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다급히 부르는 소리 - “영탁아”
Y 정신병원에서 5개월 동안의 근무는 나로 하여금 가만히 있지 못하도록 했다. 일요일 예배를 드리고 나면 더욱 그랬다. 명색이 정신병원이라는 곳이 그 모양이었으니 더 많은 환자가 수용된 정신질환자 요양원과 비인가된 정신질환자 수용소는 도대체 어떤 실태인지 알고 싶었다. 그런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환자를 위해 일하고 있다면 주일마다 교회를 안 가더라도 돕고 싶었다. 1982년 따스한 봄날, 교회를 다녀와 처자식을 데리고 통일로 어디론가 가다가 있던 ◯◯원을 찾아갔다. 원장이 목사였는데 환자들은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방에 갇혀 있고 자물쇠는 밖으로 채워져 있었다. 음! 내 입에서 신음소리만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아무 방이나 열쇠를 열게 하고 들어섰더니 두세 평 남짓한 방에 환자는 너댓 명씩 있었고 한쪽 구석에 있는 요강에서는 숨을 쉴 수 없는 냄새가 났다. 장방형의 운동장을 가운데 두고 사방 돌아가면서 그런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방마다 자물쇠가 달려있었다. 오갈 데 없는 환자를 보호해 주고 있다는 긍지에 찬 설명을 들으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원장은 그런 방을 보여 주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나오다 마주친 까만 로얄 승용차였다. 당시 까만 대우 로얄 승용차는 부의 상징이었는데 차양이 잘 처진 승용차 한 대만 들어가는 주차장에 번쩍번쩍 빛을 발하며 있었다. 목사를 쳐다봤더니 벗겨진 대머리도 역시 빛을 발하며 살찐 모습이었다. 명함에 목사라는 글자나 지우시지……. 에이! 지옥의 사자에게서 도망치듯 빨리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몇 주 후 이번에는 서울 시내 평창동에 있던 ○○요양원에 혼자 찾아갔다. 주택가에 양옥 두 채가 이상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지하의 넓은 방에 옹기종기 수십 명이 웅크리고 있는 곳에서 그 야릇한 사람 냄새만 났다. 내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는 마찬가지였다. 사회사업을 한다는 사람들은 전부 이 모양인가 하다가 오산 근처 동탄면에 있던 사랑밭 재활원을 찾아갔다. 입구에서부터 별장 수목으로 장식되어 있고 들어가다가 옥외 수영장을 보았다. ‘어! 여름이 되면 저곳에서 환자들이 수영이라도 하는가?’하는 의문을 가지고 들어갔다. 환갑을 넘기신 인상 좋은 할아버지를 뵙게 되었다. 근처에서 공장을 운영하셨고 별장으로 소유하시던 것을 출연하여 과부가 된 딸을 위해 그곳에 정신질환자 요양원을 만드신 것이었다. 사회사업학을 전공한 딸은 부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원장 이하 직원들은 이사장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좋은 사람들로만 보였다.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싶다고 찾아온 용무를 말씀 드렸더니 흔쾌히 환자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상태가 좋아진 환자들이 밖에 나와 자유롭게 가축을 기르고 면회실에서 매점 일을 하고 있었다. 토끼, 닭, 꿩, 돼지, 사슴과 공작새 등을 사육하고 있어서 마치 작은 동물원 같았다. 웅성거리는 환자들 사이로 부원장의 안내를 받으며 병실 복도를 지나는데 ‘영탁아’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본 나의 눈에 들어온 환자는 고등학교와 의과대학 동기동창인 H 학형이었다. 그래도 시설이 어느 정도 갖춰진 이곳에서는 엉뚱한 일로 또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반갑게 악수를 했으나 H 학형은 정상상태가 아님을 곧 알아차렸다. 사무실로 돌아와 약물 처방권만 주면 토요일 근무가 끝나는 대로 이곳에 와서 무료 진료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너무들 좋아하시며 당연히 사례해야지 무슨 말씀이냐고 했다. 한 달에 휘발유 값 3만 원만 주시면 된다고 사양하고 우선 3개월간 토요일마다 진료하기로 했었다. 집에 오는 길에 이사장 할아버지는 대형 냉장고에서 멧돼지 고기를 꺼내오게 하셔서 크게 짤라 주셨었다. 후일 아들딸을 데리고 그 할아버지 댁으로 세배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다.
토요일 정오에 대학병원서 퇴근하면 아무렇게나 한술 뜨고 곧장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기흥 인터체인지로 나가 오산방향으로 가다가 있었다. 대학병원 누구에게든지 보고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문제가 생길 것도 없고 무슨 문제가 생기든 내가 책임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의사도 없는 곳에 갇혀 있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의사가 가는데 누가? 왜?
우선 H 학형의 어머님을 오게 해서 현재 경비보다 월 5만 원만 더 쓰시면 선배가 운영하는 N 정신병원으로 옮기도록 도와드릴 테니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유해서 병원에 입원하게 했다. 그러나 후일 N 정신병원은 말만 의사가 있는 병원이지 사랑밭 재활원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는 병원임을 알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전문의가 된 후 호전되지 않는 H 학형의 증세를 전기치료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동기동창 의사들의 후원회를 조직하여 월 10만 원씩 보조하고 H 학형의 집안에서는 더 이상의 부담이 안 되도록 해서 내가 근무했던 안양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H 학형의 모친이 과거 군병원에서 권 선생 선배가 전기치료를 했어도 지금처럼 되지 않았느냐 하시며 극구 반대하셨다. 물론 전기치료 이후 약물조절에 실패하면 마찬가지 결과였으나 약물치료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면 다시 전기치료로 호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H학형의 모친과 몇 개월을 실랑이하다가 포기하고 판사로 근무 중이던 H 학형의 동생을 병원으로 불렀다. 형의 현재 상태, 병의 경과, 예후를 설명하고 형의 정상생활을 조금이라도 기대한다면 하루빨리 전기치료를 해야 한다고 설득해서 반승낙을 받았다. 모친은 설득하겠다며 돌아갔는데 며칠 후 모친은 H 학형을 퇴원시켜서 다시 사랑밭 재활원으로 데려가 버렸다.
토요일 오후 1시가 조금 넘어서 시작된 사랑밭 재활원에서의 진료는 저녁 7시가 넘어 밖이 깜깜해지도록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병실에서 환자들과 면담했다. 부원장이 몇 번이나 ‘그만 가시죠.’ 하는 전갈을 보내왔고 나중에는 제발 먼저 퇴근하시라고 내가 사정했다. 대부분 정신병 증세는 없어졌으나 과량의 약물로 인한 부작용이 너무 많았다. 환자 기록부의 처방란에는 촉탁의 ○○○ 사인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동문 선배 의사의 성함이라 변경해도 되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었으나 곧 그 사인은 이곳의 사회사업가 ○ 원장이 흉내 낸 조작임을 알게 되었다. ○○○ 대선배는 한두 달에 한 번 들러서 병실을 휙 둘러보고는 그냥 간다고 했다. 약물 처방권을 사회사업가에게 넘긴 한심한 선배나 그 사인을 도둑질 하여 의사도 아닌 사회사업가가 함부로 약물을 처방을 내리는 ○ 원장이나 똑같은 족속들이었다.
과량의 약물로 잠자느라 조용하기만 했던 환자들이 내가 약물을 줄여 나가자 활기를 되찾고 병동이 다소 시끄러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거기에다 한 달이 지나자 10% 정도는 다시 정신병 증상이 나타났으니 ○ 원장은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허사였고 토요일 내가 오기 전에 분명히 나빠지면 원래대로 증량하여 약을 복용시켜도 좋다고 했으나 전부 일률적으로 약을 다시 올려 버렸다. 소유주인 부원장에게 과량 약물의 부작용 중 안면 불수의 근육운동이 이곳 환자들에게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50%에서 영원히 회복이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어떻게 하든 감량해야 한다는 등 여러 설명을 했으나 ○ 원장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역시 내가 경영주가 되지 않고는 방법이 없었고 진료하러 더 가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권 선생이 환자를 빼간다는 이상한 말만 듣게 되었다. 두 달 만에 환자들과 작별을 고했고 부원장은 20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두 번째 나에게 주었다. 나는 필요없다며 돌려주었고 그 돈으로 돼지고기를 사서 환자들에게 국이라도 한 번 더 끓여 주라며 봉투를 내던지고 나왔다.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도로로 나와서야 ‘워낙 고기를 안 먹어서 어쩌다 끓여주면 설사 환자가 많이 생긴다.’고 얘기하던 게 떠올라 아차! 직접 정육점에 가서 돈을 주고 고기를 배달시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일 사랑밭 재활원은 ○ 원장과 ○○○촉탁의가 그만두게 되면서 자기들이 한 짓을 사랑밭 재활원의 문제인 양 진정하여 소유주들도 그만둬야 했다. 관선 이사가 파견되었다가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부원장이던 소유주에게 다시 인도되었다. 요양원으로는 가장 훌륭한 시설을 갖추었고 여름이면 환자들이 수영까지 하고 있으나 진정한 재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여 안타깝기만 하다. 관선이사가 파견되었을 때 소유주 부원장을 한 번 만났는데 부원장님이 그들처럼 물들지 않았으니까 그런 일이 생긴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드렸다.
1983년 봄 <추적 60분>에서 수용소 문제를 자세히 보도하자 앞서 열거한 비참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국민들에게 알려졌고 정부에서는 서둘러 건물 신축자금을 줘가며 수용소들을 사회복지법인화 시켰다.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치료받게 할 생각은 않고 엉뚱하게도 값싼 요양원에 격리 수용하는 정책을 폈고 그 폐단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웃기는 일은 그해 가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학회에서 추적 60분의 프로듀서를 모셔다가 정신의료의 비참한 현실을 보도한 공로로 감사패를 주며 열렬한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3년차 전공의인 내 귀에는 한마디만 더 언급하면 전부 정신과의사 욕일 텐데 우리 의사를 욕하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이상한 박수 소리로 들렸다.
사랑밭 재활원을 그만둔 지 몇 달이 지나 그곳에 딸을 입원시키고 있던 보호자 한 분이 대학병원으로 나를 찾아왔다. 보호자는 이미 딸을 포기하고 아무런 향후 대책 없이 요양원에 맡겨만 놓았던 것인데, 간혹 면회를 갈 때마다 제발 나를 한 번 찾아가라고 통사정해서 별 뾰족한 방법도 없고 막연한 장래가 걱정되어 왔다는 것이었다. 환자는 그 후 10여 년 동안 다소의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결국 [정신분열병을 이겨낸 사람들]책의 <사례4>가 되었고 현재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젊은 날 여덟아홉 번의 토요일 오후를 희생한 대가로 사랑밭 재활원의 환자 한 명이 영원히 수용소에 갇힐 뻔하다가 현재도 정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환자와 부모형제까지 나를 무슨 은인이라도 된 양 고맙게 생각한다면 나는 너무 값진 시간을 보낸 것이리라.
H 학형의 모친은 소식을 끊고 다시 H 학형을 사랑밭 재활원으로 보냈지만 나는 지나간 12년도, 그리고 앞으로 죽는 날까지도 정신과의사를 할 터이니 “영탁아” 부르던 그 반갑고 다급한 소리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살아 숨 쉬는 날까지 그 친구의 목소리는 이 땅의 정신질환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다급히 부르는 소리로 착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첫댓글 5부 醫窓 -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도서출판 나단, 1993
경기도 화성시 동탄의 사랑밭재활원은 지금도 훌륭한 주거시설로써 정신질환 환우들에게 좋은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선생님... 이 칼럼을 놓칠뻔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음성이 언제까지나 선생님께 변치 않는 소명이 되어,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지금껏 감당하신 것처럼 묵묵히 이겨내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같은 소망을 품고 배우며 동역할 지체들을 허락하셔서,
이 땅의 많은 아픔들이 희망을 잃은 채 더 이상 방치되거나 악용되지 않으며,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펼쳐져서, 이 시대의 치유공동체로 우뚝 세워지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선생님 이 칼럼 정말 감동입니다.
갑자기,콧끝이 찡합니다.저는 이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정부가 나서줬으면합니다.민간에 맡기지 말고 제대로된 정신병원을
필요량만큼 지어서,소명의식이 있는 의사들을 잘 훈련시켜서 배출하고-그들의 병원운영을 감독하는 기관을 민관합동으로 만들고-까짓것 사회복지예산 이런 곳에 다 쓰면 어때!-부량민간 시설에 갇혀 보이지 않게 신음하는사람들이 제대로 치과치료받고,내과치료하고 정기적인 혈액검사건강검진 받겠습니까!우리가 한끼 굶어 그들을 구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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