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감독들이 대개 그렇지만 김수용은 종잡을 수 없는 감독이다. 그가 '튀는' 감독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척 많은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58년 <공처가>로 데뷔한 김수용은 2000년에 개봉한 <침향>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말에 따르면 '한국신기록을 두고 다툴만한' 110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 중에는 수작도 있고 태작도 있다. 그 수많은 작품 목록은 김수용이 동시대에 활동했던 유현목과 김기영처럼 작가의 서명을 남길 의지가 없었다는 걸 알려준다. 그는 영화사의 의뢰를 받은 작품을 꾸준히 찍었으며 신상옥처럼 자기만의 상표를 만들어내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한 해 6, 7편의 영화를 예사로 찍었고 심지어 67년 한 해 동안 10편의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던 그는 전형적인 다작의 장인이다. 그런데도 그는 또한 한국영화계의 다른 숱한 다작형 장인과 다른, '김수용적인 것'의 서명을 한국영화에 남겼다.
고유명사 김수용을 거쳐 관통한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영화의 경향과 스타일은 당대의 것이면서 동시에 김수용의 것이기도 하다. '김수용적인 것'은 문예영화, 모더니즘 영화, 목적영화 등 당대 한국영화의 일반적인 범주에 묶이면서도 그 틀 안에서 김수용 개인의 서명이 찍힌 흔적을 새기는 것이다. 그 흔적은 김수용 개인의 궤적이면서 한국영화의 어떤 경향의 궤적을 동시에 그린다. 그는 스스로 한국 영화역사에서 두 손가락에 꼽으면 서러울 영화 테크니션이자 문학 교양인이자 실험적인 성향의 영화감독이라고 여기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방대한 연출작 목록에 대해서는 "작품을 선택해서 자기 색깔을 만드는 걸 난 못했다"고 자인했다. 그는 60년대의 보따리 장수가 주도하던, 지방 배급업자가 주 투자자였던 충무로 영화계에서 다작하며 생존과 명예를 동시에 도모했으며 유신 시대의 70년대에도 '한국 영화 세 편과 외화 수입 쿼터 한 편을 바꿔치기 하던' 영화제도의 한 편에서 꾸준히 영화를 찍었다. 그는 일정한 질을 유지하는 다작으로 한국영화사에 서명을 남긴 감독이다.
김수용의 영화 세계는 한국영화의 흐름에 끼친 뛰어난 김수용적 성취와 한국영화의 흐름에 기댄 김수용식 생존방식의 중간지점에 착지해 있다. 김수용의 영화나라에서는, 그의 작가적 흔적과 그의 작품에 묻어 있는 당대 한국영화의 관성의 흔적을 교대로 오가면서 엿볼 것을 요구하는 기묘한 겹침, 번거롭게 주름이 진 흔적이 자리잡고 있다. 그 주름을 거칠게 펼쳐 보면, 문예영화로의 안내와 모더니즘 영화의 성취와 사회비판영화에의 시도라는, 대략 세 갈래 길로 김수용이 한국 영화의 흐름에 남긴 흔적의 자취를 요약할 수 있다.
2. 문예영화의 안내자
58년에 데뷔한 김수용은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생존에의 그 강박은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오가는 여타 한국 흥행 감독의 길을 따르게 했지만 이 시기의 김수용을 다른 이들과 구별짓게 만든 것은 그가 문예영화 감독으로 서서히 이름을 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김수용은 한국과 서양의 근대문학에서 원작을 빌어와 타 예술에서나 추구하는 것이라고 봤던, 인간과 사회가 만나는 모습을 스크린에 곧잘 잡아냈다. 오영수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갯마을>,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원작인 <안개>, 차범석의 희곡을 영화로 만든 <산불> 등을 비롯해 김유정, 김동리 등 한국 소설가들의 작품이 그의 카메라를 통해 영화로 옮겨졌다. 김수용의 안내에 따라 60년대 한국영화는 '문예영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수용 자신은 정작 '문예영화'란 정의에 은근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문예영화?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문학을 영화로 만들어서 적당히 예술성을 집어넣은 작품이란 뜻인데 일본에서 나온 말이다." 김수용의 말에 따르면 영화와 문학 사이에 뭔가 접점을 찾아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먼저 나선 이는 그 자신이었다. 60년대 초의 한국영화는 그저 재미있는 구성만 되면 무조건 찍는 이야기 수준이었으며 그게 아니면 대개 일본 영화의 각본을 베낀 것이 많았다. 어느 것도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돌아보니까 이효석, 김유정, 현진건, 염상섭의 소설이 있었다. 거기에는 인간이 있고 사람냄새가 난다. 그리고 남의 것을 베낀 것이 아니니까 굉장히 이야기가 떳떳하다. 그럼 얘기를 꾸미지 말고 소설을 갖다 하자, 이렇게 된 것이다. 제작자들은 물론 처음에는 반대했다. 문학은 딱딱한 것이고 영화는 대중이 보는 것이니까 투자할 마음 없다는 태도였지만 나는 여하튼 밀어 붙여서 모파상 원작의 <첫 사랑>을 임희재의 각색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의 제목은 <돌아온 사나이>였다. 원작과 상관없는 기묘한 제목은 흥행이 안 될 것을 염려해 제작사 신필름의 대표였던 신상옥 감독이 붙인 것이었다. 그 뒤 김수용은 고향 사람을 꼬드겨 투자 받은 돈으로 김소월의 <못 잊어>를 영화화했으며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로 만든 <혈맥>은 1965년 2회 대종상 작품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제작자들이 먼저 찾아 와서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달라고 졸랐으며 그 당시에 만든 영화 중에는 심지어 토마스 하디의 <테스>을 각색한 <청춘무정>, 일본 소설을 영화화한 <빙점> 등도 들어 있었다.
김수용이 60년대에 줄기차게 만들었던 소설 원작의 영화는 <안개>, <봄 봄>, <까치소리>, <갯마을>, <유정> 등으로 이어진다. 이런 활동은 이 시기의 숱한 다작 가운데 김수용의 이름을 새기는 계기가 됐다. <갯마을>은 65년 대종상 작품상, <산불>은 67년 청룡영화제 작품상, <안개>는 67년 아세아 영화제와 청룡영화제 감독상을 받았으며 <유정>은 개봉해인 66년 서울 관객 33만명을 동원하는 흥행기록을 거뒀다. "처음에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스토리를 즐겼다. 그 당시에는 일본 것 표절 많이 했다. 그렇다면 한국 문학의 힘을 빌어 한국사람이 뿌리깊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다" 문예영화라는 명칭에 문학의 예술적 향취를 적당히 입힌 영화라는 비아냥거리는 의미가 숨어있다면 김수용의 일부 영화는 그 함정에서 벗어났다. 그 중에서 특히 <안개>는 극적인 경제성장의 문턱에 접어들면서 군사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60년대 한국사회의 어둡고 권태로운 풍경을 행동보다는 의식의 흐름을 좇는 세련된 감수성으로 담아냈던 것이다.
3. 깨진 거울의 반영
3-1. 모더니즘 스타일을 향하여
60년대에 제작자들에게 꽤 인기 있는 감독이었던 김수용은 70년대 이후 변화를 모색했다. 72년 홍콩에 건너가 쇼 브라더스에서 두 편의 영화를 연출한 김수용은 거기서 번 돈 4만 달라를 들고 미국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 1년여 동안 머물면서 감독으로 정착할 길을 모색했다. "영화 참 많이 봤다. 하루에 두 세 편 봤으니까.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의 오렌지>, 노만 주이슨의 <지붕 위의 바이올린> 등의 영화를 봤다. 미국에 가기 전에는 미국영화를 깔보고 그랬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좀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서술구조가 소설처럼 얘기가 있는 한 언어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활동할 수 없을 것 같았다. L. A에 6개월간 있다가 뉴욕에 가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뿌리라는 그곳 영화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안되겠다 싶어서 포기하고 귀국했다. 다시 한국에 와서 보니까 수준이 저 밑에 있는 것 같았다."
72년 유신이 시작되고 한국영화가 몰락의 길로 치달았던 암울한 시대에 김수용은 <안개>에서 시도했던 영화표현의 현대적인 스타일을 조금 더 유려한 방법으로 치고 나갔다. "60년대 에는 이 땅의 모든 기술을 동원해서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면, 70년대의 나는 '이제까지의 방법론을 버리자. 나 스스로 찾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군데군데 가끔씩 찾았다. 내 영화에는 드라마만 있는 게 아니라 시도 있다. 적어도 몇 장면에는 시가 있다." 그러나 김수용의 실험은 늘 이해 받은 것은 아니었다. 70년대 내내 한국 영화계 태풍의 눈이었던 하길종은 김수용의 영화가 '어설픈 실험'이라고 비난했다. 동료였던 김기영은 사석에서 김수용의 영화가 60년대의 <갯마을>처럼 서정적인 드라마를 찍는 쪽으로 간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소설에서 빌어온 60년대의 내 영화가 사건이나 인물 성격 묘사 등을 이야기의 합리적인 논리에 맞춰 영상화하는 것에 만족했다면 70년대의 나는 이야기만 하는 데 지쳐있었다. 가능하면 영화의 모든 요소 중에 스토리를 좀 줄이고 편집, 음향, 촬영의 미학을 파고드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이 시기의 작업 중에 그런 실험의 성취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야행>, <화려한 외출>, <웃음소리> 등이다. 김수용은 소설을 영화로 만든 이 시기의 영화가 당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풍조에 거역하는 것이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다. "난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만든 것이 한 편도 없다. <토지>도 1권이 막 나왔을 때 영화로 찍었다."
김수용이 스토리가 아닌 다른 영화적 표현 요소에 주력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현실의 반영이 아닌 반영의 현실이라는, 현대 영화언어의 대세에 맞는 스타일의 실험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싣는 극적 도구로 편집과 촬영과 음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얘기인지 선명히 가닥이 잡히지 않아도 인물의 내면풍경과 사회의 접점을 유연하게 잡아내기 위해 딱 부러지는 이야기는 없지만 편집과 촬영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추구하는 모더니즘 영화의 실험을 이 시기에 김수용은 추구한 것이다. 김수용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 사람 대다수가 집단의식으로 나누고 있는 뿌리 잃은 상실감이 도시적 삶의 혼란스런 양상에 부딪쳤을 때 겪게 되는 의식의 흐름을 분절된 내러티브로 따라가는 스타일에 뛰어난 감각을 보여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야행>과 <화려한 외출>이다.
3-2. <야행>
김수용의 영화세계는 크게 보아 <혈맥>, <만선>, <갯마을> 등의 서정적인 문예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 <사격장의 아이들>, 등 어린이의 눈으로 본 사회 현실을 담은 성장영화, 그리고 <안개>, <시발점>, <까치소리> 등의 실험적인 성향의 모더니즘 영화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계열의 영화는 1970년대에 <토지>,<발가락이 닮았다>로 이어졌으며 두 번째 계열은 <가위 바위 보>로, 세 번째 계열은 <안개>, <화려한 외출>, <웃음소리> 등으로 이어졌다.
<야행>은 애초에 1973년에 제작됐으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창고에 묻혀 있다가 뒤늦게 1977년에 개봉했다. 감독이 현대적 감각으로 여자의 방황을 추적하고 모든 여자의 운명은 동일하다는 명제를 담고 싶었다고 말하는 <야행>은 실제로 당시의 사회 윤리에 비춰 보면 매우 파격적인 여성의 일탈심리를 추적하고 있다. <야행>의 주인공은 은행에 근무하는 미모의 노처녀 현주이며 그는 월남전에서 전사한 여고시절의 선생이었던 육군소위와 연애한 추억을 갖고 있다. 메마른 나날의 생활을 견디면서 현주는 첫 애인이 묻혀 있는 국립 국군 묘지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서 살면서 늘 여고시절의 첫 사랑을 추억한다. 현주의 생활은 매우 규칙적이다. 낮에는 은행원으로 일하고 일을 끝내고 나면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국립 묘지 앞에 내려 늘 만나는 목석같은 경비원의 곁눈질을 받으며 아파트에 들어가 저녁밥을 짓고 나면 비밀리에 동거중인 직장 동료 박이 술에 취해 들어오고 밤이 느지막해지면 같은 은행에서 근무하며 비밀리에 동거중인 남자 박이 술에 취해 들어오는 식이다.
현주는 어느 순간부터 이런 삶에 의식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다. 집에서는 남자의 성적 도구이고 밖에서는 돈버는 도구인 자신에 대해 혐오를 느끼며 동시에 단조로운 노동을 술로 달래고 모든 여자를 성욕의 대상으로만 대하는 남자들의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휴가를 받은 현주는 고향에 내려가 여고시절을 회상하며 마을의 돈 많은 젊은 사장을 유혹해 몸을 준다. 휴가를 다 채우지 않고 서울에 돌아온 현주는 밤늦게 어두운 뒷골목길을 방황하며 남자들에게 몸을 내맡긴다. 달라진 자신을 향해 결혼하자고 조르는 박과 함께 박의 부모에게 혼인 승낙을 받으러 열차에 몸을 실은 현주는 박이 잠든 틈에 서울로 되돌아온다. 뒤늦게 달려온 박에게 현주는 나의 방황은 끝났다는 내용의 편지를 건네준다. 그리고는 다시 예전의 자기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현주는 과거의 추억에 현재의 삶을 결박한 인물이다. 삶의 순수는 고등학교 때 사랑했던 남자가 죽었을 때 이미 끝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현주의 현재의 삶은, 남자와 사회로부터 도구화될 것을 강요받는 그런 삶이다. 현주는 방황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밟는 타락의 길에 매우 적극적으로 몸을 내맡기는 쪽을 택한다. 한국영화에서 이만큼 공격적으로 여성의 적극적인 반사회적 일탈 심리를 다루려는 시도는 드물었을 것이다. 현주의 삶은 이미 사회에서 타자화돼 있지만 그가 타자화된 자신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동화시키기로 작정했을 때 놀랍게도 사회는 그 자신만큼이나 타자화돼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매일 매일 정해진 일과를 마치고 술과 여자에 대한 욕정으로 탈출구를 찾는 남자들의 삶은 본질적으로 타자화된 현주 자신의 삶과 다를 게 없다. 현주가 육교 위를 서성거리며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볼 때 그의 눈에 비치는 풍경과 사람들은 모두 대지 위에 정착하지 못,한 부유하는 인간들과 신기루처럼 흩어져 있는 추한 사물뿐이다.
김수용은 이 타자화된 자아와 현실의 초상 이면에 희미하게 정치적 함축을 깔아놓는다. 아주 명쾌한 것은 아니지만, 여고시절에 사랑했던 남자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이 있는 국립묘지 근처에서 현주는 오늘의 삶을 산다. 현주가 국립 묘지 근처의 버스 정유장에 내려 흘러내리는 스타킹을 치켜올리면 목석 같은 경비병은 아주 어색하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의 노출된 신체 일부를 훔쳐본다. 균일하게 하나의 삶, 오로지 생산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요구했던 근대화 시기를 배경으로 이 영화는 욕망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통제되고 분출되는 일그러진 모습을 여주인공 현주의 일상과 의식을 통해 파고든다. 실험영화 풍의 거친 편집과 화면 각도로 혼란스럽게 꾸며놓고는 있지만 그것이 당대의 드러나지 않는 비윤리적 일탈의 기운과 조응하는 측면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예상했던 대로 비관적인 분위기로 끝난다. 현주가 방황과 일탈을 통해 얻은 결론은 다시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현재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가 정착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야행>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어둡고 혼란스런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그건 당시 사회의 표정이기도 했다.
3-3. <화려한 외출>
<화려한 외출>의 주인공은 성공한 여성 기업가 공도희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의 성공 사례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 유명인사인 그는 매일 비서들이 짜놓은 일정에 따라 바쁘게 활동하는 대기업 총수이다. 그러나 중년 과부인 공도희는 바쁜 일상 틈틈이 느끼는 성욕의 결핍감에 시달리는 한편으로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는 빨간 옷을 아기님의 환영에 괴로워한다. 공도희가 찾아간 무당은 그 꿈속의 아기가 또 하나의 공도희, 어릴 적 죽은 일란성 쌍둥이의 환영이라고 일러준다. 두 개의 자아의 모티브를 알려주는 이 대목부터 영화는 급격하게 다른 내러티브로 빠져든다. 공도희가 홀로 차를 몰고 도시를 벗어나 어느 한적한 어촌 마을에 이르자 공도희의 차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마구 모여든다. 이곳에서 공도희는 혼란과 경악에 빠진다. 미친 여자가 춤을 추고 돌아다니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공도희에게 이유 없는 적개심을 드러내며 사람들에게 쫓기다 해녀들에게 납치된 공도희는 그녀가 자기 아내라고 주장하는 어느 낙도의 사내에게 팔려 가는 신세가 된다. 그 섬에서 공도희는 용달호라는 이름의 그 사내에게 툭하며 매질을 당하면서도 야성적인 그에게 은근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생활에 적응해간다. <화려한 외출>의 후반부는 용달호의 아이를 밴 채 낙도를 탈출한 공도희가 다시 서울에 오지만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펼쳐진다. 낙담한 공도희가 "나를 찾아줘요. 내 이름은 공도희에요."라고 부르짖으며 그가 회장으로 있었던 빌딩 꼭대기에서 자살 소동을 벌일 때 그 건물 밑에서 취재하던 한 기자가 말한다. "좀 보라고. 뭔가 화려한 것 같잖아. '화려한 외출'이라고 제목을 붙여서 기사를 써." 물론 영화의 결말은 이 모든 것이 공도희가 바닷가에 차를 세워둔 채 잠시 잠이 들었던 사이에 벌어졌던 꿈이었다는 것으로 맺고 있다. 그리고 그는 꿈속에서 본 인물들을 현실에서 평범하게 지나치는 사람들로 다시 조우하는 기이한 상황에 맞닥뜨린다.
당시 하길종은 이 영화를 두고 "일란성 쌍둥이의 문제 같은 어려운 소재를 다룰 것인지, 기계화된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한 현대 여자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존재의미를 묻는 소재를 다룰 것인지를 분명하고 정직하게 선택하지 않았던 연출자의 알쏭달쏭한 태도"를 비판했다. (김기영, 유현목의 영화를 평할 때에 비해 유독 하길종이 김수용의 영화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김수용의 70년대 대표작이라 할 <야행>에 대해서도 그는 "연출자는 의욕을 갖고 실험적인 영상을 선보였지만..."이란 투로 평가를 유보하고 대신 과장된 광고를 조롱하는 평을 실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던 초기작의 실험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거기에 의식의 흐름을 싣는 김수용의 성취와 유사한 점이 있다. 하길종은 김수용 영화의 모더니즘 스타일의 흔적에서 질투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려한 외출>은 일란성 쌍둥이와 현대인의 일상 탈출 욕구 등의 어느 한 쪽으로 저울추를 옮겨야 했던 그런 영화는 아니다. 영화 초반에 암시된 두 개의 자아는 바로 그 시시기, 개발 독재 근대화 시기의 한국인의 초상은 아니었을까. 바닷가에서 공도희가 보게 된 건 아직 근대화 되기 이전의 시기의 한국 사회의 모습, 새마을 운동 이후 야만적이고 추레하며 타기해야 할 것으로 격하된 전통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미친 여자가 뛰어다니며 서구화된 도시 여자를 적개심에 타서 바라보는, 스스로 서구 근대화의 거울에 비춰 타자화 시킨 한국사회의 과거의 모습이다. 영화는 그 시기를 논평하지는 않는다. 공도희가 낙도 마을에 팔려가 노예 같은 삶을 살며 남편과 첩 사이에서 은근한 성적 만족과 굴욕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모습에도 어떤 논평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다만 조금 더 깊숙이 두 시기의 삶의 풍경을 의식의 흐름이라는 틀 아래 겹쳐놓았을 뿐이다. 도회지에서의 세련된 삶과 낙도 마을에서의 가난하고 억눌린 삶 모두 겹쳐지면서 영화는 '화려한 외출'이라고 이름 붙여진, 아직 정착지를 찾지 못한 근대화 이후의 한국사회의 내면 풍경을 중년 여성의 모습을 통해 혼란스런 거울로 비춰 보인 것이다. 가난하고 전근대적인 인습에 쌓인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비극적인 일이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강요받는 현대 대도시 일상의 모습에 행복의 기운이 얹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하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화려한 외출>은 바로 그 어정쩡한 위치에 처한 시대의 단면을 요약한 것이다.
3-4. 모더니즘 이외의 퇴행 흔적들
1970년대에 김수용이 추구한 모더니즘 스타일의 패기는 균일한 성취를 이뤄낸 것은 아니다. 김수용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이 강한 주제나 당대 청년문화의 유행에서 나온 소설을 영화러 연출하는 데는 무기력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김수용 스스로 소설의 이야기 용적을 알맞게 줄였다고 만족감을 표시한 박경리 원작의 <토지>는 적절한 스토리텔링에 대한 강박 때문에 원작에 대한 성실한 복종도, 영화 나름의 스타일 추구도 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 종반에 이르면 일본 식민지 시대를 비판하는 목적영화의 형태로 결말이 망가져 버린다. 주인공인 서희 집안의 몰락과 그 주변인물의 스토리를 유기적으로 연결지으면서 봉건사회에서 일제 식민지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의 징후, 전통적인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필연적인 비극의 징후를 이 영화는 잡아내지 못했다. 원작 소설에 담겨 있는 너무 많은 사건들을 영화는 나열식으로 꿰는데 허둥댄다. 일제 식민지를 비판하는 감상적인 내레이션이 흐르는 후반부에 이르면 이 영화가 한국 문학의 훌륭한 기념비라는 평가를 받는 원작 소설 <토지>와 겨루는 것이 아니라 외화 수입권을 따내는 데 유리한 우수 영화 포상을 노리고 적당한 문학적 향기와 목적 계도 영화를 버무리려한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 시기의 김수용이 드물게 최인호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든 <내 마음의 풍차>도 그가 최인호 세대의 젊은 감성, 하길종이 <바보들의 행진>을 통해 받아들였던 당대 청년 문화의 낭만적이고 자폐적이며 동시에 감각적이고 반항적인 감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억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억눌린 청년의 자폐감과 방황을 탄력 있는 문체로 그려낸 최인호의 감성은 이 영화에 깔려 있지 않다. <내 마음의 풍차>는 원작에 짙게 배어 있었던 서자 의식, 아버지 세대로부터 받은 핏줄을 부정하고 싶으면서도 결국에는 완전히 부정하지 못한 채 소극적인 반항에 그치고 마는, 일종의 유배된 정서의 고독감을 관습적인 이야기로 풀어낸다. 의식의 흐름을 담아내는 데 유능했던 김수용이 왜 이 영화에선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했는지 그것은 수수께끼다. 장년층이었던 그는 청년과 아버지 세대의 대립을 적극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수용이 1970년에 만들었던 영화들 가운데는 <아라비아의 열풍>, <본능>, <가위 바위 보>, <작은 꿈이 꽃필 때>, <여기자 20년> 등 목적 계몽 영화의 성격이 강한 작품도 곧잘 눈에 띈다. 1년에 서 너편의 영화를 찍었던 김수용은 20개 영화사가 매년 각기 4편 이상의 한국 영화를 의무제작해야 한다는 당시 영화제도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였다. 그는 많은 영화를 찍을 수 있었으며 그중 대다수는 외화 수입권을 얻을 수 있는 우수영화 시상을 노리고 제작된 영화였다. 그 가운데는 매우 혼란스러운 영화도 끼어있다. <가위 바위 보>는 베트남 통일 직후 그곳을 탈출해 한국에 온 베트남 난민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나라가 망하면 국민의 행복도 사라지는 것이라는 당시 선전 영화의 틀을 바탕에 깔고 있다. 김수용은 이 관제 선전영화의 의도가 짙은 영화를 네 자매의 성장 영화로, 곧 어머니의 죽음과 네 자매의 이별을 소재로 한 보편적인 성장 영화의 틀로 풀어낸다. 영화의 결말은 국군의 날 행사가 벌어지는 도심에서 생이별을 해야 하는 형제가 마지막 작별을 하고 월남 국기를 들고 뛰어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기이하게도 관제 선전영화의 계도의식보다는 삶의 가혹한 순간에 직면한 아이들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쪽에 연출 무게가 실려 있다.
1970년대의 한국영화는 한국영화 네 편과 외국영화 한 편을 맞바꾸었던 불행한 시대였다. 검열의 통제를 축으로 한 엄격한 영화산업의 관리체제는 문예영화. 우수영화, 반공영화 등의 통조림된 영화를 찍어내도록 유도했고 독과점을 보장받은 영화사는 한국영화 네 편을 의무제작하는 조건으로 외국 영화를 수입해 그것으로 흥행을 꾀했다. 김수용은 그런 의무제작이 관행화된 시대에 예술성과 목적성을 따로 분리해 영화를 뚝딱 찍어내는 기능형 장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회화주의나 분절된 내러티브 스타일의 실험에 대한 곁눈질을 오가는 행보를 밟았다. 특히 김수용의 스타일은 언어의 밀도에 기초한 소설의 내적인 독백이나 의식의 흐름을 영화로 담대하게 옮기는 것에는 꽤 인상적인 성취를 이뤘다. 그 오락가락하는 진동 추 사이에서 그는 여전히 문예영화감독이라는 60년대의 표식을 달고 있었으며 늘 수준작을 만드는 장인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4. 허튼 소리, 희미한 저항정신
김수용이 곧이곧대로 자기의 내부에 숨어있는 현대영화의 감수성을 풀어놓기엔 당시의 한국영화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도 너무 팍팍했을 것이다. 김수용은 항상 가벼운 흥행영화와 작가영화를 병행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김수용적인 것'의 세 번째 갈래에서 우리는 희미하게 나마 당대의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해 발언하려고 하는 영화를 만난다. 이를테면 금보라의 데뷔작이었던 오태석 원작의 <물보라>는 늙은 선주가 지배하는 한 섬을 무대로 선주의 노리개감이었던 한 젊은 여성과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늙은 선주를 비판함으로써 죽음을 맞았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뜻밖에도 복잡하게 펼쳐지는데, 영화 초반에 젊은 여주인공과 동참했다고 너도나도 주장하는 마을 남정네들의 증언을 펼쳐놓고 있는 한편으로 그 애욕의 드라마 뒤에는 마을의 독재자/ 늙은 선주가 조종했던 섬의 질서를 보위하고 권력을 이어받으려는 인간들의 속물심리가 끼어있음을 차근차근 여러 사람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당대 한국 사회의 정세에 대한 간접적인 비유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김수용의 그 시도는 만만치 않은 사회적 저항을 받았다. 대표적인 것이<도시로 간 처녀>였다. "검열에서 제일 많이 다친 영화가 <도시로 간 처녀>다. 나는 김승옥과 변두리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합숙하면서 3달 동안 취재한 끝에 버스 안내양의 삶에 관한 일종의 르포영화를 찍었다. 그때 어느 안내양이 버스회사의 몸수색에 항의해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신문에는 그의 사정이 다 잘려나가고 2단 짜리 기사로만 나왔다. 그래서 나와 김승옥은 우리, 이럴 거면 차라리 신문에 나오지 않는 이 사람들의 삶을 아예 영화로 찍어버리자, 라고 의기투합했다. 사이드 스토리를 재미있게 끌고 간 영화였는데 검열에서 문제가 생겼고 간신히 극장에 걸었을 때는 관제노조에서 사람을 동원해 버스 안내양 300여명이 극장 앞에서 데모를 하고 간판을 끌어내렸다. 당시 아침에 방송되던 모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불쌍한 버스 차장을 돈 몇 푼에 좌우되는 인간들로 묘사하고 그런 얘기를 쓴 몰염치한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그런 역할을 시키려고 여배우들을 카메라 앞에 세운 감독은 각성해야 한다, 라고 했다. 참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았다. 약간은 포기한 심정으로 이만희의 영화 리메이크 작업에 들어갔다. 그게 <만추>다."
목적영화로 찍은 <피에로와 국화>는 북한 지식인을 온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영화의 상당 부분을 재 촬영했으며 이청준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는 동성애를 집어넣었다가 결국 영화화를 포기했다. 비극의 끝은 87년 작품인 <허튼 소리>였다. 중광 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이 영화는 10 여 군데가 잘려나갔고 김수용은 사상을 담은 정당한 표현이라고 주장했으나 "관객은 감독보다 무식하다. 고로 필름을 잘라야 한다"는 당시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의 발언에 항의해 김수용은 자진해서 영화계로부터 물러나는 잠정은퇴의 길을 택했다. 그 뒤 정도상의 <아메리칸 드림>을 영화로만들 계획도 세웠으나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의 만류로 포기했다고 김수용은 회고했다. "80년대에는 내 영화가 거의 흥행이 좋지 않았다. 내 생각과 관객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 또 나는 무모하게 새로운 것에 도전했다. 너무 빨리."
5. 드러나지 않은 향기, 침향
90년대 이후에 김수용은 단지 두 편의 영화를 찍었을 뿐이다. <사랑의 묵시록>은 일본 재일교포의 자본으로 찍은, 목포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던 한 일본인 여성의 삶을 다룬 전기영화다. 그리고 김수용은 99년에 <침향>을 찍었다. "영화의 참 맛을 보여주겠다"고 김수용이 의욕을 보였던 이 영화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비 지원을 받아 악전고투 끝에 완성했으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김수용 영화의 장단점이 고루 묻어 있다.
맑은 강물이나 땅 속에 오랫동안 묻어둔 참나무를 적당한 바람과 빛에 말렸을 때 얻는 그윽한 향기가 침향이다. 속도전에 휘말려 모든 것이 휘발돼 버리는 세상에서 <침향>은 제목 그대로 자연과 인간의 깊은 향기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소설가이자 카레이서인 주인공 찬우가 속세와 격절된 산 속의 절 대흥사 옆의 여관에서 지경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여인을 만나 느낀 것이 바로 그 침향이었다. 비극적인 과거를 안고 살며 나이 많은 산장 주인의 둘째 마누라가 되어 속절없이 아기 낳기만을 기다리는 그녀와의 만남에서 찬우는 그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욕망을 만난다. 군에서 막 제대한 찬우는 입대 전에 관계했던 창녀 선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이 그녀가 자신에게 유언으로 남긴, 유골을 뿌려 달라는 그녀의 생전 소원을 풀어 주기 위해 그곳 대흥사에 온다. 찬우가 진경에게서 본 것은 바로 죽은 선희의 그림자이며 그녀에게서 느꼈던 욕망이며 세속잡사를 초월해 바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 같은 초월적인 자태에서 느끼는 끌림이다. 현실의 시간과 공간과 격절된 이 초현실적인 곳에서 느끼는 냄새, 그것이 침향이다. 그것은 번잡스럽고 고정된 우리 일상에선 결코 접촉할 수 없는 경지일 것이다.
<침향>의 이미지는 관광엽서나 광고화면의 예쁜 치장에 익숙한 감성으로도 탄복할 수 있는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그것은 오랜 체험에서 훈련된 직관으로만이 찰나를 고정시킬 수 있는 장인의 역량으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미 1960년대부터 이미지로 영화를 장악했던 노 감독은 부질없이 스토리 텔링에 매달리려는 몸짓을 취한다. <침향>은 침묵이 필요한 순간에도, 이미지의 카리스마로 압도할 수 있는 순간에도, 관객이 이야기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지나치게 배려하는 연출 계산에서 쉴새 없이 대사가 깔린다. 대사를 통한 설명, 이야기에의 강박감은 김수용의 장기가 아니었다.
원래 예정됐던 각본에 완성된 영화는 몇 가지 요소를 첨가했다. 소설가였던 주인공 찬우는 소설가이자 카레이서로 설정이 바뀌었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주는, 뭔가 불가해한 일에 맞닥뜨릴 수도 있는 예술가라는 설정에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의 삶에 걸맞는 새로운 직업이 추가된 것이다. 카레이서로서 그가 느끼는 속도와 나중에 시골 절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다르다. 그 대비되는 속도관념은 입대 전에 관계했던 창녀 선희의 죽음을 계기로 찬우가 선희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절 대홍사로 향하는 설정과 잘 어울린다. 또, 거기서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성적 욕망의 우여곡절을 겪는 전개와도 잘 들어맞는다. 요컨대 이 영화는 현실의 시간을 넘어서서 관념의 시간, 어떤 다른 시간대로 진입하는 낯설고 초월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높은 관념에 비해 영화는 몇 개의 맞물리지 않는 조각으로 나뉘어 버렸다.
신비한 화면의 풍광은 종종 감정 몰입을 방해하는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와 설명조의 대사 때문에 흥이 깨진다. 영화는 물리적인 재현을 거쳐야 하는 그 번거로운 과정을 돌파하지 못했다. 특히 화면에 신비하고 초월적인 기운을 띠어야 할 배우들의 카리스마가 모자라는 것이다. 차라리 죽은 창녀 선희 역의 이정현이 1인 2역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지나간 것은 부질없다. 영화 <침향>의 전제처럼 지나간 것은 그저 처연할 뿐이고 우리는 이제 이 노감독이 다시 침향을 찾아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6. 다시 침향을 찾아서
문예영화의 전성기를 탔던 60년대, 영화사에서 의뢰 받은 의무 제작의 수혜자였던 한편으로 실험적인 모더니즘 영화를 추구했던 70년대, 그리고 사회 비판 영화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80년대를 거치는 동안 김수용은 꾸준히 많은 영화를 찍었다. "영화를 많이 한 게 결코 자랑은 아니다. 자기 경력 관리에는 치명적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어디 스튜디오에 소속되지 않은 감독들에게 충무로의 영세자본 제작자들이 달려들었다. 난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 거절을 못했다. 저 사람 잡으면 기한 내에 영화 나오고 제작비 초과 안 하고 그러면서 흥행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를 많이 만든 해에 오히려 작품이 더 괜찮았다는 것이다. 67년 <안개>, <까치소리>, <만선>을 했는데 수준이 다 괜찮았다. 왜? 같은 스탭으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영화를 찍었으니까. 정신력과 조직력이 좋았다. 영화에 대한 연구와 팀워크가 중요하지 시간이 많다고 좋은 건 아니다. 물론 변명하고 싶진 않지만."
김수용은 스스로 58년부터 2000년까지 40 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영화를 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영화에 대한 감을 놓치지 않고 지키려 늘 애썼다. 이런 것 안 했으면 하는 작품은 물론 있다. 그래도 용서하는 게 그걸 통해서 영화에 대한 확신을 잡았기 때문이다." 김수용은 관객 취향에 맞는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원칙이 몸에 배어 있다. 80년대의 사회파 영화는 아마도 당시의 그런 시류를 그가 본능적으로 받아들여 이해했지만 영화적 숙성에는 실패했던 것의 반증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외국 문물의 영향을 받아 변해 가는 사람들의 얘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얘기"를 찍었다. 김수용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어법과 반영적인 모더니즘 스타일을 오가면서 전통과 근대화의 충돌 사이에서 표류한 인간들의 초상이 있었다. 개발 독재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제도가 한국영화에 요구한 것은 근대화에의 의지였지만 김수용은 문예영화와 목적영화와 계몽영화를 두루 만들면서 어떤 식으로든 근대화에의 국가적 의지가 억눌렀던 개인의 삶의 불안한 실존적 틈을 잡아蒁려 애썼다. 그 틈이 풍요롭게 벌려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지만 그 틈 사이에서 말할 것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김수용 감독론: 다작 장인의 복잡한 상상력의 주름
김영진 (중앙대 첨단영상전문대학원 영상예술학과 박사 과정)
1. 김수용의 이름으로
한국영화 감독들이 대개 그렇지만 김수용은 종잡을 수 없는 감독이다. 그가 '튀는' 감독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척 많은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58년 <공처가>로 데뷔한 김수용은 2000년에 개봉한 <침향>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말에 따르면 '한국신기록을 두고 다툴만한' 110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 중에는 수작도 있고 태작도 있다. 그 수많은 작품 목록은 김수용이 동시대에 활동했던 유현목과 김기영처럼 작가의 서명을 남길 의지가 없었다는 걸 알려준다. 그는 영화사의 의뢰를 받은 작품을 꾸준히 찍었으며 신상옥처럼 자기만의 상표를 만들어내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한 해 6, 7편의 영화를 예사로 찍었고 심지어 67년 한 해 동안 10편의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던 그는 전형적인 다작의 장인이다. 그런데도 그는 또한 한국영화계의 다른 숱한 다작형 장인과 다른, '김수용적인 것'의 서명을 한국영화에 남겼다.
고유명사 김수용을 거쳐 관통한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영화의 경향과 스타일은 당대의 것이면서 동시에 김수용의 것이기도 하다. '김수용적인 것'은 문예영화, 모더니즘 영화, 목적영화 등 당대 한국영화의 일반적인 범주에 묶이면서도 그 틀 안에서 김수용 개인의 서명이 찍힌 흔적을 새기는 것이다. 그 흔적은 김수용 개인의 궤적이면서 한국영화의 어떤 경향의 궤적을 동시에 그린다. 그는 스스로 한국 영화역사에서 두 손가락에 꼽으면 서러울 영화 테크니션이자 문학 교양인이자 실험적인 성향의 영화감독이라고 여기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방대한 연출작 목록에 대해서는 "작품을 선택해서 자기 색깔을 만드는 걸 난 못했다"고 자인했다. 그는 60년대의 보따리 장수가 주도하던, 지방 배급업자가 주 투자자였던 충무로 영화계에서 다작하며 생존과 명예를 동시에 도모했으며 유신 시대의 70년대에도 '한국 영화 세 편과 외화 수입 쿼터 한 편을 바꿔치기 하던' 영화제도의 한 편에서 꾸준히 영화를 찍었다. 그는 일정한 질을 유지하는 다작으로 한국영화사에 서명을 남긴 감독이다.
김수용의 영화 세계는 한국영화의 흐름에 끼친 뛰어난 김수용적 성취와 한국영화의 흐름에 기댄 김수용식 생존방식의 중간지점에 착지해 있다. 김수용의 영화나라에서는, 그의 작가적 흔적과 그의 작품에 묻어 있는 당대 한국영화의 관성의 흔적을 교대로 오가면서 엿볼 것을 요구하는 기묘한 겹침, 번거롭게 주름이 진 흔적이 자리잡고 있다. 그 주름을 거칠게 펼쳐 보면, 문예영화로의 안내와 모더니즘 영화의 성취와 사회비판영화에의 시도라는, 대략 세 갈래 길로 김수용이 한국 영화의 흐름에 남긴 흔적의 자취를 요약할 수 있다.
2. 문예영화의 안내자
58년에 데뷔한 김수용은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생존에의 그 강박은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오가는 여타 한국 흥행 감독의 길을 따르게 했지만 이 시기의 김수용을 다른 이들과 구별짓게 만든 것은 그가 문예영화 감독으로 서서히 이름을 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김수용은 한국과 서양의 근대문학에서 원작을 빌어와 타 예술에서나 추구하는 것이라고 봤던, 인간과 사회가 만나는 모습을 스크린에 곧잘 잡아냈다. 오영수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갯마을>,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원작인 <안개>, 차범석의 희곡을 영화로 만든 <산불> 등을 비롯해 김유정, 김동리 등 한국 소설가들의 작품이 그의 카메라를 통해 영화로 옮겨졌다. 김수용의 안내에 따라 60년대 한국영화는 '문예영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수용 자신은 정작 '문예영화'란 정의에 은근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문예영화?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문학을 영화로 만들어서 적당히 예술성을 집어넣은 작품이란 뜻인데 일본에서 나온 말이다." 김수용의 말에 따르면 영화와 문학 사이에 뭔가 접점을 찾아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먼저 나선 이는 그 자신이었다. 60년대 초의 한국영화는 그저 재미있는 구성만 되면 무조건 찍는 이야기 수준이었으며 그게 아니면 대개 일본 영화의 각본을 베낀 것이 많았다. 어느 것도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돌아보니까 이효석, 김유정, 현진건, 염상섭의 소설이 있었다. 거기에는 인간이 있고 사람냄새가 난다. 그리고 남의 것을 베낀 것이 아니니까 굉장히 이야기가 떳떳하다. 그럼 얘기를 꾸미지 말고 소설을 갖다 하자, 이렇게 된 것이다. 제작자들은 물론 처음에는 반대했다. 문학은 딱딱한 것이고 영화는 대중이 보는 것이니까 투자할 마음 없다는 태도였지만 나는 여하튼 밀어 붙여서 모파상 원작의 <첫 사랑>을 임희재의 각색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의 제목은 <돌아온 사나이>였다. 원작과 상관없는 기묘한 제목은 흥행이 안 될 것을 염려해 제작사 신필름의 대표였던 신상옥 감독이 붙인 것이었다. 그 뒤 김수용은 고향 사람을 꼬드겨 투자 받은 돈으로 김소월의 <못 잊어>를 영화화했으며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로 만든 <혈맥>은 1965년 2회 대종상 작품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제작자들이 먼저 찾아 와서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달라고 졸랐으며 그 당시에 만든 영화 중에는 심지어 토마스 하디의 <테스>을 각색한 <청춘무정>, 일본 소설을 영화화한 <빙점> 등도 들어 있었다.
김수용이 60년대에 줄기차게 만들었던 소설 원작의 영화는 <안개>, <봄 봄>, <까치소리>, <갯마을>, <유정> 등으로 이어진다. 이런 활동은 이 시기의 숱한 다작 가운데 김수용의 이름을 새기는 계기가 됐다. <갯마을>은 65년 대종상 작품상, <산불>은 67년 청룡영화제 작품상, <안개>는 67년 아세아 영화제와 청룡영화제 감독상을 받았으며 <유정>은 개봉해인 66년 서울 관객 33만명을 동원하는 흥행기록을 거뒀다. "처음에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스토리를 즐겼다. 그 당시에는 일본 것 표절 많이 했다. 그렇다면 한국 문학의 힘을 빌어 한국사람이 뿌리깊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다" 문예영화라는 명칭에 문학의 예술적 향취를 적당히 입힌 영화라는 비아냥거리는 의미가 숨어있다면 김수용의 일부 영화는 그 함정에서 벗어났다. 그 중에서 특히 <안개>는 극적인 경제성장의 문턱에 접어들면서 군사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60년대 한국사회의 어둡고 권태로운 풍경을 행동보다는 의식의 흐름을 좇는 세련된 감수성으로 담아냈던 것이다.
3. 깨진 거울의 반영
3-1. 모더니즘 스타일을 향하여
60년대에 제작자들에게 꽤 인기 있는 감독이었던 김수용은 70년대 이후 변화를 모색했다. 72년 홍콩에 건너가 쇼 브라더스에서 두 편의 영화를 연출한 김수용은 거기서 번 돈 4만 달라를 들고 미국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 1년여 동안 머물면서 감독으로 정착할 길을 모색했다. "영화 참 많이 봤다. 하루에 두 세 편 봤으니까.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의 오렌지>, 노만 주이슨의 <지붕 위의 바이올린> 등의 영화를 봤다. 미국에 가기 전에는 미국영화를 깔보고 그랬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좀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서술구조가 소설처럼 얘기가 있는 한 언어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활동할 수 없을 것 같았다. L. A에 6개월간 있다가 뉴욕에 가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뿌리라는 그곳 영화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안되겠다 싶어서 포기하고 귀국했다. 다시 한국에 와서 보니까 수준이 저 밑에 있는 것 같았다."
72년 유신이 시작되고 한국영화가 몰락의 길로 치달았던 암울한 시대에 김수용은 <안개>에서 시도했던 영화표현의 현대적인 스타일을 조금 더 유려한 방법으로 치고 나갔다. "60년대 에는 이 땅의 모든 기술을 동원해서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면, 70년대의 나는 '이제까지의 방법론을 버리자. 나 스스로 찾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군데군데 가끔씩 찾았다. 내 영화에는 드라마만 있는 게 아니라 시도 있다. 적어도 몇 장면에는 시가 있다." 그러나 김수용의 실험은 늘 이해 받은 것은 아니었다. 70년대 내내 한국 영화계 태풍의 눈이었던 하길종은 김수용의 영화가 '어설픈 실험'이라고 비난했다. 동료였던 김기영은 사석에서 김수용의 영화가 60년대의 <갯마을>처럼 서정적인 드라마를 찍는 쪽으로 간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소설에서 빌어온 60년대의 내 영화가 사건이나 인물 성격 묘사 등을 이야기의 합리적인 논리에 맞춰 영상화하는 것에 만족했다면 70년대의 나는 이야기만 하는 데 지쳐있었다. 가능하면 영화의 모든 요소 중에 스토리를 좀 줄이고 편집, 음향, 촬영의 미학을 파고드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이 시기의 작업 중에 그런 실험의 성취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야행>, <화려한 외출>, <웃음소리> 등이다. 김수용은 소설을 영화로 만든 이 시기의 영화가 당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풍조에 거역하는 것이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다. "난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만든 것이 한 편도 없다. <토지>도 1권이 막 나왔을 때 영화로 찍었다."
김수용이 스토리가 아닌 다른 영화적 표현 요소에 주력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현실의 반영이 아닌 반영의 현실이라는, 현대 영화언어의 대세에 맞는 스타일의 실험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싣는 극적 도구로 편집과 촬영과 음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얘기인지 선명히 가닥이 잡히지 않아도 인물의 내면풍경과 사회의 접점을 유연하게 잡아내기 위해 딱 부러지는 이야기는 없지만 편집과 촬영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추구하는 모더니즘 영화의 실험을 이 시기에 김수용은 추구한 것이다. 김수용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 사람 대다수가 집단의식으로 나누고 있는 뿌리 잃은 상실감이 도시적 삶의 혼란스런 양상에 부딪쳤을 때 겪게 되는 의식의 흐름을 분절된 내러티브로 따라가는 스타일에 뛰어난 감각을 보여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야행>과 <화려한 외출>이다.
3-2. <야행>
김수용의 영화세계는 크게 보아 <혈맥>, <만선>, <갯마을> 등의 서정적인 문예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 <사격장의 아이들>, 등 어린이의 눈으로 본 사회 현실을 담은 성장영화, 그리고 <안개>, <시발점>, <까치소리> 등의 실험적인 성향의 모더니즘 영화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계열의 영화는 1970년대에 <토지>,<발가락이 닮았다>로 이어졌으며 두 번째 계열은 <가위 바위 보>로, 세 번째 계열은 <안개>, <화려한 외출>, <웃음소리> 등으로 이어졌다.
<야행>은 애초에 1973년에 제작됐으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창고에 묻혀 있다가 뒤늦게 1977년에 개봉했다. 감독이 현대적 감각으로 여자의 방황을 추적하고 모든 여자의 운명은 동일하다는 명제를 담고 싶었다고 말하는 <야행>은 실제로 당시의 사회 윤리에 비춰 보면 매우 파격적인 여성의 일탈심리를 추적하고 있다. <야행>의 주인공은 은행에 근무하는 미모의 노처녀 현주이며 그는 월남전에서 전사한 여고시절의 선생이었던 육군소위와 연애한 추억을 갖고 있다. 메마른 나날의 생활을 견디면서 현주는 첫 애인이 묻혀 있는 국립 국군 묘지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서 살면서 늘 여고시절의 첫 사랑을 추억한다. 현주의 생활은 매우 규칙적이다. 낮에는 은행원으로 일하고 일을 끝내고 나면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국립 묘지 앞에 내려 늘 만나는 목석같은 경비원의 곁눈질을 받으며 아파트에 들어가 저녁밥을 짓고 나면 비밀리에 동거중인 직장 동료 박이 술에 취해 들어오고 밤이 느지막해지면 같은 은행에서 근무하며 비밀리에 동거중인 남자 박이 술에 취해 들어오는 식이다.
현주는 어느 순간부터 이런 삶에 의식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다. 집에서는 남자의 성적 도구이고 밖에서는 돈버는 도구인 자신에 대해 혐오를 느끼며 동시에 단조로운 노동을 술로 달래고 모든 여자를 성욕의 대상으로만 대하는 남자들의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휴가를 받은 현주는 고향에 내려가 여고시절을 회상하며 마을의 돈 많은 젊은 사장을 유혹해 몸을 준다. 휴가를 다 채우지 않고 서울에 돌아온 현주는 밤늦게 어두운 뒷골목길을 방황하며 남자들에게 몸을 내맡긴다. 달라진 자신을 향해 결혼하자고 조르는 박과 함께 박의 부모에게 혼인 승낙을 받으러 열차에 몸을 실은 현주는 박이 잠든 틈에 서울로 되돌아온다. 뒤늦게 달려온 박에게 현주는 나의 방황은 끝났다는 내용의 편지를 건네준다. 그리고는 다시 예전의 자기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현주는 과거의 추억에 현재의 삶을 결박한 인물이다. 삶의 순수는 고등학교 때 사랑했던 남자가 죽었을 때 이미 끝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현주의 현재의 삶은, 남자와 사회로부터 도구화될 것을 강요받는 그런 삶이다. 현주는 방황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밟는 타락의 길에 매우 적극적으로 몸을 내맡기는 쪽을 택한다. 한국영화에서 이만큼 공격적으로 여성의 적극적인 반사회적 일탈 심리를 다루려는 시도는 드물었을 것이다. 현주의 삶은 이미 사회에서 타자화돼 있지만 그가 타자화된 자신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동화시키기로 작정했을 때 놀랍게도 사회는 그 자신만큼이나 타자화돼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매일 매일 정해진 일과를 마치고 술과 여자에 대한 욕정으로 탈출구를 찾는 남자들의 삶은 본질적으로 타자화된 현주 자신의 삶과 다를 게 없다. 현주가 육교 위를 서성거리며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볼 때 그의 눈에 비치는 풍경과 사람들은 모두 대지 위에 정착하지 못,한 부유하는 인간들과 신기루처럼 흩어져 있는 추한 사물뿐이다.
김수용은 이 타자화된 자아와 현실의 초상 이면에 희미하게 정치적 함축을 깔아놓는다. 아주 명쾌한 것은 아니지만, 여고시절에 사랑했던 남자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이 있는 국립묘지 근처에서 현주는 오늘의 삶을 산다. 현주가 국립 묘지 근처의 버스 정유장에 내려 흘러내리는 스타킹을 치켜올리면 목석 같은 경비병은 아주 어색하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의 노출된 신체 일부를 훔쳐본다. 균일하게 하나의 삶, 오로지 생산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요구했던 근대화 시기를 배경으로 이 영화는 욕망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통제되고 분출되는 일그러진 모습을 여주인공 현주의 일상과 의식을 통해 파고든다. 실험영화 풍의 거친 편집과 화면 각도로 혼란스럽게 꾸며놓고는 있지만 그것이 당대의 드러나지 않는 비윤리적 일탈의 기운과 조응하는 측면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예상했던 대로 비관적인 분위기로 끝난다. 현주가 방황과 일탈을 통해 얻은 결론은 다시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현재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가 정착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야행>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어둡고 혼란스런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그건 당시 사회의 표정이기도 했다.
3-3. <화려한 외출>
<화려한 외출>의 주인공은 성공한 여성 기업가 공도희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의 성공 사례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 유명인사인 그는 매일 비서들이 짜놓은 일정에 따라 바쁘게 활동하는 대기업 총수이다. 그러나 중년 과부인 공도희는 바쁜 일상 틈틈이 느끼는 성욕의 결핍감에 시달리는 한편으로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는 빨간 옷을 아기님의 환영에 괴로워한다. 공도희가 찾아간 무당은 그 꿈속의 아기가 또 하나의 공도희, 어릴 적 죽은 일란성 쌍둥이의 환영이라고 일러준다. 두 개의 자아의 모티브를 알려주는 이 대목부터 영화는 급격하게 다른 내러티브로 빠져든다. 공도희가 홀로 차를 몰고 도시를 벗어나 어느 한적한 어촌 마을에 이르자 공도희의 차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마구 모여든다. 이곳에서 공도희는 혼란과 경악에 빠진다. 미친 여자가 춤을 추고 돌아다니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공도희에게 이유 없는 적개심을 드러내며 사람들에게 쫓기다 해녀들에게 납치된 공도희는 그녀가 자기 아내라고 주장하는 어느 낙도의 사내에게 팔려 가는 신세가 된다. 그 섬에서 공도희는 용달호라는 이름의 그 사내에게 툭하며 매질을 당하면서도 야성적인 그에게 은근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생활에 적응해간다. <화려한 외출>의 후반부는 용달호의 아이를 밴 채 낙도를 탈출한 공도희가 다시 서울에 오지만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펼쳐진다. 낙담한 공도희가 "나를 찾아줘요. 내 이름은 공도희에요."라고 부르짖으며 그가 회장으로 있었던 빌딩 꼭대기에서 자살 소동을 벌일 때 그 건물 밑에서 취재하던 한 기자가 말한다. "좀 보라고. 뭔가 화려한 것 같잖아. '화려한 외출'이라고 제목을 붙여서 기사를 써." 물론 영화의 결말은 이 모든 것이 공도희가 바닷가에 차를 세워둔 채 잠시 잠이 들었던 사이에 벌어졌던 꿈이었다는 것으로 맺고 있다. 그리고 그는 꿈속에서 본 인물들을 현실에서 평범하게 지나치는 사람들로 다시 조우하는 기이한 상황에 맞닥뜨린다.
당시 하길종은 이 영화를 두고 "일란성 쌍둥이의 문제 같은 어려운 소재를 다룰 것인지, 기계화된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한 현대 여자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존재의미를 묻는 소재를 다룰 것인지를 분명하고 정직하게 선택하지 않았던 연출자의 알쏭달쏭한 태도"를 비판했다. (김기영, 유현목의 영화를 평할 때에 비해 유독 하길종이 김수용의 영화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김수용의 70년대 대표작이라 할 <야행>에 대해서도 그는 "연출자는 의욕을 갖고 실험적인 영상을 선보였지만..."이란 투로 평가를 유보하고 대신 과장된 광고를 조롱하는 평을 실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던 초기작의 실험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거기에 의식의 흐름을 싣는 김수용의 성취와 유사한 점이 있다. 하길종은 김수용 영화의 모더니즘 스타일의 흔적에서 질투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려한 외출>은 일란성 쌍둥이와 현대인의 일상 탈출 욕구 등의 어느 한 쪽으로 저울추를 옮겨야 했던 그런 영화는 아니다. 영화 초반에 암시된 두 개의 자아는 바로 그 시시기, 개발 독재 근대화 시기의 한국인의 초상은 아니었을까. 바닷가에서 공도희가 보게 된 건 아직 근대화 되기 이전의 시기의 한국 사회의 모습, 새마을 운동 이후 야만적이고 추레하며 타기해야 할 것으로 격하된 전통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미친 여자가 뛰어다니며 서구화된 도시 여자를 적개심에 타서 바라보는, 스스로 서구 근대화의 거울에 비춰 타자화 시킨 한국사회의 과거의 모습이다. 영화는 그 시기를 논평하지는 않는다. 공도희가 낙도 마을에 팔려가 노예 같은 삶을 살며 남편과 첩 사이에서 은근한 성적 만족과 굴욕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모습에도 어떤 논평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다만 조금 더 깊숙이 두 시기의 삶의 풍경을 의식의 흐름이라는 틀 아래 겹쳐놓았을 뿐이다. 도회지에서의 세련된 삶과 낙도 마을에서의 가난하고 억눌린 삶 모두 겹쳐지면서 영화는 '화려한 외출'이라고 이름 붙여진, 아직 정착지를 찾지 못한 근대화 이후의 한국사회의 내면 풍경을 중년 여성의 모습을 통해 혼란스런 거울로 비춰 보인 것이다. 가난하고 전근대적인 인습에 쌓인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비극적인 일이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강요받는 현대 대도시 일상의 모습에 행복의 기운이 얹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하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화려한 외출>은 바로 그 어정쩡한 위치에 처한 시대의 단면을 요약한 것이다.
3-4. 모더니즘 이외의 퇴행 흔적들
1970년대에 김수용이 추구한 모더니즘 스타일의 패기는 균일한 성취를 이뤄낸 것은 아니다. 김수용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이 강한 주제나 당대 청년문화의 유행에서 나온 소설을 영화러 연출하는 데는 무기력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김수용 스스로 소설의 이야기 용적을 알맞게 줄였다고 만족감을 표시한 박경리 원작의 <토지>는 적절한 스토리텔링에 대한 강박 때문에 원작에 대한 성실한 복종도, 영화 나름의 스타일 추구도 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 종반에 이르면 일본 식민지 시대를 비판하는 목적영화의 형태로 결말이 망가져 버린다. 주인공인 서희 집안의 몰락과 그 주변인물의 스토리를 유기적으로 연결지으면서 봉건사회에서 일제 식민지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의 징후, 전통적인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필연적인 비극의 징후를 이 영화는 잡아내지 못했다. 원작 소설에 담겨 있는 너무 많은 사건들을 영화는 나열식으로 꿰는데 허둥댄다. 일제 식민지를 비판하는 감상적인 내레이션이 흐르는 후반부에 이르면 이 영화가 한국 문학의 훌륭한 기념비라는 평가를 받는 원작 소설 <토지>와 겨루는 것이 아니라 외화 수입권을 따내는 데 유리한 우수 영화 포상을 노리고 적당한 문학적 향기와 목적 계도 영화를 버무리려한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 시기의 김수용이 드물게 최인호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든 <내 마음의 풍차>도 그가 최인호 세대의 젊은 감성, 하길종이 <바보들의 행진>을 통해 받아들였던 당대 청년 문화의 낭만적이고 자폐적이며 동시에 감각적이고 반항적인 감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억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억눌린 청년의 자폐감과 방황을 탄력 있는 문체로 그려낸 최인호의 감성은 이 영화에 깔려 있지 않다. <내 마음의 풍차>는 원작에 짙게 배어 있었던 서자 의식, 아버지 세대로부터 받은 핏줄을 부정하고 싶으면서도 결국에는 완전히 부정하지 못한 채 소극적인 반항에 그치고 마는, 일종의 유배된 정서의 고독감을 관습적인 이야기로 풀어낸다. 의식의 흐름을 담아내는 데 유능했던 김수용이 왜 이 영화에선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했는지 그것은 수수께끼다. 장년층이었던 그는 청년과 아버지 세대의 대립을 적극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수용이 1970년에 만들었던 영화들 가운데는 <아라비아의 열풍>, <본능>, <가위 바위 보>, <작은 꿈이 꽃필 때>, <여기자 20년> 등 목적 계몽 영화의 성격이 강한 작품도 곧잘 눈에 띈다. 1년에 서 너편의 영화를 찍었던 김수용은 20개 영화사가 매년 각기 4편 이상의 한국 영화를 의무제작해야 한다는 당시 영화제도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였다. 그는 많은 영화를 찍을 수 있었으며 그중 대다수는 외화 수입권을 얻을 수 있는 우수영화 시상을 노리고 제작된 영화였다. 그 가운데는 매우 혼란스러운 영화도 끼어있다. <가위 바위 보>는 베트남 통일 직후 그곳을 탈출해 한국에 온 베트남 난민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나라가 망하면 국민의 행복도 사라지는 것이라는 당시 선전 영화의 틀을 바탕에 깔고 있다. 김수용은 이 관제 선전영화의 의도가 짙은 영화를 네 자매의 성장 영화로, 곧 어머니의 죽음과 네 자매의 이별을 소재로 한 보편적인 성장 영화의 틀로 풀어낸다. 영화의 결말은 국군의 날 행사가 벌어지는 도심에서 생이별을 해야 하는 형제가 마지막 작별을 하고 월남 국기를 들고 뛰어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기이하게도 관제 선전영화의 계도의식보다는 삶의 가혹한 순간에 직면한 아이들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쪽에 연출 무게가 실려 있다.
1970년대의 한국영화는 한국영화 네 편과 외국영화 한 편을 맞바꾸었던 불행한 시대였다. 검열의 통제를 축으로 한 엄격한 영화산업의 관리체제는 문예영화. 우수영화, 반공영화 등의 통조림된 영화를 찍어내도록 유도했고 독과점을 보장받은 영화사는 한국영화 네 편을 의무제작하는 조건으로 외국 영화를 수입해 그것으로 흥행을 꾀했다. 김수용은 그런 의무제작이 관행화된 시대에 예술성과 목적성을 따로 분리해 영화를 뚝딱 찍어내는 기능형 장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회화주의나 분절된 내러티브 스타일의 실험에 대한 곁눈질을 오가는 행보를 밟았다. 특히 김수용의 스타일은 언어의 밀도에 기초한 소설의 내적인 독백이나 의식의 흐름을 영화로 담대하게 옮기는 것에는 꽤 인상적인 성취를 이뤘다. 그 오락가락하는 진동 추 사이에서 그는 여전히 문예영화감독이라는 60년대의 표식을 달고 있었으며 늘 수준작을 만드는 장인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4. 허튼 소리, 희미한 저항정신
김수용이 곧이곧대로 자기의 내부에 숨어있는 현대영화의 감수성을 풀어놓기엔 당시의 한국영화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도 너무 팍팍했을 것이다. 김수용은 항상 가벼운 흥행영화와 작가영화를 병행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김수용적인 것'의 세 번째 갈래에서 우리는 희미하게 나마 당대의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해 발언하려고 하는 영화를 만난다. 이를테면 금보라의 데뷔작이었던 오태석 원작의 <물보라>는 늙은 선주가 지배하는 한 섬을 무대로 선주의 노리개감이었던 한 젊은 여성과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늙은 선주를 비판함으로써 죽음을 맞았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뜻밖에도 복잡하게 펼쳐지는데, 영화 초반에 젊은 여주인공과 동참했다고 너도나도 주장하는 마을 남정네들의 증언을 펼쳐놓고 있는 한편으로 그 애욕의 드라마 뒤에는 마을의 독재자/ 늙은 선주가 조종했던 섬의 질서를 보위하고 권력을 이어받으려는 인간들의 속물심리가 끼어있음을 차근차근 여러 사람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당대 한국 사회의 정세에 대한 간접적인 비유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김수용의 그 시도는 만만치 않은 사회적 저항을 받았다. 대표적인 것이<도시로 간 처녀>였다. "검열에서 제일 많이 다친 영화가 <도시로 간 처녀>다. 나는 김승옥과 변두리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합숙하면서 3달 동안 취재한 끝에 버스 안내양의 삶에 관한 일종의 르포영화를 찍었다. 그때 어느 안내양이 버스회사의 몸수색에 항의해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신문에는 그의 사정이 다 잘려나가고 2단 짜리 기사로만 나왔다. 그래서 나와 김승옥은 우리, 이럴 거면 차라리 신문에 나오지 않는 이 사람들의 삶을 아예 영화로 찍어버리자, 라고 의기투합했다. 사이드 스토리를 재미있게 끌고 간 영화였는데 검열에서 문제가 생겼고 간신히 극장에 걸었을 때는 관제노조에서 사람을 동원해 버스 안내양 300여명이 극장 앞에서 데모를 하고 간판을 끌어내렸다. 당시 아침에 방송되던 모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불쌍한 버스 차장을 돈 몇 푼에 좌우되는 인간들로 묘사하고 그런 얘기를 쓴 몰염치한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그런 역할을 시키려고 여배우들을 카메라 앞에 세운 감독은 각성해야 한다, 라고 했다. 참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았다. 약간은 포기한 심정으로 이만희의 영화 리메이크 작업에 들어갔다. 그게 <만추>다."
목적영화로 찍은 <피에로와 국화>는 북한 지식인을 온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영화의 상당 부분을 재 촬영했으며 이청준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는 동성애를 집어넣었다가 결국 영화화를 포기했다. 비극의 끝은 87년 작품인 <허튼 소리>였다. 중광 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이 영화는 10 여 군데가 잘려나갔고 김수용은 사상을 담은 정당한 표현이라고 주장했으나 "관객은 감독보다 무식하다. 고로 필름을 잘라야 한다"는 당시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의 발언에 항의해 김수용은 자진해서 영화계로부터 물러나는 잠정은퇴의 길을 택했다. 그 뒤 정도상의 <아메리칸 드림>을 영화로만들 계획도 세웠으나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의 만류로 포기했다고 김수용은 회고했다. "80년대에는 내 영화가 거의 흥행이 좋지 않았다. 내 생각과 관객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 또 나는 무모하게 새로운 것에 도전했다. 너무 빨리."
5. 드러나지 않은 향기, 침향
90년대 이후에 김수용은 단지 두 편의 영화를 찍었을 뿐이다. <사랑의 묵시록>은 일본 재일교포의 자본으로 찍은, 목포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던 한 일본인 여성의 삶을 다룬 전기영화다. 그리고 김수용은 99년에 <침향>을 찍었다. "영화의 참 맛을 보여주겠다"고 김수용이 의욕을 보였던 이 영화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비 지원을 받아 악전고투 끝에 완성했으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김수용 영화의 장단점이 고루 묻어 있다.
맑은 강물이나 땅 속에 오랫동안 묻어둔 참나무를 적당한 바람과 빛에 말렸을 때 얻는 그윽한 향기가 침향이다. 속도전에 휘말려 모든 것이 휘발돼 버리는 세상에서 <침향>은 제목 그대로 자연과 인간의 깊은 향기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소설가이자 카레이서인 주인공 찬우가 속세와 격절된 산 속의 절 대흥사 옆의 여관에서 지경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여인을 만나 느낀 것이 바로 그 침향이었다. 비극적인 과거를 안고 살며 나이 많은 산장 주인의 둘째 마누라가 되어 속절없이 아기 낳기만을 기다리는 그녀와의 만남에서 찬우는 그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욕망을 만난다. 군에서 막 제대한 찬우는 입대 전에 관계했던 창녀 선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이 그녀가 자신에게 유언으로 남긴, 유골을 뿌려 달라는 그녀의 생전 소원을 풀어 주기 위해 그곳 대흥사에 온다. 찬우가 진경에게서 본 것은 바로 죽은 선희의 그림자이며 그녀에게서 느꼈던 욕망이며 세속잡사를 초월해 바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 같은 초월적인 자태에서 느끼는 끌림이다. 현실의 시간과 공간과 격절된 이 초현실적인 곳에서 느끼는 냄새, 그것이 침향이다. 그것은 번잡스럽고 고정된 우리 일상에선 결코 접촉할 수 없는 경지일 것이다.
<침향>의 이미지는 관광엽서나 광고화면의 예쁜 치장에 익숙한 감성으로도 탄복할 수 있는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그것은 오랜 체험에서 훈련된 직관으로만이 찰나를 고정시킬 수 있는 장인의 역량으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미 1960년대부터 이미지로 영화를 장악했던 노 감독은 부질없이 스토리 텔링에 매달리려는 몸짓을 취한다. <침향>은 침묵이 필요한 순간에도, 이미지의 카리스마로 압도할 수 있는 순간에도, 관객이 이야기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지나치게 배려하는 연출 계산에서 쉴새 없이 대사가 깔린다. 대사를 통한 설명, 이야기에의 강박감은 김수용의 장기가 아니었다.
원래 예정됐던 각본에 완성된 영화는 몇 가지 요소를 첨가했다. 소설가였던 주인공 찬우는 소설가이자 카레이서로 설정이 바뀌었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주는, 뭔가 불가해한 일에 맞닥뜨릴 수도 있는 예술가라는 설정에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의 삶에 걸맞는 새로운 직업이 추가된 것이다. 카레이서로서 그가 느끼는 속도와 나중에 시골 절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다르다. 그 대비되는 속도관념은 입대 전에 관계했던 창녀 선희의 죽음을 계기로 찬우가 선희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절 대홍사로 향하는 설정과 잘 어울린다. 또, 거기서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성적 욕망의 우여곡절을 겪는 전개와도 잘 들어맞는다. 요컨대 이 영화는 현실의 시간을 넘어서서 관념의 시간, 어떤 다른 시간대로 진입하는 낯설고 초월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높은 관념에 비해 영화는 몇 개의 맞물리지 않는 조각으로 나뉘어 버렸다.
신비한 화면의 풍광은 종종 감정 몰입을 방해하는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와 설명조의 대사 때문에 흥이 깨진다. 영화는 물리적인 재현을 거쳐야 하는 그 번거로운 과정을 돌파하지 못했다. 특히 화면에 신비하고 초월적인 기운을 띠어야 할 배우들의 카리스마가 모자라는 것이다. 차라리 죽은 창녀 선희 역의 이정현이 1인 2역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지나간 것은 부질없다. 영화 <침향>의 전제처럼 지나간 것은 그저 처연할 뿐이고 우리는 이제 이 노감독이 다시 침향을 찾아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6. 다시 침향을 찾아서
문예영화의 전성기를 탔던 60년대, 영화사에서 의뢰 받은 의무 제작의 수혜자였던 한편으로 실험적인 모더니즘 영화를 추구했던 70년대, 그리고 사회 비판 영화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80년대를 거치는 동안 김수용은 꾸준히 많은 영화를 찍었다. "영화를 많이 한 게 결코 자랑은 아니다. 자기 경력 관리에는 치명적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어디 스튜디오에 소속되지 않은 감독들에게 충무로의 영세자본 제작자들이 달려들었다. 난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 거절을 못했다. 저 사람 잡으면 기한 내에 영화 나오고 제작비 초과 안 하고 그러면서 흥행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를 많이 만든 해에 오히려 작품이 더 괜찮았다는 것이다. 67년 <안개>, <까치소리>, <만선>을 했는데 수준이 다 괜찮았다. 왜? 같은 스탭으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영화를 찍었으니까. 정신력과 조직력이 좋았다. 영화에 대한 연구와 팀워크가 중요하지 시간이 많다고 좋은 건 아니다. 물론 변명하고 싶진 않지만."
김수용은 스스로 58년부터 2000년까지 40 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영화를 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영화에 대한 감을 놓치지 않고 지키려 늘 애썼다. 이런 것 안 했으면 하는 작품은 물론 있다. 그래도 용서하는 게 그걸 통해서 영화에 대한 확신을 잡았기 때문이다." 김수용은 관객 취향에 맞는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원칙이 몸에 배어 있다. 80년대의 사회파 영화는 아마도 당시의 그런 시류를 그가 본능적으로 받아들여 이해했지만 영화적 숙성에는 실패했던 것의 반증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외국 문물의 영향을 받아 변해 가는 사람들의 얘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얘기"를 찍었다. 김수용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어법과 반영적인 모더니즘 스타일을 오가면서 전통과 근대화의 충돌 사이에서 표류한 인간들의 초상이 있었다. 개발 독재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제도가 한국영화에 요구한 것은 근대화에의 의지였지만 김수용은 문예영화와 목적영화와 계몽영화를 두루 만들면서 어떤 식으로든 근대화에의 국가적 의지가 억눌렀던 개인의 삶의 불안한 실존적 틈을 잡아蒁려 애썼다. 그 틈이 풍요롭게 벌려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지만 그 틈 사이에서 말할 것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