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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듣는 내내 참 행복했습니다.
스스로 반성도 많이 되었구요.
강의를 들은 후 보이는 모든 것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지난 강의에 이어 서른분이 넘는 분들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함께 하신 많은 분들이 손에 손마다 가득 농산물을 들고 오셨습니다.
그렇게 강의를 하신 이중표 선생님께 우리의 마음을 전해 드렸습니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두서 없이 옮겨 봅니다. 백분의 일 정도의 내용입니다^^;;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겠습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금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행복은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습니다.
이해관계 속에서가 아닌 누구든 동의할 수 있는 가치.
돈, 죽음초차 마음대로 못하는 진정한 가치.
행복하기 위해 진정한 가치를 찾는 것.
가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직업은 생명을 가꾸는 농업입니다.
그야말로 지금은 너나 함께 가치혁명을 이룰 때입니다.
수행은 농사짓는 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할일을 하지 않으면 농사를 망치듯,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참선(명상)이 진정한 수행은 아닙니다.
원리를 알고 바로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수행입니다.
그로 인해 마음이 안정되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실제적인 경험과 체험을 언어화 시킨 것이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진리는 하여 사실에 근거합니다.
진리는 변치 않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내 속에 마음은 없습니다. 행동을 하면 그 마음이 나타나는 거지요.
하여 내가 지은 업은 내마음으로 받는 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동이 모여 마음이 되고 마음의 밭에 뿌리 내립니다.
잘못된 인식의 틀인 무명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해소 시켜 던져 버려야 합니다.
생태계는 독자적으로 생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태계란 틀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여 약육강식이란 것은 잘못된 이론입니다.
너 없는 나는 존재 할 수 없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속에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행복은 내 안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먹고 살 수 없기에, 내 것이라는 것만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공기도, 벌레도, 짐승도, 물도, 사람도 모두 존재하기에 나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내 생명 아닌 것이 없는 것이지요.
반드시 먹은 것은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몸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과연 어디까지가 내 몸일까요?
너와 나는 둘이 아닌 불이(不二)입니다.
그러니 타자에 대해 자비로움 외에 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틱낫한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앞에 종이를 보십시오.
그 앞에는 구름이 지나고 있습니다."
(종이를 얻기 위해서는 나무가 있어야 하고, 나무가 있으려면 비가 내려야 하고, 비가 내리려면 구름이 있어야 합니다.)
*강의 자료입니다.
불교의 생명관
전남대 철학과 이중표
1)요청되는 새로운 생명관
‘진화론’이 나오기 이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명은 신이나 하늘이 주관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진화론’은 생명은 신의 창조라는 종교적 신념을 개고, 생명이 물질에서 진화한 자연현상임을 과학적으로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창조론을 믿는 종교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육체와 별개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보는 종교적 생명관은 현실에서의 삶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2년 휴거 소동이 있었고, 지금도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997년 3월 미국에서는 ‘천국의 문’ 신도들이 집단 자살했다. 이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육체를 버린 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과학적 생명관에도 문제가 많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현실적인 욕망의 충족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게 만들었고, 결국 인생은 죽음을 통해 허무가 된다는 생각으로, 인간의 내면은 날이 갈수록 초라해지고 있다. 현대인의 마음의 병은 그 근본이 인간의 육체적 생명만을 중시하는 기존의 과학적 생명관에 있으며, 환경오염, 생태계 파과, 나아가 생명복제의 문제까지도 그 뿌리는 과학적 생명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문제들은 기존의 생명관이 인간중심의 생명관이라는 데 기인한다. 인간의 생명만이 존엄하다는 생명관은 인간 생명의 유지와 존엄마저도 파괴한다는 것이 현실로 드러난 지금, 우리는 인간 중심의 생명관을 고집할 수는 없다. 인간의 생명만을 존엄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생명관은, 그것이 과학이건, 종교이건, 결국은 인간의 생명마저 위현하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손상한다면, 우리는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연과학은 소위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데카르트와 뉴턴의 기계적 세계관에서 이 세계를 서로 분리된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라 통합되어 있는 전체로 보는 전체론적, 생태적 세계관으로 전환하고 있다. 프리쵸프 카프라는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전체론적 세계관, 또는 ‘생태적’이라는 말을 일반적인 용법보다 훨씬 폭넓고 깊게 사용하여 생태적 관점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생태학적 세계관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는 과학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생물과 생물의 환경을 상호 작용하는 생태적 관게로 보는 ‘생태계’ 이론이나 지구상의 생물이 살고 있는 그리고 이들이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물질들이 있는 지구상의 전 영역을 ‘생물권’으로 정의하고, ‘생물권’이 종래 샤르댕의 ‘생물권’ 이론, 그리고 ‘생물권’이 항상성 유지라는 주요 기능을 지닌 하나의 유기체로 연결된다는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 등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생명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장회익의 ‘온생명’ 개념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된다.
새로운 생명 이해의 공통점은 자연과학의 성과에 기초하여 생명을 물질이나 환경과 분리하지 않고 상호의존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즉 세계를 분리된 사물들의 집적으로 보지 않고, 근본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는 상호의존적인 현상들의 관계 구조로 보고, 모든 생명을 본질적인 가치로 인정하면서, 인간도 생명의 관계 구조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관과 생명 이해는 불교의 ‘연기설(緣起說)’과 일맥상통한다.
불교는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여기설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에서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잇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생명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철학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수용되고 조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21세기를 살아갈 인류에게 과학, 종교, 철학이 일치하는 삶의 길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환경의 오염, 자원의 고갈, 생태계의 파괴, 인간성의 상실 등 인류가 맞고 있는 여러 위기의 극복을 위한 윤리적 판단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필자는 과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이해되고 있는 생명 이해에 기초하여 연기설에 토대를 둔 불교의 생명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2)근본불교의 생명관
생명이라는 말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개념이다. 즉 세계를 생물과 무생물로 구분하는, 다시 말해서 물질과 정신을 개별적 실체로 생각하는 데카르트적 세계관에서 본다면 생명은 정신이나 영혼/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물이다. 그러나 최근의 시스템 이론은, 데카르트의 기계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연을 설 연결된 관계들의 그물망으로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고, 생물 시스템에 대한 이론에 따르면, 마음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 즉 생명의 과정 그 자체이다. 베이트슨에 의하면, “마음은 살아 있음의 본질이다.” “마음과 생명 또는, 그의 관점에 따르면, 마음과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명백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베이트슨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과정으로서의 생명을 개념의 틀로 묶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붓다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서 생명의 문제와 관련하여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붓다는 ‘육신과 영혼이 동일한가, 다른가?’에 대한 질문에 침묵으로 대응한다. ‘여래는 사후(死後)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의 물음에도 침묵한다.
영혼과 육신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는 생명의 본질을 영혼이라고 믿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의 근거는 모든 생명현상에 나타나는 인지작용이다. 생명현상에 나타나는 인지작용을 근거로 인지작용의 주체로서 영혼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며, 이것을 생명의 본질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생각하는 실체인 정신을 가장 확실한 존재로 믿었던 데카르트의 생각과 일치한다.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체는 신체 속에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어리석은 범부는 무명에 가리고 애욕에 묶여 자신의 내부에 식(識)이 있고, 외부에 명색(名色)이 있다고 분별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식하고 사유하는 시체이다. 우리의 몸속에는 이러한 영혼이 있어 밖에 있는 사물을 본다는 것이 범부들의 생각이다. ‘12연기설’의 출발이 되는 무명은 바로 이러한 생각이다. 따라서 12연기설의 무명은 생명의 실상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우리가 정신이나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여기한 현상임을 강조한다.
나는 식(識)은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이야기했다. 식(識)은 연(緣)이 있으면 생기고, 연이 없으면 멸한다. 식은 연이 되는 것을 따라서 tyodrlamfh rm 연을 이야기했다. 안(眼)과 색(色)을 연하여 식이 생기며, 식이 생기면, 그것을 안식(眼識)이라고 부른다.
몸속에 존재하고 있는 의식이 눈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나타난 인지현상을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이야기는 인지, 즉 마음을 체화(體化)된 행동으로 보는 인지과학자 바렐라 등의 견해와 일치한ㅌ다. 붓다는 우리가 영혼이나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각활동이 체화된 인지현상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2) 12연기설[삶의 과정]
생물시스템에 대한 이론에 의하면, 생명은 과정이고, 생명이라는 과정은 인지의 과정과 동일시된다. 그리고 마음은 인지의 과정이며, 생명의 과정 그 자체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붓다가 깨달은 12연기는 인지의 과정, 즉 마음을 이야기한 것이므로, 생명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생명으 문제를 사유했고, 그 결과 12연기를 깨달았던 것이다. 붓다는 『쌍윳따 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과거에 정각(正覺)을 이루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세간은 참으로 어렵게 살아간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고, 윤전(輪轉)하여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이 노사(老死)라는 괴로움에서의 출리(出離)를 알지 못한다. 실로 이 노사라는 괴로움에서의 출리를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있을 때 노사가 있고, 무성을 의존하여 노사가 있을까? 비구들이여, 그 때 나의 근원적인 숙고로부터 지혜에 의한 확실한 이해가 있었다. “생(生)이 있을 때 노사(老死)가 있고, 생을 의존하여 노사가 있다.”
비구들이여, 그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있을 때 생(生 )이 있고, 유(有), 취(取), 애(愛), 수(受), 촉(觸), 육입처(六入處), 명색(名色), 식(識), 행(行)이 있고, 무엇을 의존하여 행(行)이 있을까?
비구들이여, 그 때 나의 근원적인 숙고로부터 지혜에 의한 확실한 이해가 있었다. “무명(無明)이 있을 때 행(行 )이 있고, 무명을 의존하여 행이 있다.”
실로 이 무명을 의존하여 행이 있고, 행을 읜존하여 식이 있고, 등등... 이와 같이 오직 괴로움일 뿐인 온(蘊)의 집(集)이 있다.
집(集), 집이라고 하는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전에 들은 바가 없는 法에 대하여 안목(眼目)이 생겼고, 이해가 생겼고, 지혜가 생겼고, 밝음이 생겼고, 예지가 생겼다.
비구들이여, 그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없을 때 노사(老死)가 없고, 무엇이 멸하면 노사가 멸할까? 비구들이여, 그 때 나의 근원적인 숙고로부터 지혜에 의한 확실한 이해가 있었다. “생이 없을 때 노사가 없고, 생이 멸하면 노사가 멸한다.”
비구들이여, 그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없을 때 生이 없고, 有, 取, 愛, 受, 觸, 六入處, 名色, 識, 行이 없고, 무엇이 멸하면 행이 멸할까?
비구들이여, 그 때 나의 근원적인 숙고로부터 지혜에 의한 확실한 이해가 있었다.
“무명이 없을 때 행이 없고,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한다.”
실로 이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등등... 이와 같이 오직 괴로움인 蘊의 滅이 있다.
멸, 멸리아고 하는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전에 들은 바가 없는 法에 대하여 안목이 todrT고, 이해가 생겼고, 지혜가 생겼고, 밝음이 생겼고, 예지가 생겼다.
붓다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처한, 태어나면 반드시 늙어 죽는다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문제 삼았다. 만약에 생명이 본래 태어나서 늙어 죽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슈뢰딩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에 독특한 모든 경험과 기억을 통해 개성적인 그 무엇, 다름 누구와도 구별되는 그 무엇을 이루고 있다는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 각자는 그것을 ‘나’라고 부른다. “그러면 대체 이 ‘나’는 무엇인가?”
그것을 세밀하게 분석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분은 그것이 경험과 기억이라는 개개 자료의 모임, 다시 말해 그러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캔버스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철저히 자기성찰을 함으로써 ‘나’의 진정한 뜻은 여러 가지 새로운 자료들이 쌓이는 바탕재료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 그렇지만 인생에는 단절이 없다. 삶 속의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 …… 어떤 경우에도 애도해야 할 개인적 존재의 소실은 없다. 언제까지나 없을 것이다.
슈뢰딩거의 생각은 붓다와 일치한다. 붓다가 이야기하는 무명은 경험과 기억을 쌓아놓고(集), ‘나’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어리석음으로 살아가면서 ‘나’를 바탕재료료 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자료를 쌓아간다. 이렇게 경험과 기억이 쌓인 것을 온(蘊)이라고 부른다. 생명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무명에 휩싸인 중생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과 기억을 모아 온(蘊)을 형성하여 ‘나’로 집착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12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다. 그리고 생명의 실상을 자각하여 온(蘊)을 멸하고 생명의 구조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12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인 ‘팔정도(八正道)’이다. 붓다는 12연기의 깨달음을 통해 온(蘊)의 집(集)과 멸(滅)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에게 老死가 문제되는 것은 ‘나’를 생명의 주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가 경험과 기억의 모임이라면 ‘나’는 생명의 주체일 수 없다. 우리는 태어나서 늙어 죽는 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경험과 기억의 모임에 불과한 ‘나’는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늙어 죽는 것도 아니다. 단지 경험과 기억의 모임인 온(蘊)을 ‘나’라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나는 태어나서 늙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붓다는 이와 같이 우리가 생명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 ‘인간’, ‘중생’이란 삶을 통해 형성된 경험의 내용이 기억되고 개념화되어 언어화된 것으로서 이것을 실체시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무지[無明]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생명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교의 수행은 붓다가 제시한 생명의 구조를 깨닫고 그 구조에 따라 중실히 살아가는 길이다. 이 가운데 ‘사념처(四念處)’는 생명의 구조를 깨닫는 방법이다. 『잠아함경』에서는 사념처의 관법(灌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음식이 모이면 신(身)이 모이고[集], 음식이 멸하면 신(身)이 사라진다.
촉(觸)이 모이면 수(受)가 모이고, 촉이 멸하면 수가 사라진다.
명색(名色)이 모이면 마음[心]이 모이고, 명색이 멸하면 마음이 사라진다.……
억념(憶念)이 모이면 사물[法]이 모이고, 기억이 멸하면 사물이 사라진다.
이와같이 신집(身集)을 따라 관(串)이 머물고, 신멸(身滅)을 따라 관(觀)이 머물며, 신(身)의 집(集)과 멸(滅)을 따라 관(觀)이 머물면, 곧 의지하여 머물 것이없게 되어, 모든 세간에 취할 것이 영원히 없게 된다. …… 모이는 법(法)을 따라 법을 관하여 머물고, 멸하는 법(法)을 따라 법을 관하여 머물며, 모이고 멸하는 법을 따라 법을 관하여 머물면, 곧 의하여 머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세간에 취할 것이 영원히 없게 된다.
우리가 내 몸[身], 내 감정[受], 내 마음[心], 외부의 사물[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잘 관찰하면, 내 몸, 내 감정, 내 마음, 외부의 사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관찰하면, 제일 먼저 드러나는 것은 먹어야 산다는 사실이다. 또 배설해야 산다. 먹기 전의 음식은 나의 몸이 아니지만, 먹은 음식은 나의 몸이 된다. 배설하기 전의 배설물은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는데, 배설한 후의 배설물은 나의 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참된 나의 몸은 어떤 것인가? 몸[身]에 대한 관찰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그 결과 이 세상에 나의 몸이라고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수(受), 심(心), 법(法)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의 관찰과 사유를 행한다. 고락을 느끼는 감정[受]은 영혼이나 정신의 작용이 아니다. 지각의 경험[觸]이 쌓여 감정을 유발한다. 자라 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을 보고 놀라는 것은 고통의 경험이 동일한 고통의 감정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사물을 인지하는 마음[心]은 삶을 통해 형성된 관념[名色]이 모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에 인지된 대상[法]은 외부에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마음에 기억됝 관념이 대상화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념처관(四念處觀)을 통해, 우리의 몸이 있고, 그 속에 영혼이 있으며, 영혼이 외부의 사물을 인식한다는 신념은 허구임이 드러난다. 우리가 내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먹은 음식이 소회되어 배설되는 과정 속ㅇ데 우리의 육신이 있다. 육신은 존재하고 있는 사물이 아니라, 음식물이 흐르는 강과 같은 것이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강이 사라지듯이, 우리의 육신은 음식을 먹지 않거나 배설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먹지 않고도 정신활동을 할 수는 없다.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인지의 과정을 우리는 정신이나 영혼이라고 부를 뿐이다. 이와 같이 육신과 영혼은 삶을 통해 우리가 인식한 내용으로 만들어낸 허구적인 관념일 뿐,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삶에는 물질과 정신, 육신과 영혼의 구별이 없다. 모든 것이 함께 상호의존적으로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으로 연기하고 있는 삶 속에는 특별히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벗을 뿐만 아니라 ‘나’가 아니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이것을 ‘무아(無我)’라고 한다. 무아의 입장에서 보면 ‘나’도 없고, ‘나’ 아닌 것도 없으며, 생명도 없고, 생명 아닌 것도 없다. 이러한 사실에 무지한 상태에서는 생로병사를 느끼는 괴로운 삶[生死]이 연기하고, 무아와 연기를 깨달은 상태에서는 ‘나’ 아닌 것이 없이 모두가 ‘한 생명’ 이므로. 生死가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행복한 삶[涅槃]이 연기한다. 이것이 12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이다. 이와 같이 붓다가 깨달은 12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은 삶의 두 가지 상태, 즉 생명의 두 가지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3) 무아(無我)와 업보(業報)[생명의 실상(實相)]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삶을 의미한다. 삶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불교의 생명관은 불교의 ‘업설(業說)’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불교의 업설은 상식적인 업설과는 크게 다르다. 일반적으로 업설이라고 하면 업을 짓는 주체로서의 시간적 동일성을 갖는 ‘자아’를 전제로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은 ‘자아’의 존재를 부정한다. 불교의 업설은 이러한 무아설에 바탕을 두고 전개된다. 『잡아함경』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비구들이여, 안(眼)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멸할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안(眼)은 부실하게 생기며, 생겨서는 남김없이 사라진다. (따라서)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 이 음(陰)/온(蘊)이 멸하면 다른 음(陰)/온(蘊)이 상속(相續)한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인지의 주체로서 눈[眼]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는 주체는 볼 때만 나타난다. 보지 않을 때는 보는 주체는 어디에도 없다. ‘보는 업(業)’을 통해서 ‘보는 눈’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우리의 의식에 나타날 뿐 ‘보는 눈’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볼 때는 나오고, 보지 않을 때는 숨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는 업’과 그 결과[報]로서 느끼고 생각하고 사물을 인식하는 삶은 있지만, ‘보는 업(業)’의 ‘작자(作者)로서의 눈’은 없다는 것이 이 경의 의미이다.
이 경에서 주목되는 것은 음(陰), 즉 온(蘊)의 상속이다. 온은 변함없이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자아’가 존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중생들의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되어 상속된다. 『잡아함경』에서는 오온(五蘊)의 상속을 종자(種字)에 비유한다. 한 알의 볍씨가 인연을 만나면 그 볍씨는 사라져도 거기에서 뿌리, 줄기, 가지, 잎, 볍씨가 나오듯이 식온(識薀)이 새로운 인연을 만나면 새로운 오온(五蘊)으로 상속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속에 상주불변하는 영혼은 없으며 오온의 상속은 업보의 관계라는 것이 붓다의 생각이다.
오온은 이렇게 삶[業 ]을 통해 나타난 무상한 의식[報]들이 모여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의식 덩어리’이며 ‘삶의 그림자’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진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색온(色蘊)을 이루고, 즐거움을 느끼고, 괴로움을 느낀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색온(色蘊)을 이루고, 비교하고, 사유한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상온(想蘊)을 이루고, 욕구를 가지고 의도한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행온(行蘊)을 이루고, 사물을 분별하여 인식한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식온(識薀)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오온은 중생들이 삶의 과정에서 생긴 경험을 기억하고 모아서 존재화한 것이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진 경험을 통해 외부에 사물이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지각하는 감관을 지닌 육체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게 되며, 과거로부터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한 경험을 통해 외부에 사물이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지각하는 감관을 지닌 육체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게 되며, 과거로부터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감정, 이성, 의지, 의식이 몸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외부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물과 나의 존재라고 믿고 있는 육신이나 영혼은 ‘경험의 모임[集 ]’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가 ‘나’의 존재로 믿고 있는 오온의 실상은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업’이다. 우리가 자기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五蘊]은 삶, 즉 업으로 환원된다. 오온이 무아이고 공(空)이라는 말은 이렇게 오온의 실상이 삶[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은 이러한 삶, 즉 업보의 현상이다. 우리가 육신이라거나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본질은 업보인 셈이다. 불교의 연기설은 이러한 ‘무아업보설(無我業報說)’을 의미한다. 무아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연기란 업보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업, 즉 연기하는 삶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생명의 실상이 무아이며 업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는 삶과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무명에서 연기한 삶이다.
붓다는 우리의 살밍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의 삶이 생명의 실상에 무지한 무명의 상태에서 살아가면 생로병사의 괴로운 삶이 연기하고, 무명을 멸하여 생명의 실상을 깨닫고 살아가면 괴로움은 사라지고 열반의 삶이 연기한다. 이러한 사실은 삶의 세계에 변함업쇼이 상주하는 진리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생명의 본질을 육체나 영혼과 같은 존재로 보지 않고 업, 즉 삼으로 본다. 이러한 업설의 생명관에서 보면, 생명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업보의 과정, 즉 삶이다. 따라서 살아가는 존재의 가치는 그가 소유한 육체나 영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은 불교의 생명관에서 본다면, 생명은 사물이 아니라 연기하는 삶의 과정[業報]이기 때문에,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생명을 개념적으로 정의하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가’ 묻는 일이다. 붓다가 생로병사에서의 해탈을 이야기하면서도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문제 삼지 않고, 우리에게 무명에서 비롯된 삶의 과정[流轉門]과 무명을 멸진한 삶의 과정[還滅門]을 이야기하고, 생명에 대한 바른 이해[正見]에서 시작되는 팔정도(八正道)를 삶의 바른 길로 제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3) 대승불교의 생명관
‘무아업보설’에 근거한 근본불교의 생명관은 대승불교에 의해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발전한다. 대승불교의 불성, 법신 등은 모두 생명의 참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의 모든 교리가 생명의 실상을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생명관과 무관한 것이 없지만, 여기에서는 『불성론(佛性論)』의 ‘불성(佛性)’과 『화엄경(華嚴經』의 ‘법신(法身)’을 통해 간단히 대승불교의 생명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불성론』의 생명관
불성(佛性)은 영혼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생명의 실상을 불성이라고 한다. 일체중생은 불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대승불교의 주장을 ‘무아사상’에 위배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불성론』에서는 “불성이란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이 드러난 진여(眞如)이다. 이 도리를 통달하면 허망한 집착을 여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근본불교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무아’와 ‘공’이 ‘불성’이며 ‘진여’라는 것이다. 근본불교에서는 허망한 실체를 부정하는 의미에서 ‘무아’와 ‘공’을 강조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참된 생명을 긍정하는 의미에서 ‘불성’과 ‘진여’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존재, 즉 나(人)와 세계(法)는 본래 연기하는 한 생명이므로, 나라고 할 것도 없고, 세계라고 할 것도 없으며, 이것이 생명의 참모습[眞如]이다. 이와 같은 도리에 통달하면, 나와 남, 육체와 영혼 등과 같은 허망한 집착이 사라진다. 샘영이 실상이 ‘공(空)’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청정한 지혜의 공덕이 생기는데, 이것을 진실(眞實)이라고 한다. 실유(實有)를 고집하는 것이 허망한 집착이고, 두 가지 공(空), 즉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을 통달하는 것이 진실한 공덕임을 깨달아, 중생들에게 나와 남의 구별이 없는[同體]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켜 아집(我執)을 없애는 것이 참된 삶의 구현이다. 이것이 자타(自他)의 분별이 사라진, 生死와 열반(涅槃)이 함께하는, 반야와 대비가 충만한 한 생명, 즉 참 생명을 실현하는 대승적 삶의 모습이다.
(2) 『화엄경』의 생명관
『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불(佛)’은 ‘생명’이다. 생명은 온 우주에 충만하다. 이렇게 온 우주에 충만한 ‘한생명(法身)’이 무량무변한 세계를 아름답게 꾸며놓고 있다. 생명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려는 희망(願)으로 살아간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려는 갖가지 희망들이 갖가지 차별된 삶의 모습과 세계를 만들어 간다. 이와 같이 모든 세계는 업력(業力)에 따라 생긴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한생명’의 원력과 업력에 의해 아름답게 장엄된 것이고, 이것을 ‘화장장엄세계(華藏 莊嚴世界)’라고 부른다. ‘한생명[비로자나불]은 무수겁(無數劫)의 세월 동안 갖가지 모습의 세계를 아름답게 이루어 놓았다. 이 모든 것이 광대무변한 생명의 힘이다. 한 생명 속에 무량한 세계가 있다. 그 무량한 세계마다 생명이 자리 잡고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생명관에는 생명과 세계의 차별이 없다. 생명 속에 세계가 있고, 세계 속에 생명이 있으며, 하나의 생명 속에 모든 생명이 들어 있고, 모든 생명 속에 개개의 생명이 들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승불교의 생명관은 모든 근본불교의 생명관이 발전된 것이다. 『불성론』의 생명관은 연기설에 바탕을 둔 ‘무아의 생명관’이 발전된 것이고, 『화엄경』의 생경관은 연기설과 무아설(無我說)에 바탕을 둔 ‘업보의 생명관’이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우리에 삶을 나누고 베풀고 인정하고 존중하여
나를 주위를 즐겁고 행복하게 행동하고 실천하자~ ^0^
동그리님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