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초등 개교 100주년을 맞아 기고한 글입니다.
나의 꿈, 나의 모교 안동초등
권 오 을(제59회, 총동창회 고문, 제15,16,17대국회의원)
"언~제나 낙~동강 바~라다 보면 ...."
안동초등 교가, 언제 불러도 가슴이 벅차고 자랑스럽다. 이제 개교 100주년을 맞은 나의 모교 안동초등. 지나온 한 세기를 회상하고 연면히 이어갈 후배들을 생각하면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처럼 우리 모교 안동초등의 영광도 무궁하리라 확신한다.
일요일 모교 운동장에서 선후배와 어울려 조기축구회에서 공을 차다보면 “큰 뜻을 품어라" 라는 표석이 유난히 눈에 띄곤 하였다. 우리 선배들이 원대한 꿈을 키웠던 곳, 그리고 우리들이 뛰놀고 뒹굴며 우정을 쌓고 미래의 꿈을 키웠던 곳, 이곳에서 천년만년 우리 후배들도 마음껏 몸과 마음을 키우며 장래를 설계할 것이다. 모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나의 꿈과 희망을 키운 안동초등 유년 시절을 회상해 본다.
바깥 공기가 아직 쌀쌀한 1967년 3월.
안동중앙국민학교( 당시의 학교명) 교실 창문에는 유리창 청소를 하려는 아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학교전체가 단층 건물로 교실이 6개 밖에 없었던 도산 온혜국민학교에 비하면 학교도 엄청 클 뿐만 아니라 겁도 없이 2-3층 유리창에 저렇게 다닥다닥 붙어서 청소를 할까 하는 것이 새로 전학 온 나의 모교 중앙국민학교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4학년 1반으로 반 배정을 받고 교실에 들어선 나는 모든 것이 낯설고 위축되어 있었다. 빡빡 머리에 옷은 촌스럽기 그지없는 내 행색에 비해 중앙 친구들은 머리도 길었고 옷도 깨끗하고 반듯 하게 잘 입은 듯하였다. 키는 컸지만 "빡빡 머리에 촌티가 줄줄 흐르는 새카만 아이가 눈은 무척 반짝거렸다"는 첫인상을 아직도 초등 동기인 아내로부터 자주 듣긴 하지만 영락없이 촌닭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그 시절에도 신고식은 통과의례인양 화장실로 불려가 며칠 동안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지금은 단짝 친구가 되었지만 그때에는 왜 그렇게 두렵고 피하고 싶던지... 며칠 동안 말로 으르렁 거리면서 기 싸움을 하던 중 선생님의 가정방문이 시작 되었고, 공교롭게도 내가 그 친구 집으로 선생님을 안내하도록 되었다. 당연히 사전에 그 친구 집을 알아야 했었고 먼저 방문한 나에게 친구 어머니는 찐빵으로 아들 친구를 대접했다. 시골에서는 미처 구경도 못한 찐빵이 어찌나 맛이 있던지. 당시 안동고를 다니던 형님과 자취를 하던 나는 그 뒤에 틈만 나면 좋은 반찬에 가끔 맛있는 간식이 나오는 친구 집에 가서 먹고, 놀고, 잠까지 곧잘 자곤 하였다.
춥고 위축되던 학교생활에 전기가 된 것이 학급 어린이 회장 선거였다.
당시 한 학급에 반장이 있었고 학급 어린이 회장이 따로 있었다. 전학을 오니 반장은 이미 선출된 뒤였고 마침 학급 어린이 회를 이끌어 갈 회장선거를 한다는 것이었고 얼떨결에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출마하게 되었다. 정확히 몇 명이 출마한지는 기억이 없지만 각자 정견발표를 한 후 70여명 반 친구들이 투표를 하는 절차에 들어갔었다. 그 때 참 이상했던 것은 출마한 친구들이 하나같이 자기를 찍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나은 후보에게 투표해 달라고 정견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아마 안동의 예의상 상대를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겸양지덕의 발로가 아니었던가 싶다. 이러한 관행은 5, 6학년 때 전교 어린이 회장 선거 때도 되풀이 되었었다. 하지만 나는 교단에 올라가서 회장으로 뽑아주면 열심히 잘 하겠다는 지지부탁 정견을 우렁차게 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과는 너무나 뻔 한일이었다. 자기를 찍어달라고 부탁한 나에게 몰표가 쏟아졌다. 아마 70여 명 중 60여명이 표를 몰아준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것으로써 시골 촌아이의 안동초등 전학생활의 낯설음과 두려움은 말끔히 없어지고 그때부터 빛나는 골목대장의 대장정에 오르게 된 것 같다.
그 당시 우리의 놀이는 구슬치기, 딱지치기, 고상받기, 전쟁놀이 등 우리 선배들이 하던 놀이에서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용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딱지를 사거나 구슬을 사고 파짜꼼을 사먹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학교를 파하면 학교 뒤뜰에서 전쟁놀이에 열중하다 어둑어둑해서야 집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무대를 낙동강변으로 옮겨 모래사장을 뛰놀면서 물고기를 잡거나 강변에 심어 놓은 땅콩밭을 서리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오면 무용담으로 꽃을 피우곤 했었다.
아마 5학년 늦여름 이었던 것 같다. 여름 방학을 마치고 개학한 후 우리는 드디어 전쟁놀이 장소를 학교 뒤뜰에서 낙동강변 모래사장으로 옮겼다. 한 1주일 날 저무는 줄도 모르고 전쟁놀이를 하다 보니 얼굴이 새까맣게 타는 것은 고사하고 팔뚝이 쩍쩍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갈라진 틈새로 모래와 물이 들어가면 얼마나 쓰라리고 따갑던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전쟁터를 다시 학교로 옮겨야 했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막연하게나마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가면서 유년시절을 보냈었다. 요즈음은 어린이의 꿈들이 축구 야구 선수에서 탤런트, 가수, 그리고 과학자, 장군, 선생님, 의사, 간호사 등 다양하지만 우리의 어린 시절은 대체로 장래 희망은 장군, 판사, 검사, 국회의원, 대통령 등 이었다. 그만큼 우리가 자란 시기와 안동이라는 지역이 다양하고 새로운 장래 직업을 꿈꾸기 보다는 기존의 공직사회에 대한 장래 희망 선호도가 무척 높았었다. 나 역시 막연하게나마 부모님 뜻을 쫒아 공직으로 나가거나 선출직인 “국회의원, 대통령” 을 적어 내는 것이 어릴 때 장래희망의 단골 메뉴였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안방 벽에 “근하신년 국회의원 권오훈", "근하신년 국회의원 김대진", "근하신년 국회의원 박해충”이란 글귀와 함께 근엄한 사진이 있는 한 장짜리 달력이다. 선거 때가 되면 광석동 네거리, 신시장, 안동초등 운동장등 유세장 구경을 자주 가곤 하였다. 자연히 어린 우리들도 마치 노래 부르듯이 “말 잘한다 ㅇㅇㅇ, 불쌍하다 ㅇㅇㅇ, 찍어주자 ㅇㅇㅇ” 등을 되 내면서 연설 흉내를 내곤 하였다.
그리고 내 유년시절 꿈을 키우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이 만화였던 것 같다. 사장 뚝 밑에 있던 길인서점, 대석동 도꾸뿔이 헌책방 옆에 있던 만화가게, 대안극장 사거리의 동아만화점, 그리고 성소병원 앞에 있던 만화가게 등, 초등 4학년부터 중학교 때까지 거의 6년 동안 매일 만화점으로 출퇴근 했을 정도였다. 중학교 입시가 있던 때라 6학년 때는 밤 11시가 넘어서 학교수업과 과외수업이 끝나곤 했었다. 그럴 때도 어김없이 길인서점으로 달려가 그날 나온 신간 만화를 모조리 섭렵하고서야 집에 가곤 했었다. 이근철의 켈로부대. 장훈의 야구, 권투, 유도 만화 등 하루라도 못 보면 도통 궁금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만화를 보면서 정의와 불의, 의리와 신의 , 그리고 친구의 우정에 대하여 간접 체험을 하면서 내 성격형성에도 무척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가끔 붉은 망토를 걸친 정의의 사도 “베트맨”이 중앙국민학교 운동장에 내려와 세상의 모든 악의 무리들을 물리치는 광경을 그리면서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를 수 십 번 되 뇌이곤 했었다.
요즈음은 만화보다는 게임방에 빠져 부모님들을 걱정시키지만 커가는 아이들의 한때의 열정이라 여긴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빌 게이츠나 안철수와 같은 위대한 과학자나 사업가가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아니 아이들이 마음껏 꿈을 쫒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한 분야의 경지에 다다라 본인의 성공은 물론 국가 사회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온실에서 키우기보다 방목 했을 때 훨씬 건강하고 진취적인 아이들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아이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길이란 것을 우리 부모세대들이 사려 깊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만화 보는 습관은 아직도 남아 요즈음에도 가끔 이원복 교수의 “만화로 보는 세계사”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벌써 반백이 넘어 머리가 희끗희끗 해진 중년의 나이이지만 나는 모교 안동초등과 낙동강을 생각하면 아직도 꿈많고 순진무구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 진다. 이제 개교 100주년을 맞은 모교가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듯이 이 운동장과 교실에서 더욱 씩씩하고 훌륭한 후배들이 뛰놀며 꿈을 키워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주인공이 나오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2009년 4월
첫댓글 순수하고 아름다운 글입니다. 자신의 유년시절을 가감없이 참 아름답게 표현했네요. 나도 어릴 적 많이 가본 여러 곳과 그 나이 때쯤 가졌을 법한 이야기들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일요일 늦은 오후 오랫만에 어릴 적 생각에 젖어봅니다.
안동중앙시절이 주마등 처럼 펼쳐지네요~ 과거로의 회상! 정겨움이 가득합니다~
고등학교때 사장뚝 만화방을 종종 들렸는데 그집이 생각납니다.
아니 40년전 일을 이리도 소상하게 기억하신단 말입니까? 혹시 준비된지도자로 우뚝설날을 대비하여 메모해놓으신건 아닌지...여하간 소시적부터 남다른 면모가 있었다는건 안봐도 비디오네요/ 더욱 위대한 모습과 행동 기대합니다 화이팅!!!
정말 기억력 좋소. 난 쓸데없이 조숙해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담배피고 술먹고...사장둑밑에 실내 포장마차처럼 생긴 미로의 술집이 단골이었지.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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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학교뒷편에서 시장서던날 고래고기 훔처먹던기억은 안썻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성소병원 앞의 만화방은 아마도 삐빠도서실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나도 부지런히 드나들었었는데....
소시적 추억이 아른하게 묻어 나네요. 임종기
ㅎㅎㅎㅎ 아주 리얼하게 기억하고 계시구만~~~ 세월의 강이 자넬 모시고 가지 못한것 같네~ 난 벌써 강건너 저편에 섯는데.... 어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