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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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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참여마당 [짧은생각]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제 편견을 버리자.
계룡산맥 추천 0 조회 380 06.07.31 23:26 댓글 3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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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07.31 23:49

    첫댓글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님의 내공을 펼쳐주시와요^^ 님도 더운날씨에 건강하세요^^ 이열치열~ 어떠시와용^^

  • 06.08.01 06:55

    ~~좋은 내용입니다. 작년 겨울 부여에 간 일이 있습니다. 그 때 백마강 나룻배에서 쉬지않고 울리는 '백마강 노래' 삼천궁녀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한심한 일이죠. 부여 군수와 경찰서장은 뭐하나?

  • 작성자 06.08.01 09:55

    김자님~/ 댓글 감사합니다. 아마 부여군수는 계속 백마강 노래를 틀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그것은 하나의 문화상품이 되어버렸으니까요. 부여군의 관광세수를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지요. 부여에서 내세울 것이라곤 낙화암과 고란사가 그중 으뜸이니까요. 낙화암만 놓고보면 그만한 경치는 전국에 널렸으니.. ^^ 다만 삼천궁녀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그저 전설임을 세인들이 혼동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 06.08.01 12:37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06.08.01 14:57

    고등학교때 가보고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는데요..삼천궁녀가 계속 낙화암에서 뛰어 내렸다면..그 높이가 낙화암보다 더 높지 않았을까...물도 깊어 보이지 않고 높이 또한 그리 높아 보이지 않더군요.

  • 06.08.01 20:07

    저도 20여 년 전. 친지의 결혼식 때문에 부여에 갔다 백마강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도 님과 똑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도 예의 백마강의 노래는 그 곳의 히트곡이더군요. 하지만 저는 백마강에 투신하여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더군요... 물론 제가 군시절 특수훈련을 받은 탓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백마강과 부여는 두고두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화두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삼우교 검증방에서 님의 댓글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건 제가 생각한 바가 있어 본문을 옮기다보니 님의 귀한 댓글이 사라진 것이니 오해없으시길...^^

  • 06.08.02 00:34

    이말인즉...삼천궁녀가 있었다는 예기는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군요...

  • 06.08.02 22:23

    제 의견입니다/ 당시 백마강에 빠져 죽은 여인이 3,000명이 넘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전쟁의 목적상 여인도 전리품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백강에 빠져 죽은 여인을 궁녀로 보지않고 양갓집 규수로 봅니다. 그들은 정조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후일 삼천 궁녀로 둔갑했다는 생각에 분노를 느낍니다. 제가 의자왕의 시호에 집착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시 '해동증자'로 불린 의자왕을 3,000 궁녀와 연계시켜 타락한 군주로 만들려고 한 의중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 06.08.07 21:16

    의자왕은 어릴적부터 총명해서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궁예도 처음에는 성인 군자였죠.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아실테고... 괜히 관심법이니 하며 궁예를 왜곡시켰다고 봅니다만 궁예, 왕건에 관한 자료는 왜이리 보기 힘들죠? 왕건도 그리 훌륭한 위인이라 생각하지않는데...

  • 작성자 06.08.04 00:01

    김자님은 그렇게 보시는 군요.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그 이유를 언급하자면, 첫째, 삼천명이상이 빠져죽을 정도였다면 사서에 한줄쯤 사비성함락의 처참함을 나타내는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봅니다만 그렇지 않구요. 또한 사비성의 구조상 시가전에서 밀리면 뒤의 부소산성에서 농성전을 벌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밀리면 가는 곳이 낙화암입니다. 물론 많은 수의 궁녀가 투신하였을 것이라 추측됩니다만 몇백명이상은 아니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본문참조).둘째, 백성들의 경우 많은 수가 황산벌에서 백제의 최종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피난을 떠났을 것으로 보이며, 당군의 경우 사비성 공략시에 성을 완전포위 합니다.

  • 06.08.05 22:46

    댓글 중/ ... 시가전이 밀리면... 에 대한 반론입니다. 시가전이라는 개념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완성된 전투개념(전술개념이 아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가지를 진지로 이용한다는 개념이지요. 하지만 백제가 망할 시절 시가전이라는 개념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시가전의 개념은 게릴라전의 또다른 형태이거든요. 당시 전투는 누가 뭐라해도 일대일로 맞붙은 백병전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지요? 품일 장군의 아들인 관창의 경우처럼 ................

  • 작성자 06.08.03 14:15

    부여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백마강으로 둘러쌓인 사비의 공격을 위해서는 도강이 필수이고 이때 이미 백마강마저 당군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보여지며, 참고적으로 백마강에 조룡대라는 바위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백마강에 이른 당군이 도강하려는 것을 백제를 지키는 용이 방해하므로 이에 당장군 소정방이 흰소의 머리를 미끼로 달아 바위(조룡대)위에서 용을 낚아 잡고서야 사비를 공격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때부터 이 바위를 조룡대라 부른다고 합니다. 아마도 백제를 지키는 용은 백마강에서 당군의 도강을 막은 백제군세력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각설하고 사비 함락시는 이미 백마강까지 당군의 도강선으로 장악되었을

  • 06.08.05 22:47

    ~~죄송합니다....~... 조룡대... 전장에 나선 장수는 무조건 이겨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강자였던 나당연합군이 조룡대의 전설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면 기록에 전해온 만큼 백제군이 약체가 아니었다는 또다른 반증이 아닐까요?^^ 물론 백제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도 전설이 필요했겠지요.

  • 작성자 06.08.03 14:21

    것으로 추측되며 , 그 상황에서 백마강으로 도주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퇴로는 오직 부소산뿐이였으니까요. 셋째, 의자왕은 황산벌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당군이 쇄도하자 사비에서 웅진으로 피난하였다가 항복합니다. 그렇다면 의자왕을 위시한 많은 이들이 이미 사비를 탈출하였다고 보여지며, 피난에서 제외된 궁인과 사비성 수비군, 그리고 피난가지 못한 양민만이 사비에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때 삼천명 이상의 여성이 백마강 또는 낙화암에서 투신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저의 판단 입니다.

  • 06.08.04 17:29

    ... 황산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역시 당시의 전투 개념을 파악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입니다. 당시 의자왕은 백제의 모든 군사력을 계백장군에게 넘긴 상태였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어쩜 근위군 마져 계백에게 넘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줄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모두가 죽기를 각오한 싸움이지 살아남기를 원한 싸움이 아닐 것입니다. 거기에 피난이라는 단어를 삽입한 것은 후세 사가들의 역사왜곡이라는 생각입니다.^^

  • 작성자 06.08.03 14:46

    한가지 더 첨언 하자면, 의자왕의 의자는 죽은 뒤 왕에게 붙은 시호가 아닙니다. 의자왕이 백제의 마지막왕이며 당나라에서 사망한 관계로 의자왕은 사후에 시호를 받지 못하였으며, 지금 우리가 부르는 의자라는 호칭은 휘(諱)로써( 여기서 휘(諱)라는 글자는 꺼리다, 삼가다) 원래는 망자의 생전 이름을 삼가하여 부르지 않는 다는 뜻이었으나 후일 생전의 이름 자체를 휘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즉, 의자는 시호가 아닌 의자왕의 생전 이름인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계신부분인 듯 하여 첨언하여 올립니다. 그리고 큰 맥락에서 3000궁녀와 의자왕을 연계시켜 타락한 군주의 면모를 부각시키려 했다는 견지에는 동감합니다.

  • 06.08.03 22:15

    제가 가장 의문을 갖는 의자왕. 물론 시호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자왕은 당으로 끌려간 뒤 당에서 죽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시신은 역대 쥐나왕족의 단골 무덤인 북망산에 묻힙니다. 생각해 봅시다. 당시 당의 왕으로서는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의자왕과 백제의 후예들을 좋게 평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백제 부흥 운동이 첫째이며, 백제와 당의 전쟁에 왜가 개입한 사실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의 왕은 망국지왕인 의자를 쥐나의 왕들이 묻히는 북망산 한 자락에 묻습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한 바와 달리 당시 당나라 왕은 의자를 만만히 볼 수 없는 군주로 여겼다는 가설이 성립합니다. 이게 제가 의자를 시호로 보는 이유입니다.

  • 작성자 06.08.03 14:47

    그로인해 의자왕은 역사상 최악의 타락한 군주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더운날 에어컨 바람의 압박이 이글 읽는 모든분들에게 함께 하시길..^^

  • 06.08.03 15:02

    계룡산맥님/ 저와 대동이나 소이 중에 심한 차이가 있군요. 의자가 시호가 아니라 휘라는 근거는 어디서 나왔는지, 근거를 부탁드립니다...^^ 연전에 저는 소설(?)을 쓴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백제가 망하자 의자왕을 실은 배가 백강에 뜹니다. 이를 보고자 수많은 백제 생민들이 부소산으로 모여듭니다. 의자왕은 백제 유민의 눈물의 환송 속에 부여를 떠납니다. 바로 그 순간 신라군과 당군이 부소산으로 몰려듭니다. 당시 부여에는 노인과 어린애 뿐이었는데, 갑자기 여자가 떼로 몰려 나타났으니 눈이 뒤집혔지요... 한많은 백제의 여인들은 나당연합군을 피해 백강에 몸을 던진다' 이게 제가 쓴 소설의 일부입니다.

  • 06.08.03 15:12

    제가 의자를 시호로 여기는 것은 의자라는 이름의 뜻이 너무도 엄청나기에 아무리 왕재라 할지라도 함부로 이름으로 쓰기에는 부담이 가는 낱말이라는 생각을 정리한 것임을 첨언합니다. 또한 저의 추측대로 의자왕이 '의자'를 시호로 받을 정도의 성군이어야만 백제 유민들의 눈물의 환송이 있었을 거라는 상상력을 동원한 것임을 실토합니다.

  • 작성자 06.08.03 15:39

    김자님~/ 예전에 의자왕에 대한 자료를 찾던 중(저도 님처럼 의자-의롭고 자애로운-라는 단어에 큰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째서 타락한 군왕으로 각인된 왕을 의자왕이라 칭할까..)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얻은 자료입니다. 당시 저도 시호로 알고 있던터라 ^^..지금도 검색해 보니 있군요. 의자왕이라고 검색해 보시면 될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떠나는 의자왕을 환송한 곳은 금강변에 있는 유왕산(부여군 양화면)이라는 산이며 그곳에는 유왕정(왕이 머물렀던 정자)이라는 정자도 있습니다. 또한 현재 부여에서는 유왕산추모제라하여 백제멸망후부터년 전승된 것으로 보이는 추모제를 매년 음력 8월 17일에 개최하고 있습니다.

  • 06.08.04 17:31

    저도 님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하였으며, 님의 주장 역시 상당히 객관적일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님의 글을 읽다보니 님의 주장 역시 기존의 사관에 의한 논문이 주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님의 논리에 수긍하기 힘들다는 점을 알려 드립니다. 이런 논리는 저도 이미 알고 있는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 작성자 06.08.03 16:05

    김자님 소설 쓰시는데 참고가 되었으면 하고요.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 역사라고 생각하는바 님과 같은 접근법도 매우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작은 의문에서 시작하여 역사적 비밀이 밝혀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말입니다. 그럼 더운날 팥빙수의 행운이 함께 하시길...

  • 06.08.04 17:31

    계룡산맥님/ 부득이 님의 댓글 사이사이마다 반론을 올립니다. 이는 님의 열정을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학설(가설)이 다른 학도끼리 회원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함을 양지해 주시리라 믿고 댓글을 답니다.

  • 작성자 06.08.04 00:58

    김자님~/ 댓글 감사하고요..몇가지만 해명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시가전이란 것은 부소산성 아래의 사비성방어가 무너졌을 경우를 상정한 것으로 적당한 단어가 선택되지 않아서 쓴것인데 님 댓글을 보니 오해의 소지가 충분히 있을 것 같다고 보여지는 군요. 제가 단순히 귀에익은 단어를 쓴것이 시발점 이군요. 둘째, 아무리 황산벌에 전력을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수도인 사비를 텅 비운채(근왕병까지 차출해서..) 군을 집중했다는 것은 얼핏 납득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님 말씀대로 조룡대의 전설이 있을 정도면 어느정도의 수비군이 사비에 남아 있었다고 보여지구요. 그리고 피난의 문제는 사람이라면

  • 작성자 06.08.04 00:44

    난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전쟁이 터지면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구요. 그리고 의자왕이 웅진에서 항복하였다는 것에 주목하여 왕이 사비에서 탈출하면서 일반 양민들도 많은수가 살길을 도모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휘에관한 것인데 의자왕과 유사사례가 고구려 보장왕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보면 보장왕(寶臧王)은 이름이 장(臧)<혹은 보장(寶臧)이라고도 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휘로 본 것이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의자라는 단어가 쓰일려면 말그대로 성군이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최소한 백제가 망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단적인예로 백제의 운명이

  • 작성자 06.08.04 00:56

    걸린 전투에 군사가 5000밖에 안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나라가 많이 기울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 성군이라는 견해는 아직은 수용하기 어려운 조심스러운 견해라고 봅니다.(추후 더많은 사료의 확보가 바탕이 되어야 겠지요.) 그리고 제 논리에 수긍하지 않는것 저는 찬성입니다. 그래야 추후 더 많은 연구와 사료가 모아질 테니까요. 하지만 저를 예단하지는 말아주시길... ^^,. 김자님과의 따끈한 견해교환 정말 좋았습니다. 어쩌다가 "의자왕이 최악의 탕군이 아니었다. 3000궁녀의 편견을 버리자"는 의도의 제 짧은 글이 이렇게 비약되었는지.. ^^, 그럼 시원한밤 되십시요~~.

  • 06.08.04 10:35

    역시 계룡산맥님의 격조높은 댓글에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태 늘어 놓기만 했을 뿐 정리가 되지않아 정리의 글을 올립니다./ 의자왕은 정말 이름에 걸맞은 성군인가? 저는 의자왕을 성군 중의 성군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적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가 망하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외침에 의한 망함이요, 다른 하나는 내분에 의한 망함입니다. 물론 두 요인이 합하면 훨씬 확실히 망합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백제처럼 외침을 당하여 국력을 완전히 소진하고 망한 나라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 증거로 계백장군과 5,000 결사대를 올립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백제의 마지막 희망은 계백이 이끄는 5,000 결

  • 06.08.05 22:49

    사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에 대해 눈여겨 보는 사람이 없더군요. 이를 정리하면 백제의 마지막이 보일 겁니다. 대저 계백의 5,000 결사대는 수많은 군사중에서 선별한 병사로 보기보다는 마지막 남은 장정들을 긁어모아 급조한 병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쓸만한 군사는 이미 죽거나, 병사의 역할을 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을 말합니다. 이는 출정에 앞서 계백이 가족을 전부 죽이고 출정하는데서 해답을 찾습니다. 황산벌로 출정하기 전에 계백은 이미 싸움의 결과를 알고 출정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자왕이 진짜 황음무도한 탕군이었다면, 계백장군은 가족을 죽인 다음 백제궁으로 가서 의자왕마져

  • 06.08.04 10:28

    죽여야 옳습니다. 황음무도한 왕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없거든요. 하지만 계백은 의자왕을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최선을 다해 백제와 의자왕께 충성을 다합니다. 이는 의자왕이 이름에 걸맞는 성군이 아니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백제의 멸망은, 인류 역사상 가장 깨끗하게 망한 나라이며(마지막 병사까지 죽은)...그 나라의 마지막 왕은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신라의 후예인 김부식이 아무리 좋게 쓰려해도 의자왕의 기록은 좋을 수 없으며....또한 아무리 나쁘게 쓰려해도 '해동증자'라는 의자의 별명을 빼놓지 못했을 것입니다.

  • 06.08.04 11:54

    두분의 지식에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감동~

  • 작성자 06.08.04 12:55

    김자님~/ 제 견해와는 다르지만 나름 정리를 하셨군요 ^^, 저도 그럼 간단한 정리를.. 1. 의자왕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것 처럼 최악의 탕군이 아니다. 2. 그렇다고 성군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재위 20년중 15년간의 치세는 인정할 만하나 후기 5년간의 실정으로 인한 백제멸망의 책임에서 자유로울수는 없기 때문이다.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귀족세력의 충성을 이끌어 내지 못한채 국난을 맞아 강력한 단결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충신계백이 이끄는 중앙군 결사대가 치른 황산벌 전투를 제외하고는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분멸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이제 추가 댓글은 무의미 할 듯 하군요. ^0^. 그럼이만~

  • 06.08.05 00:35

    문제는 의자왕이 삼국사기에의해 왜곡되엇다해도 이미당과신라가연합해서쳐들어온다는것에 이미나라가시대가운명이기울엇다는것 을 알수잇습니다 물롬 결사대5천빼고도 군사는잇엇겟죠 백제가부흥운동을할수잇엇든것도 약간에군사는남겨져잇어야 가능한겁니다 고구려역시 항전하는성들이잇엇죠 그런ㄱ군사들이남은군사라고할수잇겟죠 3천궁녀는 과장된수치일수잇으며 사비성내에3천궁녀가잇을수가없다는점입니다 삼국사기가왜곡되엇다고해도 백제가 당과신라연합군에 순식간에무너진건 부정할수엇겟죠

  • 06.08.05 18:44

    만약 대륙백제설이 사실이라면... 당태종을 비롯한 당의 왕들은 대륙 백제의 유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라도 의자왕의 시신을 북망산에 묻고, 의자라는 시호를 내렸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 백제의 유역이 나중의 신라방과 신라촌 등, 신라인들의 활동 무대가 된 점을 주목하여 내린 결론입니다.^^

  • 06.08.08 21:28

    성냥불 처럼 위태로운 백제를 신라가 쳐부셨는데, 당나라는 그 때 뭐했었나요?? 그리고 대륙백제설은 확실히 믿는데 왜 구원병이 없을까 생각되는군요... 백제가 당의 속국은 아닐텐데...

  • 06.08.07 10:21

    무왕선화공주 사이에 태어났기에 백제 귀족들로 부터 별로 인정 못받았다고 합니다...그래서 신라성 공략에 매달렸던 것이죠..나라 크기도 늘리고 왕권강화에 매진해서..기나긴 전쟁으로 왕이 가진 군사력이 많이 약해진것이죠...귀족들이 가진 군사력은 빵빵 했었구요..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쳐들어 오니까 ...망한거죠...귀족들이 정신 차리고..일체 단결했다면 망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 되어 집니다.내부 분열로 망한것이 백제 뿐이겠어요..고구려도 내부 분열로 망했는데..ㅡㅡ;;..역사는 승자들의 의도대로 왜곡되어 쓰여 지는것 입니다...국론분열...가장 경계 해야할 적 입니다...국가의 전체적인 이익을 위해서..이기주의는 버려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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