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광주의 푸가(삶창)
박관서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1996년 《삶 사회 그리고 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철도원 일기』, 『기차 아래 사랑법』이 있으며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관서 시집 광주의 푸가는 지나간 사건인 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하 ‘광주’)이 시인의 삶에서는 여전한 현재임을 집중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는 광주의 역사적 의의나 현재적 의미가 앞서기보다는 광주의 상처가 박관서 시인의 삶에서 여전히 숨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나아가 시인이 광주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주의 극복은 광주의 재현을 넘어 도달한 시인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재현은 상처에 머물러 있다는 말도 된다. 하지만 광주는 우리에게 상처를 넘어 다른 세계를 창조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상처의 재현을 되풀이 한다는 것은 도리어 광주를 정치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의심도 가능하게 하기에 극복하는 일은 과거의 광주와 미래의 광주를 현재에서 만나게 하는 일이 된다. 이는 과거의 광주와 미래의 광주를 동시에 사는 일이기도 하다.
너를 지우는 시간은 길다
송정리역에서 내려 막국수 한 그릇 말아먹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고개로 간다
몇몇 떠오르는 이들에게 연동을 넣을까 말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린 지 오래되었다
손에 쓸리는 턱수염도 어제 같아서
깨끗이 밀고 네게로 잠행한다
하늘 아래, 날벼락도 이슬비도 휘날리는 깃발도
저항하는 몸도 슬픔도 언어도
붉은 용암으로 분출되는 것을 보았다
묵힌 분노만이 사랑이 된다 애먼
사랑 타령 아니라 이 지상에 살아가는 동안
눈먼 살을 털고 이백여섯 개의 잠든 뼈를 들쑤셔
어둔 울타리에 갇혀 성난 울타리를 짜고 있는
너와 나를 지우며 간다 오래오래
품으로 깃드는 바람이 깊다
-「광주행」 전문
먼저, 「광주행」을 읽을 필요가 있다.
작품의 모두에서 시인은 “너를 지우는 시간이 너무 길다”라고 하지만 이는 작품 전체 문맥을 통해 보면 역설에 해당되는데, 그것은 “어제”를 “깨끗이 밀고” 광주에게로 “잠행”하고 있다는 발언을 통해서도 충분히 설득된다. 그런데 광주의 역사적 의미가 또렷이 드러난 현재에 왜 또다시 “잠행”인 것일까? 그것은 시의 화자가 광주를 다시 살고 싶기 때문이며 아직 광주의 “저항”과 “슬픔”과 “언어”가 살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묵힌 분노”는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인데, “묵힌 분노”는 ‘사라진’ 분노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는 분노이며 과거가 되지 않은 현재의 분노이다. 하지만 시인은 분노에만 머물고자 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아직 살아있는 분노를 사랑으로 범람시키려는 의지 내지는 미래를 구성하는 힘으로 삼고자 한다. 그 사랑은 세속적인 “애먼/사랑타령이 아니”다. 그 사랑은 비겁한 망각과 허튼 용서를 앞세우는 사랑이 아니라, “눈먼 살을 털고 이백여섯 개의 잠든 뼈를 들쑤셔/어둔 울타리에 갇혀 성난 울타리를 짜고 있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아직 시인의 역사가 비극을 반복하고 잇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다. 그럴 때만이 “너와 나를 지우며” 갈 수 있는 것이다. 시퍼렇게 살아있는 과거를 현재 삼아 시인이 꿈꾸는 것은 “너와 나를 지우며” 가는 길인데, 이것은 바로 미래의 광주를 사는 일에 해당된다.
-황규관, 시집해설 「광주를 넘어 광주로, 반복을 넘어 반복으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