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750년, 면벽 좌선하다 염불하여 극락 간 설송당 연초 스님
영조 26년(1750)
「설송당 연초 대사 비문 및 머리말(雪松堂演初大師碑銘幷序)」
『조선불교통사』
진암(晉菴) 이천보(李天輔) 지음
옛적에 우리 5대조 월사공이 청허淸虛 대사의 비명을 짓고, 고조 백주공이 편양鞭羊 대사의 비명을 지었고, 종증조 정관공은 풍담楓潭 대사의 비명을 지었고, 종조 지촌공은 월담月潭 대사의 비명을 지었다. 청허에서 월담에 이르기까지 4대의 비문이 다 우리 가문의 4대에서 나왔으니 매우 기이한 일이다.
영남 스님 남붕南鵬이 나에게 스승 설송 대사 비석 글을 써 달라고 부탁했는데, 대개 청허의 후예이다. (청허 이후) 2파로 나누어졌는데, 유정惟政 · 응상應祥 · 쌍언雙彦(1591~1658) · 석제釋齊는 교파敎派이고, 언기彦機 · 의심義諶 · 설제雪霽 · 지안 志安은 선파禪波이다. 스님(연초)은 처음에는 석제를 스승으로 섬겼으나 후에 지안을 참례하고 그 법을 모두 이어받으니 청허 계파가 스님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로 합치게 되었다.
스님의 속성은 백씨이며, 호는 설송雪松으롤 자인현慈仁縣 사람이다. 나이 13세에 운문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외모가 청초하며 심성이 순하였고 불경에 두루 밝아 그 근원을 탐구하여 묘함을 다하였다. 단에 올라 강설하면 따르는 학도들이 모여들어 종사로 받들었다. 늙어서는 문도들을 물리치고 오로지 면벽 좌선하였다.
하루는 시자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하여 차 한 잔을 마시고 임종게를 슨 다음 염불을 하고 입적하였다(誦佛而化). 대사는 병진년(1676) 5월 1일에 태어나 경오년(1750) 5월 1일에 입적하였다. 나이 75세 법랍 63년이었다. 다비한 뒤 사리를 얻어 통도사와 운문사에 나누어 안치하였다. 나는 부도浮屠에 문자를 기록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스님에게는 5대에 걸친 우의가 있는데 어찌 가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명을 지었다.
정定은 혜慧,
혜는 곧 정이니
선과 교를 (따로) 말하지 말라.
도에 동動과 정靜 없으니,
달이 물에 비치듯
서와 동으로 비출 뿐이니
오직 스님 마음 법만이
2문을 1종으로 아울렀다.
卍 보정의 꼬리말
서산대사 이후 제자들이 교학과 선학으로 나뉘었으나 연초 스님이 이 두 가지 수행법을 하나로 합쳤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오로지 면벽 좌선을 하였지만, 결국은 마지막에는 염불에 의지하였다. 본문에서 붇다를 외며 입적하였다(誦佛而化)는 기록은 참선을 강조하는 선사에게는 쓰지 않는 어법이며, 염불을 했다는 것은 ’나모아미따불‘을 뜻한다.
좌선으로 깨닫지 못하면서 다시 6도를 윤회하여 미래가 담보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선사들이 염불이라는 보험에 들고, 마지막에는 불퇴전 없이 정진하여 붇다를 이루는 극락으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것이 ’도로 아미따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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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무량공덕 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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