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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리학의 발달
유사(遺事) 내용이 많아 1번, 2번, 3번으로 나누었습니다.
김부필 23세, 김부의 23세, 김부인 23세,
김부신 23세, 김부륜 23세, 김언기 25세,
※ (효로공의 후손으로 안동 군자리의 5군자와 담암공 용석의 손자 언기)
2. 성리학의 발달
김장생 27세, 김계휘 26세, 김지남 25세,
3. 성리학의 발달
김 집 28세, 김 규 28세, 김 반 28세, 김문서 22세
성리학은 고려 말기에 문성공 안유가 원나라로 부터 도입하였다.
백이정, 우탁,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조선에 들어와 16C에 이르러
관념적인 이기론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철학의 조류는 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회재 이언적을 선구자로
원리 문제를 중요시하는 주리론이다.
화담 서경덕을 선구자로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는 주기론이이다.
두 학자를 이어 성리학을 대성한 사람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두 분의 선생이다.
이황은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더욱 발전시켜
주리철학을 확립하였다.
그의 사상은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주리란, 경험적 세계의 현실 문제보다,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요시 여겼다.
신분질서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퇴계의 학통은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한강 정 구 등의
제자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영남학피를 형성하였다.
23세 후조당 휘 부필 (양간공파‧ 밀직부사공파)
1
516년(중종11)-1577년(선조11) 조선 중기 유현, 자 언우,
호 후조당, 시호 문순공. 아버지는 관찰사 연. 어머니는 정부인 창녕 조씨
퇴계 이황의 문이며 1537년(중종12) 생원시 동방 생원과
2등 11인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567년(명종23) 조정에서 돈독한 행위를 듣고 사관(祠官)으로
등용했으나 부임치 않았다.
다음해 효능(孝陵) 참봉에 제수하니
퇴계 선생이 편지를 보내 출사토록 권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능 참봉에 또 한 번 제수하여도 부임하지 않으니,
퇴계 선생이 ”후조당의 주인은 절조가 굳세어 임명장이 내려와도 반기지 않네.
앉아서 빙설 같은 매화 향기를 대하여,
도의 존재를 눈여겨보며 읊조리기만 하네“ 하고 시를 지어 보냈다.
학문을 근본에 두고 실지에 힘썼으며 퇴계 선생 문하에 들어가서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정순정대(精純正大)하여
평생에 힘을 쏟은 것은 심경(心經)이었다.
자제에게는 효제충신을 먼저 가르쳤고, 항상 말하기를
글 배우는 데는 효제를 근본으로 함이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
1816년(순조17) 영남 유생이 상소하여 작위와 시호를 내리기 청하였다.
1822년(순조23)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성균관 제주, 세자 시강원 찬선에 추증되고
, 시호는 문순공이며, 그 때 거처하던
후조당 건물이 현존하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후인이 사우를 세워 향사하며 후손이 없으므로
제남(弟男) 해(垓)를 입양하여 후사를 이었다.
「참고문헌」광산 김씨사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문순공 휘 부필 시장(諡狀)
공의 휘는 부필이요 자는 언우이며 호는 후조당이니,
공은 어릴 때부터 특히 범상한 아이와 달랐고, 자라나자
가정교훈을 따라 익혀서 자제로서 허물이 없었다.
정유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명망이 여러 학생 사이에 탁월하였다.
같은 학사에 있던 학생이 억울하게 법에 걸려 죽임을 당하게 되자
공이 대신을 방문하고
그 상황을 설명하여 죽임을 면하게 하였다.
갑진년에 아버지 운암공이 별세하였고 다음해에 중종이 승하하였고
또 그 다음해에 상복을 벗었으나 과거 공부는 하지 않았다.
집에 와서는 조모 이씨 부인과 어머님을 예로써 받들고, 나가서는
퇴계 선생을 사사하되 매우 삼가서 명리로서 마음에 두지 않았다.
뜰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고 당의 편액을 후조로서 걸었는데,
사람들이 그 의미를 아는 이는 없었다.
명종 말기에 조정에서 공의 착한 행의를 듣고 비로소
사관으로 등용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무진년에 또 효능(孝陵) 참봉에 제수하자 이때 퇴계 선생이
서울에 있으면서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출사하도록 권하였으나,
공이 시를 지어 회답하니,
”저 산 구름에게 한 마디 부치노니,
구학에 숨은 몸 창공이 웬 말인고, 구름이 말하되 펴고 거둠은
마음대로 라고 하지만, 또한 신룡의 조화 속에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공의 깊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기사년에 정능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명에 응하지 않았는데
퇴계 선생이 다음 시를 지어 주니,
”후조당 주인은 절개와 조행이 굳세어서(後彫主人堅素節),
제서(除書:임명장)가 문에 와도 반기지 않네(除書到門心不悅),
앉아서 빙설같은 매화 향기를 대하여(座對花雪香且擊),
도의 존재를 눈여겨보며 시를 읊조리기만 하네(道存吟不輟).“
그 후 조정의 공의로서 6품 관직으로 공을 대우하려 하였으나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헐뜯어서 중지되었다.
아! 공의 세대와 지금은 삼백년이 지났다.
그의 심오한 학문과 특이한 행실을 그의 자손들도 오히려 자세히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딴 사람이야 어찌 알겠는가...
내가 어찌 숨겨진 덕을 들추어내고 아득한 행적을 드러나게 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시호라는 것은 임금의 은애를 기록하는 것이다.
공은 학문을 한 사람이다.
그의 학문의 조예가 오묘함을 사람마다 헤아려 알 수가 없는데,
하물며 사람마다 어찌 공의 경중을 말하겠는가,
오직 현인의 말이라야 백대를 넘어가도 남아 있게 된다.
이러므로 그 은애의 절차로 보아 확실한 논거가 된다.
공이 살았을 적에 퇴계 선생이 공에게 보낸 시詩에,
”의리는 삼밭 속 쑥대처럼 저절로 곧고, 예악은 금석 소리 같고 서로 알맞다.
내 신감강 어두움이 부끄러워라,
그대의 문조(글과 조행) 맑음을 기대 하노라” 했으니 이것은
퇴계가 공을 추장(推獎:여럿 중에 쳐들어 장려함)한 바였다.
공이 별세하자, 율곡 선생이 어느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무오년 가을 도산에서 후조 선생을 배면하고 학문을 여러 날 토론하였는데.
의리에 정밀하고 인(仁)에 순숙해서 더욱 주밀 하고 더욱 굳고도 강하였다.
그런데 지금 작고했으니,
이 도가 망해 없어지고
정의가 쓰러져 버렸다 했으니 이것을 율곡이 슬퍼한 바였다.
두 선생은 모두 동방의 큰 현인으로, 공을 아는 데에는 반드시
참됨이 있을 것이고, 공을 의논함에 반드시 조리가 있을 것이다.
또 누가 능히 두 선생의 말씀을 고치겠는가.
아! 거룩하도다.
그리고 과거를 아주 폐한 것과 제서가 왔는데도, 부임치 않음은
그 자취가 청송공과 같았고, 유월에 인산에 통곡한 것은
그 행적이 하서옹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대저 자취란 마음의 실천인 것이다.
자취를 보아 그 마음을 징험해 보건데, 곧고 굳어서 변하지 않은 절조를
그 때 여러 사람이 일월과 광채를 다투었다고
한 것이 실상에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삼가 이와 같이 장문(狀文)을 써서
태상시(太常寺:시장을 검열하는 기관)의 채택을 기다린다.
영안부원군 김조순 찬
※위의 글은 후조당의 시호를 받기 위한 시장이다.
시호의 절차는 해당자의 자손이나 관계자들이
죽은 이의 행장(行狀:생전의 행적)을 적은 시장(諡狀)을 예조에 제출,
심의하여 봉상시(제사와 시호를 관장)를 거쳐 홍문관에서 정한다.
․ 1882(순조23)년에 후조당께서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순공의 시호를 제수 받았다.
퇴계의 시호가 문순공 이다.
스승과 제자의 시호가 같을 수 있느냐며,
도산서원 측의 반발과 유림(儒林)사회에 시비가 분분하였다.
조정에서 문순공의 문하에서 문순공이 다시 나니 어찌
두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느냐, 면서 회답을 해와
시비가 온당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바 있다.
23세 읍청정 휘 부의(양간공파‧ 밀직부사공파)
중종20년(1525)-선조16년(1582) 조선 중기 학자. 자는 신중.
호는 읍청정(挹淸亭) 아버지는 관찰사 연, 어머니는 정부인 창녕 조씨.
명종11년(1555) 생원시 동방 생원과 3등 59인으로 합격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참봉을 제수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역동서원의 창건에 심혈을 기울였고
퇴계 선생이 선기옥형(천체를 관찰하는 기구)을 만들도록 하였다.
오천변 안산에 초당을 지으니 청량산의 용자를 우러러 학문을 강하는 정자로,
퇴계 선생이 「읍청정」이라 명하니 이를 호로 삼았고 그 건물이 현존하고 있다.
유고가 있으며 후인이 사우를 세워 향사한다.
읍청정 휘 부의 묘갈명
공의 휘는 부의요, 자는 신중이니 공이 선대의 정기를 타고나서
진순 화락하였다.
자라면서 잠시라도 예법에 맞지 않은 일이 없어
어릴 적부터 허물이 없었다.
갑진년 외간상을 당하여 형 후조당이 집상을 예법대로 해서,
건강이 삼년상을 견디어 내지 못할 듯 하였는데, 공은 겨우 약관 14세에
형과 꼭 같이 집상을 하니 고을에서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항상 즐겁고 부드러운 얼굴로 모부인을 섬기면서 밤에 자리를 펴드리고,
새벽에 문안하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형을 예로서 공경하며 언제나 공손하였다.
을묘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병진년에 내간상을 당하였는데
형제분의 슬퍼함이 전일 상사 때와 같았다.
안동 양곡에 있는 세업을 공에게 갈라 주었으나
공은 형의 곁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형의 집 곁에 집을 짓고 날마다 와서, 형을 뵈오며 화하게 담락하였다.
혹은 학문을 토론하고 혹은
의리를 변론해서 날이 저물어 지는 때를 모를 때도 있었다.
효순하고 우애하는 것으로 화목함을 돈독히 하였다.
인척과 당내 지친과 더불어
한 마을에 살면서 덕업에 힘을 쓰고 과오를 경계하며,
조석으로 강론하는 것은 예의와 충신이 아닌 것이 없어서
드디어 미풍양속을 이루었고 모든 일에 시종여일하였다.
아름다운 계절이나 좋은 경치를 만나면 한 곳에 모여서 담소하고
술자리를 베풀어 시를 읊으며 마음껏 즐거워하였다.
공은 일찍부터 퇴계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성심으로 패복(몸에 지님)하여
일에 임해서는 의심되는 점이 있으면 반드시 여쭈어서 결정하니
퇴계 선생이 그의 기질이 순실함을 칭찬하였다.
문인들이 아무개는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폐하였는데 잘한 일입니까?
라고 물으니 선생이 한참 후에“그 사람은 착실하다” 라고 말씀 하셨다.
처음 역동서원 공사를 마친 후에
고을에 어진 정자가 적지 않았으나 퇴계 선생이
공을 산장(山長)으로 추천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선생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니
선생에게 중하게 보인 바가 이와 같았다.
익위 박성 찬
23세 양정당 휘 부신 (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
중종 18년(1523)-명종 22년(1566) 조선 중기 학자. 자는 가행.
호는 양정당. 아버지는 증 참판 유. 어머니는 정부인 순천 김씨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명종 14년(1558)년에
생원시 3등 24인으로 합격하였다.
학문에 열중하여 성현의 도를 닦았고
외당(外堂)을 세워 정자 이름을 양정당이라 하였다.
퇴계 선생이 현판을 썼고, 그 정자가 오늘의 오천에 현존하고 있으며
학행이 독실하여 행검으로 사문의 증망을 받았다.
후인이 사우를 세워 향사하고 있다.
양정당 휘 부신 묘표
공의 휘는 부신이요, 자는 가행이다.
기국이 엄정하고 뜻이 고상하고 결백하여 유학에 힘써
무오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아우 부륜(설월당)과 함께 퇴계 선생에게 배워서
학문이 독실함으로써 칭찬을 받았다.
집에서 제사를 받들되 성경을 다하며 자제들을 가르치되 효우로써 하며,
친구 사이에 믿음이 있고, 친족사이에 화목하였다.
농담을 즐기지 않고, 손에 잡희를 잡지 않아 진실 한 것을
숭상하고 헛되이 문장을 꾸미지 않았다.
외당의 이름으로 양정이라 하니, 이는 주역 몽쾌에 이른바
산 밑에 샘물이 난다는 의미를 취함이다,
五代孫 동준 근찬
23세 산남공 휘 부인(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
중종7년(1512)-선조18년(1584) 조선 중기 무신이며 학자.
자는 백영. 호는 산남.
아버지는 증 참판 수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순천 김씨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일찍 향시에 두 번이나 장원을 하였다.
1549년(명종5) 무과에 나아가 좌씨 춘추를 강하여
장원하니 명예가 높았다.
선전관에 뽑혀 비변사 낭청을 겸했고 곧 이어 해주. 강릉 통판이 되었다.
1563년 낙안 군수가 되고 1567년 호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창녕 부사로 옮겨
병사 김수운과 함께 서해평을 정벌한 공으로
통정에 승진되고 인산 첨사가 되었다.
선조5년 길주 목사. 1573년 정주 목사가 되고
1576년 진주 목사를 거쳐 경상좌도병사가 되었다가
제주 목사와 경원 목사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영해 부사로 있을 때에 1582년 오랑캐가 경원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적을 평정하고 돌아오니
안변으로 전보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문무를 겸전하여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찬이 자자하였고
선정을 베풀었다.
유고가 있으며 후인이 사우를 지어 향사한다.
병사 산남 휘 부인 묘갈명
공의 휘는 부인이요, 자는 백영이며 호는 산남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고 퇴계 선생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힘을 쓰더니
일찍 향시에 나아가 두 번이나 장원을 하였다.
무예를 익혀 기유년에 무과로 빈청에 나아가 좌씨 춘추를 강하여
장원을 하니 명예가 드높아서 선전관에 뽑혔다.
아! 공의 몸가짐이 청검하고
벼슬에 있을 때에 청렴하고 검소하며 부지런하며,
가는 곳마다 더러운 때가 있으면 빗질하듯이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듯이 하였다.
들어와서는 병영을 장악하고 나가서는 군율에 빛을 내어
명성과 공적이 많았다.
낙안에 있을 때에 한 백성이 윤원형의 세력을 믿고
관의 물품을 빼어 돌리는 자가 있으므로,
공이 순찰사에 신고하여 다 받아 드렸다.
정주에 있을 때에 형제간에 송사하는 자가 있으므로 공이,
의리를 들어 형제간에 화해하는 술잔을 권하니,
그 백성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글 읽기를 즐기고 자경편에 착력하여 늙도록 폐하지 않았다.
창성 원으로 사은하는 날에 상감께서 친히 접견하여
“옛 장수중에 사법(師法: 스승해법)할만 한 사람이 누구냐? ”고 물으니
공이 조충국 (한무제 때 장수)이라고 대답함에
상감이 기뻐하고 술을 내렸다.
공이 군진에 임하여 일을 처리 할 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유장(선비와 장수)의 풍도가 있었다.
일찍이 시 한 구절을 읊으니 이르되 “공명을 탐을 내지 않고,
부귀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선인의 집에서 살면서
풍월로 벗을 삼고, 국가에 일이 없을 때는
한가로이 소일하리라.”하였으니, 과연 공의 만절에 부합 하도다.
어버이를 효성껏 모시더니 을묘년에 대고(大故:친상)를 당하여
애례(哀禮)가 극진하였다.
어른을 받들어 치성을 다하고 ,
훈자에 엄격하였으며,
종족에 돈목하고, 제애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며 재산을 나누어
이것이 특히 공이 남긴 일 들이다.
대사간 김응조 찬
23세 설월당 휘 부륜 (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
중종 26년(1531)-선조 32년(1598) 조선 중기 문신.
자 돈서. 호는 설월당.
아버지는 증 참판 유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순천 김씨
명종 11년(1555) 생원시 2등 7인으로 합격.
1572년 유일의 천거로 집현전 참봉.
선조 14년(1580) 문소전 참봉을 제수 받았고 곧 돈녕부봉사로 옮겨
정능의 석역(石役)을 맡아 관리한 공으로 어구마를 받았고
제용감 직장과 내첩시 주부로 전임하였다.
동복(同福) 현감이 되었는데 공자묘를 중건하고, 봉급을 털아
책 800권을 구입, 학령(學令) 수 십 조를 만들어 학문 진흥에 힘썼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용사난리에 가재를 털어 향병(鄕兵)을 보조하였다.
그 후 봉화 원이 벼슬을 버리고 도망치자,
관찰사 격문에 의해 임시로 봉화 현성을 지켰는데,
임금이 그 치적을 듣고 특명으로
봉화 현감을 삼아 1년 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일찍 학문이 뛰어나 16세에 채참시를 지었고,
심경(心經)과 태극도(太極圖), 주자절요 등을 연구하였다.
정자를 지어 설월당이라 현판 하니
오천에 현존하고 있으며 퇴계의 친필이다. 문집이 있다.
설월당 휘 부륜 묘갈명
공의 휘는 부륜이요 자는 돈서이니 퇴계선생의 제자이다.
나이 16세에 글을 읽다가 명도선생(송대학자)이
16세에 주무숙(송대학자)에게 도를 배웠다는 구절을 보고,
도에 뜻이 있어 탄식하며 가로되, 내 나이가 이와 같다고 하였다.
채참시를 짓고 도산 퇴계선생에 가서 친히 배우고
심경과 태극도에 의심이 있으며
곧 물어서 심중에 한 가지의 의심도 남기지 않았다.
연구하여 얻은 것은 문목(問目)을 만들어
선생에게 나아가 바로 잡았으며,
상중에 상장의 예절을 묻고
주자서 절요에 의심나는 구절은 조목을 열거하여 품하고
의리와 의심나는 제목은 반복하여 물음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퇴계 선생이 자주 칭찬하고 빈번히 편지로 회답하여 이르기를 정자,
주자가 제자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심법이 이와 같았다.
이제 족하의 의심이 이 경지에 미쳐 강하여 얻으려 한다 했고,
또 이르기를 족하(足下)가 나이가 젊고 힘이 장성한데 향약의
부지런한 정성과 입지의 두터움이 이와 같으니,
그 장래를 헤아릴 수 없도다. 하고 또 회암서(주자의 글)에
의심하는 절목이 극히 자상하니, 만일 깊이를 연구하고 정밀하게
생각함이 아니면 어찌 이 경지에 이르리오.
더욱 반복하여 깨우치고 궐하거나 약함이 없기를 바란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편지로 보낸 말은 그 들은 바로 일용 행사하는 사이에
증험하게 생각하고, 수색함이 자세하고 정밀하여 사물을 살펴온
지식이 치밀하니 ,가히 공부의 절실함을 알겠도다. 라고 하였다.
공이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질이 있어
12세에 모부인 상사를 당하여 거상함에 예의가 어긋남이 없었다.
하루는 참판공을 모시고 밥을 먹을 때,
시종하는 자가 잘못 생각하고 고기 국을 공에게 드리니,
공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참판공이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차츰 학문에 전심함에 나가며 대현의 문하에서 배우고 들어오면,
백씨 중씨인 산남 양정당 양공과 후조당 읍청정으로 더불어
강마하니, 옛글에 이르기를 노나라에 군자가 없으면 어떻게
이 도를 치하리오 하였으니 공의 일을 이름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정 한강(구)선생이 말씀하시되
오천의 한 마을에 군자가 아닌 이가 없다 하였다.
이는 진실로 잘 알고 말함이로다.
공의 학문의 조예는 후생이 헤아려 편할 바가 아니오, 사문이 찬양하고
한강이 칭찬한 것을 보면, 그 빛난 덕을 가히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문장의 뛰어남과 필법의 건강함은 어찌 족히
공에 대하여 중요한 일이라 하겠는가.
공이 일찍이 계상에서 정자를 짓고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퇴계 선생이 「설월당」이라 손수 써서 주었으므로 호를 삼았다.
명하노니,
퇴계 같은 스승을 모시고 계암 같은 아들을 두었으니 거룩하도다
공의 도여 누가 위로 있고 아래로 전하였다 아니 하겠는가.
인천 채재공 찬약
25세 유일재 휘 언기 (양간 ․퇴촌공파)
1520년(중종16)-1588년(선조29) 조선 중기 유현. 자는 중온.
호는 유일재. 아버지는 진사 주, 어머니는 순흥 안씨.
퇴계 이황의 제자이며 명종 2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정훈을 이어받아 학문에 힘쓰고 백담 구봉령과 더불어
10년 동안 청량산에서 독서하고
산에서 내려오니 바위와 언덕위의 풀과 나무가 다 글자로 보였다고 한다.
만년에 가야(안동와룡)에 살며 서당을 짓고 유일재라 하였다.
학도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하니 그의 덕풍을 듣고 모인
생도들이 수 백 명이 되었다.
재주를 따라 가르치되 공부하는 규정을 엄격하게 세우고
쉬운 것을 먼저하고 어려운 것을 뒤에 가르쳤다.
성현의 심오한 뜻을 강론하니 제자 중에 명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당시 학문의 태두로 알려진 남치리, 정사성, 귀위, 박의장,
신지재, 권태일 등은, 모두 유일재 서당 출신으로
안동 문학 육성의 창도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퇴계 선생 이후 여강 동주가 되어 서원을 여강에 세우고. 선사(先師)를 높이며
백운동 고사를 모방하여 국학을 장려하며 유학의 전수에 노력하였다.
기품이 청고하고 용모가 뛰어나서 엄정하였고 화려한 것을 물리치며
명예는 뜻이 없었다.
문하생들이 보덕단을 세워 추모하고 안동의 용계서원과
옥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성균 생원 유일재 휘 언기 장갈
대략(大畧)에 이르기를 선생의 휘는 언기요 자는 중온이다.
김씨는 왕자로부터 시기를 알아 세상에 숨어 살았는데
고상한 기품이 멀리서 전해왔다.
고려시대에 있어서 이름난 공경(公卿)으로 되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이름난 사대부(士大夫)로 되었는데 퇴촌(열)의 문장과
담암(공의 할아버지)의 학술은 빛나는 광채가 후세에 드리워져서
대대로 문행으로 이름이 있다.
선생은 일찍 정훈(가정에서 받은 교육)을 받아 스스로 학문에 힘썼다.
백담 구봉령과 더불어 10년 동안 청량산에서
독서를 했는데 나중에 그곳을 떠나 올 때에는, 벼랑의
초목들이 다 읽은 글자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만년에 가야(안동와룡)에 터를 잡았는데
도산과 거리가 머지않아 왕래하면서,
(오천종인 후조당 부필, 여러 종반과 백담 구봉령,
학봉 김성일, 회곡 권춘란, 지산 김팔원)
수업하여 공부에 더욱 독실하였다.
동문제현과 함께 모임을 약속하고 학문을 강론했는데 혹은
서로 이끌고 아름다운 수석을 찾기도 하면서,
동구에 있는 구선대를 휴식처로 이름이 정해졌다.
서재를 지어 유일(惟一)이라는 편액을 걸고
생도를 모아 강학을 하자,
멀리 있는 선비가 소문을 듣고 수 백 명에 달하도록 많았다.
그들을 재주에 따라 가르치는데,
날로 배우는 과정을 엄격히 정하고
낮은 데부터 높은 데로 올라 가는 것처럼,
순서에 따라 힘쓰도록 하였다.
독서하는 겨를에는 생도들을 이끌고 서당에 나아가
성현의 깊은 뜻을 강구하고,
시대의 득실을 토론하면서 그 문로(門路)를 개척해 주었다.
강론을 그만두었을 때에도 엄숙한 모습으로 단정하게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책을 음미했다.
혹 흥이 나면 지팡이를 짚고 바람을 쏘이기도 했는데
진세에 뛰어난 생각이었다.
학도들이 성취한자가 있었는데
잘 일러주어서 그렇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는 느끼는 사이에서 터득한 이가 많이 있었다.
시험 삼아 문인록에 살펴보면 어떤 이는 도학(道學)을,
어떤 이는 조행(操行)을,
어떤 이는 문장(文章)을 소중하게 힘쓰기도 하였다.
향인(마을사람)들이 집집마다 전해오고 대(代)마다 지키면서
아버지가 가르치고 형이 가르치기도 한다.
이런 풍습이 누구이었던가, 고산 이유장은 이르기를
“선생의 공과 덕은 사문(유교: 斯文)의 형통하는데 관련이 있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알았다 하겠다.
선생의 천품이 청고하니 방정하여 기국이 있고 용모는 크고
엄징하여 확실하였다.
평상시에는 조용한 모습으로 입을 다물고 있으나
부녀자와 아이들은 두렵게 여겨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 이야기함에 이르러서 훈훈한 화기가 풍겼으며,
어떤 일에나 임해서는 처리하는 과정에 움직일 때마다,
의리와 합치됨으로 향중에 큰일이 있으면 문득 나아가 물어보고 결정하였다.
여강동주(廬江洞主: 여강서원 건립위원장)가 되어서 사찰(寺刹)을 철거하고,
부처를 거둬치운 다음
서원(書院)을 세워 규약(規約)을 설정(設定)하였다.
선사(先師: 퇴계선생)의 사실을 기록하여
부백(府伯: 관찰사)에게 상서(上書)하여
백운동고사(白雲洞古事: 백운동 서원)에 따라
국학으로 승급(昇級)하도록 청하였다.
그 편지의 내용은 몇 천 마디의 많은 말이 선사의
성덕(盛德: 높고 성한 덕)을 잘 표현하였다.
선생은 실제(참 모양)에 힘을 쓰고 겉치레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
나타난 자취를 보면 명예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몸가짐을 깨끗이 하고 고상하게 하며, 세상에 알려짐을 바라지도 않았고
항시 하시는 일의 법칙에 따르고
세상을 현혹시키는행동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숨어살면서 지조를 가짐으로
행실과 덕망이 높았는데, 세상에서 아는 이가 적었다.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양 선생은
한 시대의 권형(치우치지 않는 인물)처럼 되었는데,
서애는 이르기를 “학문에 대하여서 전문의 누함을 비웃었고,
고을에서는 두 달존(퇴계선생과 유일재 선생)을 추앙하였다.”했고,
학봉은 이르기를
“서탑에 앉은 모습은 옥처럼 보이고
강론할 때는 혀가 마르려 했다.”하였다.
이 두 편의 글에 선생의 조예를 상상할 수 있다.
선생이 돌아간 후에는 문인들이 보덕단(報德)을 쌓고 회전(會奠)하였는데
자손들이 따라 행하면서 폐하지 않았으니
그 덕을 사모하는 것이 깊다 하겠다.
또 용계 서원에 제향(祭享)을 지내기도 하였다.
명(銘)하여 가로되,
이 와룡산 우뚝한 것은 선생의 덕과 함께 높고,
용계의 물이 흐르는 것은 선생의 마음과 함께 깨끗하구나.
광산(匡山:이태백이 공부하던 곳)에서 십 년 동안 옥을 다듬듯 연마하였고,
전당(교단)에서는 사방(四방)에서 모이는 영재를 육성하였다.
진리와 덕을 찾아 수업하는 공부가 더욱 독실하였고,
계왕개래(繼往開來:지나간 학통을 잇고 오는 학자에게 열어준다는 뜻)에 대한
사업이 또한 아름답다.
어찌 이 태어난 아름다운 기품이 뛰어났을 뿐이겠는가 또는
스승과 벗이 유익함이 많았던 것도 알 수 있다.
후학들이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 서원(書院)을 지어 제향하고
자손들의 정성도 독실하여 이 비석을 다듬어 세운다네.
여기는 바로 군자의 묘소인데 초부와 목동은 참노하지 말지어다.
참판 김굉 선, 세마 이광정 찬 행장
광산김씨약사. 광산김씨사, 퇴촌공파 파보
. 2023년 6월.
편집. 대구, 경북 전종친회 부회장. 선국.
25세 유일재공 용산 보덕단 비명역
안동 땅 와룡산 기슭 간좌 언덕에 보덕단이 있으니 이 단은 바로
유일재 김선생의 문제자(文弟子) 제현들이 보은하기 위해서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묘소 앞에 설단을 하여 해마다 한 차례씩
헌성(받들어 모심)할 곳으로 만들었다.
용계서원을 건설한 이후부터는 묘전 정향을 폐하고
사우향례(祠宇享禮)를 받든지 오래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훼철령이 내려 묘우는 헐리게 되었다.
오직 강당만 우뚝하게 남아 있으니
강림하시던 혼령께서 어디에 의지하실 바가 있겠는가?
이러므로 많은 선비들이 발의하여
길일을 받아 옛 단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었다.
앞에는 옛날 서원 사당 터가 있고 위로는 선생의 체백을 안장한
묘소가 계시니 여기야말로 아주 적합한 자라가 아니겠는가?
지금 민국이 두 번째로 맞는 정묘년 가을에 후손 용각,
용세 제군이 문부로(門父老)와 묘든 향중사림(鄕中士林)의 명을 받들고
철희에게 찾아와
『모든 일이다 되었는데 기사(紀事)할 바가 없기에 감히 청하는 바입니다.』라고
하는지라 삼가 상고해 보니 선생의 휘는 언기요 자는 중온이다.
김씨의 계통은 신라에서 시작하였는데 신라말기에 태어난
왕자 흥광이 세상이 장차 혼란할 줄 아시고
광주 평장동에 들어가 숨어살았다.
이분이 바로 시조이시다.
손자이신 길에 이르러서는 고려 태조를 보좌하여
관직이 삼중대광공신 사공에 이르렀다.
그 후부터 연달아 평장사 여러분이 나시니 이로 인하여
동명을 평장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휘 약채가 계셨는데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증직은 예조판서이다.
아들 퇴촌공 열은
형조좌랑이며 문장으로 명망이 있었는데 분파조이다.
할아버지 휘 용석은
성균진사인데 세상에서 담암 선생이라 칭하신다.
아버지 휘 주도 역시
진사이고 어머니는 순흥 안씨인데
첨정, 처정이 그의 아버지이시다.
선생은 중종 경진(1520)에 태어나시고
선조 무자(1588)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춘추가 69세였으며 와룡산 남쪽 기슭 축좌가 바로 묘소이다.
영양 남씨는 주부 세용의 따님이시고 영천 이씨는 참봉
안필의 따님이신데 전후 배위였다.
아들 갈봉은
생원 진사를 다 합격하였으며 증직은 집의다.
딸은 권산두와 이경리에게 각각 출가했는데, 모두 배전의 소생이고
만취헌의 득숙은 당음이었고,
청취헌 득의는 출계하였으며
딸은 남태화, 권혼,
김영에게 각각 출가했는데 이 모두 배후의 소생이다.
갈봉의 아들 광주는
생원이었고
광부는 출계 했으며
딸은 이예준 박대유 이진남, 권즙에게로 각각 출가하였다.
만취헌의 아들 광부는 호를 오매당이라 하였고
청취헌의 광원은 진사였다. 이하는 생략한다.
선생은 천품이 고상하고 명랑하셨으며
덕행과 기국이 넓고 깊었는데 의연한 장자의 기품이 있으셨다.
48세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다시 진취할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육영사업에만 낙으로 여기셨으니
운명을 아시는 군자라 할 수 있겠다.
선생은 처음에 구담에 사셨고 중년에 이계로 옮기셨으며
만년에 가야에 와서 터를 잡으셨다.
가야와 도산의 거리는 삼십 리가 채 못 되었다.
오천 종인(宗人) 후조당 부필 여러 종반과도 사는 거리가 불과
수마장 밖에 되지 않았다.
또 백담 구봉령, 학봉 김성일, 회곡 권춘란, 지산 김팔원 제공과도
서로 사는 거리가 역시 멀지 않았다.
그래서 나아가면 스승에 묻고
물러나면 벗과 함께 강습을 하면서 이것으로
깊은 경지의 자득한 낙을 삼았다는 것은
또한 우러러 헤아릴 수 있지 않겠는가?
모재 몇 칸을 짓고
유일재라는 편액을 붙였는데 책 상자를 짊어지고
학업을 배우려고 몰려오는 자가 날로 문전가리(門前街里)를 매웠다.
재주에 따라 잘 교양시켜 성취한 분들이 많았으며
심지어 복주(안동의 옛 지명)의 문학이 훌륭하다는 칭송까지 이르렀다.
혹 한가로운 겨를을 타서 노닐던 곳에는
광풍헌이라고도 하고 구선대라고도 하고 반송정이라고도 하는
아름다운 명칭까지 지었으니
이것은 모두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강서원이 처음 이루어 질 때에는
선생이 동주(洞主)가 되셔서 동문제공들과 더불어 강론하여
규약을 정하고 이에 따라
부백(관찰사)에게 정문을 올려 국학으로 승격시켰다.
또 중간에 일찍이 영해부교수가 되기도 하셨는데 강사를 수리하고
학측을 거듭 밝히자 깊음은 그 입덕문부(入德門賦) 한편으로 보아서
가히 상론(尙論) 할 수 있고선생께서 학풍을 일으킬 뜻이 간절하고 지극함은
부백에 올린 정문 수 백언에 추측하여 알 수 있겠다.
시전(詩傳)에 이른바
덕이 있으면 반드시 문도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이 제단을 보덕단이라고 명칭한 바에야
선생께서 성기설물(成己設物)에 대한 공(功)과 앞을 밝히고
뒤를 여신 덕이 넓고 또 멀다는 것을 더욱 상상할 수 있겠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명(銘)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도산에서 도학을 제창하자,
제현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달재성덕(達材成德)이 훌륭하고 씩씩하다.
독특하게 깨달은 선생께서는 덕재를 겸비하신 아름다운 기국이었다.
어찌 반궁(泮宮)에 물러 나와 임천(林泉)에서 덕을 길렀을까.
나에게 이것은 내 마음대로 하지만
나에게 없는 것은 하늘에 맡길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자기 운명을 안다는 것은 군자로서 귀히 여긴다.
하물며 또 나의 도라는 것은 서책에만 붙어 있은 지 오래였다.
이것으로 찾아오는 자에게 아침저녁으로 쉬지 않으면서 가르쳤다.
다음 달밤엔 달이 밝고 봄철 산에는 경치가 고왔어라.
영재교육에 낙을 삼고 하늘에서 주신 수명은 제대로 끝맺으셨고
복주 고을 문풍은 선생으로부터 베풀어졌다.
입덕문부(入德門賦)와 부백에게 올린 정문(呈文)을
읽을수록 더욱 음미할만하니 먼 백세토록 전할 수 있다.
이 보덕단을 설치한 것이 어찌 소용이 없겠는가.
몇 백 명 문인들이 보덕의 뜻을 더욱 경건히 하였다.
언덕이 혹 골짜기가 되고, 바다가 흙빛이 된 다해도,
우뚝한 이 보덕단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이지러지지도 않을 것이다.
후학 순천 김철희 삼가지음
퇴촌공파 파보
대구경북 종친회 전부회장 선국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