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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리무중
오리무중이란 무슨 일에 대하여 방향이나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앞이 안 보이는 답답한 현실일 때 이 말을 주로 쓴다. 이 말은 후한 중엽 장해라는 사람이 때 묻은 자들과 섞이기를 꺼려 세도가들이 찾아오면 5 리 안개를 만들어 자취를 감추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난 울연한 느낌을 주는 오리무중이란 말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의 도술은 무척 마음에 든다.
만약 열려라 참깨나 금 나와라 뚝딱 같은 이 세상의 주술이나 도술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택하라 한다면 나는 안개 만드는 도술을 택할 것이다. 내가 그 도술이 마음에 드는 것은 도인 같은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살아온 동안 그때그때 제일 많이 겪었던 아쉬움은 내 경우 큰 것이 아닌 의외로 걷고 있는 나를 안개 가리듯 가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내가 다리를 전다는 그 의식은 누군가가 뒤에서 지켜본다는 또 다른 숨은 의식을 낳았다. 한때 그 의식은 나를 굴곡 깊게 어깃장을 놓고는 짓눌렀다. 과외가 끝나고 쏟아져 나올 때 나는 여자아이들이 빠져나가고서야 그 뒤를 따랐다. 호명을 하여 앞에 나설 때나 상을 탈 때도 앞이 아닌 뒤에서 보는 모습이 늘 걱정이었다. 실제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끼는 때가 많았다. 그럴 때는 잘 걷다가도 갑자기 발이 더 힘을 잃었다.
앞서 가다가도 뒤에 알만 한 사람이 나타나면 갑자기 일이 생긴 양 가던 길을 멈추고 주춤하기도 하고 아예 뭣 모를 다른 길을 택하여 지나치기도 하고 때로는 상황을 머릿속에서 세밀하게 추측하여 걷는 것에 대한 불충이 남들에게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옹색하지만 얼버무리듯 처신하여 그 순간들을 벗어나도록 애썼다. 남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않는 것을 지레 속단하고 두려워한 적도 많았으리라. 어리석음이었지만 그 의식에서 감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입학시험에는 체력장이라는 것이 있어서 2백점 만점에 20점을 체육점수가 차지하였었다. 당시 나는 천 미터 달리기 3분30초와 백 미터 달리기 13초5란 제한치를 엄청 원망하였었다. 깎인 점수가 4점이면 당시 입시에서는 큰 점수였다. 어린 마음에 큰 안타까움이었다. 운명적이란 생각을 그쯤 많이 하였다. 나는 그런 내가 한때는 싫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안침진 이 의식의 아픔은 실로 내게 많은 값진 것을 가르쳐 주었다. 소연한 가을을 일찍이 맛보았다고 할까.
남에게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아픔의 것들, 마음의 상처가 어떤 것이고 낮게 처한다는 것이 어떠하리란 그러한 순연한 상념, 진정으로 따스한 눈물은 마음에 곱게 물든다는 소조한 채색의 것도 모두 그런 굴곡진 마음에서 연하여 피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내가 지금 글을 만지작대는 것도 그 범주의 가장자리를 사운거리듯 밟고 있다 여기게도 된다. 나의 글에는 유난히 산에 대한 글이 많다. 비록 균형 잡는 지팡이를 하나 챙겨 가지고 다니지만 나는 꽤 산을 즐긴다.
나는 등산화를 신지 않는다. 발이 굽어 억센 등산화로는 발이 휘감겨 아프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쥐가 날 때가 많고 다리가 풀려 다친 적도 적지않다. 그래도 나는 산을 오른다. 누구 말대로 산이 있기에 산을 오른다. 속사정을 모르는 남들은 무척 산을 잘 타는 사람으로 나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게 어디 안 다닌 산이 없으니 이제 히말라야 산만 남았네 한다. 난 그 말을 들을 때 기쁘다.
또 어떤 이는 다리를 저는 것 같아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도 본다. 그럴 때 나는 어릴 적 다쳐서 그래요 하고 답한다. 이때도 나는 나를 위해주는 그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이는 별 상관없이 개의치 않는다는 듬직한 대견함을 비로소 느끼기 때문이다. 성산하니 새치름하지 않고 시뜻하지 않으며 소삽할 리가 없다. 나를 속박하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이었다. 다리 좀 전다고 문제가 될 것이 무엔가. 이는 오히려 내게 강한 신념을 만들어 주었다. 군대를 못 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교련을 끝까지 이수하고 군대를 가겠다고 자청했었다.
지금까지 나는 소아마비를 앓았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공표하지 않았다. 예전엔 아내도 모를 일이었다. 한때는 그 사실이 창피하여 그러했지만 지금은 남과 다를 바 없다는 자존심을 어기며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어 그러할 뿐이다. 살아보니 다리를 절어서 삶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하여 어리석은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 창피한 것이었다. 못났다고 안일하고 스스로를 감금하고 인색해봐야 그 누가 알아주랴.
다시금 생각해봐도 수의사였던 아버지, 당신은 내 삶의 필연이며 행운이었다. 한때는 걷는 나의 길이 오리무중이었으면 하였는데 이제는 후한시대 장해의 때 묻지 아니한 삶이 탐이 나고 산길을 헤매게 하는 안개는 탐탁치가 않을 뿐 가을이 명주실처럼 곱게 물드는 때 나 대신 아파하였던 당신이 찬 빛에 더욱 반짝이는 명주실 같이 마냥 곱다 싶고 그런 당신이 한없이 그립기만하다. (2007 9 10 추억의 사진을 곱게 주워 담으며)
3, 그 시절 내 별명은
해맑은 미소가 몽실몽실 샘 솟던 시절. 어느 누구도 그렇지만 나 역시도 몇 개의 별명을 가졌었다. 그 나이에 별명이라 한들 별 것일 리가 없다. 낱말을 배우면 비슷한 말이나 반대말을 한창 따라서 배우는 참이니 비슷한 말 찾듯 얼굴 생김에 맞게 그냥 갖다가 부쳐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뚱뚱하다 싶으면 돼지나 찐빵이 되고, 머리가 뒤뚱하면 짱구, 홀쭉하면 홀쭉이, 키가 크면 꺽다리, 콧물을 줄줄 흘리면 코흘리개 하는 식이다.
성과 이름에서도 그냥 따서 불렀다. 이름이 봉구라 하면 방구쟁이라 불렀으며 변 씨 성을 가진 아이는 그나마 양호한 별명이 변덕쟁이였으니 몇몇 아이는 성씨 때문 아주 죽을 맛이었다. 별명은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조금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들어졌다. 키가 작으면 몽당연필이 되었으며,코흘리개는 코딱지, 대변이란 별명은 변 사또로 바뀌었고 아무것이나 걸신들린 양 먹어대는 아이는 똥개 아니면 미친개라고 불렀다. 막 머리가 트이면서 직접적인 묘사 풀이에서 그런대로 상징성을 갖는 별명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내 별명 또한 그런 식으로 변하였다. 맨 처음 듣던 별명이 안경을 꼈다하여 안경다리 이었는데 곤 색이란 별명이 한동안 붙더니만 종래는 곤달걀로 바뀌었다. 입은 옷이 모두 칙칙한 곤 색이라 한 친구가 붙여준 별명인데 어느 날 부터서는 머리가 달걀모양을 닮았다 하여 곤달걀이 되었다. 당시 엄마는 내 스웨터는 모두 곤 색 털실로 짜주었었다. 그런 동안은 별명이란 것이 가벼운 놀림은 있지만 친근감을 나타내고 이름보다 더 잘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런 내 별명은 어느 날 갑자기 염소로 바뀌었다.
하루는 한 친구가 집에 가는 길에 저기 염소 간다 하니 모두들 쳐다보고 까르르 웃어대었다. 표정들을 보아 그 말이 맞다 싶은 모양이었다. 왜 내가 염소인가. 염소라 하면 목소리가 떨림이 있거나 수염이 삐죽 나야 불리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모를 소리였다. 꼭 맞는 놀림꺼리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그 이유를 몰라 더욱 화가 났다. 나도 친구의 모습을 살폈다. 그 친구는 늘 머리를 빡빡 깎고 다녔다. 그날도 친구는 나를 염소라 불렀다. 나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어이 까까중 산에 가서 살지 왜 여기에 왔냐 하였다.
그 친구도 그 말을 듣자 꽤 약이 오른 모양이다. 내게 달려들었다. 주먹은 쥐었지만 싸움에 자신이 없는 나는 때리면 맞고 말리라 하였다. 하지만 친구는 주먹은 내밀지 않았다. 대신에 친구는 돌아서며 염소라 부르는 이유를 말하였다. 걸음걸이가 염소 걸음걸이랑 똑같다는 것이었다. 줄에 걸려 넘어질까 봐 한 다리가 들린 채로 뒤뚱하며 다리가 땅에 닿기도 전 다른 발을 급히 갖다가대는 것이 영락없는 염소란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은 당시에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 못하였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서 걸어 보았다. 분명 나는 한쪽다리가 균형이 안 잡힌 채 절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동네 어귀 언덕에서 개망초를 뜯던 염소가 다가서면 황급히 비켜서며 뒤뚱뒤뚱 해 대는 모습과 꼭 닮았다. 아무리 거울 앞에서 손을 내저으며 연습을 했지만 원하는 걸음걸이가 되지 못하였다. 이후로도 친구가 염소라 부르면 나는 까까중하고 응수를 했다. 그러다가 흐지부지 염소란 말은 지취를 감추었다. 까까중이란 말을 친구도 꽤 듣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해 겨울 동네 양어장이 꽁꽁 얼어붙던 때 아버지는 동생과 나에게 스케이트를 사주었다.
동생은 배우지도 않은 스케이트를 잘 탔다. 회전할 때만 엉성할 뿐 단숨에 양어장을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나는 똑바로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돌아서는 가족의 발걸음은 띄엄띄엄 마냥 숙지근하였다. 나는 실망하였던 당시의 아버지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스케이트를 못 탄다는 사실은 내게 큰 아픔이었다.그 비싼 돈 들여 산 스케이트는 한 번도 못 타보고 운좋은 동네 형이 싼 값에 가져갔다. 엄마는 너는 사주팔자에 천문이 있으니 어쩌거나 학문으로 풀릴 수밖에 없다는 말을 수도 없이 주문 외우듯 하곤 했었다.
그 말이 왜 내게 꼭 필요한 것인지 알 것 같았으면서도 당시에는 깊게 담아지지가 않았다. 나이 다 들어 별 소용도 없는 뜻이 되어버린 지금에서야 그것들이 새삼 파고들며 마음을 저리게 한다.불현듯 그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염소라는 별명이 주는 의미도 알 것 같다. 조치원에서 전학을 왔다는 친구는 조치원읍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다고 했었다. 그런 친구는 학교를 갓 옮겨와 어리벙벙하던 때 내가 경쟁상대자였던 모양이다. 샘 많은 친구가 나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지어낸 별명이 바로 염소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나와 사귀고 싶은 또 다른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 친구는 분명 나를 때리지 않았다. 촌놈이라고 놀리지 말라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으로는 까까중은 산으로 가라 한 소리를 촌으로 가라는 소리로 달리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친구는 훗날 의지대로 공부를 꽤 잘하여 법대를 갔다. 그런데 이후 영 소식을 모른다. 지금은 내게 아무리 염소라 하여도 씩 웃고 말 것인데 친구는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정말 까까중 되어 산으로 들어가 버린 것은 아닐까. 다시 만나면 이제부터는 친구를 오리무중이라고 불러야할까 보다. 어쨌거나 그 천한 별명도 모두 소중한 그리움이 된 이 즈음 그 추억의 염소가 이름 한가운데 홍자가 들고 얼굴이 길어 홍당무라고도 하였던 그 오리무중을 그저 한 번 만이라도 본다면 그만이다 싶다.
2. 세발 자전거
이제 그 자체가 그리움이 되어버린 빛 바랜 사진첩. 그 안에는 백옥무하의 작은 내가 예쁘게 들어 있다. 그 시절을 산 누구라도 그러하듯 내게도 가슴 깊이 간직하는 반쯤은 찢겨 나간 그리운 흑백 사진이 몇이 있다. 사진은 지나간 때를 기억하지 못하여 멈추었던 시간의 한 모습을 보고 그때를 떠올리는 묘미로서도 괜찮지만 정작 값지고 고마운 것은 정녕 알 수없는 과거로부터서도 지금을 현실감 있게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나는 할머니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하지만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왜 삼촌들이 여동생을 보고 할머니와 어쩌면 그렇게 꼭 빼 닮았느냐 하는지 나는 이해한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닮았다.
머리에 포마드를 짙게 바르고 두꺼운 오버를 걸치고 트럭을 타고 혼례를 치루기 위해 나타난 아버지. 시발택시는 아닐 줄 알았지만 설마 트럭일 줄은 몰랐다고 어머니는 이를 두고두고 말하였다. 나는 이 또한 본 적이 없지만 잘 알고 있다. 우습지만 그 트럭이 때 맞춰 고장 나 애를 먹었다는 것을 나는 곁들여서 또 안다. 사진엔 당시 정비 일을 하는 고종형의 얼굴이 보이고 형은 얼굴에 검정을 무치고 고치는 공구를 든 채로 서있다. 학교를 들어가기 전의 나는 이상하게 시리 서서 찍은 사진은 하나도 없고 판자로 어설프게 엮은 닭장 옆에서 꼭 세발자전거를 타고 나온다.
자전거가 귀하였을 그 무렵 동생은 자전거를 탄 사진이 하나도 없는데 나만 유독 자전거를 타고 두눈을 찡그리고 미소짓고 있다. 그때의 기억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모를 것이다 하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봄 소풍에서의 나는 타이스를 신고 있으며 엄마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있다. 양장이 흔하지 않던 시절 그래도 엄마는 엄앵란 스타일의 머리 손질을 한 모습으로 맨 뒤에 나온다. 여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일 것인데 여동생은 어쩌고 그 자리에 있었나 싶다. 당시의 마음 환한 엄마의 얼굴이 곱게 보인다. 장남이니 당연 열일 제치고 온 것이련 해야 할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풍가는 곳 안양유원지는 초등학교에서 꽤 먼 거리였다. 철둑을 건너 안양역을 지나고 기차 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관악산 아래 안양유원지가 나온다. 이름표를 큼지막하게 단 아이들이 앞장서서 가고 엄마들은 둔을 치듯 하며 뒤를 쫓았다. 하지만 엄마는 다른 엄마들 하고는 달리 내 옆 가장자리에서 나와 보조를 맞추었다. 선생님이 뒤로 가라하여도 엄마는 자리를 비켜서지 않고는 줄곧 곁을 지켰다. 나는 엄마가 있다는 것이 든든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꽤 창피하였다. 뒤로 가라고 눈을 흘긴 것도 같고 자꾸 부르지 말라고 하였던 것도 같은데 기억은 희미하다.
맛문하였지만 씩씩하게 걸어 보이려 애썼던 기억이 지금도 봄바람에 얼핏 스치는 듯도 하다. 왜 엄마는 그때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그해 운동회에서 달리기에 꼴찌를 하여 웬만하면 다 타던 공책을 한 권도 못 탔다. 이후에도 나는 한 번도 운동회에서 상을 탄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씩 웃으며 공책보다 더 좋은 두꺼운 대학노트란 것을 내게 주었었다. 동생은 천 미터 달리기 선수로도 뽑히는데 왜 나만 그럴까. 그쯤 나는 남들보다 잘 뛰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렸다. 엄마는 평발이라 그러하다 하였다. 그러고 보니 내 발은 남들과 달리 바닥이 평평하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다리에 쥐가 심하게 나던 때 또 자연 알게 되었다. 이슬 맺힌 눈으로 엄마는 내게 말을 해 주었다. 육이오 전쟁 때 살아남은 소년소녀들이 사오년 지나 서둘러 시집장가를 가서 첫애를 놓던 시기가 바로 내가 태어날 그 무렵이다. 내 이후로 아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 그때는 폐병도 많았지만 어린아이의 소아마비도 많았다. 나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았다. 아버지가 수의사라서 직접 대처를 하고 주사를 놓아서 약하게 왔던 덕분으로 걸음걸이가 조금 표시가 날뿐이다. 그래도 장거리에는 다리 힘이 부치는 것은 솔직히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왜 엄마가 봄 소풍 때 내 곁을 떠나지 않았는지 달리기에서 꼴등을 해도 괜찮다 한 것인지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마음 속 깊이 느낀다. 아버지가 퇴근 하는 때 자전거를 타고 집 주위를 돌고 있으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어렴풋한 기억도 집에 탁구대를 갖다가 놓고 신경 써 가르쳐 주었던 것도 못박힌 당신의 아픈 심중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절절이 안다. 숨죽인 아픔의 질곡을 넘으며 고운 당신들은 그렇게 나를 깊게 사랑하였었다. 나의 그렇게 반쯤 찢겨진 누렇게 변색이 된 흑백 사진 몇 장이 그렇게 내게 소중함을 전한다. 부모의 말 못할 애고로운 마음이 담겨 있으며 철모르는 아이의 웃음에 가족의 사랑이 앨범 속에 있다.
내가 어찌 해 태어났으며 어찌 사랑을 받았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던 그러한 사랑이 다소는 슬퍼 보이는 그 흑백의 감상에 애틋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세발자전거를 끼고 살았던 나는 다리가 아팠다는 것에 대해 어느 한 때 육니하고 억색하다 한 적은 있지만 크게 좌절 해 본 적은 없다. 심하지도 않지만 끔찍이 위해준 부모 앞에서 약해져서는 안 될 것이란 생각이 깊었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그 빛바랜 사진을 신주인 양 꼭꼭 마음속에 챙겨 넣는다. 세발자전거를 탄 사진 속의 잊지 못할 나는 눈물 삼킨 부모님의 애틋한 사랑으로 분명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