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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뿌리를 찾아서 스크랩 7.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주임교수 추천 1 조회 44 15.08.01 06: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7.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4세기초 분서왕 시대 백제도

 

 

고이왕(재위239~286)

 

고이왕은 구이왕의 아들이다. 구수왕계 사비왕을 축출하고 백제왕이 되었다.
3년(236) 겨울 10월에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5년(238) 봄 정월에 천지에 제사를 지냈는데 북과 피리鼓吹를 사용하였다.
2월에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에 왕궁 문기둥에 벼락이 치자 누른 용이 그 문으로부터 날아 나갔다.

6년(239) 봄 정월에 비가 오지 않다가 여름 5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7년(240)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여름 4월에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가을 7월에
석천(石川)에서 크게 사열하였는데, 한 쌍의 기러기가 냇가에서 날아오르자 왕이 쏘아 모두 맞혔다.

석천은 지금의 석하(石河)인 금주시(金州市) 남쪽으로 고려되며 온가구성이 있는데 백제 석현성으로 고려된다. 해군(海軍)의 집결지로 고려된다.

9년(242) 봄 2월에 나라 사람들에게 명하여 남택南澤에 논稻田을 개간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숙부 질(質)을 우보(右輔)로 삼았다. 질(質)은 성품이 충직하고 굳세어 일을 꾀함에 실수가 없었다.
가을 7월에 왕이 서문으로 나가 활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10년(243) 봄 정월에 큰 제단大壇을 설치하여 천지와 산천에 제사지냈다.
13년(246) 여름에 크게 가물어 보리 수확이 없었다.
가을 8월에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民口들을 돌려주었다.

 

중국 기록에 245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삭방태수 궁존이 영동 예국이 고구려에 속하므로 벌하였고 불내후등이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245년, 正始六年,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興師伐之,不耐侯等 擧邑降.

불내후는 불내예후라고도 하는데 그 위치는 의무려산 동쪽이며 지금의 요하 서쪽이다.
<위지동이전> 예전에 보면 의무려산 서쪽은 낙랑에 속하고 그 동쪽의 7현은 동부도위가 다스렸는데 예맥거수를 이용하여 자치하였다.
 自單單大山領以西屬
樂浪,自領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濊?民.後省都尉,封其渠帥?侯,今不耐濊皆其種也.漢末更屬句麗.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分,不得妄相
불내예후는 계속 중국군에 부역하였다. 247其八年,詣闕朝貢,詔更拜不耐濊王.居處雜在民間,四時詣郡朝謁.二郡有軍征賦調,供給役使,遇之如民

따라서 공손씨의 연나라를 멸국시킨 위나라의 새로운 낙랑, 대방군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요서인 의무려산과 요하 사이다.
그러나 247년에 다시 불내예후를 책명한 것으로 보아서 위나라의 낙랑, 대방군은 247년에 난하의 노룡으로 철수한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고구려> 기록에 관구검이 낙랑을 통하여 귀국하였다. 의무려산 북쪽의 보통 통로가 아닌 의무려산 남쪽의 통로로 귀국한 것이다. 지금의 요양하(饒陽河) 유역이 이 당시 낙랑, 대방이었다.
낙樂과 요饒는 중구 발음이 같다. 우리말에도 요산요수는 낙으로 읽지 않고 요로 읽는다.
이는 246년 관구검의 고구려 정벌중에 백제 고이왕이 낙랑을 쳤기 때문이다. 그 낙랑이 바로 의무려산 동쪽이다.

 

한편 의무려산 동쪽을 차지한 중국이 요하를 건너서 개주시 일대 진한 8국을 낙랑에 붙여서 통치하겠다고 작정하니, 한의 신지가 격노하고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여 없애 버렸다. 이때 대방태수 궁존은 전사하고 낙랑, 대방 이군은 한 땅에서 멸망하였다.
部從事吳林以
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 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이때 대방태수 궁존, 낙랑태수 유무가 한국신지를 정벌하였으나 궁존은 전사하였으니 낙랑, 대방 2군은 진한 땅에서 멸망하였다. 역시 247년의 일이다.

14년(247) 봄 정월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2월에 진충(眞忠)을 우보(右輔)로 삼고, 진물(眞勿)을 좌장으로 삼아 군사 업무를 맡겼다. 15년(248)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고 또 일년간의 조(租)와 조(調)를 면제해 주었다.
16년(249) 봄 정월 갑오에 금성太白이 달을 범하였다.
22년(255) 가을 9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를 쳤다. 신라의 군사와 괴곡(槐谷) 서쪽에서 싸워 이기고 그 장수 익종(翊宗)을 죽였다. 겨울 10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4년(257) 봄 정월에 크게 가물어 나무들이 모두 말랐다.
25년(258) 봄에 말갈 추장 나갈(羅渴)이 좋은 말 열 필을 바쳤다. 왕은 사자를 후하게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26년(259) 가을 9월에 청자(靑紫) 색의 구름이 왕궁 동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누각과 같았다.
27년(260) 봄 정월에 내신좌평(內臣佐平)을 두었는데 왕명 출납宣納에 관한 일을 맡았다. 내두좌평(內頭佐平)은 창고와 재정에 관한 일을 맡았고, 내법좌평(內法佐平)은 예법과 의례에 관한 일을 맡았고, 위사좌평(衛士佐平)은 왕궁을 지키는宿衛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고, 조정좌평(朝廷佐平)은 형벌과 감옥에 관한 일을 맡았고, 병관좌평(兵官佐平)은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다.

또 달솔(達率)· 은솔(恩率)· 덕솔(德率)· 한솔(汗率)· 나솔(奈率) 및 장덕(將德)· 시덕(施德)· 고덕(固德)· 계덕(季德)· 대덕(對德)· 문독(文督)· 무독(武督)· 좌군(佐軍)· 진무(振武)· 극우(克虞)를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이요,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었다.
2월에 명령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주색紫色 옷을 입고 은꽃銀花으로 관(冠)을 장식하게 하였으며, 11품 이상은 다홍색緋色 옷을 입게 하고, 16품 이상은 푸른색靑色 옷을 입게 하였다. 3월에 왕의 동생 우수(優壽)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28년(261) 봄 정월 초하룻날初吉에 왕이 자주색의 소매가 큰 두루마기紫大袖袍와 푸른 비단 바지靑錦袴를 입고, 금꽃金花으로 장식한 검은 비단관金花飾烏羅冠을 쓰고, 흰 가죽 띠素皮帶를 두르고, 검은 가죽 신烏韋履을 신고 남당(南堂)에 앉아 정사를 보았다.

이 모습이 바로 안악3호분의 주인공인 백제왕의 모습이다. 이는 조양시 원대자 고분에서나 같고 요양시 상왕가에 있는 구이왕묘(위영지령묘)에서나 복식이 똑같다.
더욱 특이한 것은 조양시 원대자 고분과 안악3호분은의 주인공은 거의 한 사람처럼 닮았다. 주인공이 서로 부자이거나 벽화를 그린 화공이 똑같고 볼 수 있다.

2월에 진가(眞可)를 내두좌평으로 삼고, 우두(優豆)를 내법좌평으로 삼고, 고수(高壽)를 위사좌평으로 삼고, 곤노(昆奴)를 조정좌평으로 삼고, 유기(惟己)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3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신라가 듣지 않았다.

 

261년 7월에 낙랑외이(樂浪外夷)인 한韓과 예맥濊貊이 위나라에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불내예는 의무려산 동쪽과 요하 사이이고 한은 요하 건너 그 동쪽이다. 이 해는 고이왕이 중국의 낙랑군과 대방군을 없애고서 책명을 받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과 예맥의 동행은 의무려산 동쪽 예맥이 한에 복속한 것으로 해석된다. 즉 백제가 261년에 의무려산 동쪽을 차지한 것이다.
이후 265년에 진나라가 건국되었는데 이때 본격적인 백제의 외교가 있었다.

276년 2월 동이팔국 귀화 東夷八國歸化 기록을 시작으로 
276년 7월 동이17국 내부東夷十七國內附
278년 3월 동이6국
278년 12월 동이9국 내부(來附)
280년 6월 동이 10국 귀화
280년 7월 동이 20국 조헌
281년 6월 동이 5국 내부 등의 기록이 있다.
282년 9월 동이 29국 귀화
286년 8월 동이 11국 내부, 마한등 11국 견사래헌(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의 기록이 있다.
고이왕 사후로는 

287 8월 동이 2국 내부
287년 9월 동이7국 詣校尉 내부
289년 동이 1국 내부, 이해에 먼 곳의 동이 30여국 래헌 기록이 있다.
290 동이7국 조공
291 동이 17국 내부,

이후 동이의 진나라 조공이 없다. 대신 마한의 기록만 있다.
특히 동이국 중에서 마한의 외교만 따로 뽑혀진 것이 [진서/마한전]에 나오는데 
280년,281년,286년,287년,289년에 각각 있었다.
武帝太康元年、二年,其主頻遣使入貢方物,七年、八年、十年,又頻至。
마한은 290년 이후로도 계속 외교하는데 진서의 원문에 오자가 있다.
태희(290년) 다음에 함녕(275년)은 불가능하니 오자인 것이다.
太熙元年(290),詣東夷校尉何龕上獻。咸寧三年復來(275),明年又請內附。여기서 함녕 3년은 오기이고 태녕3년의 325년으로 고려된다.

동이국 마한의 소재는 [진서]에서  본래 진한辰韓(개주시)이 대방(백제 대방 요양시)의 남쪽이고, 동서가 바다로 막혔다고 했는데, 이는 요동반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마한이 산해지간에 위치하고, 또 진한은 그 마한의 동쪽이다. 즉 마한이 진한보다 커져서 진왕을 동남쪽으로 밀어낸 것이 된다. 
진한의 조공은 280년과 281년, 286년의 조공이 각각 있었다. 마한보다 횟수가 적다가 끊어진 것이다.

 

29년(262) 봄 정월에 영을 내려 무릇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장물(贓物)의 세 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금고(禁錮)하게 하였다.
33년(266) 가을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直宣)이 힘센 군사壯士 200명을 거느리고 나와 쳐서 우리 군사를 이겼다.
36년(269) 가을 9월에 살별이 자궁(紫宮)에 나타났다.
39년(272) 겨울 11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45년(278) 겨울 10월에 군사를 내서 신라를 공격하여 괴곡성(槐谷城)을 포위하였다.
50년(283)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53년(286) 봄 정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책계왕(재위288~300)

 

책계왕(責稽王)<혹은 청계(靑稽)라고도 하였다.>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키가 크고 뜻과 기품이 웅장하고 뛰어났다. 고이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은 장정들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은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를 맞이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사성(蛇城)은 개로대왕이 사성(蛇城)의 동쪽에서 숭산까지 방죽을 쌓았었다. 평양시 북쪽 평성시의 사현(巳峴)으로 고려된다. 니성 등이 있다.   
아단성은 <광개토왕비문> 순서에서 선천군 대륙산 산성으로 고려된다.
아단성은 개로왕이 죽은 곳이다. 대륙산은 백제 왕과 왕자들을 도륙한 도륙산의 전음으로 고려된다.
 

2년(287) 봄 정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13년(298) 가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안악3호고분은 백제 책계왕묘료 추정된다. 
 

안악3호분 주인공은 백제왕 복식이며 책계왕으로 해석된다.


백제왕비 복식으로 본다.

 


안악3호분 벽서/ 영화13년 10월 무자삭 26일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도,대방태수 도[][]  유주요동평곽
[]향경 상리 동수 자[]안 연69훙관

 

5행의 도[][] 유주, 요동 평곽 글자는 위 사진에서 보듯이 도비술都鄙戌이나 도비성都鄙城으로 추정된다. 
도비는 왕자 등의 거처(都鄙=古代 王侯 子弟 公卿大夫的 采邑)이다.
따라서 유주의 요동군 평곽현성에 백제 지방왕으로서 거처하면서 직함이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 현도, 대방태수였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232년경의 그의 출생지는 대방백제 도읍지(요양시)의 경상리라고 본다.

책계왕은 창려, 현도, 대방 3군 태수를 지냈는데 [수경]에서 백랑수가 동쪽으로 흘러 왜성의 북쪽을 지나는데 왜인들이 옮겨와 산다고 하였다. 백랑수 본류에 들어가서는 조양시를 지난다고 하였다.
水出西北平川,?流?
倭城北,盖倭地人徒之。又?南?乳?城北,盖?戎?,邑兼夷?也。又?南注白狼水。白狼水又?北,自?水注之,水?西北還山,?南注白狼水。
白狼水又?北??山西,燕慕容?以柳城之北

창려는 본래 백랑수의 최상류로서 지금의 수중현 북쪽 건창현인데, 후한시대 응소(應?)가 쓴 기록에 의하면 요동6국의 치소였으며
178년에 선비족 단석괴왕이 침범해 와서 왜인들 1000여가를 잡아가서 선비족 수도(산서성)에 데려다가 물질(잠수)을 시키기도 했다. 
현도군은  대릉하 수계인 부신시(阜新市)에 있었다.
대방군은 의무려산 동남쪽에 있었다. 의무려산 서북쪽인 의현에는 요동군이 있었다. 
당시 대릉하가 고릉하를 통해서 대요수와 만나서 안시현 서쪽으로 바다로 나갔으므로 백제의 창려군, 요동군, 현도군이 모두 대릉하 수계라고 할 수 있다. 

평양에서 발굴된 영화9년의 동리(冬利)의 묘전에서는 그가 요동, 한, 현도 태수령으로 나온다. 永和九年遼東韓玄도太守領冬利

동수는 벽화에서 성상번(聖上幡)을 세우고 출행하므로 백제왕이었으며, 당시 시대 상황과 부합하는 것은 책계왕의 서기 300년이 된다.
298년 9월에 죽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지만 삼국사기 기록은 광개토왕 비문에서 1년의 오차가 있고, 사비왕 234년의 기록은 238년의 일로서 무려 4년의 오차가 있다.

 

280년에 고구려는 안국군 달가에게 내외병마사를 내려주고 숙신, 양맥을 통솔하게 하였는데
양맥이 신민시 류하(柳河= 고구려 마자수) 서남쪽 양산 지방이다.
따라서 그 남쪽에 있던 전한시대 대방 지방이었던 예맥의 불내후 지역과 고구려의 충돌이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백제는 이 대방 진출을 기화로 대릉하를 타고 깊숙히 전진하여 조양시와 객좌현을 점령하고 통치하였다.
조양시에 책계왕 고분(안악3호분)과 똑같은 벽화고분(원대자 고분)이 나오므로 조양시에도 진출한 것이 된다. 창려군이었을 것이다.

한편 의무려산(녹산) 부근에 있던 부여는 백제에 쫓겨서 서쪽으로 가서 연나라 부근에 있다가 346년 연나라에 멸망하였는데 그 위치는 유하의 상류로서 발해의 정주가 된 의려국 고지이다.

 

이제까지 안악3호분의 축조연대를 동진의 영화 13년인 357년으로 해석해 왔는데 간지와 날자를 맞추어보면 서기 300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는 백제 책계왕의 연호가 된다.
만주의 대련반도에서 요양시까지 영화 연호의 전실(벽돌) 고분이 즐비하다. 영화 연호가 가장 많다.
357년의 동진은 1월에 승평으로 개원하였다. 따라서 동진의 영화13년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안악3호고분은 그 복식이 백제왕 복식이고, 책계왕이 재위 13년에 서거했으므로 서기 300년에 죽은 것으로 고려할 수 있다. 

특히 서기 300년은 신라에 낙랑, 대방이 귀복한 해이다. 
다시 말해서 부여국 의라왕이 현재의 요서에서 일본으로 가면서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사도 장군을 두었던 때이다. 
의라왕은 일본에서 숭신천황이 되었다. 이때 숭신천황은 일본에서 백제 사비왕의 아들인 효안천황을 밀어내서 효안천황을 은거시켜서 대물주신으로 만들었다. 

즉 책계왕을 전사시킨 한인과 맥인은 바로 부여 의라왕의 무리였던 것이다. 


여기서 선비족 전연국의 역사를 살펴본다.

선비족 모용외는 적봉 일대에서 동남쪽으로 281년 10월에 창려를 약탈하였다. 점거한 것은 아니다.
다시 요서(하북성 유관)를 약탈하다가 282년 요서군 비여현에서 진나라에 패퇴하였다. 
285년에는 부여를 쳐서 의려왕이 자살하였다.(실제 죽지 않고 일본으로 가서 효령천황이 되었다.) 부여의 위치는 유하의 최상류다.
286년 진나라는 부여를 살리기 위해 의라왕을 도와서 옥저에 부여가 다시 생겨난다. 이는 녹산의 부여인데 의무려산 서쪽이다.
의현 만불당 석굴에는 북위시대에 의현이 옥려의 서쪽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으니, 옥려가 옥저이고 그 위치는 의무려산이다.

그러나 289년에 모용외는 진나라와 강화하여서 책봉을 받고 백성을 살핀다. 물론 부여를 자꾸 쳐서 부여인을 북경시에 노예로 내다 팔았다.
289년에 모용외는 도하 청산으로 이주하였는데 대극성이라고 하였고 제전욱의 도읍이라고도 하였다.
전한시대 도하는 본래 바다로 강이 들어가는 곳으로서 지금의 흥성시 부근이다.

 <통지씨족략>에서 치우씨 후손들이 대극성에 살았다고 한다. <전한서>에서는 도하에 당취수라는 물이 있었는데 번한의 수도인 탕지산湯地山에서 안덕향에서 당취수唐就水라는 이름이 비롯된 것이다. 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

<전한서>의 도하현徒河縣은 수도의 물이라는 뜻의 도하都河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용외는 302년에 우문부로부터 10만 대군을 맞아 극성에서 포위당했으나 대패시켰다.  

 

 

분서왕(재위300~304)

 

분서왕(汾西王)은 책계왕의 맏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거동과 풍채가 영특하고 빼어났으므로, 왕이 사랑하여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0월에 크게 사면하였다.
2년(299) 봄 정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5년(302) 여름 4월에 혜성彗星이 낮에 나타났다.
7년(304) 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潛師襲取樂浪西縣
겨울 10월에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304년 분서왕이 뺏은 낙랑의 서현은 진나라와 분쟁 기록이 없다. 즉, 난하에 후퇴해 있던 진나라 낙랑군과 아무 상관이 없고, 대신 의무려산의 옥저에 옮겨와 있던 의라의 부여를 다시 북쪽으로 쫓아낸 것이다.
의라왕은 이미 일본에 가서 숭신천황이 되었고 낙랑서현에는 부여 유민들만 남아 있었는데, 책계왕이 의라왕에게 전사한 것에 대하여 부여 유민들에게 복수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낙랑태수의 자객이 분서왕을 죽였다.
분서왕을 암살한 낙랑태수는 분서왕의 휘하 장수인 낙랑태수로 고려되는데 바로 장통(張統)이다.

그리하여 분서왕의 낙랑 땅은 부하장수 장통이 독립하여 스스로 낙랑태수라고 하였다.
장통은 의무려산 동서를 차지하고 북으로는 유하에 이르러 고구려와 맞대고, 동쪽으로는 요하를 사이로 백제와 맞대고, 남쪽으로는 선비족 전연국과 맞대는 상황이었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은 백제 본토로부터 오리알처럼 떨어진 이 낙랑을 쳐서 빼앗았다. 314년에는 대방을 빼앗고 315년에는 현도군을 획득했다.
그러자 장통은 남서쪽의 모용외에게 도움을 청했고, 모용외의 전연국 낙랑태수가 되어서 319년 고구려 하성(河城)을 쳐서 빼앗았다.
고구려 하성은
북표시 흑성자다.
이 결과로 낙랑태수 장통의 백제 군대가 그대로 선비족 모용외에게 속해 버린 것이다.
전연국 모용외는 금주시와 의현을 싸우지 않고 얻었다. 
318년에 진나라 평주자사 최비가 고구려와 우문씨, 단국부를 동원하여 극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모용외가 꾀로서 연합군을 반목하게 만들어 분리시켜서 고구려군과 단국부를 돌아가게 하고 우문씨를 쳐서 깨트리고 평주자사 최비를 치니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이후에 모용외는 백제를 배반한 장수 장통을 시켜서 고구려 하성을 뺏은 것이다.

 

모용외는 307년에 자칭 선비대선우로 등극하였다. 그리고 같은 선비족인 소련부와 목진부가 진나라 요동군을 괴롭히니 소련부 추장과 목진부 추장을 죽이고 두 부를 연나라에 통합하였고 진나라 요동군을 다시 세워주었다. 이는 하북성 노룡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요동군인 대릉하 주위 요동군과 난하 동쪽의 진나라 요동군 사이에는 연나라가 존재해 있어서 두 요동군은 반드시 구별해야된다. 백제와 고구려 요동군의 치소는 평곽현이고 난하 동쪽 진나라의 요동군성은 양평이다. 물론 창려에 존재하는 양평도 있는데 공손탁의 요동국 수도 양평이며 이는 왕망이 창평이라고도 불렀었다. 

300년에 시작된 서진의 팔왕자의 난은 영가의 난으로 이어져서 장안이 하물어지고, 316년 강남에서 사마예의 동진이 일어나면 중원은 5호 16국시대가 되는데 모용외는 동진과 손을 잡았다.
모용외는 317년에 중원에서 피난온 기양인으로 기양군을 만들고, 예주인으로 성주군을 만들고, 영구군과 당국군도 대극성과 금주시 주변에 만들었다. 이때 중원의 현자들을 많이 받아들여서 백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은 아들 모용인을 평곽성에 배치하여서 고구려, 백제의 진출을 막았다.
평곽성은 지금의 요하 서쪽으로서 주요한 성이다. 뒤에 고구려 건안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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