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요한일서 2장 1~2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 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의 저서 <고독한 군중(Llonely Crowd)>에서 등장하는 용어로서 저자인 리스먼은 이 책에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매우 다른 형태의 인간 유형을 사회적 성격을 통해 분석했습니다. 그는 사회적 성격에 따라 그 유형을 3가지로 분류했는데 전통사회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중요시하는 전통지향형(Tradition Directed Type), 그리고 19세기 초기 공업시대 당시 가족에 의해 가치관이 형성되는 내부지향형(Inner Directed Type), 마지막으로 현대 대중사회의 또래집단의 판단에 의해 자신을 정립하는 외부지향형(Other Directed Type)입니다.
리스먼은 이전까지 사회적 전통과 가정이 맡아오던 그 가치관과 정체성이 현대에 와서는 주변의 또래집단이 대신하게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 외부지향형 인간들은 타인들의 생각과 관심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 집단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타인의 판단이 자기 자신의 개성과 정체성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외면상의 능력이나 사교성에 상관없이 남을 의식함으로서 내면적으로는 고립감과 불안감으로 언제나 번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농촌사회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전도를 해도 남을 의식하고 남이 뭘 하면 자기도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여간해서는 전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진정한 아픔과 고민이 무엇인지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번뇌가 무엇인지를 바로 깨달아 함께 기뻐하며 함께 슬퍼함으로서 사랑을 나누고 고난에 동참할 때 비로소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될 줄 믿습니다.
한마디로 고독한 군중이란 대중사회 속에서 타인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도 내면의 고립감으로 번민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외로움을 느낍니다. 온갖 멋을 부리며 제 잘난 척 살다가도 큰 시련을 당하면 여지없이 추락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인생의 실패라고 부릅니다. 또는 탈선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집단이기주의는 날로 더 팽창해 가고 있습니다. 대리만족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명인으로 또는 인기 배우나 연예인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자살을 하기도 하고 이혼합니다. 28일 오후 방송된 KBS2 '연예가중계'에서는 가수 나훈아의 이혼소식, 전노민 김보연 부부, 조혜련 부부, 류시원 이혼 조정 등 톱스타들의 이혼소식이 잇따르는 것에 대해 '방송에서만 잉꼬' 부부행세를 한 '쇼윈도 부부'에 대해 집중 탐구가 전파를 탔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를 않습니다. 상대를 파악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의 잘못도 잘 드러내놓지 않습니다. 간섭을 받기를 싫어합니다.
이들이 왜 실패를 하게 될까요? 그들은 결코 함께 해선 안 될 대상을 자신의 편으로 착각한 탓입니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를 잘 못합니다. 무력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를 통해 세계는 지금 우리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하게 연결된 듯 보이지만, 그 실상은 군중 속의 고독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날로 그 피해는 극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룰 속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의견, 경험, 관점 등을 서로 공유하고 참여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방화된 온라인 툴(온라인 쇼핑몰)과 미디어 플랫폼으로, 소셜 미디어는 그 자체가 일종의 유기체처럼 성장하기 때문에 소비와 생산의 일반적인 매커니즘(어떤 대상의 작동 원리나 구조에 얽매이지 않고)이 동작하지 않으며, 양방향성을 활용하여 사람들이 참여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사용자들이 만들어 나가는 미디어를 소셜 미디어라 부른다. 소셜 미디어는 접근이 매우 용이하고 확장 가능한 출판기법을 사용하여,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하여 배포될 수 있도록 설계된 미디어를 말한다. 사회적 미디어(social media)는 방송 미디어의 일방적 독백을 사회적 미디어의 대화로 변환시키는 웹 기반의 기술을 이용한다. 소셜미디어는 지식과 정보의 민주화를 지원하며 사람들을 콘텐츠 소비자에서 콘텐츠 생산자로 변화시킨다. 세계는 점점 멀티 미디어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컴퓨터 안에서 채팅을 하고 페이스 북, 트윗터 등에서 어디 사는지, 전화번호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온라인 친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와 접촉 수 있는 이 세상이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욱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한 대만 여성이 친구들과의 채팅 중에 자살을 했습니다. 미국의 종합일간지 USA 투데이(USA Today)는 몇몇의 온라인 친구들이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으나 아무도 경찰이나 기관에 연락하는 등의 직접적 조취는 취하지 않았다고 보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히브리서 11장 1∼3절 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성공할 수 있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기 때문이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마귀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인생은 마귀의 종이요, 실패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두 번째 아담을 우리에게 보내셨으니 곧 나사렛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한 인생을 성공적인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우리가 얼마든지 세상을 이기게 하셨으니 이것이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성공하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자원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도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오실 때 말씀이 육신되어 오셔서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말씀으로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말씀으로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으로 살아가도록 금은보화를 주시거나 기술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실패의 인생으로 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눅 5:5). 이것은 말씀을 자원으로 삼은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아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둘째, 이 말씀의 자원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구원에 이르는 것처럼 말씀의 자원은 성경 66권 속에 무궁무진하지만 그것은 자원일 뿐 아직 내 것은 아닙니다. 성공하려는 자가 땅 속의 자원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땀을 흘리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성공하기 위하여 말씀의 자원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의 기도와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마 7:7) 그러므로 주님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십니다.
셋째, 그리고 이 말씀에 순종을 자원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말씀을 주시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을 베푸십니다. 말씀이 곧 씨앗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얻어 옥토에 뿌릴 때 많은 수확을 거두 듯 성공하려는 자는 말씀에 순종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순종할 때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 지식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역사하시며 믿음의 선진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순종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실패한 인생이 성공한 자의 인생으로 바뀌게 될 줄로 믿습니다.
실패를 해서 괴로우십니까. 내편이 없다고 한탄하고 계십니까? 결국 사람을 믿게 되면 실패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도 당신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잠시 잠깐 지나가는 간이역에 불과합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두 팔을 벌리고 골고다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 한 분외에는 어떠한 피난처도, 쉼터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당신 편이십니다. 그는 당신을 결단코 반대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항상 죄짓고 실수 하는데 어떡하지? 내 옆에 누가 있지?” 하지만, 좋으신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외로울 때 함께 하시고 지쳤을 때 찾아오시고 고난이 닥쳤을 때 찾아오셔서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십니다. 성도가 철없는 실수를 저질렀을지라도 또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고 다시 재기의 기회를 주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대하셨다면 우리가 실수했을 때 나를 올바른 자리로 돌아오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서 썩 꺼져버려. 보기도 싫어. 이제 다시 나타나지도 말아라!”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분은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할 것이요”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은 말씀하시기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하심이라…”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셔서 죄를 조장하거나 관대히 보아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 말씀하시기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설령 우리가 실수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도우심을 바라실 수가 있습니다. 대언자란 변호사 혹은 당신을 변호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본문 요한일서 2장 2절은 말합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 즉 속죄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실수할 때 돌아가는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저희들에게 구원의 길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하심으로 인하여 영생의 길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겪으신 가난과 희생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부요의 길과 치유의 길을 예비해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승리를 통하여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천국을, 빛과 생명의 길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축복의 길을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영원 전부터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자 아름답게 완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편이십니다. 할렐루야!
기도 /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어주시고 친히 축복의 길을 예비해주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확실한 자원으로 삼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에덴동산을 회복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실패한 가운데서도 늘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주심을 믿고 낙심치 아니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