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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고도 극적인 회심 후 몇 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이 아무 말도 없이 날 떠나셨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조그만 방을 빙 둘러 보았다.
의자 두 개, 책꽂이 하나,
창문으로 들어온
밝은 햇살.
낯선 적막이다.
한 주 동안 이런 적막 속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니 첫날부터 불안감이 덮쳐 왔다. 펜실베이니아 워너스빌에 위치한 예수회수련원의 영성 디렉터인 가냘픈 몸매의 수잔 보워 베이커는 날 지켜보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손목시계를 흘낏 보고 수잔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손가락으로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다시 말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내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졌군요!”
수잔은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수잔은 내 눈빛을 살피고는 곧 웃음을 거두었다.
“내 영혼에 위기가 찾아온 것 같아요.” 내 가슴 속 절박함이 한 줄기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지난 수년 동안 서서히 진행되어 온 권태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기도시간은 지루했고, 예배시간에도 다음 날 해야 할 일들이나 메모했다. NPR미국공영라디오방송 기자로 일하면서 이런 저런 뉴스를 쫓아 바쁘게 살면서 하나님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런 증상은 내가 14년 전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에 놀랍고도 극적인 회심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어떤 일에 침착함을 잃고 흥분할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무언가 강한 본능에 이끌리기라고 하듯이 예수라는 친밀한 분을 만난 그때 흥분하고 말았다. 그때는 존 웨슬리가 했던 말을 몰랐지만, 당시 경험은 그의 말대로 “신비롭게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 여운은 수년 동안 이어졌다. 기도시간은 알찬 추억으로 남았고, 거의 매일 작은 기적들이 일어났고, 택시를 타고 있을 때나 인터뷰를 위해 노트북을 꺼낼 때조차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침묵하는 텅 빈 영혼을 지닌 채 일상의 부산함을 피해 잠시의 휴식을 찾아 수잔의 수련원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다. 하나님께서 떠나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인생, 다시 상상하라: 중년의 과학, 예술, 그리고 기회」를 쓰기 위해 궁리하고 있을 때, 나는 영적 사이클과 심리적 사이클 사이에 놀라운 유사점을 발견하였다. 중년 시기에는 더욱 그러하다. 꿈을 이루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거나 컨버터블 스포츠카나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배우자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실존적 두려움 같은 전형적인 중년의 위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심리학자들은 중년기―대략 40세에서 65세까지―에는 겨우 10퍼센트만이 그런 심각한 불안을 겪는다고 한다. 영적 위기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보인다. NPR에서 10년 동안 종교 분야를 다루면서 나는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에 빠져든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중년의 위기는 그리 흔한 현상이 아니지만, 중년의 권태는 영적으로든 심적으로든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난 20년 동안 경제학자들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조사를 해 왔고,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중년의 시기에 행복감의 저하로 고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미국인들은 대충 45세쯤 인생에서 최악을 찍는다. 이유는? 40대나 50대쯤이면 삶의 무게감이 크기 때문이다. 커가는 아이들, 늙으신 부모님, 직장생활, 은행부채, 대학등록금…. 인생의 속도감이 느려지고, 삶의 행로가 힘겨워지고, 선택할 대안이 별로 없다는 걸 느낀다. 다행인 것은 50대 중반부터는 이른바 “U자형 행복곡선”U-curve of happiness이 나타나면서 삶의 만족도가 일반적으로 높아진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영적 사이클도 비슷한 형태를 취한다. 극적인 체험의 신혼기가 지나면 암울한 중간과정을 겪게 되고 그로부터 다시 안정되고 노련미 있는 신앙인으로 복귀한다. 중간에 겪게 되는 신앙적 권태는 실제 연령과 관련되기보다는 영적 성숙도와 관련 있다. 어떤 사람이 10년 이상 하나님을 알려고 몸부림쳐 왔다면, 그는 메마름과 지루함과 고통과 좌절 위에 펼쳐진 영적 황무지를 횡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영적 권태는 교회생활에서 감추고 싶은 것이고 신앙의 동료들 사이에서 좀처럼 터놓지 않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내가 겪은 권태를 이해하고 고치기 위해서, 나는 목사와 평신도, 신학자, 신앙서적 작가들과 대화해 보았고 버지니아 알링턴의 내가 출석하는 성공회 교회의 성도들과도 대화해 보았다.
46세의 교구위원인 드류 본드는 때때로 책장 앞에 서서 거기에 꽂힌 신앙서적들 중 한 권이라도 자신이 겪고 있는 영적 침체에 대한 해법을 보여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성경책을 열고 내가 전에 밑줄 그은 구절들을 봅니다. 여기저기 뒤적거려 보지만 별 감흥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내가 죽어야만 할까?’”
우리는 공감을 느끼고 마주보며 웃었다. 문제는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다.
덴버 신학대학원 영성형성 교수이자 「영혼의 사계」Seasons of the Soul의 저자 브루스 데머레스트는 몇몇 영적 메마름은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내게 말했다. 우리는 끝내 자백하지 않은 죄를 가슴에 숨긴 채 세상의 유혹을 받고 세상의 가치관을 수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너무 급히 서두른다. 성년기에 주어지는 대표강점Signature Strength과 중년기에 얻게 되는 능력과 자립정신도 영적 미지근함을 유발한다. 내가 무미건조한 기도생활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자 조용히 듣고 있던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너한테 하나님이 필요할까? 결혼생활도 문제없고, 직장도 훌륭하고, 모든 삶이 완벽하잖아? 하나님이 왜 필요해?”
그러나 가령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죄와 무관심의 벽이 없음에도 여전히 기도하는 가운데 친밀감이나 번득이는 영감을 느낄 수 없다고 치자. 이러한 무미건조함은 16세기 신비주의자 후안 델 라 크루즈Juan de la Cruz가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자신의 성장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기 위한 것이다. 시편 저자는 우리에게 갈급함이 있어야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시42, 51, 143). 데머레스트는 우리가 “변두리의 삶”을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깊숙이 들어오기를 바라신다”고 말했다.
내 고민을 수잔에게 털어 놓고 몇 시간 뒤에 나는 따뜻한 9월 한낮에 예수회수련원의 그늘 밑 잔디 위에 지친 몸을 뉘었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갑자기 바위와 돌무더기가 내 곁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소리가 너무도 요란하여 귀가 먹먹해졌다. 그러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몸부림쳤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동안 심혈을 기울여 쌓아 올렸던 “바바라의 집”이 무너져 내렸구나! 그리스도인, 아내, 엄마, NPR 기자, 장거리 달리기 선수라는 내 모든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던 집인데!
잠시 후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리더니 내 주변에서 멈추었다. 돌을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빛이 보였다. 희미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바바라, 조금만 참아! 내가 구해 줄게!” 그는 부지런히 잔해를 치웠다. 나의 의심과 배반의 무게가 덜어졌다. 나의 현실적 타협과 비겁함, 나의 성공과 실패,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 고통스런 기억들이 하나씩 치워져 나갔다. 나를 구출하기 위해 상처 난 그의 손을 보았다. 힘겨워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제 다 됐어! 잠시만! 이제 잡았다!” 나는 끌어 올려졌다. 물 젖은 인형처럼 축 쳐져 있었다. 그는 나를 세워 일으키고 꼭 잡아 주었다. 나는 긁혀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안전하게 되었다. 나는 잃어버린 동전이었고, 잃어버린 양이었고, 잃어버린 어린 아이였다.
아마도 꿈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수련원 잔디밭에서 겪은 체험은 두 번째 회심과도 같은 어떤 것이었다. 그 체험은 여러 달 동안 네게 힘이 되어 주었다. 그 다음 7년 동안 나는 작은 절망의 계곡들에서 영적 침체를 겪었고 때로는 기도와 감사로 인해 절정의 기분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또 다른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신비적 체험과 영적 위로에 집착하는 걸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구체적 경험은 우리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끈다. 결혼으로 치자면 신혼여행의 달콤함보다 더 좋은 어떤 것이 있다.
나는 중년의 신앙적 방황을 다룬 「신성한 불」Sacred Fire의 작가 로날드 롤하이저에게 영적 침체에 관해 어느 날 한숨 섞인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성경공부도 새로 시작하고, 잡지도 새로 구독하고, 책도 새로 사서 읽고 있는데 전혀 효과가 없어요. 예전 같은 열정을 찾을 수가 없어요.”
롤하이저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찾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미 지나온 사춘기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요. 이미 그 시절은 지나갔어요. 언제나 되돌리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이미 효과를 다했기 때문에 다시 효력을 발휘할 수 없어요.”
나는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회심을 원하지요.”
그가 다시 대답했다. “그 느낌을 다시 얻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혼했다가 다시 결혼하는가 봐요. 신혼 때의 그 느낌을 다시 갖고 싶어서.” 시편에서 발견되는 거의 에로틱한 갈망의 표현들은 이것이 아주 오래된 욕망임을 암시한다.
롤하이저가 했던 말들은 또한 오래된 부부들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물들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20년 동안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온 부부들의 뇌는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뇌만큼이나 보상과 관련된 부분에서 밝게 표시되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오래된 부부들의 뇌는 애착과 관련된 영역에서 밝게 표시되었지만, 최근에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뇌는 걱정과 관련된 영역에서 밝게 빛났다.
달리 말하면, 일상적인 결혼생활은 격정 없는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오랜 시간 하나님과 동행해온 사람들을 묘사하는 듯 보인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떤 연구결과를 보면, 20년을 동행해 온 부부들은 “우리가” 또는 “우리를” 같은 복수명사를 사용한다. 이혼으로 결론 맺은 부부들은 “나는” 또는 “나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아마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영적 기쁨의 비밀일 것이다. 하나님과 내가 공동의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인생,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그리고 나를 통해 일하시는 삶 말이다.
결혼생활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신혼이 끝난 후 그리스도와 다시 연결되는 데 또 다른 통찰을 제공한다. 뉴욕에 있는 스토니 브루크 대학교의 연구자들은 일상생활에 참신한 무언가―평범한 저녁식사나 영화관람 대신 하이킹이나 댄스 교습을 함께 즐기는 것―를 덧붙인 오래된 부부들이 자신들의 결혼생활이나 배우자에게서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의 뇌는 참신함을 갈망한다.
이것 때문에 나는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예수회 회원이자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예수회 지침서」The Jesuit Guide to Almost Everything의 저자 제임스 마틴이 영적 침체에 빠져 고생하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방법에 관해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통상적인 기도방식을 확 바꿔 보세요. 복음서를 읽고 있었다면 시편을 읽으세요. 아침에 기도했었다면 한 밤 중에 기도하세요. 새로운 신앙서 작가의 책을 읽어 보세요. 음악을 틀고 기도하세요. 밖에 나가 숲속에서 기도하세요.”
그렇다고 제임스가 무질서한 기도생활을 권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를 생기 있게 유지하기 위해 평범한 일상의 한계 안에서 작은 시도들―배우자와 카풀순서를 정하든, 이메일을 확인하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든―을 해 보라는 권고이다.
나는 몇 년 전 그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나 자신을 복음서들의 인물로 여기는 상상기도를 시작했다. 상상기도가 식상해졌을 때쯤 명상 안내서―나는 “닥치고 기도”라는 앱을 발견했다―를 찾아내 명상기도를 시도했다(그런데 이 시도는 실패였다). 그리고 영성개발의 고전들을 읽고 일기를 계속 썼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인의 영적 훈련과 운동선수의 신체 훈련을 등치시킨 바울의 말들(딤전4:7-9; 고전9:25)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취미로 하든 직업으로 하든 어떤 일에 달인이 되기 위한 노력에는 목적과 변주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내가 쉰다섯의 나이에 경주용 사이클을 시작했을 때, 나는 장거리 주행, 언덕 주행, 회복을 번갈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러한 변주만이 타고난 내 몸의 한계를 극복하게 만든다. 영성 훈련에서도 동일한 변주가 필요하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리더인 이안은 중년기 신앙적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예를 들면, 성경읽기, 신앙서 탐독, 제자훈련 과정이수 같은 것들이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영적 규율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우리 교회 목사인 데이빗 행크에게 그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데이빗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안에게 그의 아내 로라와는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이안이 대답했다. “여러 가지 일들을 함께 하죠. 집수리를 같이 한다거나 야구경기를 같이 본다거나. 그런 일들이 우리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 주죠.”
이안이 말을 끝내자 데이빗이 말했다. “그런 방법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할 것 같아요.”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던 이안은 곧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연구조사를 수행할 때나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때나 심지어 기금모금을 할 때에도 말이다. 그는 조경 디자이너였던 그의 아내가 흙을 다룰 때에나 뒷마당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지켜보면서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것이 내게 공감을 일으켰다. 20여 년 전, 급성장하는 교회들에 관해 기사를 쓰고 있을 때 나는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당시에 나는 인터뷰를 위해 질문을 하고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기사를 다듬고 있었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사실 그는 이미 우리 집 현관문을 들어와 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뜨겁게 달궈 놓고 계신다. 그는 우리의 힘과 열정을 사용해 우리에게서 어둠을 물리쳐 내신다.
캐롤린 위머는 네 살 때 자기 인생을 예수님께 바쳤다. 하지만 마흔 네 살이 될 때까지 겨우 두 번 기적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했다. 대학시절 그녀 주머니에 단돈 2달러만 남았을 때 누군가가 100달러를 넣은 봉투를 집 앞에 두고 갔던 것이 그 첫 번째 경험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그녀는 직장 문제로 기도를 했는데 모든 상황이 기도대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두 번째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생활의 대부분은 아주 메말라 있었어요. 내가 무얼 믿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죠. 난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수많은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머릿속으로는 뭘 믿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증거는 제대로 보질 못했어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계속 신앙생활을 했어요?” 이 질문에 그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관해 내가 처음 들어보는 주장을 펼쳤다. 캐롤린과 그녀의 남편은 몇 달에 한 번씩 자기들 교회와 관련된 작은 모임―그 모임은 일 년에 세 번 새롭게 시작한다―에 나간다. 그녀는 마흔 세 살에 두 번의 기적체험은 보잘 것 없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캐롤린은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작은 모임에 열 명이 있다고 했을 때 그들 각자에게 한두 가지 기적 체험은 있을 거예요. 그걸 모두 합해 보세요. 적지 않은 숫자죠? 신앙생활은 ‘나 홀로 여행’이 아닙니다. 물론 자기 몫의 여로가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늘 일하고 계심을 확인하기 위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과 과학적 연구결과는 모두 ‘고독은 생명을 죽게 하고, 우정은 생명을 살린다’라는 명제를 확인해 준다. 전염병학에서는 사람은 고립되면 우울증에 걸리기 쉽고 뇌졸중이나 심장마비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하루에 담배 열다섯 개비를 피우는 것과 동일하다. 반면, 다른 사람과의 우정은 면역체계를 강화하고, 모든 질병을 예방하며, 생명을 연장시킨다. 그 이유가 밝혀지고 있다. 친구나 공동체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게끔 도와주고 웃게 만들 수 있듯이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변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영적 질병의 골짜기를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돕기 위해 왜 길동무가 되어 주지 않겠는가?
그런데 작은 모임에도 참석하고 기도생활에 변화를 주고 직업이나 취미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추구했음에도 결국 여전히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계속 나를 따라 다녔다. 나는 친구이자 훈련된 영성개발자인 엘리자베스 피치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최근에 신앙적 권태보다도 더 심각한 어떤 질병에 걸려 의사조차도 진단할 수 없는 신경학적 증세로 고통을 받았다. 침대에 누워 두려움에 떨다가 이렇게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수긍하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엘리자베스는 “우리는 늘 좋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세상일이 그러질 못해. 내가 질병 속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내가 건강할 때는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내 영혼의 상태를 바꿔놓고 계셨을 거야!”라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고통스런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계속 빠져나와야 할 어떤 것으로서 권태를 말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 ‘이걸 어떻게 치유할 수 있지? 방법 좀 알려줘’라고 말하는 것은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이야. 아마도 답은 없을 거야. 그저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이 말이 내게 드류 본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수년 동안 영적 침체를 경험했었다. 그때 나는 그에게 포기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었다.
그는 깜짝 놀라며 자기 생각을 말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걸 포기하라고요? 그건 더 안 좋은 방법이에요. 대학시절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만 전혀 도움 되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동일한 말을 했다. 당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자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려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요6:68)
드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잊어버린 거예요. 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애굽의 노예적 삶이 어땠는지 잊은 것이지요. 그래서 빵이나 사막에 대해 불평하고 하나님이 바위에서 물을 내신 것까지 불평을 했지요. 심지어 노예생활로 되돌아가길 바랐어요.”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깊이 들이 쉬고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다시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아요!” CT
바바라 브래들리 해거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