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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월 21일 화요일
[(홍)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열네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성녀는 청혼을 거절한 것에 앙심을 품은 자의 고발로 신자임이 드러났으나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보여 준 그의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한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된다.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6,10-20
형제 여러분, 10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행위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11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2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14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5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1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18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20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1,26-31)와 복음(마태 13,44-46)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풍요로운 우정으로 꽃피우는 하느님 사랑과 만남으로써, 또는 그 사랑과 새롭게 만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고립감과 자아도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 8항을 열쇠 삼아 오늘 복음의 문을 열어 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급히 밀밭 사이를 질러가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에 복음을 전하시러 가시는 길일까요, 아니면 누군가 크게 아프다는 전갈을 받으시고 서둘러 그를 찾아가시는 길일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던 중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호호 불어 먹기 시작합니다. 볕에 익어 가는 밀 내음과 밀 이삭을 흔드는 산들바람! 간단하고 조촐하지만 주님이신 예수님 곁에서 이루어지는 근사한 안식일 식사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사실 구약의 율법은 매정한 법이 아닙니다.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 너희가 올리브 나무 열매를 떨 때, 지나온 가지에 다시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신명 24,19-20). 따스함이 묻어 있는 법입니다. 안식일 법도 일을 금하는 법이기에 앞서 돌봄의 법입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완고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자아도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안식일을 누려보면 어떨까요.(김동희 모세 신부)
사람이 우선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농어촌 마을에서 살다 보니, 농촌 인구의 급감으로 인한 열악한 현실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재배되고 있는 효자 농작물들이 있습니다. 쌀, 보리, 옥수수, 고추, 마늘, 양파, 고구마, 감자, 사과, 감, 배...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던 7대 주요 농작물이 있었는데,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올리브, 석류, 대추야자를 꼽습니다. 그중에서도 밀은 유다인들이 주식으로 삼았던 빵의 기본 재료로 가장 으뜸가는 작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동 지방에서는 몇 천년전 부터 곡식을 경작해왔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 유적지나 예리코 등지에서 불에 탄 밀알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주부들은 매일 맷돌로 밀을 갈아 빵을 구웠습니다.
미풍이 불어오는 어느 봄날, 안식일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파릇파릇한 밀밭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의기양양·사기충천한 얼굴로 씩씩하게 밀밭 사이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큰 뜻을 품은 제자들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꼬로록’ 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눈길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부드러운 밀이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덜 여문 부드러운 밀알은 비벼서 날것으로 먹기도 했었습니다. 제자들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밀이삭을 훑어 입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웃의 밭에 들어가 밀이삭을 자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 23,26)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 바리사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바리사이들의 외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침소봉대’(針小棒大)였습니다. 말 마디 그대로, 바늘을 몽둥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추수 행위나 노동 행위도 아니고, 지나가며 밀 이삭 한 두가지 잘라 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 규정 운운하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쪼잔하고 천박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사무엘 상권 21장 1~7절을 인용하며 다윗과 그 일행이 겪은 사건을 소개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스라엘 성전 성소에는 봉헌된 열두 개의 빵이 하느님께 바친 제물로서 일 주일 동안 접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면 사제들만이 그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일행은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굶주렸고 다른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빵을 준 사제 아히멜렉도, 율법학자들도, 성경조차도 다윗과 일행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있게 적용될 수 있고 용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제반 율법을 해석할 때는 자구 하나 하나에 연연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하며 율법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율법의 주인은, 안식일 제정의 원천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두 가지 덕목, 희망과 믿음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하느님과 더욱 깊이 연결되게 합니다. 희망은 우리가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기다리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절망에서 구해내며,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빛을 보게 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사람이 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희망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이는 단순한 낙관적 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향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실 구원의 계획을 믿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이정표와 비슷합니다. 희망은 목표와 비슷합니다. 저의 희망은 교사나 군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제가 되었지만, 저의 희망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제의를 입습니다.
믿음은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응답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믿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와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믿음을 통해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으며 희망을 품었습니다. 믿음은 미래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금 이루어지는 겁니다. 믿음은 희망이라는 이정표를 따라서 대상을 향해 나가는 겁니다. 믿음은 다분히 인격적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믿고, 자녀를 믿습니다. 37년 전입니다. 저는 약속 시간을 깜빡 잊고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저를 믿어 주었던 친구는 어두운 다방 구석에서 저를 6시간씩 기다려 주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도착하니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올 줄 알았어요!’ 저를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기다려 주었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서로 다르지만, 깊은 조화를 이룹니다. 희망은 미래를 향한 기대이며, 믿음은 지금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 주고, 믿음은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그분은 희망과 믿음의 완전한 조화를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믿으며, 부활의 희망을 품으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우리가 희망과 믿음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에 대한 완벽한 모범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희망과 믿음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시련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계신다"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단순히 기도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사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고, 공동체 안에서 연대하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이 믿음의 실천입니다.
희망과 믿음은 우리 신앙의 두 기둥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고, 믿음은 우리가 그 구원 안에 살아가게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할 때, 우리는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희망과 믿음은 사랑의 두 날개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품고 믿음을 실천하며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희망과 믿음의 은총을 간구하며, 우리의 삶을 그분께 온전히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자유롭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평화롭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넉넉하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기쁘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희망차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따뜻하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부드럽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아름답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온전하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사람답게
오늘의 성인
성녀 아녜스(Agnes)
신분 동정 : 순교자
활동지역 : 로마(Roma)
활동연도 : +304년?
같은이름 : 아그네스, 아네스
성녀 아녜스는 로마의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성인 중 한 명이다.
로마의 어느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뛰어난 미모를 지녔던 그녀는 평소에 늘 순결한 생활을 희구하여 하느님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녀가 소녀티를 벗자마자 많은 젊은이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표명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성녀 아녜스는 집을 떠나 순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어느 청혼자의 고발로 신자임이 드러나 총독에게 끌려갔다.
불과 만 13세에 지나지 않았던 성녀 아녜스는 온갖 고문 기구를 진열해 놓고 위협하는 총독의 직접 심문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자 격노한 총독은 그녀를 로마의 어느 매음굴로 보냈으나, 성녀 아녜스는 그녀의 영웅적인 용덕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정결을 성공적으로 보전할 수 있었다.
다시 그녀가 총독 앞으로 이송되자 그는 참수를 명하여 그대로 실행되었다.
전해오는 많은 전설 가운데에는 신빙성이 없는 것들도 있지만, 성녀 아녜스가 순교자로서 처참하게 죽었으며 노멘타나 가도(Via Nomentana) 근처의 묘지에 안장되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성녀 아녜스는 동정녀의 상징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그녀를 '어린 양'(Agnus 아뉴스; Agnes 아녜스)으로 묘사하였다.
성 아우구리오 (Augurius)
신분 : 부제 순교자
활동지역 : 타라고나(Tarragona)
활동연도 : +259년
같은이름 : 아우구리우스
성 에울로지오 (Eulogius)
신분 : 부제 순교자
활동지역 타라고나(Tarragona)
활동연도 : +259년
같은이름 : 에울로지우스 에울로기오 에울로기우스
성 프룩투오소 (Fructuosus)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타라고나(Tarragona)
활동연도 : +259년
같은이름 : 프룩투오수스 프룩뚜오소 프룩뚜오수스
에스파냐 타라고나 지방의 주교인 성 프룩투오수스(Fructuosus)는 성 아우구리우스(또는 아우구리오) 부제, 성 에울로기우스(Eulogius) 부제와 함께 발레리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인 갈리에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그들은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에 체포되어 집정관 앞으로 끌려갔다. 심문은 간단했다.
왜냐하면 죄수들은 하느님 한 분만을 섬긴다는 말 외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화형 선고를 받았다.
형장으로 끌려가던 중에 신분을 숨긴 펠릭스(Felix)라는 신자 군인이 성 프룩투오수스에게 다가가서 기도를 청하자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동방과 서방의 모든 보편 교회를 내 마음 안에 품고 있습니다. 언제나 가톨릭 교회 안에 머물면 당신은 내 기도의 한몫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자들을 위로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성 메인라도 (Meinrad)
활동년도 : +861년
신분 : 은수자,신부,순교자
지역: 아인지델른(Einsiedeln)
같은 이름 : 마인라트, 메인라두스
성 메인라두스(Meinradus, 또는 메인라도)의 이름은 스위스 취리히 호수 근방에 있는 아인지델른의 성 메인라두스 수도원과 관련이 있다.
이곳은 천여 년 이상 순례의 중심지이며 또 엄청난 규모의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성 메인라두스는 라이헤나우(Reichenau) 수도원 섬의 수도자였는데, 836년경에 은둔소에서 살다가 지금의 수도원이 서 있는 곳으로 왔다.
아인지델른의 고적한 숲 속에서 초막을 짓고 은수생활을 하던 그는 861년 강도들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순교자로서도 공경을 받는다.
그가 은둔 생활을 하던 곳에는 후에 그를 기념하여 베네딕토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거대한 성당 안에 있는 동정 성모 마리아상은 이 성인의 작품이라고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