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뿌리깊은 그루터기]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뿌리깊은 그루터기]
박영재 시집 / 조선문학학시인선 323 / 조선문학사(2012.07.10) / 값 8,000원
================= =================
내 고향 7월은
박영재
7월엔
산도 들도 멍이 든다
장대비 회초리질로
쏟아지면
아픈 매질에
퍼렇게 멍이 든다
멍이 들어
살이
되고 피가 되어
가을로 익는다
7월은
가을을 가꾸는 달이다
레스토랑에서
박영재
한 잔의 포도주로
하루치의 피곤을 풀어본다
레스토랑 푹신한 소파
안주 삼아
안주보다 더 달콤한
미모의 여인
와인 없이도 눈빛으로
발효되는 취기
레스토랑은
내가 찾는 지상의
낙원
저 별은
박영재
무슨 그리움이 있어
저 별에 가 닿을까
무슨 바람 있어
저 별에 가 닿을 수 있을까
그리움과
바람으로 하늘바라기 하면
저리 별이 될 수 있을까
별이 되어
가슴속 깊은 어둠
비춰낼 수 있을까
오늘도 별을 쳐다보며
별 하나
가슴으로 키워본다
봄바람
박영재
가지가 흔들리는 건
바람 때문이다
바람도 없이
흔들리는 가지도 있다
제멋대로 뻗은
생각의가지
가지 끝에
바람 이는 날엔
그리운
얼굴 하나 있다
민들레∙1
박영재
길섶이나 돌담 틈새가
고향인 민들레
올려다 본 고향 따로 있다
노란 모자 눌러쓰고
향수에 젖어 있다
담쟁이
박영재
용케도
틈새만 골라 잡고도
월장을 한다
담쟁이 뿐이랴
허물어진
생의 틈새에만 끼어드는
그런 얌체도 있지
벼랑까지 기어오르는
지상의 무릎 위에 기생하는
모든 슬픔
네가 가로 막고선
담장을 넘고 싶다
넘어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다
느티나무
박영재
느티나무는
세월을 벗하고 산다
더러는
가지에 걸치고
더러는
허리에 감으며
세월과 함께
세월로 산다
잠시 쉬어가는 이 있어
내 나이를 읽어주고
내 키를 재보고
내 허리를 안아주면
그것으로 다하는
내 몫
동구나 지키며 사는 텃수로
항시 쉬어가는
나그네를 기다린다
밤눈
박영재
밤새 내린 눈으로
울타리 치고 싶었다
울타리 쳐 놓고
따뜻한 아랫목에
잠들고 싶었다
잠들어 꿈이라도 꾸는 날이면
그대 위한
그리움이 되고 싶었다
그리움이 되어
나란히 발자국 찍고 싶었다
시를 쓰면
박영재
괴롭고 허전할 때엔
마음 펴내
시로 담아내고
외롭고 슬플 때엔
인생길 친구 되어 시를 쓴다
시를 쓰면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바위 하나 스르르 사라지고
흐르는 마음밭에
평화가 원고지를 펼쳐준다
시를 쓰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진실하게
박영재
꽃은 피었어도
소리가 없고
새들은 울어대도
눈물이 없다
사랑은 불처럼 타도
보이지 아니하고
진실은 가리워 있어도
속살까지 볼 수 있다
숨길 수 없는 진실
숨길수록 빛이 나는 진실
사랑이란
박영재
사랑이란
강이다
흐를수록 길어지고
넓어져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 길이를 좇고
넓이로 살고
깊이에 빠져 죽었을 때만
사랑은 완성되는
사랑은 강이다
그 강에 투신했을 때만
사랑은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
=================
■ 책 머리에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선조님들이 계셨고 우리 가문이 이어지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조상들이 나의 혈통적 뿌리이듯이 나 또한 나의 후손들에게는 뿌리임이 틀림없으리라.
나는 종손으로 고조부(高祖父)께서는 영종(英宗)때 통덕랑(通德郞)에 통정대부(通政大夫)요 증조부(曾祖父)께서는 헌종(憲宗)때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충무위부사(忠武衛副司)등의 직책을 맡으며 우리 가문의 뿌리가 되어 주셨다. 시간이 흘러 일제 강점기와 대동아전쟁 중인 1943년 2월 22일에 태산같이 우뚝 서서 가사(家事)를 일으키시며 4형제를 낳아주신 아버지(朴在洛)께서 39세의 젊은 청년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시고 남기고간 올망졸망한 4형제를 32세의 젊은 어머니께서 책임지셔야만 했다. 나는 장남이지만 13세였고 막내인 4째가 첫돌을 지낸(1942년 9월 15일) 상태였으니 그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이란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정을 지키시고 다시 일으키시며 자식들을 남부럽지 않게 가르쳐서 각 분야에서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었음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다음으로는 억척같이 살아오신 어머니의 기도와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성경에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13)”는 말씀처럼 이제는 그 형제의 직계 후손이 85명의 대가족을 이루게 된 것은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와 반석같이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가 여러 명 배출되어 복음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큰 축복임을 믿는다.
그리하여 나의 어머니 조광녀 권사의 헌신과 충성의 삶이 아려져 성결교단의 역사인물로 선정되어(성결교회 인물전 제9집) 그저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가문에 신앙의 뿌리가 깊이 내려지고 새순이 자라나 무성한 숲은 이루게 하심을 생각하면서 부족한 사람의 제1시집『반석 위의 백합향』에 이어 두 번째 시집으로『뿌리 깊은 그루터기』를 발간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또한 시조시집으로『산수와 동행』에 이어 두 번째 시조집으로『구름을 타고 땅을 보니』를 출간하게 되니 그저 감격스러울 뿐이다.
이 같은 일은 부족한 사람을 위하여 아낌없는 지도와 가르치심으로 이끌어주신 조선문학의 발행인이신 박진환 박사님과 조선문학문인회 선․후배들의 애정 어린 격려에 용기를 내게 된 것을 감사드린다. 그리고 문학의 초보자이고 그루터기에 돋아난 새순 시들지 않도록 잘 보살펴주실 것을 바라고 믿어본다.
뿐만 아니라 오늘 이 땅 위에 살게 하신 천국에 계신 어머니와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 이금녀 권사와 나의 피붙이인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특별히 시집 출판 비용을 전담하여 사랑을 표해 주신 내 고향 양구의 이재영 님께 진심으로 눈물겹도록 감사를 드린다.
2012년 여름에
영천(永泉) 박영재(朴永宰)
.▩.
=============== == = == ===============
박영재 시집 [뿌리깊은 그루터기]
[ 해설 ] -
思鄕 ∙ 斜陽과 동행하는 求道의 길
박진환(문학평론가•문학박사)
1. 前提
마음 한 켠에 思鄕을, 다른 한 켠엔 斜陽을 동무하고 동행하며 구원의 길을 좇아 쉬임없이 족지를 찍고 가는 노경의 시인이 있다.
비록 육신은 지체부자유의 몸이지만 한 번도 정지함이 없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딛는 고행과 같은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노시인, 육체와는 달리 정신적 지양만은 노경의 인생황혼을 앞에 하고도 거침없는 자유분방함을 보여주며 당당한 행보를 옮기고 있는, 斜陽을 길동무 하는 노시인이 있다.
思鄕과 斜陽을 동행하고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박영재 시인이 바로 장본인이시다. 강원도 양구에서 사시면서도 전국 방방곡곡에 시인의 족지가 찍히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오늘도 거침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계신 분이 박영재 시인이시다.
시인의 행보엔 함께하는 길동무가 있고 또 정신지향의 길은 마치 철도의 궤적처럼 양갈래 길로 주어지고 있는데 길동무는 思鄕과 斜陽이고 양갈래 길은 시인의 길과 신앙의 길이다. 시인은 길벗과 함께 쉬임없이 두 길을 걸어오고 걸어가면서 오늘도 자랑스런 족지를 찍으며 행려의 길을 걷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단독자 시대의 외로움을 아랑곳 하지 않고 뚜벅뚜벅 내딛는 시의 길과 신앙의 길은 기실 두 길이 아닌 하나의 길로서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내딛는 구도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프랑스의 비평가인 R.M.알베레스는 시인을 미지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신앙하는 신앙인이어야 한다고 피력한 바가 있다. 박영재 시인의 독실한 기독정신과 시정신을 앞장세워 걷고 있는 구도의 길도 신앙인으로서의 시인과 기독인으로서의 시인의 길이 각기 따로따로가 아니란 점에서 시인이 걷고 있는 두 길은 구원의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구도의 길이 되어주기도 하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미지의 세계에의 신앙, 신앙의 궁극으로서의 구원의 세계를 믿는 박영재 시인은 시인이자 신앙이란 점에서 동류항의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동류항은 시인이 걷고 있는 길을 구원을 향한 구도의 길로 보아줄 수 있게 하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그보다는 시집 『반석 위의 백합향』에 이어 이번에 상재하는 두 번째 시집『뿌리깊은 그루터기』는 이를 시로써 보여주고 있어 설득력과 신뢰를 획득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시를 제시, 구체화 했을 때 시와 신앙과 구원으로서의 시인이 걷고 있는 구도행은 그 본태를 극명히 드러낼 것으로 본다.
2. 동행으로서의 思鄕과 斜陽
이번에 상재한 시집『뿌리깊은 그루터기』에는 1백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시를 통해 분류해보면 세 詩域이 제시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하나는 思鄕을 중심으로 설정되고 있는 思鄕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노경의 시인이 맞고 있는 斜陽공간,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옆에 끼고 동행하면서 구원의 길을 향해 중단됨이 없이 내딛고 있는 시와 신앙의 공간을 세 번째 詩域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각 시역별로 시를 제시, 구체화 했을 때 시집『뿌리깊은 그루터기』의 시 세계는 그 본태를 여실히 드러내줄 것으로 보고 시를 제시, 구체화해 보기로 한다.
2-1. 思鄕공간
시집 제1부를 장식하고 있는 ‘思鄕譜’는 고향을 시의 공간으로 설정, 현실공간으로서의 고향, 가버린 날의 옛으로서의 공간, 그리고 고향이 환기시키는 인사적 ․ 정서적 ․ 정신적 내면풍경으로서의 정신공간으로 나누어 조명해 볼 수 있게 한다.
먼저 현실공간으로서의 시편부터 제시해 보기로 한다.
산촌 고향 마을에
저녁연기 떠오르면
멍석자리에 모깃불 피우고
동네사람 둘러앉아
옥수수 하모니카 삼아 곡조 없는 노래방 되고
메아리 없이도
웃음꽃 활짝 피워 정다운 이웃사촌이 된다
눈 매운 쑥 연기는
메이커 없는 천연 모기향
향으로 모기장 둘러친
흐르는 시간 속을
깊어가는 밤하늘
쏟아지는 별똥별이
빗금을 긋고 간다
예시는 「고향마을․1」의 전문이다. 강원도 양구가 고향인 시인의 로컬리티가 물씬 배어난 예시는 ‘산촌’, ‘쑥 연기’, ‘쏟아지는 별똥별’ 등의 시어가 환기시켜주는 짙은 향토성을 맛보게 해주고 있는데 시인의 고향의식이랄까, 문명이나 도심으로는 환시킬 수 없는 정겨운 사향보를 소박한 스냅으로 펼쳐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직접 살고 있는 현실공간으로서의 고향, 실재공간으로서의 현존의 공간은 다시 과거세랄까, 세월 저쪽의 옛 고향공간으로 이동되기도 한다.
되돌아보니
내가 찍고 온 발자국
선연하다
어떤 것은
헛발질로
어떤 것은
들여놓지 않았어야 할
족지(足指)로
재촉하던 발걸음을 멈춰
되돌아보게 한다
지나온 80 길고도 험했던
터널
회초리 아픈 세월이
흘러가는 구름으로
터널 저쪽 노을로 핀다
예시는「세월」의 전문이다. 화자가 찍고 온 발자취를 되돌아봄으로써 세월 저쪽으로 현실공간이 이동되고 있다. 여러 형태와 의미로 찍힌 족지는 시행이 말해주듯 ‘헛발질’, ‘들여놓지 않았어야 할/ 족지’로 제시되고 있고, 이 족지를 찍어 걸어온 길은 ‘지나온 80 길고도 험했던/ 터널’로 제시되고 있다. 80고령이 이끌고 온 생의 발자취가 터널을 지나온 것으로 보아 험로였거나 어둠을 동반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케 하는데 지나온 세월의 회초리질에 발걸음을 재촉했던 것으로 미루어 이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터널 저쪽으로 노을이 핀다’는 진술로 보아 역경이었거나 고행이었던 터널을 지나 지금은 노을로 피는 자운을 앞에 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데 여기에서의 자운은 달리 인생황혼으로 읽게 하는 斜陽이거나 고행 끝에 만난 밝은 미래 같은 것으로 읽게 해준다. 이는 현실공간으로서의 고향이 아닌 과거세의 세월 저쪽의 공간을 읽게 해주고 있는데 이러한 현실․과거세로서의 공간인 고향은 다시 인사적 ․ 인정적 ․ 정서적 공간으로서의 고향을 환기시키면서 ‘못다한 사랑’의 미련의 공간이 되어 주기도 한다.
비오는 날
유리창은 꽃밭이 된다
그리운 얼굴들이 꽃으로 피고
지워졌던 사연들도
꽃으로 핀다
못다한 사랑
우수로는 달래지 못한
옛날의 사랑도 꽃으로
피고
따뜻하게 불러보는
이름 하나도 꽃으로 핀다
비오는 날 유리창은
우수(雨愁)와 우수(憂愁)로
피우는 꽃밭이 된다
예시「비오는 날의 그대 생각」에서 발견되는 시어 ‘비오는 날’, ‘그리운 얼굴’, ‘지워졌던 사연’, ‘못다한 사랑’, ‘雨愁’와 ‘憂愁’ 등이 환기시키는 정서적 멜랑콜리는 고향을 정서적․ 인정적 공간으로 이동시켜주는 매체적 역할을 담당해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해석이야 어쨌건, 고향이 현실공간, 과거세의 공간, 정서적 공간의 세 공간으로 구체화 되고 있는 것은 화자의 ‘思鄕譜’의 본적지가 고향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
2-2. 斜陽공간
斜陽공간으로서의 공향이 시인의 현존적 ․ 실제적 현실공간으로 주어져 사향보로 제시될 수 있었다면 ‘斜陽공간’은 정신적 ․ 정서적 ․ 인생론적 공간으로 주어진 詩域이라 할 수 있다.
노을․황혼․낙조․일몰․석양 등을 총체적으로 명명 ‘斜陽’이라 한다. 한마디로 해질녘쯤이 되는 사양은 흔히 인생황혼으로 즐겨 비유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는 노경의 박영재 시인의 인생황혼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斜陽의식의 시편들이 노경의 심경을 고스란히 시에 의탁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제3부 시편들은 고사란히 斜陽譜로 제시되고 있는데 시를 제시했을 때 이해를 도울 것으로 본다.
황혼녘 노을빛이
해가 갈수록 더 곱게 보인다
마음 때문일까
나이 때문일까
아니면
황혼녘에 들어선
노경의 심회 때문인가
가버린 날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살아갈 날이 지척이라 해도
슬퍼하지 말 것이
아직도 다하지 않은
고운 노을이 있고
내가 불사뤄야 할
인생 노을이 곱기 때문이다
예시는「황혼길․2」의 전문이거니와 형상학적 노을길은 아니다. 그것은 ‘황혼녘 노을빛이/ 해가 갈수록 더 곱게 보인다’는 시각으로 포착한 노을빛이 2연에 오면 ‘마음 때문일까’,‘나이 때문일까’,‘황혼녘에 들어선/ 노경 때문일까’로 설의 되면서 정신적 사양의식의 발로로 이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상학적 황혼을 통해 인생황혼을 걷고 있는 화자 자신의 노경의 심회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뜻인데 다음 예시는 노시인의 斜陽의식을 잘 읽게 해주고 있다.
세상길 돌고 돌아
석양길로 접어들어
흰머리 흉한 주름 등 굽은 허리
남길 것은 이웃에 베풀고 갈 선과 덕인 것을
험한 벌판 걸어오고
모진 광풍 겪으면서
한 포기 들꽃처럼
지나온 세월 따라 피고 질것인가
이제 마감을 준비하며
모든 것 다 비워 버리고
석양의 노을빛처럼
비운 자리마다 예쁜 꽃
좋은 열매 남겼으면
예시는「인생노을」의 전문으로서 ‘황혼’이란 사양의식이 ‘인생’으로 직접 제시되고 있어 사양의식이 보다 노골화 되고 있다. 동원된 시어들도 ‘흰머리’, ‘흉한 주름’, ‘등 굽은 허리’ 등으로 인간의 구체적 형상을 빌어 노년기의 인생노을을 읽게 해준다. 그리고 모진 세월이랄까, 살아온 역경이랄까를 ‘험한 벌판’, ‘모진 광풍’으로 살아온 과정의 현장들을 비극화하면서 역경의 삶이 ‘예쁜꽃’, ‘좋은 열매’로 마감되기를 소망함으로써 허무로부터 구원이기를 희망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직접 ‘허무’를 제기하면서 생의 무상이랄까, 덧없음의 삶에 대한 회의랄까를 직설적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흘러가는 세월
따라가는 인생
가고 옴이 덧없음이 아니던가
자랑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지만
주어진 생에의 충실을 사랑한다
낙엽 한 입
발길에 채여 흘러가듯
따라가듯 길 재촉한다
예시「허무」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는데 시행 ‘가고옴의 덧없음’이나 인생을 조락하는 낙엽에 비유, ‘발길에 채여 흘러가듯’이라고 빗대인 시행은 분명 생의 허무의식을 통한 사양의식을 잘 드러내 보여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예시들에서 볼 수 있는 인생황혼과 황혼을 걸어가야 하는 인생길이 환기시키는 허무의식과 허무의식이 수반하는 인생무상과 같은 것은 시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허무나 무상이 아니라 이로부터의 구원이나 또 다른 생의 길을 걷고자 하는 구원의 길을 설정하고 구도의 길을 걷는다는데 있다.
박영재 시인의 행보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노 시인이 시인의 길과 신아의 길을 동시에 걸음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3. 시와 신앙의 길
노시인이 걷는 길은 시와 신앙의 길이다. 박영재 시인이 시인의 길을 걸으면서 원로장로로서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달리 구원의 길,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된다. 시인과 장로라는 타이틀 말고도 알베레스가 피력했던 신앙인으로서의 시인과 신앙인으로서의 장로는 분명 동도인이 되게 한다. 동도인으로서의 구원의 길을 열어가고 있는 구도자로서의 박영재 시인은 시와 기도와 십자가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구도인임에 틀림없게 된다. 그리고 시인은 이를 시로써 실천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괴롭고 허전할 때엔
마음 펴내
시로 담아내고
외롭고 슬플 때엔
인생길 친구 되어 시를 쓴다
시를 쓰면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바위 하나 스르르 사라지고
흐르는 마음밭에
평화가 원고지를 펼쳐준다
시를 쓰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예시는 「시를 쓰면」의 전문이다.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것이 단순한 창작인의 행위가 아니라 시가 구원임을 말해 주고 있다. ‘괴롭고 허전할 때엔/ 마음 퍼내/ 시로 담아내고’에서 보여주는 괴롭고 허전함을 달래주고 메워주는 시나 ‘외롭고 슬플 때엔/ 인생길 친구가 되어’ 주는 시는 분명 시가 괴로움, 허전함, 외로움, 슬픔을 달래고 위안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곧 시가 지구수단이 되어준다는 뜻인데 시가 구원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시를 쓰면/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바위 하나 스르르 사라지고’, ‘흐르는 마음밭에/ 평화’가 찾아옴으로써 아픔과 슬픔, 역경과 고통을 카타르시스, 시가 구원에 값하게 됨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만이 아니다. 기도 또한 수단이 되어주고 있는데 시를 제시해 본다.
눈감아도 보이는
길이 있다
가 닿으면
새로 주어지는
길도 있다
헛발질 않고
뚜벅뚜벅 걷다보면
가 닿을 수 있는 길
주님의 말씀 동행삼아 걸으면
새로 주어진 길에
들어설 수 있을까
예시는「기도」의 전문이다. 시행 ‘눈감고도 보이는/ 길’은 가시적인 현장으로서의 길이 아닌 마음으로 열어내는 정신적인 길, 곧 구원의 길일 수 있다. 그래서 ‘가 닿으면/ 새로 주어지는/ 길’ 곧 영생의 길이거나 열락의 길이 되어줄 수 있게 된다. 곧 ‘주님의 말씀 동행하는’ 신앙의 길이자 구도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 되어주는 이치를 성립시킨다.
한편의 시를 더 제시했을 때 더 극명한 것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마음 열리고
가슴 다수워지며
말씀 없이도
들리는 말이 있어
귀가 열리고
스스로 손 모아
발원하는 기도가
있어
올려다 보니
피어오르지 않고도
감싸주는 향이 일고
일어 무릎 꿇게
하는 모습
그것은
향나무 십자가(十字家)였네
시 「십자가의 마음」이 보여주고 있는 ‘마음 열리고’, ‘가슴 다수워지며’, ‘말씀 없이도 들리는 말’은 분명 복음이다. 복음을 듣고 기도로 기구해보는 발원은 신앙을 통한 구원의 실현이거나 실천의 의식지향이다. 이러한 의지지향만이 올려다 보며 무릎 꿇을 수 있는 십자가는 신앙과 구원을 동시에 말해주는 것이 된다.
이상 예시에서 볼 수 있듯이 시․기도․ 십자가는 서로 다른 양식이지만 궁극적으론 구원을 기구하고, 실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동일성을 성립시킨다. 이쯤에서 결론은 제시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3. 결어
박영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뿌리깊은 그루터기』는 사향공간, 斜陽공간, 시와 신앙의 공간으로 세 시역을 설정, 이를 시로써 실천함으로써 구원에 가 닿고자 한 시와 신앙을 통한 구원의 구가와 함께 이를 실현해가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시와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시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
◆ 표사의 글 ◆
시인의 행보엔 함께하는 길동무가 있고 또 정신지향의 길은 마치 철도의 궤적처럼 양갈래 길로 주어지고 있는데 길동무는 思鄕과 斜陽이고 양갈래 길은 시인의 길과 신앙의 길이다. 시인은 길벗과 함께 쉬임없이 두 길을 걸어오고 걸어가면서 오늘도 자랑스런 족지를 찍으며 행려의 길을 걷고 있다.
― 박진환 박사의 평설 중에서
.▩.
=================
▶박영재 시인∥
∙ 강원양구 출생
∙ 양구 사랑의교회 원로장로
∙ 성로회 중부지역 회장
∙ 한국기독교 원로장로 총연합회 부회장
∙ 조선문학 문인회 이사
∙ 여강시가회 이사
∙ 한국시조사랑운동본부 이사
∙ 광진문화원 모범 공로상
∙ 여강시가회 공로상
∙ 제29회 동백문학상
∙ 한국기독교 운로장로회 공로산
∙ 국민운동본부장 유달영 공로상
∙ 대통령 감사장 2회
∙ 시집『반석 위의 백합향』『뿌리깊은 그루터기』가 있고, 시조집으로『산수와 동행』
『구름 타고 땅을 보니』가 있으며, 기타 동인지 다수가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