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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새끼들! 조준사격 안 하냐
증 언 자 : 곽형렬(남)
생년월일 : 1959. 1. 31(당시 나이 21세)
직 업 : 의무전경(현재 교사)
조사일시 : 1989. 7-
개요
제2기동대 전투경찰로서 5월 16일 횃불시위 때부터 시위진압에 투여, 18일 시위가 일어난 곳곳에서 진압을 함은 물론 21일 집단발포 순간을 자세히 목격했다. 전경의 입장에서 바라본 광주민중항쟁과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증언이다.
전경으로 지원하다
나는 고흥군 남양면에서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학교가 멀어서 마을회관에 군용천막을 쳐놓고 책상도 없이 마대 위에 앉아 공부했다. 아버지가 교사라면 시골에서는 유지에 속했기 때문에 나는 마을 애들과 놀때도 조심스럽게 놀아야 했다. 애들과 싸움이라도 해서 누구를 때리기라도 하면 나는 아버지에게 종아리에 매 자국이 나도록 맞아야 했다. 그때 아버지는 피멍이든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면서 말씀하셨다. "너는 선생의 아들이니까 될 수 있으면 남을 때리는 입장이 되지 말고 그냥 두들겨 맞아라."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부정적인 말들을 많이 들으면서 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내성적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내성적인 내 성격을 고쳐보려고 서클생활도 열심히 일하고 대학신문사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그때가지만 해도 특별히 의식은 없었고 또 시위도 거의 없었다. 전경에 지원하게된 동기도 아주 단순했다. 전경생활을 하면 현역 군복무보다 시간이 많다는 것 때문이었다. 해안초소 근무나 검문소에서 나름대로 시간을 활용해서 자신 없는 영어를 그 기회에 마스터해 보자는 욕심에서였던 것이다. 훈련을 마친 다음 강진군 성전면 소재지에서 1촌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705대대에 배치를 받았다. 그곳에서 2주동안 신병교육을 받았다. 그 후 완도군 신지초소에 배치받았다. 1979년 10월 703대대 기동타격 대대원이 되었다. 기동타격대는 원래 간첩이 나타날 때 맨 먼저 출동하는 부대로서 중대병력들이 4개월씩 교대로 근무했다. 그런데 나는 기동타격대원이 된 얼마 후 10·26이 일어나 교체되지 못한 채 고생을 많이 했다.
전남 도경찰국 2기동대로
1979년 10월 26일 아침이었다. 그때가지만 해도 졸병이어서 배식을 받기 위해 취사장으로 갔을 때였다. 동기 김진규가 말했다. "박대통령이 죽었대." "무슨 소리를 하냐?" "라디오를 들었어." 그때 내무반에는 라디오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 그 사실을 들은 후에도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이 죽었어도 부대내에 조기가 게양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보고 상급자들도 의식이 있었던 모양이 라고 생각했다.그 후로 경찰들에게 '진도개' 발영이 내려 5분대기조를 만들어 완전군장에 전투복을 입고 며칠 동안 대기했다. 외출이나 휴가도 통제되었고 추운 겨울에도 연병장에서 눈바람을 맞으면서 태권도 연습을 했다. 11월 3일 완도 소철산에 중계소를 만든다고 파견을 나갔다가 다시 1980년 4월 10일경 광주에 있는 2기동대로 발령이 났다. 타격 대와는 달리 기동대는 맞지 않아서 참 편했다. 1980년 5월 접어들어 사회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지고 시위가 일어나자 전남대와 조선대에 출동을 나갔다. 분대장들은 순경이었다. 전남대로 진압을 나갔을 때였다. 박관현씨가 열변을 토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데모대열에서 하얀 고무신을 신은 대학생이 걸어와 대대장 앞에 섰다. "안녕 하십니까?' "이 새끼 제대하고 가서도 데모를 하냐?"그런 후 대학생은 되돌아가 데모대열에 합류했다. 5월 13일즘엔 전남대 후문에서 충돌이 한 번 있었다. 지금의 북구청과 전남대 운동장 사이에 있는 담벽이 허물어져 있어서 벽돌이 많았다. 학생들과 투석전이 벌어져 수위실 위 옥상에서 던진 돌에 대원이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
비상계엄 확대조치
5월 16일 횃불시위 때는 시내에 굉장히 많은 시위대가 몰려왔다. 도청 앞 분수대에서 재수생을 대표한 젊은이가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시위가 끝나고 횃불행진을 할 때 우리 부대는 양동 복개상가에서 광주천을 거쳐 도청으로 돌아오는 시위대 옆에 서서 함께 갔다.17일은 시위가 없었다. 전남대 교수들이 그동안 경찰이 고생이 많았다고 성금 10만원을 보내왔다고 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돌아가는 속에서 부대내 방송이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특박을 보내준다고 갈 사람은 신청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부대원의 3분의 1 정도가 1박 2일 특박을 나갔다. 그것은 곧 경찰들 정보로는 적어도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대한 예상이 없었기 때문일거라 생각된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자다 근무 설 시간이 되어 34시경에 일어났다. 그리고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선포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근무를 서고들어온 시간이었는지 시간이 확실치 않지만 특박을 나갔던 부대원 한 명이 상당히 흥분된 상태로 들어왔다. 그리고 옷을 벗어제쳤다. 등에 몽둥이 자국이 2줄기나 선명하게 나 있었다. "지금 시내에는 공수부대가 확 깔려 있다. 술 한잔하고 있는데 공수부대 놈들이 젊은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두들기더라. 나는 군복을 입고 있어서 괜찮을려니 했는데 나도 이렇게 때려 맞았다.그는 특박을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두들겨맞고 화가 나서 부대로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굉장히 살벌하게 돌아가는 모양이라고 여기고 잠을 잤다.
나한데 총을 준다면
18일에는 아침을 먹자마자 출동을 한 것이 전남대 정문 앞이었다. 몇 시경이었는지 기억이 없지만 그때는 이미 투석전이 벌어진 후여서 정문 앞에는 돌들이 깔려 있었고, 공수들만 몇 명 서 있는 상태로 학생들은 없었다. 우리는 산수동 쪽으로 갔다가 처음으로 시위군중들과 충돌하였다. 부대윈이 모두 출동하여 150명 정도였으나 학생들은 흥분된 상태이긴 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최루가스를 분사하는데 방독면을 처음 써보았던 나는 잘못 써서 가스를 마셔버렸다. 그래서 뒤로 물러서서 다시 고쳐 썼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학생들을 연행하지는 않았고 가스를 분사시키는 것만으로 금방 해산시킬 수 있었다. 그다음 간 곳이 조선대 앞이었다. 조선대생들과 조선대 공전생들이 길 양옆으로 나오고 있었다. 대장은 될 수 있으면 페퍼포그로 가스를 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연기만 품어댔는데 가스인 줄 알고 흩어져버렸다. 나중에 가스가 아닌 줄 알고 다시 되돌아오는 학생들도 있어지만. 오후 2시경에는 금남로로 갔다.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들이 밀고 당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통합병원 경찰학교의 1기동대와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창설된 상무관에 있는 3기동대와 합류했다.
그리하여 1개 중대씩 전면에 서서 차단을 하면 뒤에서 2개 중대는 쉬는 형태를 취했는데 밀고 당기는 시간이 초래되었다. 그때 유동 삼거리 쪽에서 공수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밀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위군중들이 끝도 없이 맡아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는데 그때 심정으로는 공수들이 와준 것이 고마웠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자 시위군중들이 일시적으로 흩어져 우리는 중앙로의 골재들이 깔려 있는 곳에 앉아 빵으로나마 점심을 때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본 공수들의 시위진압 방법은 전경들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전경들은 시위진압을 할 때 절대로 개별행동은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중대단위로 대열을 지어 위협을 주고 대열을 지어 물러서고 하는 게 수칙인데 비해 공수들은 산개해서 개별행동하는 것이 인정되는 모양이었다.장갑차를 앞세우고 양옆 뒤로 산개를 해서 철사로 역어 얼굴을 가린 헬맷을 살고 봉을 머리 앞으로 세운 채 시위 군중들이 돌을 던지거나 말거나 앞으로 전진을 했다. 그리고 일제히 앞으로 달려갔다. 시위군중들이 도망을 가면 건물 속에까지 따라갔다. 그래서 시위군중을 쫓아가 잡으면 일단 참나무 봉이나 군화발로 앞정강이를 차 버렸다.
그러면 대변에 앞으로 거꾸러져 버렸다. 공수들이 가진 봉은 경찰봉과는 달랐다. 공수의 봉은 참나무로 만든 봉으로 빨래 방망이보다 더 길었고 강도도 세서 그것으로 한번 맞으면 머리가 터져버릴 정도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을 팬티만 입힌 채 군트럭에 원산폭격을 시켜놓는 등 공수가 진압하는 상황을 보면서 우리끼리 한 이야기가 있었다. "나한테 총을 준다면 절대로 광주 시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는 못하겠다." 더욱이 우리 전경들은 연고지 배출이었기 때문에 98퍼센트가 전라도 출신이고 대학 재학중인 사람들이 많아 진압을 하러 나가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공수부대와 전경들이 합동진압을 할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전경들이 뒤쪽에 있었다. 그래서 공수들이 착검을 한총을 '우로비껴총'을 하고 뛰어다니는 것은 보았지만 대검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은 보지 못했다. 밤이 되면서부터는 시위가 뜸해지고 쉽게 끝났다. 통금시간이 가까어졌는데도 외지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광주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사인을 해주어 무사히 귀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등학생들의 시위
19일 상황은 조금 지루했다. 오전 상황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억이 없고 오후에 대동고등학교로 출동했다.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고 연락이 온 모양인데 고등학교로 출동한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대동고 앞 소나무가 있는 작은 동산의 어떤 묘소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노랫소리도 들리고 교사들 몇몇이 서 있는 것이 멀리 보이기도 했다. 대장이 우리에게 지시했다. "만약 충돌하게 되면 고등학생들이니까 절대 때리지 말도록 그리고 명령 없이 절대 가스도 뿌리지 말도록." 그곳에서 우리는 빵과 우유로 간식을 먹었다. 개인당 1천5 백원의 식비가 나왔으므로 단체로 어디에선가 구입해왔다. 한참 후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오지 않아 별다른 상황이없었으므로 우리는 차에 올랐다. 나는 어디로 가는 줄도 몰랐는데 차 안에서 동료들이 송정리 광산여고에서도 데모를 하고 있어서 그곳으로 간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광산여고에서는 노래를 부른다거나 시위하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린 다시 시내 쪽으로 왔다. MBC방송국 앞을 지나오는데 MBC방송국 건물이 그을려 있었다. 그러한 것을 보면서 도청 앞으로 왔을 때 그전까지는 사용되지 않았던 분말가스가 뿌려져 있었다. 그것을 본 우리는 차 안에서 방독면을 착용했다. 18일보다는 시위군중수가 더 불어나서 11시경까지 전일빌딩 앞에 앉아 있다가 귀대했다. 광주역 앞에 왔을 때 갑자기 차가 멈추었다. 기동대는 항상 출동을 할 때 기동대 대장이 탄 백차가 앞장을 서고 그다음이 가스분사기 그러고 그다음이 기동대 병력을 실은 3대의 버스였다. 앞에서 백차가 서니까 자연히 멈추게 된 것이었는데 광주역 광장에 30∼50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해 있었다. 시민들은 새기줄이나 갈쿠리 등이 달린 기다란 작대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경찰마크가 새겨진 울의를 입펏 차에서 내리자 대장이 "저놈들 잡아라"고 명령을 내렸다. 경찰들이 쫓아가자 시민들이 흩어져 역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역 안까지 쫓아갔다가 나와보니 20여 명 남짓 잡혀 있었다. 그들은 허리를 푹 숙이고 떡 앞에 앉아 있었다. 언뜻 보고 나는 그들이 죽어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 기동대원중 한 명이 경팔봉을 들고 서서 "고개 들면 죽여버린다"고 위협을 하고 있었다. 무전기로 연락을 해 두었는지 형사기동대 버스가 금방와서 시민들을 인솔해 갔다. 그곳에서 바로 귀대를 했다.
식사당번으로
20일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친 다음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밥을 먹을 때는 개인적으로 배식을 받지만 먹고 난 다음에는 소대별로 식사당번이 있어서 식기를 씻는다. 주로 식사당번은 졸병들이 맡았으므로 나도 식기를 씻고 돌아왔다. 대원들은 이미 방석복을 입고 그다음 전경복을 입고 머리에 헬맷을 쓰는 등 옷 입고 장비 챙기는 동작이 거의 끝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무반에 한 명씩 대기하고 감시하는 식사당번으로 남게 되었다. 우리 전경들의 개인장비는 개인에게 분배되어 있었지만 가스탄이나 사과탄은 소대장이나 분대장이 관리하고 있어서 나는 거의 사과탄이나 가스탄은 만져보지도 못했다. 다만 페퍼포그와 총 끝에 캔으로 된 것을 끼워놓고 공중을 향해 쏘아 시위군중들 머리의 5미터 이상의 상공에서 터지도록 하는 FM은 사용해 보았다. 요즈음 말하는 직격탄은 그 FM을 상공에 쏘지 않고 사람을 향해 직접 쏘도록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 그러한 장비들을 모두 챙겨 대원들이 출동한 다음 나는취사장에서 아줌마들이 해준 대원들의 점심밥을 싣고 11시경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시위군중들이 엄청나게 많아 도청주변의 길은 전부 막혀 있었다. 광주천 옆으로 빠져 수협 앞길로 간신히 들어왔지만 대원들이 식사를하고 난 후에는 빠져나가지 못했다. 나는 시위진압군이 아니었으므로 무전기 하나를 들고 돌아다녔다. 무전기에서는 택시 3백대가 트렁크에 돌을 가득 싣고 들어온다는 등 잡다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내가 있는 곳은 도청과 상무관 사이여서 그 밖의 지역에서 일어난 일은 잘 모르겠다. 저녁때쯤 되어 내가 전에 있었던 타격대 병력들이 올라 왔다. 서치라이트를 켜고 있었는데 다 온게 아니고 일개 분대만 왔다고 했다. 몇 시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사고가 발생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경찰병력과 서에서 올라온 직원들이 남도예술회관 앞에서 전면에는 전경들이 서있고 뒤쪽에는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위대 버스가 들어온 것이다. 결국앞에서 있던 전경들은 양옆으로 피해 버리고 앉아 있던 경찰들이 차에 깔려버렸다. 나는 뒤쪽에 앉아 있어서 혈장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2구의 시체를 보았다. 그 시체는 밤늦은 시각까지도 상무관 앞에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3기동대 소속인 병력이 몇 명 정도 남아 있어서 그들에게,"동료들이 죽었는데 이대로 놔둘 수 있느냐 모포라도 가져다가 덮어주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방독면이 없었으므로 가스 때문에 아주 곤경을 치렀다. 누군가가 가스는 3층 이상 안 올라간다고 말해주어 상무관 옥상으로 올라갔지만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운전병과 둘이 트럭 안에 앉아 있기도 했다. 트럭 안에서 밤을 지새우는데 새벽가지 전옥주(그때는 이름을 몰랐음) 씨의 가두방송이 가슴을 치렁치렁 울렸다."광주 시민들이여! 우리의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우리 모두 힘을 합하여 공수들을 몰아냅시다."
집단발포 상촹
21일 상황은 헬기에서 선무방송을 하는데 전남 밤에 들었던 전옥주씨의 음성 같았다."광주 시민들이여! 자제해 주십시오." 정말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었다. 도청 안에서 청바지 입은 여자 3명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도청 건물의 민원봉사실 앞에 서 있다가 집단발포순간을 목격했다. 시위군중들이 YMCA 앞에까지 왔고 공수부대와의 간격은 공수들이 서 있으면 시민들은 발밑에 앉아 있을 정도로 가깝게 있었다. 그때 군중들 사이에서 태극기를 단 차량들이 라이트를 켜고 공수부대가 있는 쪽으로 더 밀고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고 밀리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군중들 뒤쪽에서 더 밀고 들어가자고 했는지 차량들이 다시 앞으로 돌진해 옴과 동시에 애국가가 울러퍼졌다. 그 순간 나는 순진한 생각으로 '애국가가 울러퍼지면 모두들 부동자세를 취하니까 흥분되어 있는 시민들을 잠시 멈추게 하려고 애국가를 울리는 모양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동시다발적으로 총성이 울렸다.공수와 시민들이 서로 배를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차량이 들어오니까 공수들이 물러나면서 총을 쏜 것이다. 일단 동시다발적인 총소리는 조준사격이 아니라 공포였다. 공중을 향해서 쏘니까 실탄이 아스팔트 위에 툭툭 떨어지고 도청 분수대 주변에 연기가 자욱한 것이 보였다. 실탄은 별로 많이 지급이 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포를 쏘고 난 다음 장갑차 한 대가 노동청을 향해 서 있었는데 내가 서 있는 곳과는 직선거리 10미터도 못 되어 장갑차 안에서 한창이 꼽혀진 띠를 공수들에게 던져주고 또 탄박스를 내려주는 것을 훤히 볼 수 있었다. 공수들은 탄박스를 받아 탄창에 실탄을 기웠다. 장교인 듯한 사람이 공수들을 보고 소리쳤다. "이 개새끼들! 조준사격 안 하냐?"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계급장을 확인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공수들은 실지 장교인지 사병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공수들은 그때부터 도청 앞에 돌로 난간을 만들어놓은 곳에 길어 조준사격을 하기시작했다. '무릎앉아쏴,''서서쏴' 자세를 취하고 총을 쏘는 공수들도 있었다. 만약 시민들이 총을 들었다면 어떻게 광장에서 공수들이 산개를 해서 총을 쏠 수 있었겠는가. 장갑차에서도 사격을 했다.
우리 전경들은 그 총을 사용해 보지 못했는데 캐리버 50이었을 것이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아니라 손잡이 같은 것을 당겼다. 장갑차 위에 총이 달려 있었는데 시위군중들이 있는 노동청과의 거리는 1백미터도 채 못 되었다. 다연발 총으로 쏘아 한 사람이 푹 쓰러지고 나면 사람들이 흩어졌다. 사람들이 불과 몇분 만에 다시 모여 시체을 떼메고 가고 나면 또 모이고 그러면 또 한 사람이 푹 쓰러지고 그러한 것을 세 번이나 보았다. 그곳으로 다시 오면 분명히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모여들고 또 모여들고 하는 것이 꼭 불을 찾는 불나방들 같았다. 나는 그러한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국회 청문회에서 도청 앞 발포상황을 증언한다고 하기에 나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증언을 바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총소리가 나니까 모두 흩어져버렸던 사람들이 어떻게 증언을 할 수 있겠는가. 그때 노동청 앞쪽에 대기중이던 경찰병력도 총소리가 나자 도청 안으로 들어가버렸는데...... 나도 아쉬운 것은 부분적인 것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것이 발포신호였다고 하면서 왜 그것에만 멈춰 버리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도청 안에서 애국가를 내보낸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도청직원 아니면 다른 누군가였을텐데 그 사람을 찾아내어 물어보면 누가 애국가를 내보내라고 했는지 나올 텐데 왜 그것은 안 짚고 넘어가는지 말이다. 그리고 국회 증언에서는 헬기로 31사단 병력은 철수했다고 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도청 정문 앞에서 바로 카빈 총을 싣고 갔다. 당시 카빈은 경찰이나 예비군만 가지고 있었고 31사단 병력도 카빈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도청안에 있는 카빈총을 싣고 나간 것을 보면 그때부터 도청 철수를 준비했던 것 같다. 김영택 기자는 M16이 아닌 카빈 총소리가 먼저 났다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듣지 못했고 내가 본 것도 부분이기 때문에 무엇이 먼저이고 나중인지는 기억할 수 없다. 다만 동시다발적으로 총소리가 났다는 것밖에는 모른다.
해산명령이 내리고
그러한 상황을 한참 지켜보다가 경찰병력들이 하나도 없어서 나도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들은 도청 안의 경찰국과 농림국 사이의 테니스장 알에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김밥을 받아 먹었다. 김밥은 광산경찰서에서 만드러 헬기로 날라왔다고 했다. 그 후 몇 시인지 모르지만 대장이 우리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 광주가 집인 사람은 집으로 들어가고, 광주에 집이없는 사람은 31사단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해산명령을 내리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전남대병원 옥상에 LMG가 설치되어 있어서 상당히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해산명령이 떨어지자 우리는 도청 뒷담을 넘어서 골목골목으로 흩어졌다. 나는 유류고를 넘었다. 가정집이 나왔다. 그 집 사람들도 모두 도망가 버리고 텅 비어 있었다. 그 집으로 들어온 부대원들은 장농이고 뭐고 다 열어젖히고 사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나는 동기 하나와 함께 아래채 여자 방이었던 곳으로 들어가 호기심에 문갑을 열어보기도 했는데 그렇게 부자로 살고 있는 집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거북선 담배 2갑도 꺼내들고 나왔다.
그런데 다른부대원들은 여자 슬리퍼까지 다 끌고 가고 심지어 고등학교 2년 선배였던 사람은 여자 드레스를 입고 나갔다. 나와 동기는 맨 마지막으로 그 집을 빠져나왔다. 나는 남자 겨울 잠바를 하나 걸쳤는데 그 집 식구들이 체구가 크지 않았는지 기장이 형편없이 짧았다. 동기는 키가 커서 맞는 옷이 없어 그냥 나왔지만 부대 원들이 벗어던지고 간 군화 중에서 좁은 것을 골라 신고나왔다. 도청에서 양영학원으로 나오는 골목에서 구교육위원회 앞가지 오는 도중 총을 쏠까봐 담벽에 한참씩 붙어 있다가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뛰었다.
그러나 여유를 가지고 걸어도 누가 "저 나쁜 놈 잡아라"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광주 시민들에게 경찰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알았기 때문이다. 공수들이 너무 설쳐버리니가 경찰들은 그들에 비하며 신사였던 것이다. 동기와 내가 계속 걷고 있는데 장동 하천가에서 아줌마 한 분이 우리의 행색을 보고 그렇게 해가지고 어디를 가려고 그러느냐고 하면서 들어오라고 했다. 내가 생각해봐도 군화에 군복 바지를 그대로 입고 잠바만 걸친 폼이 웃겼다. 그 아줌마가 준 옷으로 갈아입고 농장다리를 거쳐 산수동에 있는 동기 누나 집으로 들어갔다. 그 누나는 걱정만 하고 있다가 우리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녁을 먹은 우리들은 집 밖으로 못나가게 하는 누나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젊은 놈들이 집에만 있다는 것이 답답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동네 안 슈퍼마켓에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카빈 소총을 들고 다니면서 암호를 가르쳐 주었다는 이야기였다. 한 사람이 오더니 말했다. "나도 엊그제께가지만 해도 전경 이었는디." "우리도 전경입니다‥‥‥" 고생이 정말 많았겠네요 나는 지금 동신여고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맥주를 사주었다. 나는 동기 누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우리 집으로 가기 위해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를 가느냐고 말렸지만 실지 나는 입대한 다음에 이사를 했기 때문에 집이 어딘지도 정확히 몰랐다.산수동 오거리에서 산수동 부녀회원들이 밥을 해놓고 지나간 시위차량에 올려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위차량에 시민군들이 타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계속 걸어서 백림약국 쪽으로 오는데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싣고 가고 있었다. 주위에서 있는 사람들이 "이럴 때 죽으면 개죽음이여" 하면서 수군거렸다. 그러나 내가 죽은 사람의 친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병환으로 죽은 모양이었다. 상황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계엄군에게 죽은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골목으로 가면 더 위험할 것 같아 큰길로만 걸었다. 신안동 천변에 왔을 대 지프차가 한 대 처박혀 있었고 운암동 구름다리 건너에도 8∼12톤 트럭 2대가 불타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모두 경상도 차량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AP통신 기자가 취재를 하고 다니는 모습도 보았다. 이 북새통 같은 살벌한 속에서도 취재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이 기자인 모양이 라고 생각했다.
해산
집에 도착해 보니 동생들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장로 취임 때문에 고흥에 가셨다는데 화순 쪽으로 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내려온 고모,고모부와 함께 택시로 담양 쪽으로 빠져 순천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기동대에 있는 아들 걱정 때문에 입술이 다 탄 상태에서 장로취임을 하신 것이다. 5월 27일 이전에 동기와 숨어서 부대에 한번 가보았다. 운암동쪽 논길로 갔는데 기동대 안에 거주하던 민가의 아줌마,아저씨가 손을 잡고 반가워 하셨다. 그리고 빵과 음료수를 돈도 안 받고 주셨다. 그들은 시위군중들이 부대에 들어왔는데 아무 일 없었고 도로공사에서만 차를 몇 대 가져갔다고 한다. 동기와 나는 직접 부대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침상 위에는 발자국이 많았고 기타 등이 깨져 있었다. 부대에 하나씩 있던 탄피가 없어져 있었다. 또 참호를 파고 Y자로 나뭇가지를 꺽어 세워놓은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군인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동기와 나는 그런 것을 보고 그냥 돌아왔다. 그 후 나는 시내에는 가보지 않았지만 운암아파트 1단지 상가 앞에 있는 물탱크 옆에 앉아서 공수들의 만행을 어른들과 이야기하면서 보냈다.
그러던 27일 아침이었다. 공무원들은 8시까지 출근하라는 방송이 들렸다. 내가 그 방송을 듣고 부대에 들어갔을때는 몇 사람밖에 없었다. 그애들은 공수들이 출근하는 사람에게까지 총질을 하더라고 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닦아서 넣어두었었다. 그 총이 없어져 버렸다고 하고 있는데 부대원 중 한 명이 부대 앞 조그만 시궁창에 묻어놓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총을 다시 꺼내어 위경 창에 이불을 쳐놓고세워놓았다. 그 후 이틀 동안은 광주사태를 체험하였다고 해서 정신훈련을 받았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훌륭한 체험을 한 군인이다."는 내용이었다. 부대에 마지막으로 귀대한 부대원은 경감과 대장이 직접 위경소까지 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들어와 우리는 주변에 서서 박수로 환영을 했다. 그리고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린 사람은 모두 치료비가 나왔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없었고 치료비를 받아 병원에 가는 사람도 없었다. 치료비를 전부 모아 광주공원 앞에서 돼지 불고기를 사다가 술을 마셨다. 딴부대가 해산된다고 하니까 그때부터 부대원들은 말도 안 듣고 술만 마셨다. 우리는 21일 도청에서 해산했을 때 민간인 집에서입고 나온 옷이며 신발들을 돌려주기 위해 방문을 했다. 그 아저씨는 다른 것은 없어져도 다 이해를 하겠는데 여자 드레스가 없어진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 선배와 나는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웃었다. 사망자명단에 전경들이 죽었다고 발표되었지만 그것은 전경들이 해산될 때 벗어놓은 전경복을 시민군이 입고 다니다가 죽은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기동대에서는 한사람도 죽지 않았다. 그것은 개별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관제성 유언비어
기동대가 해산되자 나는 강진 타격대로 다시 들어갔다. 타격대 병력은 기동대 병력보다 더 많았다. 기동대 분대장은 순경이고 소대장은 경위이지만 탁격대는 분대장이 특경,소대장이 경시,부대장이 경위,대장이 경감이었다. 나는 장흥 관산으로 파견을 나갔다. 그곳에는 1개 소대가 있었는데 병력들이 조금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뉴스만 나오면 소대장과 분대장이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그러면 우리는 텔레비전을 못 보았는데 나는 그들도 광주사태를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부에서 만들어낸 유언비어로 광주 시민을 폭도라고 규정하여 떠들어댔으니까. 한번은 내가 외출을 나갔다 들어오다 장흥지검에 오빠를 면회 왔다는 육군본부에 근무하는 여자를 만났다. 광주사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여자는 광주 사람들은 완전히 빨갱이고 폭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공수들의 만행때문에 광주 사람들이 순수하게 대항을 한 것이지 그런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전혀 믿지 않았다. 나는 너무도 다르게 알고 있다는 것에 기가 막혔다. 세상에는 이렇게 콱 막힌 여자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기는 강원도 흥천에서 근무하던 친구 말에 의하면 광주에서는 경찰과 시민이 함께 시위를 했다고 전해 듣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광주 사람들이 입대해서 들어오면들어오자마자 구타를 당하고 수난을 당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그래도 다른 부대 원들이 24시간을 잠도 못자고 비상대기를 하면서 광주 사람들을 욕할 때 설마 그럴까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그 후 타격대에서 도경찰국 통신과로 올라왔다. 5월 당시에 근무했던 경찰들은 도청 건물 복도에서 테니스장까지 시체들이 즐비했고 구내식당 복도에까지 엄청나게 많았다고 했다. 나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의 시위를 이해하지 못했다. 신현확이니 전두환이가 적힌 플래카드를 시위대 학생들이 들고 다녔지마 나는 그들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나는 데모를 하려면 교문 안에서 하지 왜밖으로 나올까 생각했었다.그런데 다음에 보니까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제야 학생들이 부르짖는 것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얼마나 정보가 빠른가도 알았다.
민주화는 곧 언론의 자유
내가 처음으로 정치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로 유신헌법이 만들어질 당시였다. 면직원들이 유신헌법에 대해서 홍보를 하러 다녔다. 공무원들은 정치적인 중립성이 보장되어야 된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을 보고 어렴풋하게나마 회의를 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단독후보로 나온 전두환이 유일한 영도자감으로 홍보가 되고 안방투표식으로 선거를 치렀다. 북한의 김일성이 회의장에 손들고 나타나면 기립박수를 치는 것을 슬라이드를 통해서 보여주면서 북한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한다고 했는데 그것과 꼭 같았다. 전두환도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머리가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그때부터 나는 민주화는 곧 언론의 자유라고 생각했다. 언론의 자유가 조장되지 않으면 절대로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광주사태의 호칭문제는 지금도 광주사태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광주시민들이 저지른 것이라고 보는 정부측의 표현이었지만 광주시민이 일으킨 사태가 아닌 정부에서 일으킨 사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는 내 나름대로의 근거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5월 17일 왜 시위진압부대를 특박을 보냈겠는가. 경찰의 정보가 그렇게 어두운 것인가. 최규하 대통령이 아랍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 아무도 모른 상황에서 계엄령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니까 계엄확대 조치를 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부대만 해도 18일에 출동한 부대병력이 전원 출동을 못 할 정도로 귀대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그것은 곧 경찰측에서도 예측하지 못한 급전된 상황이었다고 생각된다.
평민당도 훌륭한 모사꾼에 불과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그동안 하도 말을 많이 해서 나도 할말이 없지만 광주 시민들이라면 누구나가 다 눈으로 확인하고 귀로 들은 사실들이 왜곡되고 있는 것에는 참지 못할 일이다.청문회를 지켜보다가 화가 나서 신기하 평민당 의원 사무실을 찾아갔다. "왜 시위군중들이 먼저 총을 들지 않았던가에 대해서 또 발포 순간에 대한 질문은 이렇게 이렇게 했으면 좋겠소"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청문회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평민당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너희들도 어쩔 수 없는 모사찬이면서 가장 훌륭한 정치인인 양 나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름대로 광주문제 해결방안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크게 생각하는 것이 체면이라고 할 수있다. 광주 시민들의 명예가 훼손된 만큼 명예를 회복시켜줘야 할 것이다. 그리고 5·18의 발발동기가 밝혀지지 않는 이상 절대로 해결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한 증언과 내가 한 증언의 내용이 다르듯이 피해자 측과 가해자측이 서로 상반된 증언만 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광주 시민들이 모두 증언자가 되어야만 정확한 것이 밝혀지리 라고 생각한다. 한쪽에서는 과잉진압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크게 벌어졌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각본에 따라 진행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상황으로 가장 유망한 대전주자가 김대중씨였다고 본다. 손문은 삼민주의는 신권,근권,민권사회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에 있어서의 모든 전쟁은 군을 위해서만 진행되었고 유럽에 있어서의 모든 전쟁은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만 되었다고 했다. 중국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듯이 광주사태도 군 중심의 역사가 욕심이 나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조사·정리 장옥근)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