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삶의 투쟁
『나의 투쟁 1』,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한길사, 2016.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은 총 6권으로 된 자전소설이다. 현재 도서출판 한길사는 총3권을 출판했다. 작가 크나우스고르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나 베르겐 대학에서 문학과 예술을 전공했다. 그는 <세상 밖으로>(1998)로 데뷔했으며 노르웨이 문예비평가 상을 받는다. <어떤 일이든 때가 있다>(2004)와 <나의 투쟁>을 발표하며 작가적 명성을 얻는다. 2009년에는 노르웨이 최고문학상인 ‘브라게상’을 받았다. <나의 투쟁>은 인구 500만 정도인 노르웨이에서 50만권 이상 팔렸다. 세계 32개국으로 번역되었고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는 작품이다.
<나의 투쟁> 1권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일상들을 설명한다. 아버지는 두루두루 박식한 사람이며 중학교 교사로 엄격하고 규칙적이었다. 어린 시절 칼 오베는 아버지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으며 말을 어긴 적도 없다. 막내였던 오베는 어머니에겐 안정감을 느꼈지만 아버지와는 공포스러운 관계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행동과 소리에 민감하고 눈치를 보게 되었다.
“심장의 삶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힘이 다할 때까지 움직이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다 멈추어버리면 되니까.”(p.9)는 <나의 투쟁> 첫 문장이다. 심장과 대조적으로 삶은 끝없는 투쟁이다. 매일매일 시간과 싸워야하고 사건과 맞서야 한다. 서른아홉 살이 된 오베는 어느 날 아버지의 부음소식을 듣는다. 형 윙베 크나우스고르와 아버지의 장례절차를 치르며 아버지와의 관계를 하나둘 복기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아버지를 향한 증오뿐이었다. 아버지의 손찌검, 온갖 교활하고 기묘한 방법으로 나를 벌했던 일(p.415)이 떠오르고 오랫동안 혼자 시간을 보냈던 감정들만 남게 된다. 아버지는 이혼 후 할머니와 살았다. 할머니 집에 도착해보니 집은 온통 쓰레기더미로 가득하다. “이 방엔 마약 중독자가 살았던 거 같아. 빌어먹을 마약중독자”(p.445) 아버지는 알콜중독자로 지내며 집 안 가득 썩은 냄새를 남기고 떠났다.
이제 오베가 할 일은 그 흔적을 말끔히 지우는 것. 청소뿐이었다. 이 행위는 주인공에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청소는 아버지와 다른 삶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자 케케묵은 감정을 씻어줄 치유행위다. “아버지가 죽인 것들을 우리가 되살린다는 생각. 우리는 아버지와 다른 멀쩡하고 올바른 인간이라는 걸”(p.465)증명하고 싶었다. 닦고 또 닦기 시작한다. 오베의 마음 안에 너무 견고했던 아버지였지만 결국 밑바닥으로 추락해버리고 삶을 망쳐버린 아버지. “나는 팔이 빠져라 걸레질을 하면서 죽어도 아버지의 전철은 밟지 않겠다고 다짐했다(p.484).
<나의 투쟁>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산다는 것’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를 묻고 있다. 아버지의 투쟁은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아버지의 삶에서 무엇을 꺼내 써야할지 고민한다. 늘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본 것은 삶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은 죽음이었다.”(p.299)며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삶의 묵직한 의미를 끝까지 찾고자 했다.
소설이 주목받는 이유는 일상의 지독성이다. 이는 소설이 허구적이어야 한다는 개념을 파괴했다. 한 개인의 일상은 그 어떤 문학보다 진정성을 담보한다. 그 대담하고 솔직함을 작가는 <나의 투쟁>에서 보여 줬다. 작품을 읽으면서 디테일한 기억에 놀라고 방대한 시간의 복원에 감탄하게 된다. 자신의 세상을 문학으로 승화한 <나의 투쟁>은 치열한 글쓰기의 한 투쟁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삶의 항해 속에서 반복적이고, 폐쇄적이며, 단조로운 불변성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것들이 나를 보호해주기 때문이다(p.49).” 일상은 심장이 뛰는 것처럼 끝없는 반복의 연속이다. 작가의 시시콜콜한 역사가 그대로 소설에 투영되어 독자는 그 세계 속에 빠진다. 그리고 각자만의 ‘나의 투쟁’을 발견하게 된다.
“문학은 항상 유토피아를 지향해왔다”고 말하는 저자는 작가라면 픽션과 픽션으로 맞서 싸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문학이 유토피아를 지향하지만 유토피아에서 그 의미를 찾지 못하면 픽션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픽션세계에서 있는 그대로를 서사하려는 몸부림을 <나의 투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적 요소가 부재한 소설’한 소설이라고 평가받는 이유에 대해선 고심이 필요하다. 독자들은 한 개인의 나르시시즘적인 묘사를 지루하게 받아들이는 층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전적 소설이 문학적 요소와 어떻게 융화될지 작가의 몫으로 남는다.
<서평-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