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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는 중동이야기]
구약성서와 유대교 이야기
모세와 출애굽
모세와 람세스 2세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성서 외에 그의 실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장정만도 60만가량이 되었다" (출애굽기 12:37)는 성서 내용으로 미루어 이집트에서출발한 이스라엘 백성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구약성서는 어른 장정 60만에 처자식, 그리고 잡다한 사람들이 행렬에 함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 일행은 수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양 · 소 등 가축 수도 엄청났다고 돼 있으니, 이들의 행렬은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땅을 울릴 정도였을 것이다.
이런 대규모의 민족이동을 역사가 기록하지 않을 리 없다. 더군다나 파라오 군대와의 충돌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기록이 일체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출애굽은 전설처럼 만들어진 가공의 이야기일까. 이 해답은 『구약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출애굽기'에 파라오는 이스라엘 가정에서 태어난 남자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는데, 2명의 조산사가 그일을 해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모세 일행이 하루 만에 홍해를 건넜을 뿐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수적으로 훨씬 많은 파라오의 군대와 맞서 싸우고 이들을 따돌렸다고 전해진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어른 장정 60만 보다 훨씬 소규모였다는 사실을 『구약성서』가 스스로 밝힌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 민족은 다양한 부족의 집합체며, 부족 전체가 처음부터 이집트의 동델타에 모여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집트에 가지 않고 가나안에 정착했거나, 처음부터 시나이에 살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장인은 시나이의 미디안인이며, 『구약성서』는 그들이 모세 일행에 합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민수기 19:29~32). 이스라엘 민족은 이렇게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다양한 부족이 모여 서서히 형성됐다는 것이 오늘날의 학계 분석이다.
따라서 '출애굽' 이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부분에 국한되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인은 수천 명, 또는 수백 명 규모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부 부족들의 경험이 훗날 성서 편집 과정에서 부족 전체의 체험으로 확대됐을 가능성이 크다.
거꾸로 모세라는 존재의 역사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역사 자료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실존성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쟁이있지만, 모세가 생존한 시대를 방증하는 상황 증거들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이미 모세의 이름 자체가 그 실존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앞서 지적했다. 이 밖에도 모세의 실존성을 입증하는주장이 많다.
우선 첫째, 이 무렵 힉소스의 이집트 지배가 끝나가고 있었다. 힉소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왕국과 신왕국 사이의 제2중간기에 이집트를 지배한 셈계의 '외국인 지배자' 였다. 힉소스는 테베를 지배하던 카모세 왕(기원전 1556-1550)과 전투를 벌였고, 카모세는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 근처까지 진격했다. 카모세 왕의 후계자인 아모세 왕(기원전 1550-1525)은 수차례의 전투 끝에 힉소스를 이집트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아모세는 이렇게 신왕국 제18대 왕조(기원전 1550~1307)의 창시자가 됐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의 “요셉을 모르는 새로운 왕이 나타나 이집트를 지배했다”는 대목은 바로 아모세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역시 '출애굽기' 의 이스라엘인들은 파라오를 위해 곡물을 저장하는 피톰과 람세스 도성을 건설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피톰과 람세스의 장소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톰은 팀사 호의 서쪽에 있는 텔엘다바이며, 람세스는 힉소스의 옛 수도 아바리스다. 아바리스 출신으로, 힉소스와 혈연관계인 세티 1세(기원전 1309-1290)와 람세스 2세는 이곳에 수도를 건설했다. 제19왕조의 출범이다. 이곳은 오늘날 동델타에 있는 타니스 또는 칸틸 주변으로 추정되는데,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 이곳에는 당시 신전과 궁전 유적들이 남아 있다.
람세스 2세는 장수한 왕으로 유명하다. 그는 고대 이집트에서도 가장 많은 공공 건축물을 세운 파라오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운 조각들은 대부분 거대했으며, 이들 건조물은 오늘날 룩소르(옛 테베) 등지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의 최대 업적은 수도를 동델타 지역으로 옮긴 것이다. 그는 수도 건설을 위해 수많은 시민, 특히 하층계급의 외국인들을 동원했다. 이 와중에 이스라엘인들이 동원됐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셋째, 『구약성서』 ‘출애굽기' 에서 갑자기 '히브리인' 이라는 단어가 부쩍 늘어난 점이다. 그전까지 이 단어는 주로 외국인이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하거나(창세기 14:13, 39:14, 39:17) 이스라엘 민족이 외국인 앞에서자신의 신원을 확인할 때(창세기 40:15) 에 한해 사용됐다.
성서 고고학자들은 '히브리 (hibri)' 라는 단어가 인종을 가리키는 것이아니라 당시 오리엔트 지역에서 사회계층을 지칭하던 단어로 보고 있다.비슷한 단어로 당시 이집트에는 '하피루(hapiru)', 메소포타미아에는 ‘아피루(apiru)'가 있었다. 이는 '시민권이 없는, 기존 사회계층에 속하지 못한 민족의 한 계급’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역사학자 존 브라이트는 “히브리의 선조를 하피루와 동일시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람세스2세 통치하에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한 아피루들 사이에 이스라엘인이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넷째, 모세가 주창하는 유일신교에 관한 것이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를 받고 '유일신이자 전능하신 주 야훼' 의 숭배자가 된다. 문제는 이 유일신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할 수 있는 학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 신왕국제18왕조에 나온 아멘호테프 4세(기원전 1353-1335)의 영향을 무시할수는 없다.
아멘호테프 4세는 태양신인 아톤을 유일신으로 신봉했고, 아몬 신을중심으로 하는 다신교를 일체 부정했다. 그는 스스로 이름을 이크나톤(태양의 빛을 신봉하는 사람으로 고치고, 텔엘아마르나에 새 도시를 건설했다. 텔엘아마르나는 테베와 나일 강 하류 멤피스 중간에 위치한 도시로, 기존의 상식을 깨고 나일 강 동쪽 기슭에 건설됐다. 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은 테베의 아몬 신전을 거점으로 하는 전통적인 아몬 신관(神官)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고, 그가 죽은 뒤 텔엘아마르나는 철저하게 파괴돼 버려졌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유일신교에 아몬 신관들과 파라오 등 기존 세력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받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모세가 파라오를 정점으로 하는 기존 세력의 대립 축으로 유일신을 선택했거나, 또는 그 영향을 받았다고 볼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모세의 실존성과 출애굽의 역사성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시기를 추정한다면 신왕국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기원전 1290-1224) 시대, 또는 성서의 “그 뒤 오랜 세월이 흘러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출애굽기 2:23)라는 대목을 고려할 때 그 다음 왕위에 오른 아들 메르넵타 왕(재위 기원전 1224-1214) 시대일 가능성이 크다.
성서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탈출해 나온지 480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4년째 되던 해 둘째 달 곧 시브월에 솔로몬은 야훼의 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열왕기상 6:1)고 분명히 기록돼 있다. 솔로몬의 즉위(기원전 958)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즉위4년부터 480년을 역산하면 출애굽의 구체적인 시기를 알 수 있다. 이 계산대로라면 출애굽은 기원전 15세기 중반이 된다.
이 논쟁에 대해 역사학자 브라이트는 “성서에서 40이라는 수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종종 한 세대를 나타낸다. 이는 '시나이의 광야에서 40년간 방랑생활을 했다'는 식으로 이용된다. 그렇다면 480년은 열두 세대를 의미한다. 한 세대를 약 25년으로 계산하면 이 기간은 얼추 300년이 되며, 이를 그대로 적용하면 출애굽의 시기는 기원전 13세기 중반이 된다"고 주장한다.
놀란 모세는 “제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라며 신의 명령을 세 차례 거절한다. 하지만 "너는 신이 보내는 사람" 이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소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집트 파라오와의 싸움인 모세의 '출애굽’은이렇게 시작됐다.
모세는 뒤쫓는 파라오의 군대를 물리치고 60만 명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시나이 (지금의 이집트령 시나이 반도)로 건너가 그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십계를 받게 된다.
왕가의 계곡에서 만난 투탕카멘
룩소르의 나일 강 동쪽 기슭에 있는 최고의 신 아몬 레에 봉헌된 카르나크 신전(아몬 신전)의 거대함과 정교함에 압도돼 한동안 말을 잃었다.그중에서도 제2탑문을 지나고 나타난 카르나크 신전의 대열주실에서는 한동안 숨을 죽이고 까마득한 기둥을 쳐다보았다. 폭 102미터, 깊이 53미터의 공간에 134개의 거대한 기둥이 세워져 있다. 중앙 통로의 기둥 14개는 높이 24미터에 기둥의 지름만 3.5미터. 나머지 120개의 기둥은 높이14미터에 지름 2미터다. 말 그대로 '신전의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표현이 적당할 듯싶다.
람세스 2세는 동나일 델타의, 과거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지금의 타니스)에 새 도시를 세웠다. 오늘날 타니스에 가면 당시 도시 건설에 투입된 공력을 느낄 수 있다. 모세의 출애굽도 원래는 이 새 도시 건설에 이스라엘 민족이 동원된 데 기인한다.
배를 타고 나일 강 서안으로 건너가면 왕가의 계곡이 나온다. 나일 강 서안의 메마른 계곡 안쪽에 자리하는 이곳에는 파라오의 묘 60여 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놀라운 사실은 묘와 제전을 위한 벽화들이 마치 3000여 년의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듯 지금까지 선명한 원색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은 람세스 4세의 무덤 바로 오른쪽 앞에 있었다.
이 무덤은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발견했는데, 무덤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영국인 카터는 원래 카이로 박물관에서 일하는 화가였다. 차츰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몇몇 발굴 작업에 참여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결국에는 이집트 고고학 주석감사관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그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투탕카멘의 무덤이 존재하리라 믿었다. 그러던 중 영국인 부호 카나본 경의 이집트 휴양을계기로 투탕카멘 묘 발굴이 현실화됐다.
백만장자인 카나본 경은 운동과 모험을 즐겼으며 미술품 수집에도관심이 많았다. 그는 자동차 사고로 크게 다치고서 요양을 위해 이집트에 갔다가 무덤을 발굴하는 광경을 보게 됐다. 그는 고고학 발굴이야말로 예술품 수집과 모험을 함께 맛볼수 있는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아직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굴되지 않은 사실에 착안, 그는 카터와 함께 투탕카멘 묘발굴에 나섰다.
파라오의 저주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6년 동안 '왕가의 계곡'을 파헤치다가 어느 무덤 입구를 발견했다. 투탕카멘의 무덤일까? 그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구덩이를 다시 메우고 발굴을 위임한 카나본 경에게 가능한 빨리 영국에서 이집트로 와달라고 전보를 쳤다. 3주 후 두 사람은 고고학역사상 가장 감격적인 순간을 체험했다.
1922년 11월 26일 오후, 10미터 깊이의 땅 속에서 벽으로 막힌 두 번째 입구가 발견되었다. 카터와 카나본 경은 3000년이나 굳게 막혀 있던 벽에 구멍을 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역사상 가장 귀중한 보물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순간이었다.
하지만 카나본 경을 시작으로 무덤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갔다. 결국 1930년에 무덤 발굴팀의 생존자는 하워드 카터뿐이었다. 전 세계 언론은 '파라오의 저주' 라며 이 내용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대부분 언론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게 정설이지만 '파라오의 저주'가 완전히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시체가 분해되면서 사상균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무덤을 발굴하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상균에 감염되어 죽은 것이 언론에 의해 '파라오의 저주'로 만들어진 것이다.
파라오의 관에는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는 문구가 있지만 이와 동시에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는 글귀도 함께 쓰여 있다. 투탕카멘은 자신의 무덤이 후손들에 의해 영광스럽게 개봉되기를 기다려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첫 탐사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중단됐고, 1917년 말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재개됐다. 하지만 3년째 되던 해 이들이 발견한 것이라고는 옛 인부들의 막사 흔적뿐이었다. 5년에 걸친 발굴 작업의 결과는 참담했다. 이때까지 막대한 자금이 투입됐음은 물론이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한 해만 더 발굴하기로 했다.
절망 끝에 희망은 찾아왔다. 1922년 11월 4일, 발굴 현장에 선 카터는 이상한 기운을 직감했다. 잠시 후 그에게 "처음 발견한 인부 막사 바닥에서 돌 계단이 발견됐다"는 인부들의 보고가 전달됐다. 발굴 작업에 가속도가 붙었다. 카터는 이틀 후 12개의 계단 끝에 모습을 드러낸 문을 발견하게 됐다. 다름 아닌 투탕카멘 왕의 무덤으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투탕카멘 왕은 앞서 언급한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신봉한 아크나톤의 아들이었다. 투탕카멘은 18세 때 요절한 소년 왕이며, 그의 묘지는 미완성 상태였다. 이 미완성 묘에서 발견된 보물들이 얼마나 호화로운지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카이로 박물관의 '투탕카멘 특별실’에 전시된 3중의 관을 비롯해 2000여 점의 부장품 규모에는 누구나 압도된다. 투탕카멘 묘가 미완성의 소년 왕 것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파라오의 묘는 어느 정도 규모였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