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와 호랑이 설화
문화류씨와 구월산 호랑이와 연관된 설화가 몇가지 있는데 살펴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류 돈(柳墩, 1274-1349)의 묘지명
그 선조인 차달(車達)은 태조(太祖) 대의 공신이다. (차달이) 아직 벼슬하지 않았을 때, 그 현(縣)을 지나가는데 큰 호랑이가 으르렁대며 길 한가운데에 엎드려 있었다. 소리를 들어보니 병이 들었음을 알고,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어 목구멍 안에 걸려 있는 것을 뽑아내었는데 바로 은비녀였다. 호랑이는 껑충 뛰어 오르며 사라졌다. 그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신이 와서 말하였다. “나는 구월산(九月山)의 주인이오. 어제 저녁부터 목이 아파 고생하였는데 다행히 공의 도움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9대에 평장사(平章事)가 나게 하여 주겠소.”
2. 문화류씨 영락보(1423년 간, 柳 穎 ? ~ 1430) 서문
....... 좌윤공(柳 孝金)이 호랑이를 구하여 목숨을 건저준 음덕......
3.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간) 제42권 황해도 문화편
【인물】 【고려】 류차달(柳車達) 태조가 남정(南征)할 때에 유차달이 거마(車馬)를 많이 내어 군량길을 통하였다 하여, 그 공으로 대승(大丞) 벼슬을 봉하고, 삼한 공신(三韓功臣)의 호를 주었다. 류효금(柳孝金) 류차달의 아들이다. 일찍이 구월산에 유람하다가 길에서 큰 범이 앞을 막으며 입을 벌리고 눈물을 흘리는데, 흰 물건이 입 안에 가로 걸렸다. 류효금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해치지 않으면 내가 꺼내 주겠다.” 하니, 범이 머리를 끄덕이며 허락하는 시늉을 하므로 곧 꺼내니 그것은 은비녀였다. 그날 밤에 범이 와서 이르기를, “나는 산의 정령(精靈)이다. 어제 성당리(聖堂里)에 가서 어떤 여인을 잡아 먹다가 물건이 목에 걸려서 매우 괴로웠는데 공이 나를 구원하여 주었으니, 공의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 하였다. 그 후에 유효금의 벼슬이 좌윤(左尹)에 이르렀다.
4. 문화류씨 가정보(1565년 간, 류 희잠 ? - ? ) 서문
...... 좌윤공(류 효금)과 호랑이 설화 ......
5. 어우야담(著 柳 夢寅 1559-1623) 금수(禽獸) 편
......문화(文化)의 장교(將校)로 이름을 알 수 없는 류 아무개(柳不知何名者)가 비녀가 목에 걸린 호랑이를 구해주었는데 얼마 후에 류 아무개 아버지가 죽어 묘를 잡아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그 호랑이가 그 묘자리를 가로 막고 장사를 못 지내게 한 후에 호랑이가 다른 산으로 가서 묘자리를 잡아 주어서 류 아무개가 그 곳에 아버지를 장사를 짓는데 그 후 류 차달을 낳아 승상이 되었다(厥後生柳車達爲丞相). 지금의 문화류씨다(今文化之柳是也).
6. 호랑이 설화를 통해 본 차 ․ 류 양문의 동원설 (저자 : 차일남)
차씨 전래 설화는 "류공숙이 호랑이 목에 걸린 비녀를 꺼내줌. 부친 차승색(류색)의 묘 자리를 잡아 주고 후손이 잘 되도록 함."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그 출처는 없다.
※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차식(1517-1575, 차천로의 아버지)의 신도비를 류몽인(1559-1623)이 1619년에 썻다고 하는데 류 몽인(1559-1623)이 쓴 어유야담에 문화류씨와 호랑이 설화 야담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은 류 돈(柳墩, 1274-1349)의 묘지명, 문화류씨 영락보(1423년 간, 柳 穎 ? ~ 1430) 서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간) 제42권 황해도 문화편에 나오는 이야기와는 많이 다르게 나오고 있는데, 호랑이가 자기를 구해준 사람의 아버지의 묘자리를 보은(報恩) 차원에서 잡아주었고, 이후 호랑이를 구해준 사람 류 아무개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류 차달이고 승상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 류 차달이 문화류씨 시조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연안차씨 차 일남은 아마도 류 몽인의 어유야담에 나오는 문화류씨 관련 호랑이 설화를 보고 이를 차승색 차공숙으로 둔갑시키는 것 같다.
그리고 1619년 류 몽인이 썻다던 차식의 신도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이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자 승색의 부자가 은밀히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꾀하다가 탄로가 나 고구려 빙주(俜州)로 도망가 숨어살며 그의 할아버지 검부(儉夫) 아내의 성을 따라 양(楊)을 유(柳)로 바꾸어 승색은 유환(柳桓)이라 부르고 공숙은 유숙(柳淑)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5세를 지나 효전(孝全)에 이르러 고려 태조가 남쪽의 정벌에 나설 때 수레를 준비하여 군량(軍糧)을 공급하는 등 그 공로가 매우 컸으므로 효전의 옛날 성인 차씨를 회복한 다음 연안(延安)으로 관향을 삼고 식읍(食邑)으로 천호(千戶)를 받았으며 대광백(大匡伯)에 봉해졌다."
이 신도비를 명을 보면 차 운로 부탁으로 류 몽인이 차천로,차운로의 아버지인 차식의 묘비를 쓰면서 류-차 동원설은 언급되지 않고 고려 개국시 군량 조달을 하였던 류 차달의 이야기를 차효전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첫댓글 내용믈 본후 나름의 소감을
말씀으로 전하면. 그들은 자기들 조상쪽에 좀더 유리하 도록 조금이라도 끄잡아 쓴
흔적이 보이는 군요.문중에
좋은사연 주신것에 깊은
감사 드립니다.
좋은 글 내용 잘숙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윗글에서도 얘기 하듯이 유씨네들이 말하는(조작.낭설), 차씨 3부자가 차원부설원기를 만들어 유포 했다고 하는 그 어떤 이유도 없는데,왜 이렇게 허위낭설을 퍼뜨리는지 알수가 없네요. 그럼.....저 위에...호랑이 설화는 누가 조작 했나요? 유돈의 묘지명을 쓴사람이...아님...영락보의 유경이...아님...가정보의 유희잠이... 가소롭소이다...똑 같은 설화가...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겪었다? 지나가는 소가 웃고...개가 짖고...지렁이가 박장대소 할 일일세...지 똥의 냄새는 모르고.....
소위 당신네 유씨가 말하는-차씨들이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유씨에게 견강부회- 그런 이유 때문에 차씨와유씨가 동조라고 조작 할려고 헀으면 온 조선에 광고-특히 소위 차씨3부자-를 하고 다녔을텐데 어디에 그런 흔적이 있습니까?
당신네들이 말하는 모든 역사나 문중사가 사료에 없으면 믿을 수가 없다고 했는데, 어디 어떤 사료에 설원기가 차씨가-특히 3부자-조작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모두가 다 추측일 뿐이지...
귀하께서는 아무리 철모르는 철부지 아이라 하여도 어찌 이리 경망스러운 뎃글 인지요.
혹여, 연안차씨의 대표자가 아니길 바랍니다.
문화류씨와 구월산 호랑이와 인연 또는 설화는 그 대상이 류차달이던 류효금이던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화류씨와 구월산 호랑이와 인연이 고려시대부터 구전으로 전해 왔고 지금까지 문헌 또는 기록상으로 류돈의 묘지명(지석)에 기록된 것이고 최초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고려개국이 900년초이고 류돈이 1274년생이니 370여년전부터 문화류씨와 호랑이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가 내려온 것이고 그 주체가 누구던 설화나 구전으로 내려오면서 흔히 있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무슨 호랑이가 문화류씨 자손에게 경상의 자리를 주었겠는가? 조상의 음덕과 노력한 결과일 뿐이다. 이런일에 흥분을 한것은 건강에 안좋을 듯...
그런데 류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오는 문화류씨와 호랑이 인연은 류몽인이 그동안 문화류씨 가문이나 당시에 전래되었던 문화류씨와 호랑이 인연 설화를 듣고 각색을 하였는지 아니면 실지 그 당시에 류몽인이 쓴 글처럼 그런 이야기가 퍼져 있는 이야기를 정리하여 쓴 글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나 고려 개국초 구월산 호랑이와 인연이 있는 당사자인 문화류씨 가문에서는 그 주체에 대하여서는 류차달 또는 류효금 설등으로 하여 알려져 왔고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류효금이 호랑이 구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류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오는 것은 솔직히 금시초문이다. 류몽인은 문화류씨와 호랑이 설화를 좀 더 각색하듯 하다.
위에 글 5번으로 추측-유씨네들이 젤로 잘하는-해 보면 유몽인은 차씨와 유씨가 같은 계통-이런 관념 조차도-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 말도 많고 유씨네들이 꼽 씹고 있는 "원파록"은 어디에서부터 나왔을까? ---1619년기사보---여기서 부터 아닌가?
차은로가 자기 형님과 설령 설원기를 위작 하였다면, 유몽인에게 자기 아버지의 신도비명을 부탁할 때에 분명히 "황제"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얘기도 있었을 텐데 그런 내용은 어디에도 없던데... 그럼 도대체 원파록 얘기의 출처가 어디일까?
유씨네들 말대로 정말로 원파록을 차씨들이 조작,날조해서 유씨들을 꼬셨을까? 그 명망 높고 현달한 가문의 지체 높으신 기사보 편찬자께서 한미한 가문인 차씨에게 쏙아서 그런 유치(?)한 선계를 기록 했을까?
별로 배운게 없어 철부지 아이처럼 생각을 해 봐도 의문이 생기는 것은 왜일까? 차천로는 과거시험 볼때에도 상계4대까지 기록 해야 함에도 왜 그 기록을 못 했을까? 소위 유씨네들이 말하는-견강부회-해도 됐을텐데...
배운게 없는 나로서는 여기 "류-차" 에 있는 글로만 볼뿐...왜 차천로는 유씨와 같은 후손이라고 여기저기에 자랑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문집에도 떳떳하게 왜 자랑하지 않았을까? 동생 운로도 마찬가지이고...의문이다.
차씨3부자가 설원기를 조작 했다면 뭔 이득을 볼려고 그랬을까? 이득 본게 과연 있을까? 3부자도 설원기를 보지 못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봤다면 그 어디에선가는 그 증거가 있을텐데 말이다....그래서.....추측일 뿐이다.
1619년이 한 참 지나고 나서 1708년 차씨의 소위-무자보-가 나왔다. 그럼.....선과후가 어찌 되는가? 1619년 당시에 타임머신이 있어 1708년의 미래로 와서 무자보를 보고서 빼꼇을까? 의문이다.
유씨네들이 잘 표현하는-소가 웃고 개가 웃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