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후예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
관직과 토지를 독점한 특권층과 나락으로 떨어진 백성들의 삶!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 정권의 한계는 뚜렷했다. 정통성이 없는 왕권이었기에 세조는 공신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즉 공신들과의 연합 정권이었던 것이다. 세종에게 왕위를 빼앗긴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세종의 가족들과 단종을 죽이는 데 앞장을 섰다. 세조는 공신들에게 관직 매매권과 토지, 그리고 단종 측과 사육신의 아녀자들을 하사했다. 심지어 신숙주는 단종의 왕비를 노비로 하사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정인지는 세조를 ‘너’라고 불렀다. 무력만 있으면 누구나 왕위를 가질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여 봉석주 반란 사건 등이 일어났고 정통성 없는 정권이었기에 명나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대 외교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공신들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단 1년 만에 의문사했다. 성종은 26년 동안 재위했음에도 별 치적이 없었고, 성종이 성군이라고 알려진 것은 세조 대의 혼란기에 비할 때의 반사이익이 컸다. 중대한 기로 앞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역사적 인물들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삶을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왕위를 뺴앗긴 양녕대군의 핏빛 복수
양녕대군 이제(李?)는 태종의 큰아들로서 왕세자의 자리를 꿰어차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선택은 셋째아들 충녕대군 이도(李?), 즉 세종이었다. 중국의 경우 왕세자의 자리에서 밀려나면 곧 죽음을 맞았지만 세종은 형 양녕대군을 철저히 보호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의 생각은 달랐다. 양녕대군에게 세종은 목숨을 보호해준 인군(仁君)이 아니라 왕위를 빼앗아간 동생에 불과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죽이고 단종을 왕위에서 밀어내자 양녕대군은 단종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세종의 후예들인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등을 죽이려 들었다. 왕위를 빼앗긴 데 대한 처절한 복수였다. 양녕대군뿐만 아니라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 역시 복수에 나섰다. 그 역시 단종을 죽이는 데 가담했으며 백성들의 공물을 착취했다. 단종과 사육신을 죽인 종친들과 정인지, 신숙주 등 공신들은 단종 측 신하들의 땅뿐만 아니라 아녀자들까지 탐했다. 심지어 신숙주는 단종의 왕비까지 노비로 달라고 요청했다. 유학자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패륜을 저지른 이들을 세조는 막을 수 없었다. 공신과 종친들의 도움으로 왕위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공신들 중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탐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누구나 힘만 있으면 왕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정난공신이었던 봉석주는 김처의, 최윤 등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 세조는 공신 세력을 그나마 견제하기 위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귀성군 이준 등을 신공신으로 삼아 조정에 포진했으나 구공신 세력을 몰락시킬 수는 없었다.
왜 장남 월산대군을 버리고 자을산군을 택했을까?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의문사했을 때 왕위를 이을 사람은 예종의 적자인 만 세 살 제안대군이나 세조의 장손인 열다섯 살 월산대군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와 구공신들이 왕으로 선택한 사람은 월산대군의 동생 자을산군이었다. 왜 적자와 장손을 버리고 자을산군을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예종에게 있었다. 세조의 장남이었던 예종은 아버지와는 달리 과감한 공신 척결에 나섰다. 예종은 종친과 공신들의 관직 매매를 금지하고 위반하면 온 집안을 족주(族誅)하겠다고 선언했다. 예종은 대납권에도 손을 댔다. 당시 공신들은 백성들의 세금을 대신 내고 나중에 서너 배로 돌려받는 대납을 공개적으로 자행했다. 예종은 대납하는 자는 공신, 종친, 재상이라 할지라고 극형에 처하고 재산을 관에서 몰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과감한 조치는 어머니 정희왕후의 친정 집안까지 미쳤다. 예종이 의문사했을 때 시신이 하루 만에 변색되었다. 독살을 당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그러나 정희왕후와 공신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잘 다룰 수 있는 정통성이 약한 열두 살 자을산군을 다음 왕으로 지목했다.
예종에게도 뼈아픈 실책이 있었다. 유자광의 밀소에 넘어가 신공신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던 남이를 역모죄로 죽인 것이다. 이에는 평소 예종이 남이에게 가지고 있었던 악감정도 작용했다. 예종은 그것이 구공신들의 신공신 제거 전략임을 깨닫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신공신과 구공신 간의 균형이 무너졌고 예종은 구공신들을 제거할 우군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재위 1년 만에 의문사했다.
공신과 사림 사이에서 줄타기, 성종
구공신들은 열두 살 성종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성종은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 숙부 예종의 의문사가 그에게는 반면교사의 거울이었다. 관직 매매권인 분경 허용과 신공신인 귀성군 이준 제거 등 성종은 일단 구공신들의 의견을 따랐다. 구공신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임금을 갈아치울 수 있는 세력이었다. 그러나 익명서 사건으로 정희왕후가 수렴첨정을 거두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형식적으로 고사한 후 바로 친정에 나섰다. 열아홉 살 성종은 젊었고 구공신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성종은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기용했다.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 세력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부정적이었으며 단종 모후의 소릉 복원을 청원했다. 비록 소릉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를 주장했던 남효온은 처벌받지 않았다. 또한 중국 사신을 압구정으로 초대하기 위해 큰 장막을 청한 한명회의 요구를 묵살하고 한강의 정자들을 모두 없앨 것을 명했다. 세조부터 성종 대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한명회의 세상이 가고 있었다. 한편 김종직의 시호 문제에 있어서는 훈구 세력의 의견을 따라 문충(文忠)에서 문간(文簡)으로 바꾸었다. 문충이란 시호를 받을 만큼 공이 크지 않다는 것이 훈구들의 주장이었다.
이처럼 정치에서 유연한 능력을 발휘했던 성종은 여성 문제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호문(好文)만큼 호색이었던 성종은 많은 여성을 편력했고 이것이 원자의 모후이자 왕비인 윤씨와 충돌했다. 인수대비, 정희왕후 등 왕가의 여인들이 앞장서서 왕비 윤씨를 폐비 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데 앞장섰고, 성종은 연산군이라는 불안한 유산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무너진 헌정 질서, 그리고 서로 다른 선택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을 때 조선의 헌정 질서는 무너졌다. 이때는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처럼 개국 초가 아니었다. 이미 장자로 왕위를 계승한다는 질서가 세워진 때였다. 그렇기에 세종의 장남 문종이 왕위를 이었고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왕이 될 수 있었다. 조선의 헌정 질서가 무너졌을 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신숙주와 성삼문은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신숙주는 정인지 등과 함께 단종을 죽이는 데 동참했고 성삼문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아가지, 불덕 등 천인들이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독동, 윤생 등 노비들이 단종을 보호하기 위해 죽음을 무릎 썼다. 반면 한명회, 권람 등 공신들은 사육신 측의 재산뿐 아니라 아녀자들까지 나눠 가졌다. 한편 양성지처럼 헌정 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민심을 달래고 법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노력하는 제3의 길을 선택한 이들도 있었다. 예종 역시 공신들의 관직 매매와 대납권을 폐지하며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의문사했다. 이처럼 중대한 기로 앞에서 서로 다른 선택들을 한 역사적 인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첫댓글 드디어 '조선왕조실록 4'가 나왔군요~^^
코로나 국면이 아니면 ,,,
이덕일소장님 모시고,
저자와의 만남의 장을 마련할 텐데~
아쉽네요^^
5권도 어서 나오길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