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 중에 신영복 교수님의 영면 소식을 접했다. 사실 난, 신영복 교수의 저작을 읽은 건 이 책이 처음인지라, 아쉬움은 깊다기 보다는 이제 막 무언가를 알기 시작한 어떤 것을 갑자기 툭 떨어뜨리는 듯 다가왔다. 그의 동양고전 독법은 유유하고 깊게 흘렀다. 그 모습에는 이제까지의 동양고전 독법과는 조금 다른 친근함과 적용이 있었다. 통찰은 20년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수형생활에서 정제를 거듭하여 올린 인간의 내면이었다. 점점 내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호기심과 공감이 커지던 중 갑자기 툭 떨어진 결정은, 다시 들어올리기 버거울 듯한 무거움을 지니고 있었다. 의아했다.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어떤 존재에 내 무의식이 이런 무게감을 부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러고보면 깊은 통찰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두루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건가 싶다.
고전은 인간사회의 흐름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반복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선과 악이 비판과 통찰이 엉켜 굴러가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쉽게 체험하기 힘든 한 인간의 극한의 경험은 보편의 인간사에서 끌어올리기 힘든 생각과 성찰을 만들어낸다.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실수와 비판의 반복 안에서 도드라지는 한 인간의 성찰은 매너리즘과 비슷한 시간의 흐름 안에서 내 자신을 들여다보게끔 만드는 죽비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 끌어올린 성찰이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돌아봄이라는 것은,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꾸준하게 행한 자기공부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글 하나하나에 힘을 놓은 흔적이 없다. 20년 20일이라는 수형생활과 임사체험에 가까운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단련하고 있었음은, 한계적 상황을 벗어났음에도 습관처럼 생각의 힘을 유지하게 만들었나 싶었다.
장기복역이라는 관점에서 어쩔 수 없이 서준식의 옥중서한을 떠올렸다. 17년이라는 형기에서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사상에 대한 신념을 고수하며 싸워야만 했던 한 사람의 편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처절함을 느끼게 한다. 신영복 교수가 감옥을 자신의 대학시절이라 표현했다면 서준식의 감옥은 투쟁의 전장이었다. 극한의 환경과 의도된 억압 하에서 두 사람은 자기단련이라는 힘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모습은 조금 달라보인다. 다른 면모가 서준식의 경우엔 조금 쉽게 다가온다. 재일유학생간첩단이라는 조작으로 사건을 만들어 장기복역이 강요된 입장에서 자신의 사상을 고수하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 사건 당시 자신을 지배했던 사상에 대한 회고나 성찰은 왜 남기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에 대한 답 없이 그를 바라보는 건, 그의 수형생활이 대학시절이었지만 변신의 시절이기도 했다는 번외의 결론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난, 다양한 사상과 신념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그를 지배하고 일깨웠던 사상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접하고 싶어졌다. 그것이, 남북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서 국가권력이 자행하여 만들어낸 수많은 무기수형수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사상을 고수하며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한 신현칠 선생님과도 같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작은 배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국가보안법이라는 폭압적인 악법이 21세기에도 존재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내려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작은 경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이제 고인이 되었다.
그의 강의 마지막은 그의 성찰답게 사람을 희망으로 결론지었다. 고전이 그러하고 그의 대학생활은 부대낌에서 비롯되었으니, 사람에서 성찰하고 사람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사회이니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과 이기에 대한 회의가 점점 가득해지는 세상에서 석과불식이라는 화두로 다시 인간을 내세우는 건,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숙제같기도 하다. 인간의 어떤 면모를 미래의 희망으로 내세워야 하는가.. 인간사회가 실수와 비판을 반복해왔음을 생각하면 이 역시 어렵지 않은 고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그리 쉽게 답을 낼 수 있을 만큼 단순하거나 호락하지 않기에 여전히 어렵다. 그리고 자투리처럼 남을 수 밖에 없는 분노.. 한 인간을 잔인하리만치 오랜 시간을 가두어버린 폭력에 대한 분노와 폭력을 행사한 이들에 대한 분노, 그러한 폭력의 과거를 현재로 조금씩 실체화하려는 위정자들의 기만적인 모습들에 대한 분노. 신영복 교수가 극한의 정수같은 통찰을 우리에게 선물하였다면, 그 배경의 위악도 함께 직시해야하지 않을까? 그 위악은 지금의 무지와 혼란의 근원과 닿아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인의 명복을 위해 기도한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신영복 교수님의 영면 소식을 접했다. 사실 난, 신영복 교수의 저작을 읽은 건 이 책이 처음인지라, 아쉬움은 깊다기 보다는 이제 막 무언가를 알기 시작한 어떤 것을 갑자기 툭 떨어뜨리는 듯 다가왔다. 그의 동양고전 독법은 유유하고 깊게 흘렀다. 그 모습에는 이제까지의 동양고전 독법과는 조금 다른 친근함과 적용이 있었다. 통찰은 20년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수형생활에서 정제를 거듭하여 올린 인간의 내면이었다. 점점 내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호기심과 공감이 커지던 중 갑자기 툭 떨어진 결정은, 다시 들어올리기 버거울 듯한 무거움을 지니고 있었다. 의아했다.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어떤 존재에 내 무의식이 이런 무게감을 부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러고보면 깊은 통찰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두루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건가 싶다.
고전은 인간사회의 흐름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반복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선과 악이 비판과 통찰이 엉켜 굴러가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쉽게 체험하기 힘든 한 인간의 극한의 경험은 보편의 인간사에서 끌어올리기 힘든 생각과 성찰을 만들어낸다.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실수와 비판의 반복 안에서 도드라지는 한 인간의 성찰은 매너리즘과 비슷한 시간의 흐름 안에서 내 자신을 들여다보게끔 만드는 죽비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 끌어올린 성찰이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돌아봄이라는 것은,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꾸준하게 행한 자기공부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글 하나하나에 힘을 놓은 흔적이 없다. 20년 20일이라는 수형생활과 임사체험에 가까운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단련하고 있었음은, 한계적 상황을 벗어났음에도 습관처럼 생각의 힘을 유지하게 만들었나 싶었다.
장기복역이라는 관점에서 어쩔 수 없이 서준식의 옥중서한을 떠올렸다. 17년이라는 형기에서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사상에 대한 신념을 고수하며 싸워야만 했던 한 사람의 편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처절함을 느끼게 한다. 신영복 교수가 감옥을 자신의 대학시절이라 표현했다면 서준식의 감옥은 투쟁의 전장이었다. 극한의 환경과 의도된 억압 하에서 두 사람은 자기단련이라는 힘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모습은 조금 달라보인다. 다른 면모가 서준식의 경우엔 조금 쉽게 다가온다. 재일유학생간첩단이라는 조작으로 사건을 만들어 장기복역이 강요된 입장에서 자신의 사상을 고수하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 사건 당시 자신을 지배했던 사상에 대한 회고나 성찰은 왜 남기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에 대한 답 없이 그를 바라보는 건, 그의 수형생활이 대학시절이었지만 변신의 시절이기도 했다는 번외의 결론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난, 다양한 사상과 신념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그를 지배하고 일깨웠던 사상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접하고 싶어졌다. 그것이, 남북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서 국가권력이 자행하여 만들어낸 수많은 무기수형수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사상을 고수하며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한 신현칠 선생님과도 같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작은 배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국가보안법이라는 폭압적인 악법이 21세기에도 존재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내려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작은 경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이제 고인이 되었다.
그의 강의 마지막은 그의 성찰답게 사람을 희망으로 결론지었다. 고전이 그러하고 그의 대학생활은 부대낌에서 비롯되었으니, 사람에서 성찰하고 사람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사회이니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과 이기에 대한 회의가 점점 가득해지는 세상에서 석과불식이라는 화두로 다시 인간을 내세우는 건,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숙제같기도 하다. 인간의 어떤 면모를 미래의 희망으로 내세워야 하는가.. 인간사회가 실수와 비판을 반복해왔음을 생각하면 이 역시 어렵지 않은 고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그리 쉽게 답을 낼 수 있을 만큼 단순하거나 호락하지 않기에 여전히 어렵다. 그리고 자투리처럼 남을 수 밖에 없는 분노.. 한 인간을 잔인하리만치 오랜 시간을 가두어버린 폭력에 대한 분노와 폭력을 행사한 이들에 대한 분노, 그러한 폭력의 과거를 현재로 조금씩 실체화하려는 위정자들의 기만적인 모습들에 대한 분노. 신영복 교수가 극한의 정수같은 통찰을 우리에게 선물하였다면, 그 배경의 위악도 함께 직시해야하지 않을까? 그 위악은 지금의 무지와 혼란의 근원과 닿아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인의 명복을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