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빛나는 보도(步道)를 걸어간다. 신년 미사에 가는 길이다.
새로 깐 보도블록 위에 절묘한 각도로 비춰 반사하는 햇빛이 밤하늘의 별들을 데리고 온 듯 반짝인다. 걷는 사람의 기분을 개선장군처럼 달뜨게 한다. 겨울 벚나무들이 보도 왼쪽에 줄을 섰다. 지난 성탄 날은 건물 사이를 빠져나온 된바람이 앙상한 가지를 휘돌아 내려와 걷는 다리를 사정없이 훑었었다. 한데, 오늘은 춥지도 않고 바람도 안 분다.
새해 첫날이 또 다가왔다. 해마다 벽두가 오면 올핸 무엇, 무엇을 잘하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작심 3일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었다. 늘 현실은 어쩔 수 없다고 자기 합리화 변명을 앞세우며 살아온 것이다. 어떤 해는 새해 계획을 의도적으로 안 해도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자기를 이겨내는 길이 곧 성공’이란 선인들의 통찰은 진실이었다. 벚나무들은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려고 저렇게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온몸으로 당당히 맞서는데, 사람인 나는 해마다 따뜻한 겨울옷을 입으며 살아왔다.
지난해 11월 하순. 주일미사 길에 만났던 이곳은 꼭, 사람의 황혼길 같은 모습을 연출했었다. 낙엽 지는 벚나무들이 도시 분위기를 압도하였다. 어떤 나무는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았고, 어느 나무는 절반쯤 낙엽 졌으며, 어떤 것은 삼 분지 일정도 떨어졌고, 다른 나무는 이제 단풍 들기 시작하기도 했었다. 그 모양이 사람 사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미 세상 떠난 이, 아직 일하는 사람, 외톨이 노년을 사는 친구, 그리고 소식도 모르는 이들….
보도에 떨어진 낙엽은 거의 노랗거나, 붉거나, 밤색이었다. 저쪽에서 한 중년 남자가 긴 빗자루로 자기 가게 앞 인도(人道)의 낙엽을 쓸었다. 속으로 ‘다 떨어질 때까지 놔두면 늦가을이 더 아름다울 텐데’하고 오래전부터 가졌던 생각이 떠올랐다. 아내가 “수고하십니다!”하고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그저 묵묵히 낙엽을 쓸 뿐이었다. 사람의 삶도 저 단풍 들어 낙엽 지는 잎들처럼 서로 다르지만, 시간이란 빗자루는 말없이 너와 나 그리고 모든 존재를 언제나 쓸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 저렸다.
그날 미사 강론 때 사제가, “여러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라고 신자들에게 물었다. 들은 적은 있는데, 오래되어선지 라틴어이기 때문인지 언뜻 뜻이 떠오르지 않았다. 옆 사람들도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제는 그 뜻과 역사적 배경, 신앙에 관련되는 내용 등을 설명했다. 강론을 들으며 희미한 옛 기억이 살아나기도 했다.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다. 고대 로마에서 개선장군이 시가행진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한 말이다. 승리감에 취해 돌아오는 장군에게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겼다고 우쭐대지 마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라.' 는 뜻에서 쓴 말이다. 위령성월(慰靈聖月)을 보내는 우리도, 죽음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기억하자고 사제는 말을 맺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보통 사람인 내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토가 사람, 그것도 대부분이 젊은 군인들의 목숨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또, 공산주의 체제를 버린 러시아라면, 나토와 국경선을 맞대는 것이 어찌 그리도 싫은 걸까.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헤아릴 수 없는 점은 매한가지다. 역사를 소급해 보면 이복형제간에 무엇이 뒤틀린 걸까. 도대체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왜 사람 목숨을 파리의 그것보다 가벼이 여길까.
지구촌은 지금 메멘토 모리를 잊었거나, 내다 버린 듯하다. 유사 이래, 권력자들의 욕심이 벌여온 전쟁에 무고하고 존엄한 생명들이 부지기수 희생되니 말이다.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의 삶이 어째서, 낙엽 지는 가로수의 삶보다 못하게 보일까. 가로수와 낙엽들은 자연의 섭리대로 사는데, 인간은 어찌 그러지 못하는가. 로마 시대의 지성(知性)이 창안했을 ‘메멘토 모리의 정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생각해 보면, 삶은 죽음이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과정이다. 죽지 않는 삶은 없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삶의 목적은 죽음이다. 한발 더 나아가 살펴보면 소름 돋는 삶의 현장과 맞닥뜨린다. 지구별의 모든 삶은, 다른 존재를 먹어야 산다는 끔찍한 사실이다. 만물의 영장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왜 ‘성체성사’를 제자들의 사명으로 남겼을까. 한 생명이 죽어 밥이 되면, 그는 다른 생명을 살리고 먹은 자의 삶으로 부활하는 진리를 품고 있는 전례(典禮)이기 때문이리라.
새해 첫날, 미사에 가면서 앙상한 나뭇가지와 보도에 별처럼 반짝이는 빛에서 불현듯 메멘토 모리가 생각났다. 나이가 드니,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생사불이(生死不二)를 제대로 알아간다는 건가.
아마도 하늘나라엔, 영혼들이 별들처럼 빛나고 있을 테지.
- <에세이21) 2025. 봄호 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