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붙들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들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 계시록 3 : 20)
당신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만큼 지혜로울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자신을 게시하신다.
그 분을 찾거나 부를 필요는 없다. 그 분은 당신의 마음 문 앞에 가까이 계신다.
그리고 당신이 문을 열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다. 그 문이 열리기를 당신보다 훨씬 더 원하신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서 삶을 시작하셨을 때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가리킨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방해할 수 없다. 어디를 보든지, 당신은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마치 태양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 이미지가 눈 안에서 활활 탄다.
여기 이 세상에서 는 육체가 더 강하고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곳은 육체를 위한 자연 환경이다.
여기서 영혼은 나그네요 이방인이다. 이 둘은 하늘 나라에서 만난 다.
고전적 참회의 행동은 육체의 지배를 조금이라도 약화하려는 노력이었다. 진정으로 육체를 제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실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보다 이 사랑을 배우기를 간절히 기다리신다.
낚시와 비슷하다. 미끼는 물고기를 기다리고 있다.
물고기가 그것을 삼키면 틀림없이 잡힌다. 몸을 비틀어 튀어 오르려 하겠지만 갈고리에 걸려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붙잡힌 사람은 단단하게 매인다.
육체의 참회와 고행은 효과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 받아 들이고 견딘다. 그들이 입은 피해도 부드럽게 용납한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경험한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가게 하거나 더 확실하게 우리를 하나님께 묶지 못한다.
하나님께 더 단단히 붙들려 있을수록 당신은 더욱 더 많은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마이스터 에카르트 / 설교 (Sermons)
아들의 마지막 전화
미국의 한 부부가 겪은 가슴 아픈 이야기다. 어느 해 휴가철이었다. 사교계에서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부부가 어느 파티에 참석하려고 막 집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저예요. 베트남에서 군복무가 끝나서 돌아가려고요." "정말 잘 되었구나. 그럼 집에는 언제 오니?" "그런데 친구 한 명을 집에 데려가고 싶어요." "물론 괜찮다. 며칠 간 함께 지내렴." "엄마, 그런데 그 친구에 대해 미리 알아둬야 할 사실이 있어요. 다리는 모두 잘렸고 한쪽 팔이 없어요. 얼굴도 심하게 손상되었고 눈과 귀도 한쪽씩 잃었어요. 별 볼 일 없긴 하지만 쉴 곳이 꼭 필요한 친구예요."
그의 어머니는 머뭇거렸다. "쉴 곳이 필요하다고? 그렇다면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며칠 같이 지내거라." "제 말을 이해 못하시는군요. 전 그 친구와 같이 살고 싶다는 말이에요." "얘야, 그 친구와 함께 산다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어서 와서 휴가를 함께 보내자. 그리고 네 친구 말인데 사정은 안됐지만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니? 또 뭐라고 설명할 거니? 네 아빠에게나 친척들한테도……."
이야기를 미처 끝내기 전에 아들은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 부부가 파티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캘리포니아 한 마을의 경찰서에서 전화를 달라는 메시지가 남겨 있었다. 어머니는 전화를 걸어 경찰서장을 찾았다. 경찰서장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길에서 한 젊은이를 발견했습니다. 두 다리와 한쪽 팔이 없고 얼굴은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죠. 눈과 귀도 한쪽씩 없었는데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했더군요. 신원을 확인해보니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무조건적인 수용은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이라면, 그 젊은이를 두 팔 벌려 맞이할 수 있었을까?
/『너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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