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동해안에서 열린 해병대 상륙작전 훈련을 참관했다. 이어서 해군함정 편으로 울릉도로 향했다.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가 그 같은 정보를 입수하고, 특종 욕심이 나서 미리 함장실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 의장이 민기식 1군 사령관, 이맹기 해군참모총장, 이후락 공보실장을 데리고 함장실로 들어오다가 이만섭 기자와 마주쳤다.
이만섭이 “동아일보의 이만섭 기잡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박정희 의장은 “아, 그래요. 그런데 요즈음 신문이 문제야. 신문은 선동만 해요. 쌀값이 오르면 신문이 1면 톱으로 ‘쌀, 쌀, 쌀값 폭등’하고 주먹만한 활자로 보도하니 쌀값이 더 오르지 않소. 신문이 그렇게 해서야 되겠소?”하며 퍼붓다시피 했다.
이만섭은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쌀값이 오르면 위정자들이 그런 현실을 알고 적절한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지 결코 선동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보도야말로 신문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박정희 의장은 계속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장성들도 박정희 의장의 말에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만섭 기자 또한 지지 않고 반격했다.
“저는 윤보선 대통령이 이야기한 것을 사실대로 보도했는데도 잡혀 갔습니다. 혁명 정부의 언론정책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건 뭔가 잘못된 것 같소.”
“그렇습니다. 그건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박정희 의장은 미안했던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서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하니 주민들이 횃불을 밝혀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국가 원수가 울릉도를 방문한 것은 이날(1962년 10월 11일)이 처음이었다. 박정희 의장 일행은 박창규(朴昌圭) 울릉군수(뒤에 대구시장 역임) 관사에서 묵었고 이만섭 기자는 대륜학교 후배 집에서 잤다.
▲1962년 10월 11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일행이 울릉군수로부터 행정현황을 보고받은 후 울릉군청을 나서고 있다. 박 의장은 직원들에게 “살기 어렵고 교통 불편한 곳에서 수고한다”고 말하고 “앞으로 더욱 향토재건에 힘써 살기 좋은 고장을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 정부기록사진집
다음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일행은 울릉군수로부터 관내 현황을 보고받았다. 그 자리에서 전기와 항만시설 등 다양한 민원을 청취하는 한편 울릉도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 당시 울릉도는 생활기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인구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방문 이전인 1961년 11월 30일 독도의 측량을 지시한 바 있는데, ‘독도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에 등록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요지였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방문으로 울릉도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높아졌다. 1963년부터 부산ㆍ포항ㆍ울릉간 정기 여객선 청룡호가 취항했다. 또한 1967년 저동항이 동해안의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되었으며 사업비는 한일협정 발효에 따라 청구권 자금이 사용되었다.
바닷가 다방에서 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있는데 이만섭 기자가 들어왔다. 박정희 의장은 이만섭 기자를 불러 옆자리에 앉힌 뒤 함께 국수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무섭고 차가운 인상의 권력자 입에서 나온 너무나도 겸손하고 솔직한 이야기에 이만섭은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이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두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도동항에서 작은 경비정을 타고 먼 바다에 떠 있는 본선으로 떠나려고 할 때 풍랑이 심했다. 경비정은 흔들리다가 뒤집힐 뻔했다. 위기를 감지한 이맹기 해군참모총장이 “바다로 뛰어내리자”고 했으나 풍랑이 더욱 거세어져 배를 해안에서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배웅 나왔던 주민들이 고함을 지르며 밧줄을 던져 겨우 경비정을 해안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다. 해안 가까이 다가갔을 때 박정희 의장을 비롯한 일행이 한 사람씩 바다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수심은 사람의 키를 넘지 않았다.
박정희 의장 일행은 산을 넘어 저동항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경비정을 타고 본선에 다가갔을 때 또다시 풍랑이 거세게 일었다. 일행이 밧줄을 묶어서 만든 줄사다리를 타고 본선에 오르는데 파도가 덮쳤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비틀거렸고 하마터면 바다 속으로 떨어질 뻔했다.
이만섭은 “그 자리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났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도 그날의 파도만큼이나 심하게 바뀌었을 것”이라 회상하였다. 또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이래서 국가 원수가 한 번도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는 모양이다”고 했다.
이듬해 주민들에 의해 저동항에 ‘大統領權限代行 國家再建最高會議議長 陸軍大將朴正熙將軍巡察記功碑’가 세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