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면 비누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앞에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 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셔츠로 갈아 입은 그가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는다.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 웃어 보인다.
"무얼 해?"
대개 이런 소리를 던진다. 그런 때에 그에게서 비누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는다. 엷은 비누의 향료와 함께 가슴 속으로 저릿한 것이 퍼져 나간다. -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뭘 해?"
하고, 한 마디를 던져놓고는 그는 으레 눈을 좀더 커다랗게 뜨면서 내 얼굴을 건너다본다. 나는 알고 싶은 것이다. 그의 눈 속에 과연 내가 무엇으로 비치는가? 그러나 그의 눈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나의 괴롬과 슬픔은 좀더 무거운 것으로 변하면서 가슴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찰나에는 나는 그만 나의 자연스러운 위치 - 그의 누이동생이라는, 표면에서 보아 아무 스스러움도 불안정함도 없는 나의 위치로 돌아가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을 깨닫는다.
"인제 오우?"
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가 원한 듯이 아주 쾌활한 어투로,
"응 고단해 죽겠어. 뭐 먹을 거 좀 안 줄래?"
내 가슴은 비밀스런 즐거움으로 높다랗게 고동치기 시작한다.
그는 늘 왜 내 방에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할까? 언제나 냉장고 앞을 그냥 지나 버리고는 나에게 와서 달라고 조른다.
'그'를 무어라고 부르면 마땅할까. 오빠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재작년 늦겨울 므슈 리에서 손목을 끌리다시피 하며 이곳에 도착한 나에게 엄마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숙희의 오빠예요. 인사를 해. 이름은 현규라고 하고."
보랏빛 양탄자 위에 서서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는 그로부터 나를 숙희라고, 쉽고도 간단하게 불러오고 있었다.
"헤이, 숙!"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에게 무조건 관대하였다. 지나칠 만큼. 그래서 때로는 섭섭할 만큼. 그러므로 그가 이즈음 내 방에 와서 배가 고프다고 한다거나 손 같은 데에 약을 발라 달라고 하게 된 것은 나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변화인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므슈 리와 엄마는 부부이다. 내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은 거의 그런 말을 발음해 본 적이 없는 습관의 탓이 크다. 그러나 나는 그의 혈족은 아니다. 현규와도 마찬가지이다. 그와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순전한 타인이다. 스물두 살의 남성이고 열여덟 살의 계집아이라는 것이 진실의 전부이다.
"숙희야, 나 이런 것 주웠는데..."
일요일 아침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엄마가 손에 쥐었던 봉투 같은 것을 들어보였다.
지수가 보낸 편지를 주머니에 구겨넣고 아침 이슬로 무릎까지 폭삭 적시면서 경사진 풀밭을 걸어내려갔다. 머리 위에서 새들이 우짖었다. 하늘은 깊은 바닷물 속같이 짙푸르고 나무 잎새들은 빛났다. 여름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나는 풀 위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슬픈 마음이 들기도 전에 발등 위로 눈물이 한 방울 굴러떨어졌다.
그때 와삭거리고 풀 헤치는 소리가 등뒤에서 나며 늘씬하게 생긴 세터가 한 마리 나타났다. 그 줄을 쥐고 지수가 걸어나왔다. 건강한 체구에 연회색 스포츠웨어가 잘 어울린다. 지수는 나를 보고 좀 당황한 듯하였으나 이내 흰 이를 보이고 웃으면서 다가왔다.
"편지 보아주셨죠?"
"네."
"회답은 안 주세요?"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는 성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귀가 좀 빨개진 것 같았다.
잡석을 접은 좁단 층계를 뛰어오르자, 나는 곧장 내 방으로 올라갔다. 지수가 하듯이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어쨌건 기운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기운차게 반쯤 열린 도어를 밀치고 들어갔다. 뜻밖에도 거기에는 현규가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어딜 갔다 왔어?"
"...."
"어디 갔다 왔어?"
"...."
별안간 그의 팔이 쳐들리더니 내 뺨에서 찰깍 소리가 났다. 화끈하고 불이 일었다. 대번에 눈물이 빙글 돌았으나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전류 같은 것이 내 몸 속을 달렸다. 나는 깨달았다. 현규가 그처럼 자기를 잃은 까닭을. 부풀어 오르는 기쁨으로 내 가슴은 금방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침대 위에 몸을 내던졌다. 새우처럼 흐르는 환희의 분류가 내 몸 속에서 조금도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밤에 우리는 어두운 숲 속을 산보하였다. 어두운 숲 속에서 손을 잡고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안겨 버렸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가 왔는데 어쩌면 엄마가 미국엘 가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게 되면 일년이나 아마 그쯤은 못 돌아올 것 같은데 숙희하고 오빠를 버리고 가기도 어렵고.. 그래 싫다고 몇 번이나 회답을 냈지만.."
오빠는 찬성을 해주었다고 말했다.
"나도 좋아요."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멍하니 생각하면서 나는 대답하였다. 내 온 신경은 가엾은 상처처럼 어디를 조금만 건드려도 피를 흘렸다. 나는 할머니한테 갔다 온다고 우겨 서울을 떠났다. 다시는 학교에 다니지도 않으리라고 마음 먹었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뒷산에 올라갔다. 바람을 받으면서 앉아 있곤 했다. 젊은 느티나무의 그루 사이로 들장미의 엷은 훈향이 흩어지곤 하였다. 터어키즈 블루의 원피스 자락 위에 흰 꽃 잎을 뜯어서 올려놓았다. 수없이 뜯어서 올려놓았다. 꽃잎은 찬란한 하늘 밑에서 이내 색이 바래고 초라하게 말려들었다. 다음 찰나 나는 나도 모르게 일어서 있었다. 현규였다. 그는 급한 비탈을 올라오고 있었다. 일자로 다문 입은 좀 슬퍼 보여서 화를 낸 것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가 이삼 미터의 거리까지 와서 멈추었을 때 나는 내 몸이 저절로 그 편으로 내달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젊은 느티나무 둥치를 붙든 것이었다.
"그래, 숙희, 그 나무를 놓지 말어. 놓지 말고 내 말을 들어."
그 얼굴에는 무언지 참담한 것이 있었다.
"숙희는 돌아와서 학교에 가야 돼. 나는 그렇게 할 작정이니까. 우리는 헤어져 있어야 돼. 집은 남 빌려주자고 말씀드렸어. 내가 갈 곳도 생각해 놓고. 숙희도 어머니 친구댁에 가 있으면 될거야. 그렇게 헤어져 있어야 하지만, 숙희, 우리에겐 길이 없는 것은 아니야. 내 말을 알아들어줄까?"
"그때 숲 속에서의 일은 우리에게는 어찌할 수도 없는 진실이었다. 우리는 이 일을 잊을 수도 없고 이제 이 일을 부정하고 살아가지도 못할 게다. 우리는 만나기 위해 헤어지는 것이야. 우리에겐 길이 없지 않어. 외국엘 가든지..."
나는 눈물을 그득 담고 끄덕여 보였다. 내 삶은 끝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그는 억지로 조금 미소하였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산비탈을 달려내려갔다.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전처(前妻) 소생의 아들과 후처(後妻)가 데리고 온 딸. 따지자면 씨도 배도 다르다. 남남끼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규범(規範) 아래서는 엄연히 남매간의 의리(義理)에 묶여야 한다. 이 의리는 침해될 수 없는 타부이다.
젊고 아름답고 교양 있는 어머니가 지난날 혼담(婚談)이 있기도 하였었던, '불쌍한 아버지'처럼 호의로 가득한 대학교수에게 개가(改嫁)를 한다. 망부 소생(亡夫 所生)의 딸이 어머니를 따라 의부(義父)집에 동거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집에는 '키도 어깨폭도 표준형'인, 수재형의 아들이 있다.
'숙희'와 '현규'는 이렇게 해서 관계지어진다. 그들은 '인공으로' 맺어진 남매의 의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의리를 당연한 숙명으로 익히기에는 그들은 이미 '열여덟 살의 계집아이'요, '스물두 살의 남성'이다. 그들은 사랑하기 마련이다. 물론 동기간의 그것이 아니라 이성간(異性間)의 그것으로. 따라서 독자에게 제기되는 흥미는 윤리의 굴레와 사랑이다.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완고한 인공(人工)의 타부를 무너뜨려 버릴 것인가, 그 앞에 굴종하여 체념으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삼류 극장의 레퍼터리에서처럼 정사(情死) 같은 것으로 끝장낼 것인가?
그런데 그들이 그 주어진 운명에 어떤 결정적 단안(斷案)을 내리기에는 그들 자신이나 그들을 에워싼 모든 조건이 너무나도 까다롭다. 우선 숙희는 어머니를 극진히 사랑한다. 어머니의 개가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 의부는 숙희의 '건강하고 행복스런 얼굴'을 진심으로 바라는 '호의 덩어리'요, 숙희 역시 그 의부를 좋아할 뿐더러 어버이다운 '강한 보호 감정'을 느끼고 있다. 어머니와 의부가 빚어놓은 '로만틱한' 분위기로 만족스럽다. 요컨대 모든 것이 '안락하고 쾌적한' 것들이다. 그들 자신도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고 아름답고 슬기롭다. 불장난을 삼갈 만한 지각들이 차 있다. 모든 조건은 최상이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도리어 결정적인 단안(斷案)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인공으로' 얽어 놓은 타부이지만 그것을 범했을 때에 빚어질 파국을 미리 헤아릴 줄 안다. 그렇다고 그 타부 앞에 굴복하기에는 사랑의 진실이 너무도 엄청나다. 그들은 번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닥친 갈등에는 실상 손쉬운 평화적 해결책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하늘을 벗어나면 되지 않은가? 미국 같은 곳으로라도 가게 되면 만사 형통인 것이다.
이렇게만 말해 버리면 작품의 결말이 너무 싱겁다. 실상 이 작품에 있어서와 같은 사랑과 윤리 사이의 갈등은 어떤 형태의 결말이든 싱겁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성격의 작품에 있어서 결말이란 하나의 방편일 뿐, 별로 중요한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갈등의 십팔 세의 소녀가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독자는 이 작품에 있어서와 같은 갈등 및 그 해결에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리한 주문이다. 오히려 인생의 무턱에 들어서면서 누구나 한번씩은 치르게 마련인 첫설움의 계기를 이 소녀는 자기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써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이 간직한 본질적 흥미는 그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작품의 주인공이 십팔세 소녀이며 또 그녀가 작중(作中)의 내레이터라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