인류 역사는 무수한 식인 사례를 증언한다. 예를 하나만 들자면 중앙아메리카의 아즈텍 인들은 사람을 잡아먹었다. 스페인이 아즈텍을 점령했을 때 광장에 쌓인 수십만 구의 유골을 보았다. 아즈텍 제국에는 가축이 없었다. 사람 외에 잡아먹을 고기가 없어서 잡아먹었다는 설도 있다.
생명체는 정말 평등하다. 침팬지와 인간은 유전자가 99%나 일치하며(비슷하게 생겼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심지어 전혀 비슷하게 생기지 않은, 미물인 초파리의 유전자도 60%나 인간과 일치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공통의 조상을 두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부처님이 "모든 동물은 전생에 한 번쯤은 다 우리 부모였다"라고 하신 말씀이 유전자학과 진화론 측면에서 보면 맞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과거 수십억 년 전에서 수백만 년 전까지 어류, 파충류, 포유류, 영장류를 부모로 두었다! 그러니 지구촌 생물들은 다 가족이다. 그러니 어찌 평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p.307
다 좋은데, 절 밖 식당에는 고기 없는 음식이 별로 없다고 애로점을 토로한다. 그럼 '되도록' 고기가 없는 음식을 먹으면 된다. '되도록' 고기가 적게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된다. 오십 보와 백 보는 다르다. 국수류와 비빔밥과 된장국, 순두부 등을 먹으면 된다. 이 정도 음식이면 부처님이 드시던 음식보다 나으면 나았지, 절대 못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어느 해 흉년이 들자 '말먹이'를 드신 적이 있다. 아마 당신은 '말먹이를 먹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국수류도 고기로 국물을 낸 것이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하는데, 다시 강조하자면 오십 보와 백보는 다르다. "사람이라면, 특히 평범한 사람이라면 (작은) 죄를 안 짓고 살 수 없다, 그러므로 (큰) 죄를 짓자" 하면 누가 동의하겠는가? 먹어도 되도록 줄이면 된다. 만약 당신이 하루 세 끼를 먹는다면, 끼니 수는 줄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고기 섭취량을 3분의 1로 줄이면 된다. 부처님은 하루 한 끼만 드셨기 때문이다. '먹자, 안 먹자' 둘 중 하나가 아니다. 그사이에는 무수한 등급이 있다. "안 먹을 수 없으니 마구 먹자"가 아니라, "할 수 없이 먹으니, 되도록 적게 먹자, 또는 되도록 먹지 말자"가 정답이다.
전쟁터에서 죽지 않으려면 죽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로로 잡을 사람들까지 마구 죽여도 되는 건 아니다. 항복한 사람들까지 마구 죽여도 되는 것은 아니다. 살인에도 등급이 있다. 우발적인 홧김 살인과 계획적인 연쇄살인은 다르다. 범죄에도 등급이 있다. 바늘 도둑과 소도둑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육식하더라도, 되도록 고등동물은 먹지 않고 물고기를 먹는 것이 좋다.
일본인들은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1685년에 ‘생류연민령(生類憐憫令)'을 내린 이후 수백 년 동안) 주로 물고기만 먹고도 노벨상도 24명이나 타고,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중국 본토를 점령하고, 동해에서 아라사의 발틱 함대를 격멸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국과 맞대결을 하고, 못 하는 게 없다.
사찰 식당 음식은 절에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고기를 요리하는 것은 문제이다. 독살이 토굴 살림에서 고기 요리를 하는 것은 변명할 길이 없다. 맛과 습관, 이 둘 이외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고기가 요리하기 훨씬 편하다고? 그걸 이유라고 드시는가? 차라리, "추운 겨울 아랫목에 앉아서 윗목에 있는 밥을 가져다 먹기 귀찮아서 굶어 죽었노라"라는 게으름뱅이 귀신의 말을 믿겠다.
맛이, 맛에 대한 집착이 문제이지 이리저리 방법을 찾아보면 얼마든지 육식을 줄일 수 있다. 특히 자기가 손수 요리하는 경우, 버섯 감미료, 표고버섯, 두부, 콩 단백질, 우유, 치즈, 채소, 국수, 된장국 등으로 얼마든지 맛있고 훌륭한 음식을 마들 수 있다.
서양에는 채식주의자도 많고, 식당에는 채식 메뉴도 많다. 설마 처음부터 그리 많았겠는가? 누군가 시작을 했고 다른 사람들이 꾸준히 동참한 결과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거꾸로 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불교도가 나서서 채식 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러면 덤이 있으니, 광우병과 조류 인플루엔자에 안 걸린다.
티베트의 해발 수천 미터 고산 지역처럼, 환경이 열악해서 어쩔 수 없이 먹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환경이 양호해서 '어쩔 수 있는' 경우는 '어쩔 수 있게' 먹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이 드실 게 없을 때, 개, 돼지, 닭, 오리, 토끼를 잡아 드실까, 아니면 아사(餓死)를 택하실까? 自問해 보시라. 당신의 답이 명확하다면, 당신의 행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정 먹을 거면 조용히 먹어야 한다. p.309
만약 먹을 양이면,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아무리 해도 그 황홀한 맛을 잊을 수 없어서, 피치 못할 이유로, 또는 말 못 할 사정으로 꼭 드셔야 한다면, 첫째, 절대로 동물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주장하지 마시라. 그 말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시라. 둘째, 모든 동물이 평등하다고 주장하지 마시라. 그 말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먼저 지금까지 먹을 동물들의 명복을 비시라. 셋째, 모든 동물의 스승이 되자고 주장하지 마시라. 외계인이 당신 가족을 잡아먹어놓고, 그리고 당신도 잡아먹을 예정이면서 당신의 스승을 자처하면 당신은 용납하시겠는가? 넷째, "먹히는 것은 육신이지 마음이 아니다. 참나, 주인공, 불성은 조금도 손상된 바가 없다. 그러므로 다른 동물의 육신을 먹는 것은 무방하다"라고 주장하지 마시라.
무서운 논리이다. (그런 논리라면 -동물 육체는 먹었어도 그 영혼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면- 사람을 잡아먹어도 무방할 것이다) 정신, 육체 이원론의 무시무시한 일면이다. 이런 식으로 위선자가 되지 마시라. 조용히 자신의 위선을, 나약함을 인정하시라. 그리고 드시라. 아무말도 하지 말고! 잡아먹히는 동물 입장으로 보면,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고, 생각해 주는 척하며 왜 (잡아) 먹느냐는 말이다.
출처 : 강병균 교수 역저.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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