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명가명품콜렉션Ⅳ·멱남서당 소장 秋史家의 한글문헌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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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와 추사한글
1. 추사한글의 점획과 결구
한글 자모(子母)의 점획은 15세기 창제당시 고전체(古篆體)에서 시대별로 필사(筆寫)에 대한 속도와 필사자의 미감(美感)이 바뀜에 따라 18·19세기에는 한글의 전형이라고 하는 ‘궁체’의 점획으로 바뀌었다. 한글 자모의 결구(結構)는 한자와 같이 정방형(쭕)구조가 기본인데 글자의 중심도 창제당시(15세기)에는 한자와 마찬가지로 쭕 한가운데 배열되었다. 그러나 추사 당시(19세기) 궁체에서는 이미 글자의 중심이 우측으로 이동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추사한글은 자모의 점획이 고전체와는 달리 이미 양식적으로는 궁체의 범주 속에 포함되지만 글자중심이 한자와 같이 여전히 글자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점과 한글자모의 철자 형태와 결구가 자유롭게 쭕를 출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이지만 궁체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2. 추사한글의 용묵과 운필
추사의 한글은 흘림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용묵(用墨)과 운필(運筆)의 측면에서 동시대의 궁체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한글편지에서 보이는 필획의 태세(太細 : 굵고 가늠)와 곡직(曲直 : 굽음과 곧음)의 대비, 방필(方筆 : 모난 획)과 원필(圓筆 : 두리뭉실한 획)의 조화, 그리고 용묵(用墨)에 있어 필속(筆速)에 따른 윤갈(潤渴 : 먹의 퍼짐에 있어 진하고 마름 정도)의 맛을 극대화시키는 측면은 추사의 한자편지나 시고(詩稿)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추사의 경우 한글과 한자가 필법에 있어서도 동일하다는 증거이다.
3. 추사체 - 고졸(古拙) 이전에 정법(正法)이 토대 추사체는 주로 50대인 제주도 유배시절에 완성되었다고 보는데, 서체(書體) 면에서는 글씨의 전형이 되었던 종래 해서와 행서 중심의 왕희지 서체를 넘어 그 근본을 금석(金石)에 쓰여진 전(篆)·예(隸), 특히 서한(西漢)의 예서에서 구하면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추사체의 특질은 금석기(金石氣)가 두드러지는 강경한 필획(筆劃)과 음양의 대비가 돋보이는 결체(結體), 그리고 그것들의 이상적인 조합이 이끌어 내는 화면경영이다. 우리가 추사의 글씨를 보고 보통 기괴(奇怪)하다거나 졸박(拙朴)하다고 평하는 것은 이러한 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추사의 글씨가 단순히 졸하고 괴한 것이 아니라 그 바닥에는 엄정한 법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추사의 학서과정을 보면 이미 초·중년에 명청대의 동기창·옹방강과 송나라 때의 소동파·미불은 물론 구양순·저수량 중심의 당해(唐楷)의 정수를 체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추사체는 조형적으로 볼 때 이러한 정법(正法)이 토대가 되어 점획이나 결구에서 금석기운이나 골기(骨氣), 전예의 필법이 혼융되면서 만들어진 것임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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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한글 편지의 어문학 가치
언간(諺簡)은 왕실의 비빈(妃嬪)·공주(公主), 그리고 양반가문 부인이나 한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서민들 사이에 오간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군왕이나 사대부들도 상당한 양의 한글 편지를 남기고 있다. 특히 한자(漢字)가 전제된 언해(諺解)자료 위주의 종래 국어사 연구와는 달리 한글편지에는 당시 생활에 사용되는 말을 직접 글로 옮긴 구어체(口語體)가 등장하기 때문에 현장의 다양한 국어질서가 문법(文法) 음운(音韻) 문체(文體) 어휘(語彙) 등의 측면에서 새롭게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한글편지는 개인생활도 그대로 드러나 있어 일반적인 기록과 사서(史書)에서는 담길 수 없는 정보가 많은데 궁중·사대부가와 토속성이 강한 서민의 언간(諺簡)에서는 개인의 심리상태나 그 시대 풍속과 사회상까지도 잘 포착된다. 또한 언간은 속성상 수신자와 발신자 중 한쪽은 여성이 관여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여성생활사 복원에도 요긴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추사의 한글편지에는 서울, 대구, 평양, 고금도, 제주도, 예산 등지로 무대가 바뀌면서 호방했던 추사의 30대, 40대 모습, 이를 테면 자신을 ‘영호유객(嶺湖游客)’이라고 칭하거나, 평양기생 죽향이와의 염문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지역의 풍속이나 사회상, 그리고 특물산이나 풍토병도 나타난다. 추사의 한글편지에는 당시의 구어적 어미(語尾)나 존대법(尊待法)에서부터 축약이나 생략된 문체, 그리고 어휘에서도 희귀어, 특수어, 방언, 이두어 등이 다양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음식 의복 질병 등 당시 조선의 문물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1. 추사 한글편지를 통해서 본 언간(諺簡)의 양식과 작성 사례
편지의 세 가지 요소는 발신인·수신인·내용인데 문안(問安)·정찰(情札)·밀서(密書) 등의 용건이 양자간의 대화를 상정한 글로 표현되기 때문에 구어체(口語體) 중심의 적절한 예법(禮法)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형식이나 표기법도 대지(臺紙)를 대고 종횡의 글자 수를 계산하고 쓰는 일반문헌과는 달리 원고본(原稿本)이 없이 직접 종이 위에 생각나는 바를 적어 내려가기 때문에 내용전개 순서에서부터 개인의 개성적인 필체와 행간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자유분방함이 잘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보통 정자는 높은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발견되고 행초서나 흘림체는 그 반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편지에는 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예법이 있는데 문법과 어휘선택은 물론 대두법(擡頭法 : 글자 돋올리기), 이행법(移行法 : 글자 줄바꾸기), 이격법(離隔法 : 칸 비우기) 등 행간이나 글자의 조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종손의 책무와 지아비로서의 사랑 추사는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림·시문(詩文)은 물론 유불선(儒佛仙)을 두루 통한 경학자(經學者)이자 금석고증학에서도 독보적인 성과를 남기고 있다. 이러한 추사는 경주(慶州) 김(金)씨 월성위가(月城尉家) 종손(宗孫)으로서 제사는 물론 양아버지(김노영 金魯永, 1747~1797)와 친아버지(김노경)을 동시에 모셔야 할 뿐만 아니라 사별한 전처(한산 이씨 韓山 李氏)와 후처(예안 이씨)의 지아비로서, 동생(명희 命喜, 1788~1857·상희 相喜, 1794~1861)와 서자(상우 商佑, 1817~1884)·양자(상무 商懋, 1819~?)를 둔 형님이자 아버지로서 편지에 묘사되는 추사의 모습은 결코 당시 사대부들이 겪음직한 일상사로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는 사연들이 들어 있다. 먼저 40통 편지의 핵심 내용을 예안 이씨 건강(본증 本症) 문제, 유배지의 질병 음식 의복에 관한 사항, 종손의 책무로서 제사와 종부 양자를 맞이하고 손자를 보는 일 등이다.
1. 지아비로서의 사랑 아내에게 자신의 건강이나 안부를 전하는 것은 물론 지아비로서 아내의 안부나 건강을 묻는 것이다. 처음 33세 때의 추사 한글편지 11통은 사대부의 권위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는 그야 말로 생기발랄함이나 어린아이가 시장에서 돌아오는 부모를 기다리는 심정의 사랑이나 애교이다. 그러나 부인 예안 이씨는 애초부터 본증(本症)을 앓고 있었고, 그것이 서서히 드러나는 40대 중반에서부터 본증이 극에 달해 부인이 죽음에 이르는 유배지에서의 사랑은 헌신적인 것을 넘어 차라리 숭고하기까지 하다.
2. 종손의 책무 부모를 모시는 일에서부터 아들 손자의 탄생과 돌잡기, 양자를 들이는 일, 며느리를 보는 등의 혼사, 회갑, 그리고 가족의 죽음이나 제사 등의 경주 김씨 월성위가 종손으로서 본가와 처가 집안 대소사에 대해 일일이 챙기고 있다. 특히 경주김씨 월성위가 종손으로서 손이 귀한 추사가문에서 대를 잇는 문제는 추사에게 초미의 관심사였고, 자연 양자를 들이거나 손자를 보는 것은 유배지의 고통과 애환 속에서도 추사 생애 최고의 기쁨인 것인데, 양자 상무가 제주도를 인사차 오려 하자 또 극구 만류하고 있다. 그리고 며느리에게 ‘천은’이라 손자의 이름까지 지어 보내고 있다. 유교사회에서 며느리를 들이는 일은 차기 종부로서 책임이 막중한 것이므로 귀양지지만 매 편지마다 연거푸 언급하면서 며느리에게 제일먼저 제사지내는 것을 가르치게 하고 있다. 이처럼 종손의 책무 중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제사이다. 추사는 시제는 물론 젊을 때부터 본부인, 친부모, 양부모의 제사를 모시었는데, 문제는 부인 예안 이씨와 헤어져 있기 때문에 주부도 없이 제사를 모시거나 종손임에도 제사를 참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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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 삶의 애환과 고통
추사는 55세 때인 1840년(헌종 6년) 9월 2일 유배명령을 받고 10월 1일 대정 배소(配所)에 도착하였는데, 편지에는 먹거리를 구함에 있어 곤란함과 까다로운 입맛, 의복문제, 그리고 노환과 질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대목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학질(凱疾)·감기·종환(腫患 : 부스럼)·회증(蛔症 : 회충)·치통(齒痛)·소양증(搔痒症) 등과 같은 추사와 부인 등 가족들이 앓고 있는 병명은 물론이고, 민어, 석어, 어란, 진장(진간장), 지령(간장), 백자(잣), 호도, 곶감, 김치, 젓무, 쇠고기, 약식, 인절미, 새우젓, 조기젓, 장볶이, 산포, 장육, 건포, 오이장과 무장과 겨자 등 서울에서 온 음식, 생복, 산채, 고사리, 소로장이, 두릅 등 제주도 현지에서 구해 먹은 음식 등의 명칭에서부터 의복 등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특히 추사의 체질을 짐작할 수 있는 편지도 있는데, 상복약인 수수엿을 약재와 한데 고아 보내게 하면서 백합(白蛤), 천문동(天門冬), 길경(吉更), 계피(桂皮), 귤피(橘皮) 등의 약재를 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추사의 체질이 태음인(太陰人)에 속함을 추정할 수 있다.(1841. 10. 1 편지 협서 추정) 그러나 추사에게 유배시절시 가장 비통한 일이 두 건이 있으니, 하나는 동생 상희의 딸이 요절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아내 예안 이씨의 죽음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붉게 만드는 것은 부인이 1842년 11월 13일 죽은 줄도 모르고 그 다음 날인 14일과 18일 편지를 쓰는 추사의 모습에서이다(부고는 1843년 1월 15일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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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추사 한글편지는 추사와 예안 이씨 사이에서 오고간 지극히 개인적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너무나 시시콜콜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래서 역으로 여기서 우리는 추사의 인간적인 면모를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볼 수 있다는 데에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것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 시나리오인 만큼 이것을 통해 어떤 교과서에도 없는 당시 18세기 조선의 사대부가의 보편적인 삶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글편지에 나타난 사연의 구절구절에는 우리가 신격화되기까지 한, 그래서 보통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넘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추사의 전혀 다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한글편지에 나타나는 추사는 오히려 보통사람보다 더 보통사람이었던 것이다. 연달아 보내는 편지, 종종 아내소식을 기다리는 모습에서 급한 성격이나 부인으로부터 입에 맞는 갖은 음식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입맛도 알 수 있다.
* 이 글은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의 보도자료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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