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추사 유배지 김정희 느티나무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등 다섯 왕 시대를 살았다. 고조부 김흥경은 영조 11년에 제165대 영의정에 올랐다. 김흥경의 넷째 아들인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사위이다. 김한신과 화순옹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이에 김한신은 바로 손위 형 김한우의 아들 김노경을 양자로 삼았다.
김정희는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의 안평대군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이다. 또 고증학, 금석학은 물론 문인화의 예술에 의미를 더한 새 경지를 열었다.
명문가 집안에 천부의 빼어난 능력을 갖추었으나 김정희는 세 번의 유배형 고통을 겪어야 했다. 첫 번째는 아버지 김노경의 1830년부터 3년간의 강진현 고금도 유배이다. 두 번째는 본인이 윤상도의 상소 초안을 써준 일에 연관되어 죽음 직전의 고문 뒤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여의 제주도 대정현 유배이다. 세 번째는 1851년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로 1년 반의 함경도 북청도호부 유배이다.
부러울 것 없는 환경과 능력, 명분과 대의에 거침없었던 기개와 소신을 갖춘 조선의 선비 김정희의 유배는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익은 벼가 고개 숙이듯 인격을 완성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유배지로 가던 때와 해배 되어 나오는 김정희의 행동이 다르다.
김정희가 1840년 쉰다섯 살에 혹독한 고문을 받고 제주도 남쪽 대정현으로 유배 갈 때이다. 전주에서 일흔한 살의 서예가 창암 이삼만(1770~1847)을 만났다. 이삼만이 글씨를 보여주자, 김정희는 ‘노인장께선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라고 인정머리 없는 혹평을 했다. 또 해남 대흥사에서 동갑내기 오랜 벗 초의(1786~1866)에게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전의 현판 ‘대웅보전’ 대신 자신의 글씨를 달게 했다.
제주에 있을 때인 1843년이다. 당대의 대선사인 백파(1767~1852)가 부인상을 당한 김정희에게 위로의 문상 편지를 보냈다. 이에 김정희는 ‘백파망증 15조’라는 제목의 논쟁 답장을 보냈다. ‘망증(妄證)’은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정상을 벗어난 증언’이다. 백파의 편지 내용 글을 문제 삼아 백파가 망령이 들어 이치에 맞지 않은 주장을 한다며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아무리 자신의 견해와 다르더라도 문상에 논쟁으로 맞선 것은 자신감이라기보다 지적인 오만함이리라. 하지만 이를 통해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앤 서릿발 같은 노력과 기개를 엿볼 수도 있다.
1848년 유배지를 나온 김정희는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초의를 만나 ‘내 글씨를 떼어내고 원교의 현판을 다시 달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네.’라고 했다. 이어 정읍의 백파에게 갔다. ‘망증’을 사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날 폭설이 내려 만나지 못하고, 훗날 백파선사 비문을 지어 사죄했다. 또 서둘러 전주로 이삼만을 찾았으나 2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김정희는 ‘명필 창암 완산이공삼만지묘’라는 묘비명으로 사죄했다.
김정희의 대정현 첫 유배 적거는 포교 송계순의 집이었다. 그러다 세한도의 집을 본떠 만든 지금의 제주추사관인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제주 유생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다. 또 ‘추사체’를 완성하고 생애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를 비롯해 많은 서화를 남겼다. 1856년 10월 10일 일흔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정희의 제주 유배 적거를 지키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보며,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며 소년 이백을 깨닫게 한 할머니의 모습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