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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아 가면서 수 많은 만남과 부딪히게 된다.
어떤 만남은 아주 큰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경우가 있다.
박정희와 박태준의 만남
●박정희
"자네가 제철소를 맡아"
1964년 박태준은 대한중석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을 받았다.
박정희는 이미 박태준을 대한중석에서 경영 능력을 시험해보고 종합제철소를 맡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해외 출장을 나갈 기회가 있으면 선진 제철소를 유심히 살펴보라"고 박태준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1965년 6월 청와대에서 박정희는 박태준을 불렀다.
박정희는 박태준으로부터 일본 철강업계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나는 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 거야. 자네는 제철소를 맡아.
고속도로가 되고 제철소가 되면 공업국가의 꿈은 실현되는 거야.
자네의 능력과 뚝심을 믿네"라고 말했다.
●대일 청구 자금으로 포스코 건설 박태준은 포항제철 건립에 착수했지만 문제는 1억달러에 이르는 자금이었다.
박태준은 1969년 1월 한국과 워싱턴을 오가며 세계 5개국 8개 회사의 연합(KISA)과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그는 귀국하던 길에 하와이에 잠시 들러 낙담한 채
하와이 바닷가를 걷다가 '대일 청구권 자금'을 활용해 제철소를 지어야겠다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했다.
그는 국제전화로 박정희에게 자기 생각을 알리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날아가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자금 지원 협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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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과 이명박의 만남
이명박은 현대건설 입사 필기시험에 합격했음에도
학생운동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전과 때문에 최종입사가 불가능하게 되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젊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막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부당한 취직방해를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이에 이낙선 청와대 민정비서관은 현대건설에 이명박의 과거를 문제 삼지 말도록 조치했다.
면접에서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창조입니다"라고 답했고,
결국 1965년 현대건설 경리과 평사원으로 입사하게 된다.
훗날 정주영 회장은 이명박에 대해 "얼굴은 새카만 녀석이 눈은 살아있었다.
한쪽 눈이 찌그러져 있는데, 똘망똘망하게 보여 합격시켰다.
나중에 청와대에 갔더니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명박이라고 있지요? 아주 고약한 녀석인데 정치권에 기웃거릴 줄 알았더니 현대로 갔더군요.
인간 좀 만들어 보세요.'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박
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에게 "이명박을 잘 보라!"며 감시 할 것을 주문했지만,
정 회장이 "이명박을 잘 돌봐줘라"는 말로 오해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어쩌면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에 학생운동 출신이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쓸 정도로
이명박이 배짱이 있다는 점을 정주영이 눈여겨 보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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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첫만남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 가운데 이승만 박사와의 첫 만남 이야기를 읽었는데 매우 흥미로웠다.
두 사람은 1933년 2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처음 만났고,
이듬해 10월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신랑은 59세, 신부는 34세였다.
글이 실린 원문을 찾아보니 1988년에 출간된 『대통령의 건강』이라는 책이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남편의 개인적인 생활 모습 위주로 쓴 회고록이다.
이 책은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 (도서출판 촛불, 2007)으로 수정본이 다시 나왔는데,
최근 어렵게 구해 읽어보았다. 제1화 <첫 만남>의 일부를 옮겨 놓는다. (pp.18-21)
지금으로 부터 55년 전 1933년에 내가(당시 33세) 이 박사를 처음 만나게 된 곳은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 호반에 있던 '호텔 드 뤼씨(Hotel de Russie)'의 식당이었다.
그때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프랑스 파리를 경유해서 스위스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이 박사는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하고 있던 국제연맹에서
만주의 한국 동포들이 또다시 일제의 학정 밑에 놓이게 된 애절한 사연을 알리고,
한국을 독립시켜야만 극동의 평화가 유지된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국제연맹 방송을 통해,
각국 대표와 신문기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일제의 만행과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 호텔에 여장을 푼 이튿날(1933.2.21),
저녁식사를 하려고 4인용 식탁에 어머니와 내가 단둘이 앉아 있을 때,
이미 만원이 된 식당에서 이 박사도 식사를 하려고 앉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이때 지배인이 우리에게 와서 정중하게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으신데,
함께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하고 양해를 구해서, 우리는 승락을 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온
이 박사(당시 58세)의 첫 인상은 기품있고 고귀한 동양신사로 느껴졌다.
그는 프랑스어로 "좌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앞자리에 앉았다.
곧 바로 메뉴를 가지고 온 웨이터에게 높은 신분으로 보였던 이 동양신사가 주문한 식단을 보고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라는 시큼하게 절인 배추와 조그만 소시지 하나,
그리고 감자 2개가 전부였다.
당시 유럽을 방문하는 동양 귀빈들의 호화판 식사와는 달리 값싼 음식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런지 이 동양 귀빈의 너무도 초라한 음식접시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숙녀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서양 신사들과는 달리 온화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 오자 프랑스어로 "본 아뻬띠(맛있게 드세요)"하고
예의를 갖춘 후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었다.
나는 이 동양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을 느꼈다.
무의식중에 나는 이 분의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눈이 마주치게 되어 무안해서, 미소를 머금고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오셨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분은 힘 있게 '코리아'라고 대답했다.
나는 여행하기 직전에 우리 독서 클럽에서 보내 주어 읽고 있던
<코리아>라는 글 속의 '금강산'과 '양반'이라는 한국말이 생각났다.
내가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이 산다지요?"하고 말했더니, 그분은 무척 놀라면서 반가워 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을 알아주는 외국인이 드물었고, 또 알아도 일본의 악선전 때문에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자기 조국 '코리아'를,
그것도 아름다운 '금강산'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분을 무척 기쁘게 한 것 같았다.
그때 지배인이 베른(Bern)에서 온 기자가 그를 찾아왔다고 전했다.
그러자 그분은 우리에게 "덕택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실례합니다."하고 급히 자리를 떴다.
다음날 나는 신문에서 그분의 사진과 한 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신문기사에서 그분은 "한국이 독립해야 아시아의 평화는 이룩될 수 있다"고 열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La Tribune D'Orient>(1933.2.22)
별 생각 없이 나는 그 기사를 오려 봉투에 담아서,
내 이름은 쓰지 않은 채 그분에게 전해달라고 호텔 안내에게 맡겼다.
그런데 답장이 왔다. "나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내주신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리승만"이라고.
다음날 다른 신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기사가 또 실려서 보내드렸더니,
답례로 그분은 차 대접을 하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
처음엔 사양하다가, 나는 그분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분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정식 국적과 여권도 없이 동분서주하며,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을 찾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지칠 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8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넘치는 정열과 젊음을 지닌 한국의 독립투사와 얘기를 나누게 되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이 끌려갔다. 나는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느꼈지만,
이 외로운 한국 독립운동가의 바쁜 일손을 돕기로 했다.
나는 이 당시 33세로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속기와 타자가 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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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과 이승만의 만남
[칼럼]
'마법의 이름' 이승만, 스탈린을 격파...독립전쟁 승리, 건국의 길 활짝
김구의 배신 불구...미국을 이용한 유엔전략에 압승
여류 독립운동가 임영신-모윤숙, 필사적인 외교 헌신
2월의 건국 드라마...꺼져가는 대한민국 운명 살리다
<'국군을 죽어 말한다'의 시인 모윤숙.>
2월의 건국 드라마 ---‘마법의 이름’ 이승만
미모 여류시인과 인도 외교관의 ‘달밤 데이트
이승만, 스탈린을 격파...31대2 독립전쟁 압승
“남산의 저 소나무들이 말라죽어도 저의 형님에 대한 신의는 변함이 없습니다.”
한 살 아래 김구가 이승만 박사에게 맹서한 말이다.
1947년 11월 유엔감시 남북한 총선 결의안이 유엔서 통과되자
이승만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며 자유민족세력의 단결을 위해 믿음직스럽지 못한 김구를 여러번 만나 결속을 다진다. 소련이 유엔결의를 거부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김구는 단언했다.
“남한만이라도 선거해서 독립정부를 세워야한다. 제주도에 세우더라도 한반도 대표정부다.
누가 단독정부라 하느냐. 유엔이 인정하는 중앙정부다.”
이듬해 1월22일 예상대로 소련이 ’북한선거‘를 거부했다.
26일 갑자기 김구가 남한단독선거를 거부한다.
철석같이 약속한지 두달도 안돼 김구가 태도를 돌변한 것이다.
행여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남산 소나무들이 벌써 말라죽은 모양이군” 허탈한 이승만은 임시정부 때부터 겪은 일인지라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유엔 한국위원단 역시 두 패로 갈린 것.
한반도전체 선거가 불가능해졌으니 철수하자는 측과,
유엔 결의이므로 선거 가능지역 남한만이라도 실시해야 한다는 측의 공방이다.
결국 위원단은 유엔본부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고 위원단 의장 메논 박사(인도 대사)를 유엔에 파견하기로 한다.
즉, 대한민국의 건국은 중립국 인도 외교관 메논의 손에 쥐어진 운명이 되었다.
여류시인 모윤숙, 메논을 달밤 드라이브 이끌어내
메논이 유엔으로 떠나기 전날 2뤌13일 밤, 이승만은 다급하게 전화 다이얼을 돌린다.
그때 여류시인 모윤숙(毛允淑, 1910~1990)은 창밖의 겨울 달을 바라보며 시국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엊그제도 이승만 박사는 메논을 데려오라 해서 이화장 만찬에 참석,
남한단독선거의 정당성 이야기로 열변을 토하는 것이었다.
김구의 배신, 이승만의 자신감, 유엔본부에 가는 메논이 과연 한국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
모윤숙은 안절부절 뒤척이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니나 다를까, 또 이승만 박사의 절박한 목소리.
“이봐요. 윤숙이. 밤이 늦었지만 메논씨를 또 데려와 줘요. 아주 중요한 일이오.”
“아이 박사님도...지금 몇 신데 여자가 밤중에 외국 남자한테 무슨 청을 할 수 있나요...”
“이거 봐요.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판에 밤이고 아침이고가 어딨나.
제발 전화 좀 걸어 봐요. 이게 마지막 청이오.”
이승만은 35살아래 막내딸 같은 모윤숙에게 매달린다.
유엔한국위원단이 묵고 있는 호텔은 바로 모윤숙의 집앞 길건너에 있었다.
이박사의 간절한 심정은 자신의 뜻이기도 하다.
메논을 설득하고 다짐받아야 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무슨 핑계로 밤중에 그를 끌어낸담.....
다행히도 메논은 문학과 역사를 좋아하는 박사 문화인,
첫 만남부터 타고르 시로 마음이 통하고 양국 역사와 문화 등 풍성한 화제로 한 달 넘게 지냈다.
영국식민지 인도 역시 1년전 8월15일에 독립했잖은가.
그 독립영웅 간디가 2주전에 죽었을 때는 추모식도 메논과 함께 하였고,
며칠 전엔 인도의 명물 타지마할 무덤은 달밤에 봐야 낭만을 즐길수 있다 해서
모윤숙도 우리 궁궐과 임금님 무덤들도 달밤에 보면 신비롭다고 맞장구쳤던 기억이 났다.
“의장님, 달빛이 참 좋은데요...제가 좋아하는 금곡릉 드라이브 어떠신가요?”
반갑지만 때 아닌 제의에 메논은 몇 번 거절하다가 애원하는 간청에 못 이겨 승용차를 모윤숙의 집 앞에 대고 말았다.
미안하다는 인사로 승차한 모윤숙은 차가 동대문 근방에 이르렀을 때 말을 꺼낸다.
“날씨도 차가운데 어디 가서 한국의 건강식 인삼차 좀 드시고 가시지요”
염치 불구하고 차를 이화장으로 이끌어 문 앞에 세우게 하였을 때 메논이 소리쳤다.
“노티 걸(Naughty girl)”
그때 기다리던 이승만이 바지 저고리로 달려나와 메논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목적지가 여기 아닌데요” 메논은 겸연쩍게 웃으며 끌려들어가 또 이승만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이날 밤 이승만의 메논 설득은 결정적인 역사를 만들어낸다. (모윤숙 지음 [회상의 창가에서] 1980)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메논.인도 대사인 그는 유엔에서 남한단독선거안을 관철시킨다.>
유엔에 임영신, 서울에 모윤숙---이승만, 필사적인 외교전
유엔 본부엔 이승만이 지난해 파견한 독립운동가
임영신(任永信, 1899~1977)이 임병직(林炳稷, 1893~1976)과 맹활약을 펴고 있었다.
엘리너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 노벨상 수상작가 펄벅을 비롯, 유엔사무총장, 필리핀 로물로 등 주요 우방들의 외교관들과 광범한 로비를 펼쳐 본결의안 통과에 공을 세운 교육자 임영신, 이제 또 다시 새로운 장애물을 만나 촛불처럼 흔들리는
‘대한민국 건국’의 마지막 장벽을 뚫기 위해 낮과 밤을 잊었다고 자서전에 기록해 놓았다.
메논이 유엔으로 떠난 후 이승만은 전보를 10통도 더 보냈다.
타이프를 치고나서 ‘매리언 모(Marion Moh)’
로 모윤숙의 세례명을 찍고 모윤숙에게 사인하라 말했다.
“매리언 이름이 아니면 읽어보겠소? 이건 그대가 보내는 한민족의 SOS인줄 아오”
당시 뉴욕 맨해튼 아닌 롱아일랜드 레이크석세스에 위치한 유엔본부에서 메논은 꼬박꼬박 답장을 보냈다.
그는 이미 한국독립을 성공시키자고 결심한 터이다.
2월 19일 유엔에서 메논은 남북한의 현황을 길게 보고하면서 이렇게 강조한다.
“이승만이란 이름은 한국에서 마술 같은 위력을 가졌다.
그는 조국통일 신념이 확고하고 뛰어난 애국자로서 오래전부터 한민족 전체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되어있다.
인도의 간디와 네루처럼.”
2월26일 유엔은 마침내 ‘한반도 대표지역 남한 선거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찬성31. 반대2.기권11. 이승만은 또 한번 스탈린과의 싸움에서 일방적인 판정승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스탈린과의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임시정부 수립직후 레닌의 공산화공작 및 스탈린 집권시 공산세력에 탄핵받은 지 29년만에,
그리고 해방후 귀국하여 ‘반공 선언’후 3년 만에 길고 긴
자유독립투쟁의 최후승리!!
1919년 국제연맹시절부터 미국의 힘을 이용한
글로벌 파워 활용전략, 즉 이승만의 ‘용미(用美)’ 외교독립운동이 마침내 대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이승만 1인 투쟁이 대한민국 건국의 길을 활짝 열었다. 건국후 6.25는 이승만과 스탈린의 마지막 결전이다.
뒷날 메논은 회고록에 썼다.
“이것은 나의 임무 수행중에 머리보다 가슴을 우선시킨 유일한 예외이다.
이승만과 매리언의 초인적 애국심에 누구라도 감복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유엔서 돌아온 메논은 3월 인도의 외무장관으로 발령 나서 귀국하였고,
몇 년후 모윤숙을 인도로 초청하여 메논부부가 극진히 대접하기도 하였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시인 모윤숙이 일제때부터 쓴 '렌의 애가'는 70년대까지 53판을 기록하며
90년대에도 속간되는 장기 베스트설러였다. 모윤숙은 1960년부터 국제펜(PEN)클럽 한국회장을 지냈다.
2022-02-12
인 보 길 기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