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샌포드
1980년대 중반
월스트리트 침체기- 기업인수합병시장 침체기 , 일반 투자자 주식자금 인출,- 은행들 적자
1987년 뱅커스 트러스트- 8000만달러 라는 허구의 이익을 제외하면 적자
챨리 샌포드- 이익 창출을 위해 고심
샌포드의 최대 강점
-리스크에 대한 직관 능력 탁월
1975년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않고 뉴욕시 채권인수단에서 탈퇴.뉴욕시 파산상태에 몰리게 됨으로서
그의 능력 확인 ,
1978년에는 뉴욕지점의 지점 80개 매각처분. 전통적인 상업은행의 영역인 예금 수취 업무 비중 축소
회사 자금으로 금리에 배팅 . 수익창출
1983년 사장취임-금융기술, 임직원들에 대한 인센티브, 탈규제에 초점,
정교한 리스크 측정 시스템 개발, 트레이더와 세일즈맨 몰아부침.수학 과학 전공자들을 트레이더나
세일즈맨으로 점점 더 많이 채용. 기존의 규제완화를 완벽하게 활용, 더 많은 규제완화를 위해 로비
1987년 회장 취임. 당시 뱅커스 트러스트는 세게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앞선 은행
장기 주가지수 옵션
금융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수익성이 떨어지던 시점에 샌포드는 본사 33층의 똑똑한 젊은이들을 활용해
새로운 사업분야에 열정적으로 뛰어듬.
금리스왑-에서 통화스왑으로
장기주가지수 옵션에 투입, 만기가 일년이상
뱅커스 트러스트는 니케이 지수 상승을 점치는 일본의 생명보험회사와 돈이 필요한 캐나다의 사업자와
니케이 지수 하락에 배팅하는 유럽인들을 연결
뱅커스는 니케이 지수하락을 점치고 있었기 때문에 니케이 상승에 대한 위험해지만 하면됨.
유럽의 투자자들은 니케이 지수 하락을 예상. 뱅커스는 이들로 부터 하락에 대한 배팅의 상품을 팔 수 있음.
캐나다는 아무런 위험없이 대출을 받을수 있고 일본은 주가가 하락할 경우 손실을 안게 된다.
뱅커스는 막대한 수수료 수입을 올릴 수 있다.
니케이지수 옵션 만기는 대출상환기일과 비슷한 3년 4년 만기였고 이는 장외거래였기 때문에
당국의 규제대상이 아니었다.
뱅커스 트러스트는 주식 파생상품이라는 이름으로 이와 비슷한 방식의 짝짓기 거래를 여러가지 선보임.
1989년 주가지수 옵션팀은 2억달러의 수익을 올림 전체 뱅커스 순익의 3분의 1
1990년 초 베어스턴스, 골드만 삭스 , 사로먼 브라더스, 모건 스탠리 등 월스크리트의 투자은행들이
여러가지 다양한 구조의 장기 닛케이 자수 옵션을 만들어 모두 수억원어치를 팔아먹음.
이들 투자은행들은 모두 주식 파생상품 전담팀을 구성해 가동
뱅커스의 차기 회장 예정자 앨런 휘트 18명의 장외 파생상품 거래 전문가들과 함께 퍼스트 보스턴으로 옮김.
리스크관리의 혁신
샌포드- 크리거 사건 이후 리스크 관리 체제에 관심 기울림
위험 조정 자본 수익률
고수익을 낳는 것이라 할지라도 지나치게 위험한 것이라면 회사의 자원을 다른 것에 배분하는 것이 낫다는 의식.
시장별로 과거의 실적을 조사하고 99% 통계적 신뢰도 수준에서 각 시장의 연간 손실 가능액 추정 . 그리고 그것을 회복할 수 있을 정도의 가상 자본을 시장별로 배분, 위험한 거래를 하는 직원에게는 더많은 가상자본이 배분. 상대적인 실적평가를 받게됨
실제 수익률이 낮아지므로 앤디 크리거의 보너스가 이해됨. 회사의 귀중한 자본을 얼마나 큰 위험에 노출시키느냐 신경쓰게 함.
규제 아비트리지
안팎으로 졍경의 압력이 시작되자 뱅커스 트러스트의 임직원들은 법규의 한계에 도전하기 시작.
1930년대 미국 글래스 스티걸법- 투자은행 업무와 상업은행 업무 분리
상업은행 에 인기 없음. 전통적인 업무는 고수익 창출에 어려움이 있음. 샌포드- 글래스 스티걸법의 허점을 찾아내 이용하거나 규제 당국자들에게 로비를 벌여 법의 적용에서 예외를 인정받는 등 이 법 자체를 무력화시키곤 함.
예) 주식발행 절차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도록 해 은행들도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냄.
일괄등록제도 이후 샌포드는 상업은행도 새로 발행되는 증권을 유통시킬 수 있어야한다고 주장.
증권거래위원회 승인. 뱅커스 처음으로 증권업부 시작.
먼저 기업의 채권을 인수해 사모 방식으로 (공모 반대)기관투자가들에게 배분.
사모방식의 채권발행은 굳이 증권 거래위원회에 신고할 필요도 없었고 일반적인 회계기준을 준수할 필요도 없었다.
뱅커스 트러스트는 1983년 한해동안 10억 달러어티의 채권발행 중개. 이후에는 규모가 더욱 늘어남
그러나 사실 위원회는 1990년 4월에야 사모방식으로 발행한 채권이나 주식을 팔 수 있도록 인정함. 그것도 대기업이나 아주 부유한 개인들에게만( 개인의 피해를 줄이기위한 것으로 해석됨)
이외에 뱅커스는 금리스왑과 통화스왑 거래 수백건을 성사 시켰고 미국 정부 채권과 단기 기업 채권을 거래하기도 함 아울러 1980년대에 개발된 고도의 기업 인수 합병 방식인 차입매수에 대해 자금을 융자해주는 거래도 함. 차입매수에 나선 기업 사냥꾼들에게 표적 기업의 주식을 살 수 있도록 돈을 빌려준것,
1980년대 중반 뱅커스 트러스트는 투자은행과 아주 비슷한 모습을 갖춤. 글래스- 스티걸법에 의하면 불법-뱅커스
(우리는 투자은행이 아니다. 몇 몇 소수의 거래에서 대리인의 역할을 했을 뿐이며 그런 것은 규제당국에서 염려할 사안이 아니다) 고 항변
뱅커스가 금리와 통화 스왑분야에서 쌓은 경험은 1990년대 초 사업에 중요한 밑거름이 됨.
1980년대 스왑시장의 경쟁 치열 규모는 700억 달러 . 당시로서는 매우 큰 시장. 예금보험공사 ,연중, 재무부산하 통화감독국등 규제당국들이 스왑거래의 위험성을 문제삼기 시작.
몇 몇 금융회사들이 스왑거래를 활용해 회계장부를 조각하기도 함. 특정분기의 이익실적금액을 의도대로 맞추기도 하고 스왑거래 효력 개시일은 늦춰잡는 방법으로 가치평가를 어렵게 만들기도 함. 일본계 은행들은 이익을 부풀리고 손실을 숨기는 방법으로 스왑을 적극 활용
1985년 회계기준 위원회 스왑거래를 대차대조표에 반영하는 것에 대하여 의논.
모든 은행이 일치단결하여 저항. 기준 금액은 대출도 예금도 아니니 넣을 사항이 아니라고 함
회계기준위원회가 조사를 시작한 후 몇 주일만에 10개 대형 스왑딜러 회사들이 국제 스왑딜러협회 결성- 첫번빼 목적- 스왑에 대한 규제에 반대하는 것
1989년 연준-뱅커스 트러스터를 포함해 몇몇 상업은행들에 대해 투자은행 자회사를 설립해 증권업무를 취급할 수 있도록 허용. 단 투자은행의 매출액이 모기업 매출액의 10%를 넘지않는 조건
뱅커스- BT시큐리티스 코퍼레이션 설립
그러나 1990년 2월 금융문화의 상징이던 드렉셀 번햄 램버트 파산. 은행들이 1980년대와 같은 수익을 창출하기란 불가능해보임
어느 금융회사가 무엇으로 돈을 벌었다하면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그 수익을 갉아먹음
뱅커스도 곤경에 빠짐, 비록 수량적 기법과 리스크관리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할지라도
노벨 경제학 수상자 머튼 밀러-금융 혁신의 주된 추동력은 규제를 피하고자 하는 욕구.
스왑은 기본적으로 투자계약이며, 규제되는 선물이나 옵션을 비롯한 다른 많은 금융수단들과 경제적으로 같지만 규제되지 않으며 증권법규상 공시의무도 적용되지않음 . 금융회사나 기업들이 스왑거래를 하는 것은 단지 리스크를 효율적을 배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규제받지 않는 점 때문이라고 밀러는 생각.
기업과 그 재무담당들이 맞춤형 스왑으로 규제를 피하거나 리스크를 숨길 수 있는한 금융회사들이 그런 기업들에게 스왑을 팔아 이익을 올리는 현상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
제무 담당자들은 프리미엄 기꺼이 제공-스왑이 더 많은 이익의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그 리스크를 숨길 수 있다면......(주주에게 숨길 수 있고 규제 당국자들에게 노출되지 않는다면)
스왑에 대한 법률적 규제와 다른 비슷한 종류의 금융수단들에 대한 법률적 규제 사이에 차이가 존대하고 기업들이 이런 차이가 지닌 가치를 인정하는한 복잡한 스왑상품에 대해 거액의 수수료를 지급하는 관행은 계속될 것.
만약 다른 은행들이 법의 한도를 벗어나 기업들에게 스왑팔기를 꺼려한다면 뱅커스 트러스트로서는 오히려 잘된일, 경쟁에 덜 시달려도 되니까,,
깁슨 그리팅스
1983년 부터 뱅커스 트러스트와 깁슨은 관계.
1991년 5월 깁슨 5000만 달러 차입 연 9.33% 금리
가을에 금리가 하락하자 재무 담당자 짐 존슨은 금리 스왑을 통해 금리부담을 낮추겠다는 생각을 함.
깁슨은 옳은 판단을 내렸고 이익을 낼 수 있었음,,그러자 뱅커스의 점점 더 복잡한 스왑거래 제안에 말려듬.
스왑에 제곱의 요소가 포함된 복잡한 거래에 말려듬,,배팅의 리스크과 가능한 수익률 증폭 효과. 마치 3연승 단식 마권과 같음.
1992년 말 금리가 오르기 시작하면서 100만 달러 가량의 손실. 그 후로도 깁슨은 변동성과 리스크가 큰 스거래들을 계속함.
뱅커스 트러스트는 깁슨과의 스왑거래로 1300만 달러를 벌어들임
프록트 앤드 갬블
1993년 10월 뱅커스의 세일즈맨 허드슨이 피앤지의 재무담당에게 접근
당시 피앤지는 소비재 사업에 투자할 단기 가업어음을 시장에서 조달하고 있었고 차입비용을 스왑을 통해 낮추려고 함.
허드슨이 피앤지에 복잡한 스왑거래를 하도록 유도. 불과 1년만에 뱅커스는 2500만 달러의 수수료 수입을 올림
허드슨과 폰커넬
허드슨- 세일즈맨
폰 커넬 - 트레이더
폰 커넬이 정해준 기준가격으로 허드슨이 판매
기준가격에 따라 허드슨과 폰 커넬의 수입이 달라짐
폰 커넬의 술수로 허드슨의 수입이 달라짐.
이는 복잡한 스왑거래의 산술방식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음
샌포드식 경영
1990년~1993년 사이 미국의 주요은행들 가운데 뱅커스 트러스트의 수익이 가장 높았음. 이익의 1/3은 스왑등 파생상품에서, 1/3은 트레이딩에서
그러나 애널리스트들은 뱅커스 트러스트를 신뢰하기 않았고 뱅커스의 주가가 지지부진한 것으로 화답
1988년부터 1994년까지 뱅커스 트러스트의 문화는 주주나 고객들이 아닌 임직원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변함
뱅커스가 깁스와 피앤지에 어떤 상품을 팔았는지는 1994년에 온 세상에 알려짐
복잡성의 증가, 통제력의 상실, 규제완화등의 변화가 뱅커스외의 다른 금융회사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