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독서일지 (2024.06.04~06.25)*
-13일차 : 6월 22일 토요일
초여름, 비는 내리고
책은 읽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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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TV 뉴스로 예보되었던 비가 아침부터 소리 없이 추적거리며 내리더니 종일 내리고 있다. 여름이라 더워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만 때아니게 맹위를 떨치며 연일 기온이 상승한 터라 다음에 오는 비는 마음을 차분하게 삭여주며 무덥고 길 여름 계절을 대비하게 한다.
영국 역사학자인 애니 그래이가 대영제국 시절 빅토리아 여왕의 음식과 관련한 왕궁 주변 풍경을 그린 논픽션 《먹보 여왕》을 다 읽고, 튀르키예 작가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 1·2》와 역사학자이자 문학인류학자인 주영하 교수가 지은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를 비가 내리는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의 방 창가 쪽에 자리 잡고 읽기 시작한다.
오직 비가 내릴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창가 저 밑으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자전거를 탄 아이와 그 아이를 쫓아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맞으며 달려가는 아이 모습을 잠시 우두커니 쳐다본다. 아이들 모습이 인근 아파트 동 사이로 사라지자 다시 조용해진다. 책 속의 문구들이 유난히 시적으로 각인된다.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다각도에서 깊어지며 마치 바닷가 파도처럼 밀려오듯 뒤따라와 잠시 책을 손에서 놓기도 한다. 그러나 책읽기에 이만한 분위기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탓에 책을 들어 올리고는 깊이 잠수하듯 내용 속으로 빠져든다.
2
《먹보 여왕》
-애니 그래이 지음/홍한별 번역/(주)출판사 클 2021년판
먹는 일에 부리는 욕심이
좋아 보일 때
평생에 걸쳐 먹는데 진심이던 여왕이었고 뭔가 먹을 줄 아는, 그것도 제대로 먹을 줄 아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말년에 그의 건강을 걱정해서 음식을 자제하라는 주치의와 주변 신하의 간곡한 만류에 역정을 낼 정도였다(이 책을 읽다보면 빅토리아 여왕은 웬만해서는 역정이나 화를 내지 않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그녀는 많을 때는 한 해에 만찬을 같이 한 인원이 십삼 만 여명에 달했다. 영국이라는 유럽 역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국가를 대표하는 국왕으로서 정치는 입헌군주제에 따라 내각을 대표하는 총리에게 일임하여 명색이 상징적인 역할이었다고 하지만, 외교 관례이기도 한 드물게 국빈 방문이 있거나 매년 방문한 외교 사절을 환영하는 만찬에서 자리를 빛내는 역할은 그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자리여서, 그런 명예로운 자리에서 하는 식사는 영광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국왕으로서 의무적으로 치러 내야하는 엄밀한 의미에서 고역이기도 했다(그녀의 치세 말기에 이르면 이런 그의 고충에서 누적된 피로감이 곳곳에서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빅토리아 여왕의 일생을 다룬 독특한 전기문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대부분 전기문이라고 하면 출생부터 시작해서 교육, 성장, 결혼, 육아, 일과 성취, 중장년과 노년의 삶을 다루는 것이 보편적인데 이 책 《먹보 여왕》은 부분적이고 간략하지만 전기문에 들어갈 구성 요소들은 연대기는 물론이고 그 형식대로 빠짐없이 골고루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왕궁의 전통적인 식문화와 다양한 요리, 요리와 관련한 요리사를 포함한 적지 않은 궁중 내 조직과 그들을 움직이는 행정 시스템 등이 다른 일반 전기문과 달리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점이다.
제목이 <먹보 여왕>이어서 다양한 궁중 음식과 그 요리법들이 주종을 이루는 지루한 내용의 서적일 것 같지만, 책의 겉장에 씌어진 부제와 같이 영국 빅토리아 여왕 치세 당시의 왕실 식문화를 소개하고 그와 관련된 영국 내, 외부 세계의 시대적 풍경을 수필의 신변잡기 형식과 같이 담백하고 비교적 간소한 문체(필요하면 빅토리아 여왕과 그의 가족이나 주변 인물과 주고받은 편지글도 그대로 인용)로 담아내어 책 읽는 기쁨에 새롭게 눈뜨는 경험(영화 ‘음식남녀’처럼 음식과 요리를 주제로 한 영화 속 남녀 관계의 특별한 경험을 뛰어넘는 대영제국의 왕궁과 주변 일상을 스펙터클하게 관찰하는)을 선사하고 있다. 그건 요즘 대세인 화려한 영상이 해결할 수 없는 이 책만이 줄 수 있는 절대미감이다.
그녀의 각종 초상화가 보여주지만 남편 앨버트공이 사망한 이후로 음식에 더욱 열심이었던 탓에 언뜻 비만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여왕이 그 덩치(키는 작아서 158정도)로 영국의 왕궁인 윈저궁이나 버킹엄궁을 비롯해 그녀의 가족들의 별장 두 곳(오스본 하우스와 스코틀랜드 밸모럴성), 그리고 이웃한 프랑스를 비롯해서 틈만 나면 쉬고 싶다며 유럽의 인근 국가들로 적지 않은 수행원들을 이끌고 휴가를 다니며 이곳저곳 종종걸음 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다음은 모두 한결같이 열심히 입과 이빨을 이용해 음식을 먹어대는 여왕의 인간미 물씬 넘치는 풍경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정찬 방식>, <주방>, <요리사>, <별궁>, <아이들과 함께>, <일상식>, <특별식>, <더 넓은 세상의 음식>, <여왕의 노년> 등으로 전체 내용이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다른 풍경이 담겨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풍경이 펼쳐진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적나라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과 함께 하는 가정생활을 엿볼 수 있다.
-왕궁 주방과 당대 요리기구의 변천사를 볼 수 있다.
-여왕이기 전에 한 사람의 여성인 빅토리아 여왕을 만날 수 있다.
-여왕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인 빅토리아 여왕을 만날 수 있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왕궁내의 조직과 행정 시스템을 볼 수 있다.
-유럽 왕실과 귀족층에서 유행하는 프랑스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인생사를 간략하게 파악할 수 있다.
-왕실과 국왕과 국민간의 관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대부분 한 국가의 역사를 생각할 때 정치와 국가 간에 벌어진 전쟁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다소 긴박하고 격렬한 시간의 연속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권력획득을 위한 세력 간 암투를 위주로 그려질 때에는 비정함과 잔인함에 치를 떨며 권력의 비열한 속성이 역사의 모든 것처럼 오인되며 역사 돌아보기를 때로 거부하기도 한다.
애니 그래이의 《먹보 여왕》은 역사를 ‘음식과 요리’라는 특별한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서 독자에게 신선한 감동과 따스한 이해를 구할 수 있다. 매 장이 주는 제각각의 풍경은 처음 보는 장면들의 역사로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빅토리아 여왕 치세를 포함해서 19세기 전반의 약 백 년의 영국 역사를 조망하며 세계사의 흐름을 일상적인 측면에서 차분하게 들여다보는 기회가 된 훌륭한 역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