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의 동시성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이소라, '바람이 분다'에서)
좋은 번역의 기준으로 ‘반응의 동시성’이 꼽힌다.
의미가 머뭇거리지 않고 독자에게 꽂힌다는 뜻이겟다. 대박이야,
이런 말습관이 외국어권에는 없겠지만, 외화의 자막에는 나타날 수 있다.
‘놀랍다’는 개념의 외국어가 지시하지 못하는 의미의 즉물성을 ‘대박’이라는 속된 표현은 향유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 생생한 이해에 도달한다.
시는 반응의 동시성이 아니라 비동시성을 추구한다. 그또한 시의 노림수가 된다.
자본주의의 속성과 결혼하기 힘든 시의 경외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들은
여러 차원에서 시의 비동시성을 포기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시도 독자의 감성을 동시적으로 자극하도록 요구받는다.
‘자기 홍어 먹을 줄 알어?’라고 물어야 할 경우가 있듯이,
‘자기 시 읽을 줄 알어?’라고 물어야 하는 경우도 이제 우리 시대의 시적 환경이다.
물론, 그럼이라고 단언하는 경우는 대개, 시의 외피와 상관없이 더이상 시라고
부를 수 없는 경우를 상상하기 십상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이 바닥 장사 오래 하다 보면 알아진다.
반대로 보편성을 넘어 언어의 성이 아니라, 자신의 토굴로 피란한 시들도 있다. 이런
시들은 독자의 머리 꼭대기에 주소를 가지고 있기에 독자들은 시를 찾을 수 없다.
문학사는 기억하지만, 왕왕, 독자는 알지 못하는 요령부득의 시들이 그들이다. 도서관용 시.
조용필의 노래가 있고 서태지의 노래가 있다. 조용필이 구축한 노래의 개념을
서태지는 단박에 격파한다. 그것이 예술의 운명이자 활력이기도 하다. 조용필의 노래에
감응하던 대중들이 서태지 음악을 접하고 처음에는 놀랐을 것이나, 이젠 그게 그것이 되었다.
노래와 더불어 동시적으로 반응할 수 있을만큼 관습화되었다. 비동시성이 동시성으로
전환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요즘 한국시의 근황을 살필 때, 조용필과 서태지를 들먹이는 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크레바스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본다. 나는 지금 무엇을 근심하는가.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한국시의 대상이 사라졌다고 한다면 시겁인가?
이 글을 만지고 있는데, 비 온다. 일말의 가을비. 누구 마음대로 비 내리나.
글을 더이상 써야할 이유가 사라진다. 이것이 반응의 동시성인가?
재미 삼아, 반응의 동시성과 비동시성을 생각하며, 몇 가지 다이얼로그를 묶어 놓는다.
K: 어머, 또 시집 내셨네요. 작년에도 내지 않으셨나? 표지 곱다.
이번 시집의 줄거리는 뭔데요?
H: 아, 시집이군요. 축하합니다. 좌우간, 시는 쑥스럽더라. 사는 게 다 그렇긴 하지만.
F: 잘, 읽을게요. 참, 친구 오빠도 시집 냈어요. 제목이 뭐더라. 선생님 거 하고 비슷한데.
생각났어요. 맞다, ‘오빠 한번 믿어봐’
E: 친구 아버지는 퇴직하시더니 시를 자꾸 쓰시더라구요.
시는 시간 많은 분들이 쓰는 건가 봐요.
B: ))침묵((
J: 이렇게 내자면 경비도 만만찮겠다. 시만 쓰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R: 아직도 시 쓰시는군요. 선생님 시는 쉬워서 좋아요.
저 가을 좀 봐 /박세현
나뭇잎 다 비워내고
맨입술 다시면서 남몰래 부르르
떨어보는 미성년 계수나무의 시늉이 앳되다
비린내!
이런 밤을 개기기 위해
만델링과 예가체페가
싸우듯이 뒤섞인 커피 연타로 마신 밤
마음 놓고 길 놓칠 수 있어 좋다
조용히 열 받는 순간
마지막 악장 생략한
저 가을 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