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사용 보고서
찬 기운 떨치고 들어온 햇빛에 초록 잎이 남실댄다. 창 쪽 몇 안 되는 화분에 입춘이 앉았다. 행운목, 파키라, 스파티필룸, 고무나무, 몇 개의 난 화분 등 앞 베란다의 여백에 있는 것들이다. 잔뜩 웅크렸던 줄기와 기운 없던 잎들이 기지개를 켠다. 그들의 탄성이 온 집 안에 번진다.
다가올 봄에는 기둥선인장 하나 들여야겠다. 꽤 값나가는 화분이어서 큰맘을 먹어야겠지만, 새로운 분위기 연출에는 안성맞춤일 것이다. 북유럽 스타일의 거실을 상상하니 벌써 마음엔 새로운 풍경이 들어앉는다.
직장인으로 살 때는 마음에 여백이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여 종일 일하다 돌아오면 피로가 전신을 다운시켰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오직 쉬고 싶을 따름이었다.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버겁다는 생각에 절어 살았다. 가끔 답답한 마음에 여백이 절실할 때 주방 기구 하나씩을 들였다. 약탕기, 죽 제조기, 녹즙기 등. 큰맘 먹고 장만한 것들이 지금은 애물단지가 되어 좁은 집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여백을 잘못 사용한 부작용이다.
전업주부로 살기 시작하면서 생긴 여유로운 마음에 자연스럽게 화초가 들어왔다. 첫 아이를 안고 씻길 때처럼 내게 화분은 꽤 조심스러운 존재였다. 잘못했다가 눈으로 귀로 물이 들어갈까 싶어 허둥대기 일쑤였고,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를 혼자 씻기는 일은 모험이었다. 화분을 들여 함께 사는 일 또한 그랬다. 좌충우돌하면서 어느새 익숙하게 아이를 잘 길렀던 것처럼 하나씩 늘어나는 화분을 기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여전히 화초 가꾸는 솜씨는 미숙하기만 하다. 몇 안 되는 화초의 이름도 자주 잊는다. 전신마취로 대수술을 두 번이나 해서인지 꽃이나 나무의 이름도 잘 외지 못한다. 화분을 들일 때 이름표를 꽂아두지 않으면 하루도 못 가 이름을 까먹는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 주인에 대한 화초의 반항이었을까. 내 손에 붙들려 온 화초들은 대개 오래 살지 못했다. 잘 자라다가 잎끝이 누렇게 변하면서 죽어가거나, 푸르던 몸통이 물컹해지기도 했다. 물을 너무 자주 주어서 그런가 싶어 뒤로 물러나면, 몸이 비틀리며 아우성치는 나무가 생겼다. 그럼 또 황급히 물을 주는 어리숙한 식물 집사(?)였다.
화초를 기르는 일은 시간의 여유나 마음에 여백이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좀더 깊은 사랑과 관심을 주어야 하고, 기본적으로 꼼꼼하고 세심해야 했다. 그 무렵 설렁설렁 대충 사는 나에게 와서 죽어가는 화초에게 죄를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 생활하며 혼자 사는 딸이 강아지를 입양했다가 분리불안이 심해 결국 지인에게 양육권을 넘긴 것처럼 나는 화초에 대한 일방적인 관심을 거두었다. 강아지가 보고 싶을 때면 애견카페에 가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오는 딸처럼 나는 허전한 마음을 메우기 위해 화초 잘 가꾸는 지인의 집을 찾아 위로받곤 했다. 베란다 가득 갖가지 종류의 나무와 꽃을 잘 가꾸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의 손을 잡고 요리조리 살피기도 했다.
화초를 기를 수 없는 아쉬움이 잠잠해 가던 어느 날, 지인의 집에서 잎인지 줄기인지 너울너울 풍성한 나비란을 보고 마음이 요동쳤다. 병원에서 3교대로 일하면서 어떻게 강아지를 보살필 수 있겠느냐고 강력하게 반대한 내 의견을 무시하고 반려견을 안고 들어온 딸의 마음이 순간 이해되었다. 내 마음을 읽은 지인이 나비란 묘목을 갈라주었다. 전주에서 광명까지 애지중지 잘 데려온 나비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자꾸 죽어 더 이상 화초를 기르면 안 되겠다고 했던 다짐은 어디로 가고 그 후로 화분 하나씩 내 삶의 여백에 들여놓기 시작했다.
부부금슬 좋은 집에서 화초도 잘 자란다는 말. 이 말은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고 내 경험인 것도 같지만, 맞는 말이다. 부부가 뜻이 맞지 않아 늘 다툼 속에서 불행한 생활을 한다면 마음에 여백이 있을 리 없다. 전쟁통 같은 날들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내기 급급할 테니 화초에 줄 마음이 있겠는가. 생활이 안정되고 편안할 때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주변에서 내지르는 고통의 소리도 들리고, 여린 꽃과 나무들의 눈물과 웃음도 보인다. 화초도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물이다. 자신이 주인을 고를 수는 없지만, 맘에 맞지 않는 주인에게 항변하는 힘은 있다. 그들도 집 안의 공기를 알아차린다. 집 안에 행복한 웃음이 가득하면 꽃과 나무들도 평온하다. 잎은 더 푸르고 줄기는 더욱 짱짱하다. 사랑을 주는 주인에게 꼬리를 치는 강아지처럼 식물도 있는 힘껏 재롱을 부린다. 아침저녁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주는 이유다.
아직도 화초를 잘 가꾸는 편은 아니지만, 생활이 안정되고 마음에 여백이 생기면서부터는 그래도 제법 화초와 동거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때로는 일상에 쫓겨 잎들이 목이 말라 아사 직전일 때 겨우 물 한 바가지 주는 우를 범하기도 하지만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살아주는 화초들이 대견할 뿐이다.
봄을 데려올 입춘 햇살이 더욱 깊게 들어앉는다. 거침없이 입을 열어 빛을 마시는 화초들처럼 웅크렸던 가슴을 활짝 편다. 손끝에서 싱싱한 잎이 핀다.
첫댓글 투명한 섣달 하늘 아래서도 고운 마음이 따스하게 스며드는 듯.... <여백 사용 보고서>.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