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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사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충청 절도사 황진(黃進)을 비롯해, 증(贈) 한성 우윤(漢城右尹) 고득뢰(高得賚),
증(贈) 첨정(僉正) 안영(安瑛) 등 남원이 배출한 세 명의 절의(節義)를 기리는 사당으로 1648년(인조 26년)에 창건되었고
1650년(효종 1년)에 비명(碑銘)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비문에 의하면 황진은 27세에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여서는 웅치(熊峙) 전투와 이현(梨峴)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쳐 호남(湖南)을 온전히 지켰다고 한다.
정충사비
증(贈) 좌찬성(左贊成) 황공(黃公) 정충사비(貞忠祠碑)
유명(有明) 조선(朝鮮) 남원(南原) 정충사비명(貞忠祠碑銘)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세자부(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 김상헌(金尙憲) 짓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집(金集) 쓰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홍문관부제학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行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여이징(呂爾徵) 전서(篆書)를 쓰다.
만력(萬曆) 계사년(선조 26, 1593년), 왕의 군대가 왜병(倭兵)을 크게 버르집어 바닷가로 쫓아내자 적장(賊將) 수길(秀吉)이 심히 원한을 품었다. 이해 6월에 그 장수 청정(淸正)으로 하여금 병력을 모두 동원해 진양(晉陽)을 공격하도록 하여 기성(箕城 : 평양(平壤)의 옛 이름)의 전투를 설욕하고자 하였으니 전국의 병력을 하나의 성에 집결한 것과 같았으니 그 형세가 참으로 계란을 누르는 것과 같았다.
우리 군사는 하루에 두세 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한 명의 군사가 열 명의 적을 당해내지 않음이 없어서 사기 백배하였다. 그러나 하늘의 도움이 순조롭지 않고 큰 비가 내려 성이 무너져 10일 만에 성이 함락되고 말았으며 성안의 장사(將士)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그중에 충청절도사(忠淸節度使) 황공(黃公)이 있었으니 공의 휘(諱)는 진(進)이고 장계현(長溪縣) 사람이며 고(故) 상신(相臣) 익성공(翼成公) 희(喜)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증(贈) 좌의정 윤공(允恭)이며 남양방씨(南陽房氏)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가정(嘉靖) 경술년(명종 5, 1550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신체가 장대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용기와 힘이 남보다 뛰어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굳세었으며 큰 뜻을 품었다. 27세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3년간 하였으며 상복을 벗자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에 제수되었다. 계미년(선조 16, 1583년)에 문죄(問罪)할 때에 반란한 오랑캐를 화살로 쏘아 먼저 공을 세워 안원권관(安原權管)에 제수되었다. 분소(分所)에서 오랑캐를 벤 공으로 죄를 지은 친구가 사면을 받도록 정성을 다하였으니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다시 선전관에 제수되어 통신상사(通信上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갔다. 동행했던 자들이 앞 다투어 물건을 매매하며 이익을 탐하였지만 공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단지 보검(寶劍) 두 자루를 샀다.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으니 공은 말하기를, “명년에 오랑캐가 반드시 맹약을 어길 것이다. 내가 장차 이것으로 그들을 무찌를 것이다.”하였다. 공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이 말을 도리어 의심하였으나 후일 공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오자 상께서 불러 오랑캐의 동정을 물었다. 상사(上使)는 적이 반드시 쳐들어올 것이라 아뢰었지만 부사(副使)인 김성일(金誠一)은 반드시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공이 상소를 올려 김성일을 참수할 것을 청하고 또 주사(舟師 : 수군(水軍)을 말함)가 오랑캐를 방어할 계책을 진달하려 하였지만 시의(時議)에 막혀서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와 동복현감(同福縣監)에 제수되어서는 날마다 전쟁연습을 하고 무기를 손질하여 일찍이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이듬해 오랑캐가 마침내 물밀듯이 밀려오자 임금의 수레가 서경(西京)으로 파천(播遷)하고 전라감사 이광(李洸) 등이 용인(龍仁)에서 전사하였으나 공은 홀로 군사를 보전하여 돌아왔다. 웅치(熊峙) 전투와 이현(梨峴) 전투에서 모두 크게 물리쳐서 호남(湖南)이 이 덕분에 온전할 수 있었다.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全州)를 지날 때 그 고을 사람들이 감덕(感德)하여 음식을 들고 나와 길을 막을 정도였다. 그러나 막부(幕府)에서 그 공(功)을 엄폐(掩蔽)하여 상이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에 임명되는 데 그쳤다. 체신(體臣)과 승제(承制)로서, 익산(益山)의 임시 수령이 되었는데 명이 허락되어 익산 수령에 제수되었다.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가 수원(水原)으로 병사를 올려 보낼 때 공을 척후(斥候)로 삼았는데 오랑캐의 포위를 받게 되었다. 공이 적기(敵騎) 중에 말을 잘 타는 자를 보고서 말을 빼앗아 포위를 뚫고서 말을 달려 돌아왔다. 일이 알려지자 절충장군(折衝將軍) 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으로 승진되었다.
계사년(선조 26, 1593년)에 본도(전라도) 병사(兵使)로 승진하여 경성(京城)에서 달아나는 적을 상주(尙州) 적암(赤巖)까지 추격하여 여러 차례 물리쳤으며 함안(咸安)까지 적을 추격하기도 했다. 진(陣)을 옮기매 진주창의사(晉州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김해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복수장(復讎將) 고종후(高從厚) 등이 차례로 찾아와 회합했다.
당시에 적이 이미 먼저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이에 공의 기세는 더욱 장대하여 여러 적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하여 밤낮으로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적이 비가 오는 틈을 타서 성이 뚫린 곳으로 달려 들어왔다. 공이 몸소 흙과 돌을 지고 보수하니 군사들이 앞 다투어 감읍(感泣)하여 제 몸을 보살피지 않고 힘껏 싸워 적을 무수히 죽였다. 성 가까이에 초목을 없애 흙이 드러나게 하고서 적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쳐들어왔는데 병기가 심히 막강하였다.
공은 문득 계책으로 적을 쳐부술 것을 생각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이려 하니 적장(賊將)이 스스로 물러났다. 때마침 적 한 명이 쏜 총알이 해자(垓字) 곁을 뚫고 공의 왼쪽 이마를 맞혔으니, 이로써 공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일군(一軍)이 부모를 잃은 듯 울부짖으며 천둥처럼 발을 굴렀다. 이종인 역시 힘껏 싸우다 양팔로 적을 끼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도 모두 촉석루 아래로 몸을 던졌으니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적이 성을 허물고 떠나갔다.
이보다 앞서 공은 우리에게 성 하나에 같이 입성하자고 하였는데 외부에서 원군이 오지 않으면 사태가 위급할 터인지라 나는 성 밖으로 출진하여 성의 안팎에서 서로 상응하면 적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김천일은 이를 어렵게 여기고 출진하지 않았다. 의병장 곽재우(郭再佑)도 역시 공을 보고 말하기를 “진주(晉州)는 공의 관할이 아닌 데다 조정의 명령도 없는 터에 하필 들어가려 합니까?”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倡義使)와 약조를 하였으니 어길 수 없습니다.”하였다. 곽재우가 사태가 이미 정해진 것을 보고 술잔을 따르며 서로 작별하였다.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문이 들리자 곽재우가 말하기를, “다른 여러 장수는 얻기가 쉽다마는 황 절도사(黃節度使) 같은 경우는 그에 버금가는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하고 애통해하기를 마지않았다.
또 증(贈) 한성 우윤(漢城右尹) 고공(高公) 득뢰(得賚)도 창의사(倡義使) 김공(金公)을 따라 한곳에서 죽었고 증(贈) 첨정(僉正) 안공(安公) 영(瑛)도 재봉(齎峰) 고공(高公 : 고경명을 가리킴)을 따라 금산(錦山)에서 죽었으니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떠나지 않았으며 죽음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여겼다. 이에 한때 남원에 세 명의 절의(節義)가 있게 되었으니 그 성취한 바는 비록 대소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하늘이 부여한 병이(秉彛 : 떳떳한 양심)은 열렬하여 빼앗을 수 없었으니 피차에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에 고향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정충(貞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공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정직(廷稷)과 정설(廷說)로 모두 무과(武科)에 합격하였다. 손자는 위(暐)인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다.
기축년(인조 27, 1649년) 봄에 남원의 향대부(鄕大夫) 최군(崔君) 온(蘊) 등 50여 명이 함께 글을 지어 천 리 밖에 있는 양주(楊州)로 사람을 보내와 나에게 비문의 글을 지어 줄 것을 요구하며 말하기를, “공께서는 충신(忠臣)이 행한 절의(節義)의 일을 즐겨 말씀하시어 세상에 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이 세 현인의 사적은 특히나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이에 내가 감히 늙었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일을 서술하고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백제(百濟)의 한 지방에
굳센 장부의 무리
계백(階伯) 장군의 뒤에 일어섰도다.
성충(成忠)의 앞에서 달리매
열렬한 황공(黃公)이로다
이 고장에 태어나신
삼한(三韓)의 어진 이들
모든 장부의 제방(堤防)이셨도다.
임진란을 만나
오랑캐가 날뛰는데
공은 절도사로
호남을 다스렸네.
천 리에 떨어진 고립된 군사 위해
멀리 진양(晉陽)으로 달려가니
보는 자들이 가슴이 서늘했네.
공이 스스로 떨쳐 일어나
장군을 호령함에
부월(鈇鉞)이 엄하였네.
의사(義士)의 한마디 말
천금보다 중하여
적이 까맣게 몰려와도
공은 호랑이처럼 용맹했지.
소리 질러 꾸짖으며
벽력처럼 포효했으니
하늘이 돕지 않아
요성(妖星)이 성루(城壘)에 떨어졌도다.
공은 하늘에서도
옛 마을을 돌아보소서.
성상께서 공의 공(功)을 생각하사
백성들을 흥기시키고
택일하고 제물을 마련하여
정성껏 올리나니
어찌 감히 불경하리오.
하물며 가래나무 숲(성현의 묘지에 가래나무를 심었다 함)이니
높기도 하고 편안키도 하겠도다.
아울러 세 분을 기려
용두(龍頭)의 정자(亭子)
비석 위에 새기나니
기적(紀蹟)이 아름답게 전하여
전현(前賢)과 짝하고저!
숭정경인년(효종 1, 1650년) 10월 일
이 정충사는 숭정 31년 무자년(인조 26, 1648년)에 창립되었는데 3년 뒤인 경인년(효종 1, 1650년)에야 비명(碑銘)이 완성되었다. 같은 해 계사월에 충선(忠宣)이란 편액이 내렸다. 사당은 처음에 용두정(龍頭亭) 아래에 있었는데 뒤에 지금의 터로 옮겨서 세웠다. 현종(顯宗) 계축년(현종 14, 1673년)에 공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는데, 그 시장(諡狀)을 우리 선조이신 우옹(尤翁)께서 지으셨다. 숙종 계유년(현종 19, 1693년)에 안공(安公)에게 좌승지가 증직되었다.
아, 세 분 충신의 대절(大節)은 이미 청음(淸陰 : 김상헌)과 신독재(愼獨齋 : 김집), 두 선생께서 드러내셨는데도 사당 앞에 제물을 올리는 돌이 없었으니 양심을 지닌 자로서 어찌 감개하여 한스럽게 여기지 않았겠는가. 내가 외람되이 이 부(府)에 부임하여 이에 대해 더욱 흥기하고 느끼는 바가 있어, 공의 후손인 황건(黃鍵)과 외손인 장경취(張炅就)와 내가 서로 상의하여 힘을 합해 비석을 마련하였으니, 백여 년간 마련치 못했던 것을 이제야 마련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그렇게 할 운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가만히 생각건대 이번 거조(擧措)는 주 부자(朱夫子)께서 신주(信州)의 정충비(旌忠碑)에 추가로 기록했던 전례를 따른 것으로서, 돌이켜봄에 어찌 비슷한 점이 없겠는가. 그리하여 여러 유생들이 뜻을 모아 좌측에 간략히 기록하여 외람되게도 여기에 이름을 의탁하였으니, 아, 또한 영광되도다.
신축년(정조 5, 1781년) 3월 일 세우다.
贈左贊成黃公貞忠祠碑」
有明朝鮮南原貞忠祠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傅金尙憲撰」
資憲大夫吏曹判書金集書」
嘉善大夫行弘文館副提學知製 敎兼 經筵叅贊官春秋館修撰官呂爾徵篆」
萬曆癸巳 王師大膊倭兵蹴之於海上賊酋秀吉甚怨是年六月使其將淸正盡銳專犯晋陽以報箕城之役以全國之力擬之於一城其」
勢固已壓卵我師日再三合無不一當十士氣百倍天不助順大雨城壞比十晝夜城陷城中將士皆死之其一忠淸節度使黃公公諱進長」
溪縣人故相翼成公喜五世孫父 贈左議政允恭娶南陽房氏女嘉靖庚戌生公偉軀美髯勇力絶人性剛毅有大志年二十七中武科爲」
宣傳官母憂廬墓三年服除除居山道察訪癸未問罪時錢叛胡先登有功授安原權管分所獲虜級脫其友戴罪自効者人義之復拜宣傳」
官亡何從通信上使黃允吉往日本同行者爭以越槖市利公不顧獨買二寳劒人恠問之曰明年虜必渝盟
吾將用此殱之不知者反疑大」
言後見公志還 上問虜情上使言賊必來副使金誠一言必不來公欲上疏請斬之且陳舟師禦虜之計爲時議所沮除濟用監主簿同福」
縣監日習戰用備未甞自逸明年虜果掃境以來乘輿西遷全羅監司李洸等潰于龍仁公獨全師以歸戰于熊峙又戰于梨峴皆大捷湖」
南賴以全領軍過全州州人感德壺漿塞路幕府掩其功賞止訓鍊副正體臣承制假守益山 命許卽眞全羅兵使宣居怡之進兵水原也」
以公斥候爲虜所圍見賊騎善馬者奪騎潰圍馳還事 聞陞折衝忠淸助防將癸巳陞本道兵使魚城賊遁追擊于尙州赤巖屢捷又追至」
咸安移陣晋州倡義使金千鎰慶尙右兵使崔慶會金海府使李宗仁復讎將高從厚等次第來會時已有賊先聲不日奄至不見其際公氣」
益壯意欲呑諸賊日夜身睥睨間不少懈賊乘雨趨城缺處公親負土石以補之士爭感泣忘身又奮力殺賊無算近城草木爲赭賊百道竝」
進器械甚盛公輒以計破之又射殪其將賊將自退適一賊挾丸竄壕邊暗中公左額遂不救一軍如喪父母哭聲雷震宗仁亦盡力血戰怒」
挾兩賊投江而死金千鎰崔慶會高從厚等皆投矗石樓下死者萬餘人賊夷城而去初公議吾等同入一城外援不至則事危矣吾欲出陣」
城外裏外相應賊可制也千鎰難之不果出義兵將郭再佑亦見公曰晋非公所轄且無 朝令何必入公曰已與倡義使約不可背也郭知」
其已定酌酒相訣及聞城陷曰諸將易得至於黃節度難得其比痛惜不已又有 贈漢城右尹高公得賚從倡義金公死一處 贈僉正安」
公瑛從霽峯高公死錦山皆終始不去視死如歸於是一時南原有三節義其所成就雖有大小之殊而秉彝之天烈烈不可奪則無彼此矣」
故鄕人聚而爼豆之顔之曰貞忠公有二子曰廷稷廷說皆武科孫曰暐司諫院正言至己丑春南原之鄕大夫崔君蘊等五十餘人合辭送」
人于楊州千里之外徵余言以文麗牲之石曰聞公好談忠臣節義之事以傳于世今此三賢之蹟獨不可不紀余不敢以老耄辭謹爲之序」
而係之銘銘曰」
百濟一區毅夫之徒堦伯後起成忠前驅 烈烈黃公挺生茲鄕三韓之良萬夫之防 歲丁龍蛇逆虜跳梁公時杖節專制湖廂 千里孤」
軍遠赴晋陽見者寒心公自奮揚 將軍號令鈇鉞其嚴義士一諾重於千金 賊來如蝟公勇如虎音烏叱咜雷霆吼怒 天不助順妖星」
隕壘公神帝庭亦返故里 王念乃功俾民以興卜日潔牲治主以升 孰敢不敬況也梓林曰高曰安並美成三 龍頭之亭石崖可鐫紀」
蹟傳芳用配前賢」
崇禎庚寅十月 日」
維茲貞忠祠創立於 崇禎三十一年戊子越三年庚寅碑銘成而不克鐫越四年癸巳以㫌忠宣額祠始在龍頭亭下後移建于今址」
顯廟癸丑 贈公諡武愍其諡狀卽我先祖尤翁所撰也 肅廟癸酉加 贈安公左承旨噫三忠大節已有淸陰愼獨齋二先生之所發」
揮而祠前尙無麗牲之石凡有秉彜者孰不慨恨哉余忝莅是府尤有所興感於斯而公之後孫黃鍵外裔張炅就余相謀出力伐石百餘」
載所未遑者始得就此豈非有數存乎其間耶竊惟是擧宜有追識如朱夫子之於信州㫌忠碑而顧豈無似所敢議者然而諸章甫勤意」
有不能孤畧記于左方猥此托名吁亦榮矣」
辛丑三月 日立 通訓大夫行南原府使宋宅圭追記」
○ 안영(安瑛)은 자는 원서(元瑞)인데, 기묘 명류 홍문관 교리 안처순(安處順)의 증손이고, 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이다. 남원에 살았는데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하였다. 이때에 바야흐로 남원에 있었고 어머니는 서울에 있었는데, 길이 막혀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화도로 들어가 어머니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하였는데,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막하에 들어갔다. 막하의 제생들이 큰 소리만 치면서 그를 깔보았지만 안영은 아무 말 없이 대오에 따랐을 뿐이었다. 싸움에 패하자 제생(諸生)들은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으나 안영만은 가지 아니하였다.
瑛字元瑞。己卯名流弘文館校理處順之曾孫。判書李後白之外孫。居南原。事親至孝。是時方在南原。其母在京中。道路阻絶。生死不聞。欲入江華尋其母存沒。聞敬命之起兵。遂詣幕下。幕下諸生高談大言藐視之。瑛惟日隨行逐隊而已。及軍敗。諸生一時散走。瑛獨不去。時敬命次子因厚率武士前列。出入矢石間。及軍潰。下馬據床。整其所率部伍。搏戰良久。力盡而死。
大東野乘卷之三十六終 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二) 신경(申炅)
대동야승 권36종(大東野乘 卷之三十六終)-신경(申炅)
재조번방지2(再造藩邦志二)
안영(安瑛)은 자는 원서(元瑞)인데, 기묘 명류 홍문관 교리 안처순(安處順)의 증손이고, 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이다.
남원에 살았는데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하였다. 이때에 바야흐로 남원에 있었고 어머니는 서울에 있었는데, 길이 막혀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화도로 들어가 어머니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하였는데,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막하에 들어갔다.
막하의 제생들이 큰 소리만 치면서 그를 깔보았지만 안영은 아무 말 없이 대오에 따랐을 뿐이었다.
싸움에 패하자 제생(諸生)들은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으나 안영만은 가지 아니하였다.
瑛字元瑞。己卯名流弘文館校理處順之曾孫。判書李後白之外孫。居南原。事親至孝。是時方在南原。其母在京中。道路阻絶。生死不聞。欲入江華尋其母存沒。聞敬命之起兵。遂詣幕下。幕下諸生高談大言藐視之。瑛惟日隨行逐隊而已。及軍敗。諸生一時散走。瑛獨不去。時敬命次子因厚率武士前列。出入矢石間。及軍潰。下馬據床。整其所率部伍。搏戰良久。力盡而死。
그때 고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는 무사를 거느리고 앞줄에 서서 화살 속을 드나들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걸상에 의지하고 인솔한 대열을 정돈하여 돌격전을 벌이다가 힘이 다하여 죽었다.
고경명의 장자(長子) 고종후(高從厚)가 경명의 시체를 수습하여 산사(山寺)에 임시로 장사지내고, 다시 흩어진 무리를 수습하여, 복수군(復讐軍)이라 호칭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경명 등이 양산숙(梁山璹)을 행재소에 보내었는데, 그가 돌아올 때 왕은 친히 불러보고 이르기를,
“돌아가면 고경명 등에게 말하여 빨리 국가를 회복하여 나로 하여금 너희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있게 하라.”
하고, 고경명에게 공조 참의 지제교 겸초토사의 벼슬을 제수하고 다음과 같은 글을 주어 위로하였다.
내가 임금 노릇을 잘못하여 백성을 편안해 살 수 있게 하지를 못하였도다. 첫째로 인화(人和)를 잃었고 또 오랑캐를 막는 데 실패하여 나라를 잃고 서도로 파천하여 의주에 물러나온 지 이미 달을 넘겼도다. 종묘사직이 빈 터가 되고 생령(生靈)이 죽었으니, 아아! 이 무슨 일인가. 그 죄는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실로 한없이 부끄럽도다. 서남(西南)은 멀고 아득하여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는데, 이번에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에서 무너졌다고 들리니 다시는 남쪽을 바라며 구해 주기를 기대하던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도다. 그런데 이에 양산숙(梁山璹) 등이 해상과 육지를 거쳐 이곳에 진달하여, 너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병마(兵馬) 2만과 함께 수원에 나와 둔을 쳤다고 하니, 나같이 부덕(不德)한 사람이 어찌 이처럼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단 말인가? 우리 조종(祖宗) 2백 년의 깊고 두터운 인택(仁澤)이 인심을 감격시킴이 지극한 것이니, 내 매우 기쁘도다. 그래서 곧 양산숙(梁山璹) 등을 군중(軍中)으로 돌려보내니 너희들은 나의 고충을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내가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다. 비록 인덕(仁德)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혜택이 아래까지 다하지 못하였으며, 지혜는 물정을 살피지 못하고 정사는 실수가 많았으나 내 본심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일을 본의로 알았다. 근년에 들어 변방에 소란이 많고 군정(軍政)이 느슨해진 것을 보면서도 도리어 생각하기를, ‘성과 해자가 높고 깊으며 갑옷과 병기가 굳고 날카로우면 오랑캐와 도적을 막을 수 있다.’ 하고, 중외(中外)에 신칙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도록 하였으나, 성이 높을수록 국세는 날로 줄고, 참호가 깊을수록 백성의 원망은 날로 더해져서 뽕잎 떨어지듯 기왓장 부서지듯이 이 지경이 될 줄이야 실로 헤아리지 못하였도다. 더구나 궁중을 엄밀하게 단속하지 못하여 백성을 속이고 작은 이익을 취했으며, 왕자(王子)는 산택(山澤)의 이권을 독점하고 백성은 생업을 잃었으니, 백성이 나를 원수로 여긴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이미 유사에게 명하여 모두 다 혁파하고 반환하도록 하였지만, 이러한 것들을 어찌 내가 다 알고 있었겠는가? 알지 못한다는 것도 나의 허물이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후회한들 어찌하랴. 차라리 스스로 희생이 되어 천지와 종사(宗社)와 백신(百神)의 신령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내가 손가락을 깨물며 후회하기를 이미 이와 같이 하였으니, 바라건대, 네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고치고 새로운 정치를 계획하도록 허락해 주기 바라노라. 나의 실덕(失德)은 대략 개진(開陳)하였거니와, 이번 재난은 실로 뜻밖의 일이로다. 무지하고 흉악한 왜적이 천자의 나라를 칠 꾀를 생각하고, 나에게 역당이 되라, 길을 빌리자 하기에, 내 의리를 들어 거절하였더니, 흉악한 짐승같은 마음으로 나의 큰 덕을 저버리고 작은 원망을 맺으려고 하는도다. 내 생각하건대, 종묘사직이 망하고 신민은 버릴지라도 군신(君臣)의 직분은 천지가 살피는 바이니, 대의를 우주에 밝히고 흉중을 태양 아래에 드러내어 천지신명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고자 할 따름이기에,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천조(天朝)에 호소하였도다. 황제께서 성명(聖明)하시어 나의 지극한 뜻을 살피고, 요동 총병관 조승훈(祖承訓)을 보내어 유격장군과 마병(馬兵) 1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을 공격하고 서울의 적을 소탕하고자 하였고, 또 강소(江蘇)와 절강의 선봉군사 6천 명이 조석을 앞두고 강을 건너올 것이며, 본도의 병마 또한 수만 명이 모였으니, 천자의 위엄과 성세가 미치는 곳에 군사는 마땅히 더욱 분발할 것인데 하물며 궁지에 몰린 오랑캐는 죄악이 이미 극도에 달하여 천벌이 당연히 가해져야 할 것이다. 평양의 왜적은 기세가 이미 꺾이어 섬멸을 당하게 되었도다. 맑은 가을이 다가오고 태백성(太白星)이 바야흐로 높으니, 군대의 위용이 있는 곳에 살기(殺氣)는 순해지고, 충의가 향하는 곳에 어느 적인들 이기지 못하랴. 너희들은 이미 경기 땅에 있으니, 형세를 살펴 군사를 합쳐서 서울을 수복하기 원하노니! 네가 힘쓰지 않으면 내 또 누구를 의지하랴. 군량이 모자라면 경기ㆍ호남에 있는 창고의 것을 네 마음대로 가져다가 공급하고, 군기(軍器)가 다하면 경기ㆍ호남의 병장기를 네 마음대로 가져다 쓰면서 각기 힘쓰도록 하라.
이제 고경명에게 공조 참의를 제수하고 초토사의 관직을 더하며, 김천일에게는 장예원 판결사에 올려 창의사(倡義使)를 더하고, 박광옥(朴光玉) 등 이하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관직을 올려주노라. 너의 충의를 생각하면 작상(爵賞)을 바라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 일은 이밖에 다른 길이 없으니 받아줄 것이며, 더욱더 힘쓰기를 바라노라. 용만(龍灣) 한 구석에 국운(國運)이 어렵게 버티고 내 땅 경계는 끝났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꼬. 인정(人情)이 이미 끝에 달했으니, 이치가 당연히 수복되기를 그리워할 것이다. 가을 기운이 잠깐 일어나니, 변지(邊地)의 날씨는 일찍 차도다. 장강(長江)을 바라보니 또한 동으로 흐르는데, 돌아가고자 하는 일념(一念)은 강물처럼 도도하구나. 교시가 이르면 너희 신민들은 반드시 나의 뜻을 가련하게 여기고 슬퍼할 것이다. 슬프다! 하늘이 이성(李晟)을 낸 것은 성궐(城闕)을 다시 회복할 날을 기대하게 한 것이고, 날마다 장준(張俊)을 바라는 것은 원릉(園陵)이 무사하다는 기별을 기다림이라. 하루 빨리 이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여 이슬과 서리를 맞는 나의 고통을 면하게 하기를 바라노라. 이에 교시하노니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양산숙(梁山璹) 등이 고경명(高敬命)의 군진에 돌아오니, 고경명은 이미 죽었었다. 양산숙이 이에 교서를 반포하여 선유하니, 남은 군사와 백성, 억센 장수와 완악한 졸개까지도 울지 않는 이가 없으니 사람들이 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에서 내린 애조(哀詔)에 비유하였다. 양산숙은 이에 강도(江都)로 돌아가 김천일의 군진에 들어갔다.
고경명은 폐거(廢居)하고 있던 사대부로 하루아침에 의기를 떨쳐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는 무리를 불러 모았으니, 일은 비록 이룩하지 못하였으나 의열(義烈)은 빛나 두터운 봉록을 먹는 계획없는 관리들이 부끄럽게 될 것이다. 조정에서는 고경명의 죽음을 듣고 탄식하며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임금도 역시 슬퍼하여 고경명에게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성균관사의 증직을 내리도록 명하고, 고인후(高因厚)에게는 예조 참의를, 유팽로(柳彭老)에게는 사간원 사간을,
안영(安瑛)에게는 장악원 첨정을 증직하여 광주(光州)에 사당을 짓게 하고, 포충사(褒忠祠)라고 사액하여 세시(歲時)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또한 모두 분향하고 술을 올렸으니, 그의 충의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고종후(高從厚)가 의병을 다시 모아 여러 도(道)에 격문을 돌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 20년(1592, 선조 25) 월 일, 복수 의병장 전 임피 현령(臨陂縣令) 고종후(高從厚)는 피눈물로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열읍 의병청(義兵廳)의 제공들과 여러 군자들에게 삼가 고하나이다. 고자(孤子)는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설욕하기 위하여 기병하여 절에 있는 종들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어 그 수가 실로 많으나 열읍을 두루 다니기는 나로서 너무도 겨를이 없으므로 다만 관리의 힘만을 의뢰하고 있는 형편이라 행군할 시기를 놓칠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가슴속에 맺힌 원한을 가지고 감히 당세(當世)의 의사(義士)들에게 고합니다. 혹시 문서나 장부에 유의하여 사리(事理)에 방해됨이 있지나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계책상 부득이한 일이긴 하나 역시 죄는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고자(孤子)는 집이 본래 가난하여 왕통(王通)의 헐어빠진 움막집이 있을 뿐이요, 성품조차 소활하여 자공(子貢)과 같은 재산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도적만은 잊을 수가 없어서 이에 감히 금혁(金革)의 변례(變禮 긴급한 경우 예를 변경함)로 상복을 벗고 군대에 나선 것인데 호걸로서 대열에 참여한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국가의 원한 깊은 원수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재물이 부족하면 군사를 모을 수 없고, 병기가 날카롭지 못하면 적을 누를 수가 없습니다.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감히 안공(顔公)처럼 미곡(米糓)을 애걸하고 맨 땅에 빈 손으로 일어나니, 조적(祖逖)처럼 병기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군사들이 배를 주리게 되면 어찌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겠습니까? 땅을 밟고 하늘을 이고 사는 이상 결코 제 한 몸이 잘되기를 꾀하는 것이 아니요, 맨주먹을 휘두르고 칼날을 무릅쓰니 천리(千里)를 싸워 나가기는 어려울 것같습니다. 오직 죽은 이를 위하여 한번 씻고자 함인데, 어찌 힘있는 분들이 가만히 앉아 바라만 볼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 한 도(道)의 제장(諸將)들이 누군들 나라의 백성이 아니리오. 단에 올라 피로써 맹세하니, 혹은 죽은 어버이에게 의기를 허락하고 어깨를 치고 소매를 끌어잡는 사람 중에는 역시 고자(孤子)에게 연분이 있습니다. 비록 얼굴을 대해 보지는 못했지만 소리만은 서로 접속되고 있는 처지이니, 백세(百世)나 떨어져도 감응이 있는 자도 있는데 하물며 같은 시대에 태어났음에 있어서랴. 이번 6월의 군대 출동은 결사적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 몸소 먼저 무부가 되어 비록 훈업(勳業)을 생전에 다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인륜을 유지해서 그 의열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날 것이니, 이는 한 집안의 사론(私論)이 아니요, 백세의 공론(公論)이라 하겠습니다. 저 길가는 나그네도 눈물을 흘리거늘 하물며 선비들에 있어서 어찌 슬픈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의(義)를 사모하고 인(仁)을 힘써 행한다면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여야 할 것입니다. 수전노가 되기보다는 남의 급한 것을 구해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비는 자식을 가르치고 형은 아우를 격려하니 어찌 월(越) 나라가 진(秦) 나라 여윈 것을 바라보듯하겠으며, 현(縣)이 다르고 군(郡)이 다르다 하여 저들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여기지를 마십시오. 사해(四海)는 모두 우리의 형제들이니 한 말의 곡식도 오히려 방아찧어 나누어 먹을 수 있고, 작은 고을이라도 충신이 있다하였으니 한 세상을 속여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옛말에도 있으니 여러분은 들으십시오. 한 삼태기의 흙이 산이 되고, 한 치의 쇠붙이도 사람을 죽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각자가 자기 힘에 따라 할 것이니 어찌 다 구비하기를 바라리오. 글로써 성의를 드러내지 못하고 여기에서 말을 마치겠습니다. 악의의 전[樂毅傳]을 읽으면 반드시 책을 놓고 울 것이며, 노숙(魯肅)이 창고를 털어주듯 하면 소문을 듣고 일어날 것입니다. 자산과 기계를 내어 서로 도와주시려고 하시면 여러분은 성명을 이어 서명하소서.
남원(南原) 정충사(貞忠祠)의 비문 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26)에 왕사(王師)가 왜병들을 바닷가에서 크게 무찔러 왜적들의 수괴인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깊이 원망하였다. 그해 6월에 자신의 장수인 가등청정(加藤淸正)으로 하여금 정예병을 모두 거느리고 진주성(晉州城)을 공격하여 평양성(平壤城)에서의 패전을 갚게 하였는데, 일본 전국의 힘을 이 한 성에 응집시켜서 그 형세가 참으로 바윗덩이로 계란을 억누르는 것과 같았다. 우리 군사들은 하루에 두세 번을 적과 싸우면서 혼자 열 명을 당해 내지 않는 군사가 없어 사기가 백 배는 치솟았다. 그러나 하늘이 순조롭게 도와주지 않아 큰비가 쏟아져 내려 성이 무너진 탓에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성 안에 있던 장사는 모두 죽었는데, 그중에 한 분이 바로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 황공(黃公)이었다. 淸陰先生集卷之二十九 碑銘 六首 청음 김상헌(金尙憲) [주C-001]정충사(貞忠祠) : 남원(南原)에 있는 사당으로 뒤에 정충사(旌忠祠)로 사액(賜額)되었다.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한 황진(黃進)ㆍ고득뢰(高得賚)ㆍ안영(安瑛)을 모신 사당이다. 南原貞忠祠碑 萬曆癸巳。王師大膊倭兵。蹴之于海上。賊酋秀吉甚怨。是年六月。使其將淸正。盡銳專犯晉陽。以報箕城之役。以全國之力。擬之於一城。其勢固已壓卵。我師日再三合。無不一當十。士氣百倍。天不助順。大雨城壞。比十晝夜城陷。城中將士皆死之。其一忠淸節度使黃公。公諱進。長溪縣人。故相翼成公喜五世孫。父贈左議政允恭。娶南陽房氏女。嘉靖庚戌生公。偉軀美髥。勇力絶人。性剛毅有大志。年二十七。中武科爲宣傳官。母憂廬墓三年。服除。除居山道察訪。癸未。問罪時。箭叛胡先登有功。授安原權管。分所獲虜級。脫其友戴罪自效者。人義之。復拜宣傳官。亡何。從通信上使黃允吉往日本。同行者爭以越橐市利。公不顧。獨買二寶劍。人怪問之。曰明年虜必渝盟。吾將用此殱之。不知者反疑大言。後見公志。還。上問虜情。上使言賊必來。副使金誠一言必不來。公欲上疏請斬之。且陳舟師禦虜之計。爲時議所沮。除濟用監主簿同福縣監。日習戰用備。未嘗自逸。明年。虜果掃境以來。乘輿西遷。全羅監司李洸等。潰于龍仁。公獨全師以歸。戰于熊峙。又戰于梨峴。皆大捷。湖南賴以全。領軍過全州。州人感德。壺漿塞路。幕府掩其功。賞止訓鍊副正。體臣承制。假守益山。命許卽眞。全羅兵使宣居怡之進兵水原也。以公斥候。爲虜所圍。見賊騎善馬者。奪騎潰圍馳還。事聞。陞折衝忠淸助防將。癸巳。陞本道兵使。京城賊遁。追擊于尙州赤巖屢捷。又追至咸安。移陣晉州倡義使金千鎰,慶尙右兵使崔慶會,金海府使李宗仁,復讎將高從厚等次第來會。時已有賊先聲。不日奄至。不見其際。公氣益壯。意欲呑諸賊。日夜身睥睨間不少懈。賊乘雨趨城缺處。公親負土石以補之。士爭感泣忘身。又奮力殺賊無算。近城草木爲赭。賊百道竝進。器械甚盛。公輒以計破之。又射殪其將。賊將自退。適一賊挾丸竄壕邊。暗中公左額。遂不救。一軍如喪父母。哭聲雷震。宗仁亦盡力血戰。怒挾兩賊。投江而死。金千鎰,崔慶會,高從厚等。皆自投矗石樓下。死者萬餘人。賊夷城而去。初。公議吾等同入一城。外援不至則事危矣。吾欲出陣城外。裏外相應。賊可制也。千鎰難之。不果出。義兵將郭再佑亦見公曰。晉非公所轄。且無朝命。何必入。公曰。已與倡義使約。不可背也。郭知其已定。酌酒相訣。及聞城陷曰。諸將易得。至於黃節度。難得其比。痛惜不已。又有贈漢城右尹高公得賚。從倡義金公死一處。贈僉正安公瑛。從霽峯高公死錦山。皆終始不去。視死如歸。於是一時南原有三節義。其所成就。雖有大小之殊。而秉彝之天。烈烈不可奪則無彼此矣。故鄕人聚而俎豆之。顏之曰貞忠。公有二子。曰廷稷廷說。皆武科。孫曰暐。司諫院正言。至己丑春。南原之鄕大夫崔君蘊等五十餘人。合辭送人于楊州千里之外。徵余言以文麗牲之石曰。聞公好談忠臣節義之事。以傳于世。今此三賢之蹟。獨不可不紀。余不敢以老耄辭。謹爲之序而係之銘。銘曰。 淸陰先生集卷之二十九 碑銘 六首 청음 김상헌(金尙憲) 16世 안영(安瑛)의 유사(遺事) /참찬공파 안방준(安邦俊) 수재(秀才) 안영(安瑛)의 자(字)는 원서(元瑞)이니, 기묘 명류(己卯名流)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안처순(安處順)의 증손이요 판서(判書)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으로서 남원부(南原府)에 살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원서는 남원의 장원(莊園)에 있었고 모부인(母夫人) 이씨(李氏)는 서울 집에 있다가 난을 당하여 서로 잃었었는데, 원서가 피난한 사녀(士女)들이 대부분 강화(江華)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이씨의 거처를 알아보려 하였으나 적병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길이 불통이므로 원서는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이때 고 초토사(高招討使, 고경명(高敬命))가 의병을 일으켜 강화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원서는 이에 초토(招討)의 군중으로 가서 어머니를 찾으려 하였다. 원서는 이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막하(幕下)의 제생(諸生)들이 모두 큰소리를 치며 얕보았으나 원서는 날마다 대(隊)를 따라다닐 뿐이었다. 그런데 패전을 하게 되자 제생들은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으나 원서는 홀로 가지 않고 고공(高公)에게 ‘일단 물러났다가 후일 다시 도모하자’고 청하였으나 고공은 “나야 죽어야 하지만 그대는 속히 돌아가라.” 하며 의연히 움직이지 않으므로, 원서는 고공을 껴들어 말에 올려놓았는데, 고공은 말 타는 데에 익숙지 못하여 말에서 떨어졌고 말은 달아났다. 원서는 자신이 타던 말을 고공에게 주고 원서는 걸어서 그 뒤를 따랐다. 적이 가까이 다가들자 고공은 원서에게 권하여 피해 달아나라 하였으나 원서는 응하지 않았다.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가 도착하자 원서와 유공은 협력하여 고공을 구하다가 드디어 같이 전사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의 증직(贈職)과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안영(安瑛)-1파16세 공의 집은 남원에 있어 당시 모친이 근친으로 서울에 거처하므로 문안차 상경하려는 때에, 임진왜란으로 왜적이 침범하여 임금은 의주로 파천하고, 도로가 두절되었다는 소식에 공은 식음을 전폐하고 울부짖다가, 고경명 의병장이 이끄는 담양지역 의병에 서기관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적들과 싸우다가 마침내 고경명공을 감싸 안으며 전사하였고, 고공의 아들 인후도 전사하게 되니, 임진년(1592) 7월 10일 공의 나이 28세였다. 공의 백부 매담공 창국이 의병승을 모아 공의 시신을 수습할 때, 공의 칼집에 새겨진 성자(姓字)와 수금랑에 수 놓인 ‘s충효’ 두 글자를 증거로써 찾게 되었다. 10월에 남원 풍수암 오좌에 장사지내니 선영 아래이다. 금산의 사실을 보고 받은 조정에서, 증 장악원 첨정을 추서하고, 을미년에 정려문을 세워 기리도록 하였으며, 숙종 계유(1693)에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하였다. 그 후 각 지방인이 연고지에 세운 광주 포충사, 금산 종용사, 남원 정충사 세 사당에 배향되고 있다. 공의 자는 원서이니 증조부 처순은 홍문박사로 기묘사화를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니 호는 사제당이요, 조부 전은 호가 죽암이니 문장과 행실로 명성이 있었다. 부친 선국은 관직이 사과이며, 모친 연안 이씨는 선조조 명신 판서 이후백(세칭 청련선생)의 따님이다. 공은 고암 양자징의 사위가 되어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성리학을 배웠으며, 문예와 서간문 등은 일찍부터 오묘한 경지에 이르러 사우(士友) 간에 명성이 있었다. 과거 보기를 단념하고는 스스로 호를 청계거사라고 짓고, 학문의 완성을 실천 수행하는데 힘썼다. 부인 제주 양씨의 묘는 공의 묘 조금 아래에 있다. 아들은 수준이요, 손자는 필이다. ---------------------------------------------------------------------------------------- 안영 [ 安瑛 ] 원본글 출처 : 안영의 유사(遺事) 저자 : 안방준(安邦俊) 이명 자 : 원서(元瑞)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수재(秀才) 안영(安瑛)의 자(字)는 원서(元瑞)이니, 기묘 명류(己卯名流)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안처순(安處順)의 증손이요 판서(判書)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으로서 남원부(南原府)에 살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원서는 남원의 장원(莊園)에 있었고 모부인(母夫人) 이씨(李氏)는 서울 집에 있다가 난을 당하여 서로 잃었었는데, 원서가 피난한 사녀(士女)들이 대부분 강화(江華)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이씨의 거처를 알아보려 하였으나 적병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길이 불통이므로 원서는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이때 고 초토사(高招討使, 고경명(高敬命))가 의병을 일으켜 강화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원서는 이에 초토(招討)의 군중으로 가서 어머니를 찾으려 하였다. 원서는 이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막하(幕下)의 제생(諸生)들이 모두 큰소리를 치며 얕보았으나 원서는 날마다 대(隊)를 따라다닐 뿐이었다. 그런데 패전을 하게 되자 제생들은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으나 원서는 홀로 가지 않고 고공(高公)에게 ‘일단 물러났다가 후일 다시 도모하자’고 청하였으나 고공은 “나야 죽어야 하지만 그대는 속히 돌아가라.” 하며 의연히 움직이지 않으므로, 원서는 고공을 껴들어 말에 올려놓았는데, 고공은 말 타는 데에 익숙지 못하여 말에서 떨어졌고 말은 달아났다. 원서는 자신이 타던 말을 고공에게 주고 원서는 걸어서 그 뒤를 따랐다. 적이 가까이 다가들자 고공은 원서에게 권하여 피해 달아나라 하였으나 원서는 응하지 않았다.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가 도착하자 원서와 유공은 협력하여 고공을 구하다가 드디어 같이 전사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의 증직(贈職)과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참고참조어 : 국조인물고 해제 ---------------------------------------------------------------------------------------- 안영 [ 安瑛 ] 이칭별칭 : 자 원서(元瑞) 출생-사망 미상 ~ 1592년(선조 25) 성격 : 의병 출신지 :남원 본관 : 순흥(順興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관련사건 : 임진왜란 대표관직(경력) : 의병 목차정의내용정의?∼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
내용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원서(元瑞). 남원 출신. 교리(校理) 처순(處順)의 증손이다. 임진왜란 때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光州)에 있던 고경명(高敬命)이 창의기병(倡義起兵)하니, 옥과(玉果)의 유팽로(柳彭老)가 호응하여 모여든 의병 6,000여명을 거느리고 전주를 지나 여산(礪山)에 머물렀다.
적을 멸하고 서울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 충효를 다하려고 양대박(梁大樸)과 더불어 고경명 휘하에 들어갔다. 전라감사 이광(李洸)은 관군을 거느리고 금강까지 왔다가 갑자기 회군하였으나 고경명은 계속 북진하고 아들 종후(從厚)와 의논하여 은진(恩津)을 거쳐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였는데, 적이 금산에 이미 들어갔음을 듣고 금산성 밖 와은평(臥隱坪)에 진을 쳤다.
적은 관군이 취약함을 알고 먼저 관군을 향하여 진격하니 영암군수 김성헌(金成憲)이 도망하고 전군이 흩어지자 적은 고경명군을 포위하고 공격해왔다.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으나 결국 싸움에 패하여 전군이 흩어졌다. 그가 고경명에게 후퇴하여 후일에 재건할 것을 종용하자, 고경명은 내가 마땅히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니 군(君)은 속히 자리를 떠나라 대답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억지로 고경명을 말에 태웠으나 기마에 서투른 고경명이 말에서 떨어져 말을 놓치자 자기의 말에 태우고 자신은 도보로 뒤를 따랐다. 적병이 핍박하자 유팽로와 더불어 대장 고경명을 몸으로써 막고 적과 싸우다 고경명과 그의 아들 종후, 유팽로와 함께 순국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영 [ 安瑛 ] 출생-사망 ? ~ 1592 본관 : 순흥(順興) 자 : 원서(元瑞) 출생지 : 남원(南原) 조선시대의 의병. 본관 순흥(順興). 자 원서(元瑞). 남원(南原) 출생.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서울에 있는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가는 길에 고경명(高敬命) 휘하의 의병에 가담, 활약하다가 금산 싸움에서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장악원첨정에 추증되었다.
참조항목 : 정충록 출처두산백과 [출처] 안영 | 두산백과 ---------------------------------------------------------------------------------------- 안영 [ 安瑛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원서(元瑞), 호는 청계(淸溪). 증조할아버지는 기묘명현 사제당(思齋堂) 안처순(安處順)이며 아버지는 사과(司果) 안선국(安善國)이다. 남원의 금릉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안영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남원의 본가에 있었는데 당시 모친은 서울의 집에 있었다. 난을 만나서 서로 찾지를 못하고 있는 터에 서울의 사대부 부녀자들이 강화로 피난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어머니의 행방을 알고자 밤낮으로 찾아 다녔다.
이때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이 강화로 들어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를 만나기 위하여 양대박(梁大樸)과 함께 고경명의 휘하에 들어갔다.
고경명이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워 패하였다. 안영이 ‘이번에는 일단 물러났다가 뒷날 다시 일어날 것을 도모하소서’라고 권하였으나, 도리어 고경명은 ‘나는 이미 죽음을 결심하였으니 그대는 빨리 여기를 벗어나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영은 듣지 않고 고경명을 부축하여 말에 오르게 하였으나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안영은 자신의 말에 고경명을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따라갔다. 유팽로(柳彭老)와 더불어 고경명을 엄호하며 적과 싸웠으나 끝내 고경명·유팽로와 함께 순절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 「청계실기」가 있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는 좌승지에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내렸고, 광주의 포충사(褒忠祠)와 금산의 종용사(從容祠), 남원의 정충사(旌忠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남원지』(남원지편찬위원회, 1992) 출처 : 디지털남원문화대전
안종약(安從約)ㅡㅡ>안구(安玖)ㅡㅡ>안지귀(安知歸)ㅡㅡ>안호(安瑚),안선(安璿),안기(安璣),안침(安琛), ㅡㅡ>안처경(安處經),안처권(安處權),안처상(安處常),안처건(安處健)·안처순(安處順) 안기(安璣)ㅡㅡ>안처순(安處順)ㅡㅡ>안전(安瑑)ㅡㅡ>안선국(安善國)ㅡㅡ>안영(安瑛)ㅡㅡ>안수준(安壽俊)ㅡㅡ>안필(安珌)ㅡㅡ>안후익(安厚益),안후악(安厚岳) 청계공 안영 묘
공은 휘가 진(進)이고, 장계현인(長溪縣人)으로, 고(故) 상신(相臣)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좌의정에 증직된 황윤공(黃允恭)이며, 어머니는 남양 방씨(南陽方氏)인데, 가정(嘉靖) 경술년(1550, 명종5)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체구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용력(勇力)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성품은 강직하고 굳세었으며 큰 뜻을 지니고 있었다. 2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제를 마치고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에 제수되었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죄를 물을 때 반호(叛胡)를 활로 쏘면서 먼저 성에 올라가 공을 세웠다. 안원 권관(安原權管)에 제수되었는데, 자신이 노획한 오랑캐의 수급을 나누어 주어 공을 세워 죄를 씻어야 하는 친구의 죄를 벗겨 주자 사람들이 의롭다고 하였다. 이후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얼마 있다가 통신상사(通信上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갔는데, 함께 간 일행이 앞 다투어 물품을 사 가지고 와 이문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보검(寶劍) 두 자루만 구입하였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며 그 까닭을 물으니, “내년에 왜적이 반드시 맹약을 깰 것이다. 나는 그때 이 칼을 써서 섬멸할 것이다.” 하자 공에 대해 잘 모르는 자들은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훗날에는 과연 공의 뜻을 보게 되었다.
조정에 돌아오자 상께서 왜적의 사정을 물었는데, 상사인 황윤길은 왜적이 반드시 침입해 올 것이라고 하였고, 부사인 김성일(金誠一)은 왜적이 반드시 침입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공은 상소를 올려 김성일을 참수하고 수군(水軍)을 양성해 왜적을 방어할 계책을 진달하려고 하였으나 시의(時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와 동복 현감(同福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날마다 전술을 익히면서 대비하느라 편히 쉬는 날이 없었다.
다음 해에 과연 왜적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어가가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전라 감사 이광(李洸) 등은 용인(龍仁)에서 왜적에게 궤멸되었으나, 공만은 홀로 군사를 온전하게 데리고 돌아와 웅치(熊峙)에서 왜적과 싸웠으며 또 이현(梨峴)에서 싸웠는데, 모두 적을 크게 무찔러서 호남이 이에 힘입어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全州)를 지나갈 때 전주 사람들이 은덕에 감격하면서 호장(壺漿)을 싸들고 와 길을 메웠다. 그러나 막부(幕府)에서 공의 공(功)을 엄폐하여 상이 훈련 부정(訓鍊副正)에 그쳤다.
체찰사가 승제(承制)로 익산(益山)의 임시 군수(郡守)로 삼았는데, 곧바로 정식으로 익산 군수가 되게 하였다. 전라 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가 수원(水原)으로 진격하였을 때 공은 척후(斥候)로 나갔다가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적중에 좋은 말을 탄 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말을 빼앗아 타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돌아왔다. 이 일이 보고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어 충청 조방장(忠淸助防將)에 제수되었다.
계사년(1593, 선조26)에 전라 병사로 승진하였다. 이때 경성(京城)에 있던 왜적이 후퇴하는 것을 상주(尙州) 적암(赤巖)까지 추격하여 격퇴시켰다. 다시 함안(咸安)까지 추격하였다가 진주(晉州)로 진영(陣營)을 옮겼는데,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등이 차례로 와서 모였다. 이때 이미 왜적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더니, 며칠도 채 지나기 전에 왜적이 갑작스럽게 쳐들어왔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공은 기운이 더욱 굳세어져 여러 왜적들을 집어삼키려고 하였다. 이에 밤낮없이 성가퀴의 사이에 나가 있으면서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왜적이 비가 오는 틈을 타서 성의 허술한 곳으로 넘어오려고 하자, 공은 스스로 흙과 돌을 날라 그곳을 메우니 병사들이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앞 다투어 성을 보수하였다. 또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 셀 수 없이 많은 적을 죽였는데, 성 부근의 초목이 붉게 물들 정도였다.
왜적이 사방에서 일제히 쳐들어오면서 무기를 몹시 많이 가지고 공격해 왔는데, 공이 번번이 계책을 써서 부숴 버렸다. 또 화살로 왜적의 장수를 쏘아 죽이니, 적장이 스스로 물러갔다. 그때 마침 왜적 한 놈이 성의 해자(垓子) 가에 숨어 있다가 몰래 총을 쏘아 공의 좌측 이마를 맞추었으므로 드디어 공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모든 군사가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여 통곡 소리가 천둥이 울리는 것과 같았다.
이종인(李宗仁)도 역시 온 힘을 다해 혈전을 치르다가 적병을 양쪽 옆에 끼고는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고종후(高從厚) 등도 모두 촉석루(矗石樓) 아래로 투신하여 죽었는데, 이때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왜적이 성을 함락시키고 떠났다.
당초에 공이 “우리들 모두가 한 성에 들어가 있다가 외부에서 원군이 이르지 않을 경우에는 일이 위급하게 될 것이다. 나는 성 밖으로 나가 진을 치고 있다가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왜적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천일이 그렇게 하는 것을 곤란하게 여겨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도 공을 만나서 말하기를, “진주는 공이 관할해야 할 곳도 아니고 조정의 명령도 없는데 하필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와 약속을 하여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자, 곽재우도 이미 공이 뜻을 정한 것을 알고는 술잔을 나누며 서로 영결하였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곽재우가 말하기를, “다른 장수들은 쉽게 얻을 수 있으나, 황 절도사만은 그에 비길 만한 장수를 얻기가 어렵다.” 하면서 애통해 마지않았다.
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된 고득뢰(高得賚) 역시 창의사 김천일을 따라 싸우다가 같은 곳에서 죽었으며, 첨정(僉正)에 추증된 안영(安瑛)도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싸우다가 금산(錦山)에서 죽었다. 이들은 모두 종시토록 전장을 떠나지 않으면서 죽는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이에 한꺼번에 남원(南原)에서 세 절의사(節義士)가 나오게 되었다. 그들이 성취한 것은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었으나, 떳떳한 천성이 열렬하여 뺏을 수 없는 것은 피차간에 차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향리 사람들이 이들을 함께 제사 지내면서 그 사당을 정충사(貞忠祠)라고 하였다.
공에게는 정직(廷稷)과 정열(廷說)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무과에 급제했다. 손자 위(暐)는 사간원 정언으로 있다. 기축년(1649, 인조27) 봄에 이르러 남원의 향대부(鄕大夫)인 최온(崔蘊) 등 50여 인이 함께 천여 리나 떨어진 양주(楊州)까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써 주길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공은 충신과 절의에 관한 일에 대해 말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이 삼현(三賢)의 자취를 기록하여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감히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서문을 지은 다음 명(銘)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지난 옛날 백제 있던 이 한 구역에 / 百濟一區
꿋꿋하고 굳센 장부 무리 있었네 / 毅夫之徒
계백 장군 뒤에 있어 일으키었고 / 階伯後起
성충 장군 앞에 있어 내몰았다네 / 成忠前驅
열렬하고 열렬했던 우리 황공은 / 烈烈黃公
바로 이곳 남원에서 태어났다네 / 挺生玆鄕
삼한 땅의 뛰어났던 장수였으며 / 三韓之良
일만 군사 막을 만한 무위 있었네 / 萬夫之防
세차 마침 용사의 해 되던 그해에 / 歲丁龍蛇
섬 오랑캐 제멋대로 날뛰었다네 / 逆虜跳梁
공은 그때 절도사의 부절 잡고서 / 公時杖節
호남 지역 전담하여 절제하였네 / 專制湖廂
천리 먼 길 외론 군사 거느리고서 / 千里孤軍
멀리 있는 진양 향해 달려갔다네 / 遠赴晉陽
보는 자들 한심하게 여기었으나 / 見者寒心
공은 홀로 떨치어서 일어났다네 / 公自奮揚
장군께서 군사에게 내린 그 호령 / 將軍號令
부월처럼 엄정하고 엄정하였네 / 鈇鉞其嚴
의사께서 한 번 뱉은 승낙의 말은 / 義士一諾
중하기가 천금보다 더 중하였네 / 重於千金
적들 오는 모습 보면 고슴도치고 / 賊來如蝟
공의 용맹 보면 마치 범과 같았네 / 公勇如虎
큰소리로 군사들을 질타를 하매 / 音烏叱咤
호령 소리 우레처럼 울리었다네 / 雷霆吼怒
하늘에서 순조롭게 아니 도와서 / 天不助順
요사스런 별 보루에 떨어졌다네 / 妖星隕壘
공의 혼은 상제 뜰에 올라갔으나 / 公神帝庭
또한 역시 옛 향리로 돌아왔다네 / 亦返故里
왕께서는 공의 그 공 생각하여서 / 王念乃功
백성들을 시켜 사당 짓게 하였네 / 俾民以興
날짜 가려 뽑고 제수 마련한 다음 / 卜日潔牲
신주 깎아 모시고서 제사 올렸네 / 治主以升
누가 감히 공경하지 아니하겠나 / 孰敢不敬
더군다나 가래나무 숲 있는 데랴 / 況也梓林
고득뢰와 안영 두 분 계시었거니 / 曰高曰安
아름다움 나란하여 셋이 되었네 / 竝美成三
용머리에 솟아 있는 정자가 있어 / 龍頭之亭
그 절벽에 사적 지어 새길 수 있네 / 石崖可鐫
공의 공적 기록하여 후대에 전해 / 紀蹟傳芳
전 시대의 어진 이와 짝하게 하네 / 用配前賢
[주D-001]계미년에……때 : 1583년(선조16)에 니탕개(泥湯介)를 중심으로 한 회령(會寧) 지방의 여진족이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니탕개는 선조 초에 우리나라로 귀화한 여진인으로, 육진(六鎭) 지역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후대를 받아 온 자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경원(慶源)에 사는 여진인들이 민심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경원 부사 김수(金璲)가 이들에게 패해서 여진인들이 부내의 모든 진보(鎭堡)를 점령하여 기세를 떨쳤다. 그 뒤에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이 힘껏 싸워 강을 건너서 여진족의 소굴을 소탕하매 난이 평정되었다. 《國朝寶鑑 卷28》
[주D-002]승제(承制) : 임금의 명을 받아 외방에 나가 있으면서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임시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3]고득뢰(高得賚) : 본관은 용담(龍潭)이고, 자는 은보(殷甫)이다.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고 경서와 글씨에 뛰어났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고향인 남원(南原)에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최경회(崔慶會) 휘하의 부장이 되어 금산(錦山) 등지에서 왜병과 맞서 싸웠으며, 진주성(晉州城)이 위급해지자 최경회와 함께 성에 들어가 다른 의병과 협력하여 성을 지키다가 순국하였다.
[주D-004]안영(安瑛) :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자는 원서(元瑞)이다. 임진왜란 때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光州)에 있던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금산의 싸움에서 고경명과 함께 순국하였다.
百濟一區。毅夫之徒。階伯後起。成忠前驅。烈烈黃公。挺生茲鄕。三韓之良。萬夫之防。歲丁龍蛇。逆虜跳梁。公時杖節。專制湖廂。千里孤軍。遠赴晉陽。見者寒心。公自奮揚。將軍號令。鈇鉞其嚴。義士一諾。重於千金。賊來如蝟。公勇如虎。音烏叱咤。雷霆吼怒。天不助順。妖星隕壘。公神帝庭。亦返故里。王念乃功。俾民以興。卜日潔牲。治主以升。孰敢不敬。況也梓林。曰高曰安。竝美成三。龍頭之亭。石崖可鐫。紀蹟傳芳。用配前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