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두 정치[ 三頭政治 ] [ 출처 -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2002. 9. 25]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났던 정치 형태이다. 원래는 고대 로마의 관직인 ‘3인 위원’을 가리켰으나, 뒤에 세 명의 정계 유력자가 결탁하여 정권을 독점하는 것을 일컫는다. B.C. 60년에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 세 사람이 파벌을 중심으로 하는 원로원에 대항하여 정치상 서로 이해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밀약하고 제1차 삼두 정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크라수스의 전사 뒤 해체되었으며,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세력 다툼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하여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다.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세 사람이 B.C. 43년에 ‘국가 재건을 위한 3인 위원’으로 임명되면서 제2차 삼두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세 명의 지위는 B.C. 37년에 다시 5년 연장되었으나 B.C. 36년 레피두스가 탈락되어 해체되었다. 그 뒤 B.C. 31년에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에게 승리함으로써 공화정은 무너지고 제정이 수립되었다.
★ 전후 2회가 있었다.
[ 출처 두산백과 ]
① 제1차: BC 60년 평민파 수령 카이사르(시저)는 원로원 벌족파의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장군 폼페이우스, 부호(富豪) 크라수스와 비공식적 동맹을 맺고 다음해 집정관이 되어, 세 사람이 희망하는 정책을 강경하게 실현하였다. 그 결합은 굳은 것이 아니어서 카이사르가 갈리아지방의 정벌을 위하여 로마를 떠난 사이에 약화되었으므로 BC 56년의 루카회담에서 결속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BC 54년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카이사르의 딸이 죽고, BC 53년 크라수스가 동방 파르티아의 토벌전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에 3두정치의 일각이 무너져 동맹이 해소되었다. 마침내 BC 48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격파하고 독재정치를 하게 되었다.
② 제2차: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제1의 실력자인 안토니우스는 키케로 등 원로원 보수파와 대립하여 BC 43년 호민관 티티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결탁하여 ‘국가재건 3인위원’에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그 결과 5년간의 독재적 권력을 얻은 3자는 일체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300명의 원로원의원과 2,000명의 기사계급에 있는 자들을 살해 또는 추방하고 속주의 분할통치를 하였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연합하여 필리피싸움에서 반대파의 주력인 공화파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를 분쇄하였다. 그 후 3자의 직권은 2번 갱신되었으나, BC 36년 레피두스가 실각하여 3두정치는 자연 소멸되었고, 결국 BC 31년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악티움해전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로마를 통일하여 단독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 때를 계기로 로마공화정은 무너지고 제정(帝政)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