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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계 신인상 당선 작품>
솔개 외 4편 / 엄 옥 례
잠시 머리가 핑 돌더니 코피가 떨어진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일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몸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마음의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바닥에서 몸을 세웠던 그때처럼.
결혼 후, 계절의 수레바퀴가 스물 몇 번 돌았어도 나는 집 안에서만 맴돌았다. 그저 내조가 최선이라는 소신으로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에만 마음을 두었다. 나를 딛고 올라가고 그러다 지치면 기대라고 말없이 등이 되어 주었다. 가족들이 소소한 꿈을 하나 둘 이루어 갈 때면 마치 내가 성취한 것처럼 가슴이 벅찼다. 더 높이 날아오르라고 뒤에서 힘껏 부채질했다.
특히 남편에게 더 애를 썼다. 남들의 눈에는 남편과 이인삼각이 되어 내조를 잘하는 아내로 보였겠지만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 남편에게 보이지 않는 끈을 매어 두고 목표 지점으로 가는 길을 벗어나지 않게 당겼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닦달인데도 남편은 이를 응원으로 여기며 내가 바라던 곳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올랐다. 하지만 마지막 고비에서 발을 헛디뎌 그만 추락하고 말았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남편도 부상을 입어 고통이 심했겠지만 나는 더 깊은 내상(內傷)을 입었다. 몸도 방바닥에 널브러져 가자미처럼 납작하게 퍼졌다. 귀에서 윙윙 소리가 나고 고통은 내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마음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어디에도 바닥은 있는 법, 하늘이 나를 이유 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치지는 않았으리. 축 늘어진 몸을 꿈틀꿈틀 일으켜 세웠다. 어항 속에서 안주하는 앤젤피시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서서 아마존의 정글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누구에게나 재능을 공평하게 주었다 하니 내게도 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결심은 섰지만 막상 세상으로 뛰어들자니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었다. 마음뿐인 그 즈음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무엇이 있었다.
늘 고공비행만 하는 솔개도 고비가 있는 법이다. 팔십 수년을 사는 솔개는 생을 반쯤 살면 발톱이 무뎌져 먹이를 낚아채기 힘들다. 먹이를 잡아채더라도 부리가 굽어 쪼아 먹기 어렵다. 게다가 날개마저 두터워져 높이 날지 못해 도태와 생존을 가르는 벼랑 끝에 선다.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은 솔개로 하여금 두려움과 고통을 안고 산꼭대기에 서게 한다. 허기에 몸을 휘청거리고 피를 흘리면서도 헌 부리를 바위에 쪼아 부수어 새 부리가 돋아나면 낡은 발톱과 깃털을 뽑는다. 마침내 새 발톱과 깃털을 갖추고 또 한 번 창공을 향해 힘차게 비상한다.
환골탈태의 시간을 가졌던 솔개처럼 나도 일신(一新)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또는 남편에게 힘이 되라고 가졌던 모임들을 하나, 둘 정리해야 했다. 모임의 중심에 서서 펄럭이던 치맛자락도 거두어들였다. 외돌토리가 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관계 속에서 발을 빼자 세상에서 내가 쓸려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체면과 겉치레, 내게 달라붙은 낡은 타성을 벗지 않고는 새로워질 수 없기에 살이 찢겨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한 가닥 미련조차 버려야 하리. 일상을 두고 산 정상 바위로 올라가는 솔개의 심정도 그랬을까.
솔개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적을 할퀴고 뾰족한 부리로 사냥감을 쫀다. 이것은 생존 수단이며 또 한편으로는 새끼에게 줄 먹이를 구하는 모성이다. 나는 세상에 나가 무엇을 할까. 이성을 가진 사람이기에 쌀독이 바닥나더라도 남을 쪼거나 할퀴지는 않아야 한다. 모성이 알을 품듯 세상을 품으며 먹이를 구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세상에서 마음 다친 아이들, 아픔이 있는 사람들을 쓰다듬는 일을 하기로 했다.
녹슨 머리로 밤낮없이 책을 읽고 공부했다. 그러자니 공기 같던 나의 손길에 길들여진 가족은 아부재기를 쳤다. 정성이 부족한 반찬에 대강 해 놓은 빨래 손질, 설렁설렁 해치운 집 안 정리에 불평이 따랐다. 이제껏 뒷바라지하며 살아온 나에게 무슨 이카로스가 될 거냐며 남편이 빈정댈 때면 내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마음이 흔들려 털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오히려 남편의 차가운 태도가 내 중심을 세웠다. 남편은 내가 지쳐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었다. 내 성격을 잘 알고 어떤 연단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뒤늦게 세운 뜻을 무너뜨릴까 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끈을 묶어 놓고 조심스럽게 당겼다 풀었다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일이 들어왔다. 교안을 짜고 연습도 해 두었으나 구들장 귀신이던 내가 남을 지도하기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뒤엉켜 싸우는 아이를 떼어 놓느라 진땀을 빼는가 하면 한 아이를 달래 놓으면 다른 아이가 뒹굴었다. 첫 시간을 마치고 나니 허탈감이 온 신경을 타고 돌았다. 가족들 뒤에서 조용히 내조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모나고 울퉁불퉁한 심성을 감싸 안아 둥글게 어루만지는 것이 내 일 아닌가. 더군다나 나를 지켜보는 눈은 또 몇인가. 마음을 다잡으며 노인의 외로움을 다독이고 청소년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일을 자청했다. 간혹, 우울증을 못 이기는 노인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짓궂은 학생의 장난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내 몸짓이 그들에게 위안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웃을 수 있는 일이다.
금빛 날개를 가졌어도 공기의 저항이 없다면 날 수 없듯, 삶도 날갯짓과 저항이 균형을 이루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리. 청둥오리도 강한 상승 기류를 타고 높디높은 히말라야를 넘는다지 않는가. 이리저리 부딪히며 나를 비우다 보니 그 자리에 일이 들어왔다. 새로운 바람을 만나면 새가슴처럼 조마조마한 마음이 앞서 잠시 기우뚱거리지만 이내 중심을 잡는다. 인생사 다 그러하듯, 바람을 타는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으로 나가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아직도 그 맛은 맵고 쓰다. 대나무 살을 깎고 문종이를 자르는 소년처럼, 나를 깎고 잘라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하리. 바람을 예정하고 연을 만들고 또, 연을 만든 소년만이 꿈을 실어 하늘 높이 날릴 수 있을 터이니.
응석
창을 넘어오는 겨울 햇살이 따사롭다. 한 평 햇살을 덮고 누워 있자니 거실에서 이것저것 건드리던 뚜비가 쪼르르 달려온다. 얼굴을 핥는 녀석에게 응대라도 하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집는다. 배를 쓰다듬어 주자 눈을 스르르 감는다. 털북숭이 녀석도 포근한 어미 품이 그리울 때가 있나 보다.
남편도 뚜비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날이 있다. 퇴근길, 소주에 붉게 취할 때면 안방으로 오지 않는다. 술 냄새 난다는 나의 타박을 피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본능적으로 위층을 향한다. 계단에서 구를까 걱정이 되어 손을 잡아당겨도 아무 소용이 없다. 엉금엉금 오르면서도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 손에 든 비닐봉지를 놓지 않는다.
팔순이 넘은 어머님은 잠결에도 남편과 내가 벌이는 실랑이를 알아차리고, 기다렸다는 듯 아들을 맞아들인다.
"아이쿠! 내 강생이 무슨 술을 이래 많이 마셨노?"
어머님이 삭정이 같은 손으로 남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 남편은 그제야 손에 든 봉지에서 사탕을 꺼낸다. 옛날, 어머님이 공사판 일을 마친 후 사 오시던 눈깔사탕이다. 남편은 아기처럼 입을 동그랗게 모아 "아" 하며 어머님의 입에 사탕을 넣어 드린다. 어머님의 얼굴은 목단처럼 화사해진다. 사탕으로 나누는 어머님과 남편의 교감은 시작부터 달콤하다.
남편의 어리광은 도를 넘는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팔을 벌리면 어머님은 알았다는 듯 옷과 양말을 벗기고 수건으로 얼굴과 손발을 닦아 준다. 큰대 자로 누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표정을 짓던 남편이 코를 골면, 그제야 어머님도 모로 누워 마른 잠에 드신다. 그 행복을 깨기 싫어 슬그머니 돌아서지만 내 가슴속에는 질투심과 부러움이 뒤섞여 포말을 일으킨다. 그런 밤이면 나는 한참 동안이나 몸을 뒤척이다가 꿈길로 접어든다.
이튿날 아침,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어머님은 해장국을 끓여 놓는다. 또, 꿀물을 담은 컵도 남편의 머리맡에서 잠이 깨기를 기다리고 있다. 뇌종양 수술을 받았던 어머님은 걸을 때 머리에 물동이를 인 것 같다고 하면서도 아들의 뒷수쇄를 기꺼이 감당하신다.
처음엔 남편이 피터팬 증후군이 아닐까 의심도 품었다. 결혼한 아들을 보듬는 어머님의 행동이 유별나다고도 생각했다. 한때는 일찍 청상이 된 어머니가 아들을 남편처럼 생각하는 드라마가 떠올라 온 신경이 곤두서기도 했다. 꿀물 담은 컵을 남편의 머리맡에 두고서 해장국을 준비하는 어머님을 보며 속을 끓였었다. 그러나 세파에 시달리며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언어를 차츰 해독하게 되었다. 어머님께 아들은 삶의 전부였다. 그 가파른 삶이 길러낸 남편은 가슴에 나를 들였다고 해서 어머니를 밀쳐낼 수 없었던 것이다.
초나라에 학식이 깊다고 알려진 노래자는 백수를 바라보는 부모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아기 같은 몸짓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물시중을 들다가도 부러 물을 엎질러 앙앙 울기도 했으며, 머리에 하얀 서리가 서려도 재롱을 멈추지 않았다. 점잔을 떨어야 할 현자(賢者)가 어머니 앞에서 강아지처럼 재롱을 부리다니, 지위 고하를 떠나 사람의 마음속 오지에는 무엇이 흐르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은 내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모성이 해 주었다.
요즘 나는 아침이면 아들 방에 가서 야릇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잠이 많은 아들을 깨우는 데 윽박지르기나 달래기는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응석 깨우기였다. 멍게 껍질처럼 오돌토돌 여드름이 난 얼굴에 뽀뽀를 해 대면 아들은 커다란 몸집으로 내 목을 끌어안고 옹알이하듯 응응 소리를 낸다. 나도 어머님처럼 우리 강생이를 연발하며 아들의 배를 슬슬 문지른다. 아들이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면 다리까지 꾹꾹 주물러 준다.
몸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행위는 상대를 믿기 때문이다. 아들이 배를 내미는 것은 믿음이고 내가 배를 문질러 주는 것은 믿음에 대한 인증이다. 사랑한다. 지켜 주마.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은 말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이 몸짓보다 더 그윽한 언어가 어디 있을까. 햇살보다 따뜻한 체온과 가나안의 땅보다 깊은 믿음이 흐른다.
이제 남편의 배냇짓은 슬쩍 눈감아 줄 일이다. 응석을 부려 본 사람이 남을 품을 수 있기에. 차가운 삶의 전선에서 온종일 싸우다 보면 남편인들 어머니의 품이 그립지 않겠는가.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등에 매달린 식솔들 생각에 홀로 골목길 전봇대를 붙잡고 중심을 잡은 적도 있었을 게다. 훗날 내 아들도 아내의 품보다 이 엄마 품이 더 그리울 때가 있을 테니까.
남편은 내가 어리광을 부릴 정도로 편하지는 않다. 나이 차이가 많아 나를 감싸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장된 몸짓으로 나를 불안하게 하기도 한다. 은근히 힘겨루기 하는 부부 사이라서 약점을 보이기 싫은 탓도 있을 것이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 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이렇게 한 시인이 가슴속에서 길어 올린 글귀가 알 수 없는 설움이 밀려올 때마다 되살아나며 엄마 생각에 울컥해진다.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신 지 십여 년이지만 그리움은 늘 내 마음의 골짜기에 흐르고 있다. 딸에서 엄마로, 여자에서 아내로 살면서 목까지 설움이 차 오를 때마다 나도 어머니에게 달려가 응석을 부리고 싶다. 단 일 분이라도.
통(通)
새로 단장한 두리봉은 들머리부터 말끔하다. 계단을 한 발 한 발 오르며 마음을 다스리고, 가파른 길에서는 로프를 붙잡아 중심을 잡는다. 구름다리를 건너며 견우와 직녀의 순수한 사랑도 느껴 본다. 햇살 바람에 팔랑이는 이파리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새소리에 오감을 맡기다 보면 내 마음도 열린다.
흔히 세상을 고해라고 한다. 문제 하나를 매듭짓고 잠시 나른한 행복을 맛볼라치면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온다. 아들이 원하던 대학의 문턱을 넘지 못하자 스스로 휴대전화를 해지하고 각서를 써서 내게 건네고 네 번째 도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단단한 각오는 오래가지 않아 느슨해졌다. 늦잠 자는 날이 많아졌고 어쩌다 아침 식탁에 함께 앉아도 젓가락 소리만 오고 갔다. 만물에 활기가 넘치는 봄이지만 잔뜩 웅크린 아들을 볼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아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유를 짚어 보았다. 하나 둘 입대하는 친구들을 보고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걸까. 분위기로 보아 여자 친구가 생긴 건 아닌 듯했다. 넌지시 말을 걸어도 외면했다. 아들의 결정을 만류했던 남편이 고함을 쳐 보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아들의 말문은 더 닫혔다. 두 사람 사이에 불통의 벽이 높아지는 바람에 나는 전령사가 돼야만 했다.
통즉불통(通卽不痛), 불통즉통(不通卽痛)이다. 몸에 기혈이 막히면 병이 나듯 마음에 벽이 생길 때는 가슴앓이를 한다. 털어놓을 수 없는 속이 오죽할까. 심기가 불편한 남자는 동굴로 들어간다더니, 아들은 자기 방에서 두문불출이고 남편도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평소 소소한 일까지 의논하던 남편이 나한테도 벽을 세우자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음 둘 곳 없을 때마다 뒷산 두리봉에 오르곤 한다. 두리봉은 이 사람 저 사람 두루 두루 오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산자락에 여러 마을이 있다 보니 오르는 길이 수십 갈래다. 길을 걷다 보면 이 마을, 저 마을 사람을 다 만난다. 낯설어도 인사가 오가고 물 한 모금에 마음을 열기도 한다. 길이 통하면 마음까지 통하는가. 두리봉에 오르는 길은 어느 길이든 막힘이 없어 가슴에 숨구멍이 트이는 것 같다.
한지붕 아래서 서로 외면하고 사는 일은 고통이다. 남편의 닫힌 마음을 열어 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무심했지만, 남편도 나 혼자 산에 다니는 게 은근히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이때다 싶어 남편의 등에 대고 나 혼자 새처럼 재재거렸다. 두리봉의 달라진 풍경은 혼자 보기 아깝다고 애교도 부리고, 혼자 가니 무섭다 하며 엄살도 떨었다. 드디어 며칠 뒤 남편이 먼저 등산화를 찾아 신었다.
남편은 고개를 숙인 채 계단을 뚜벅뚜벅 올랐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얻자 세상을 품에 안은 듯 기뻐했었다. 팔불출 소리를 들을지언정, 자식이 잘되면 자랑하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요즘에는 모임에서 자식 이야기가 나오면 얼른 자리를 피한다는 남편의 뒤를 따르며 굽은 등과 흰머리를 보니 가슴이 아려 왔다.
산모퉁이를 돌아간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간격을 줄여 보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쫓아갔더니 웬일인지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갈 건지 묻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봉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게 아닌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꼭대기에 닿으니 남편은 운동 기구 위에 있었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운동에 열중인 남편을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산을 내려가면서 남편이 다음에는 아들도 데려오자고 하는 것이었다.
주말 아침 아들을 깨웠다. 아들은 하품을 연발하며 이번뿐이라며 몸을 일으켰다. 목줄에 끌려오듯 아들은 묵직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서로 부대끼며 마음을 통하고 싶었기에 어르고 달랬다. 시합이라도 하듯 셋은 제 힘 닿는 대로 걸었다. 간격이 차츰 벌어져 남편과 아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산마루에 닿을 즘 고개를 들어 보니 남편이 혼자 내려다보고 있었다. 봉우리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고 있자니 한참 후에 아들이 모습을 보였다. 아들은 남편과 내가 오른 길과 다른 방향에서 오고 있었다.
열심히 운동을 하는 남편, 기구를 툭툭 건들기만 하는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볼록한 이마며 뒤통수, 이마에서 귀를 덮은 곱슬머리까지 어찌 저리도 닮았는지. 그뿐인가. 남편도 대학 문턱에서 몇 번을 되돌아서야 했던가. 고집 센 성격까지 닮은 둘을 내가 어찌 당할까. 무력감이 차 올라 서운한 마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아침부터 성화에 끌려 여기까지 따라온 아들을 생각해 속으로 삭이고 말았다.
뒷날도 그다음 날도, 셋은 말없이 땅만 보고 산을 올랐다. 묵언 수행을 오래 하다 보니 도를 깨친 걸까. 남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길을 잘못 들면 산속을 헤매니 잘 보면서 가! 그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대화가 트이자 아들은 저가 선택한 길이 자신 없다고 털어놓았다.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이 쉽지 않다는 걸 먼저 경험했기에 말렸다. 그래도 기왕 선택한 길이니 잘해 봐라. 비록 짧은 대화지만 그 효과는 컸다. 서로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엔 부자가 나란히 산길을 오른다. 당겨 주고 밀어 주고 장난도 스스럼없이 치는 걸로 보아 마음의 벽이 다 걷힌 것 같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속을 산책하듯 두리봉 길을 걷는지도 모른다. 트인 마음으로 스며드는 산 공기가 상쾌하다.
졸참나무
누가 치맛자락이라도 당긴 걸까. 집에서 일터로만 쳇바퀴를 돌리던 발길이 무슨 심사인지 뒷산으로 향했다. 칼바람이 물러간 자리에 봄바람이 스며들고 동면에서 깨어난 나무는 분주히 수액을 빨아올리고 있었다. 그 기운을 마시며 잠시 쉬는 산허리,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진 나무 둥치에서 가지 하나가 연둣빛 새순을 빠끔 내밀고 있었다.
지난여름에 쓰러진 졸참나무다. 등산로를 넓히느라 뿌리가 드러나, 태풍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우람하지는 않아도 제법 실팍하고 도토리까지 조롱조롱 달고 있었다. 고만고만한 삶을 위안 받으러 가끔 산을 오를 때면 가난한 마음을 채워 주던 나무다. 만져도 보고 흔들어도 보고,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세파에 쓰러져 번성했던 가지도 다 버리고 희망 한줄기를 살리려는 남편이 보이기 때문이다.
스무 해 전, 신접살림을 차린 동네에서 컴퓨터 가게를 열었다. 컴퓨터 전문회사에 근무한 남편의 기술을 잘 살리면 돈을 많이 벌 거라는 기대로 마음은 벌써 부잣집 마님이었다. 하지만 시류보다 일찍 시작한 탓에 구매자는 없고 가게에는 호기심만 드나들었다. 보증금이 바닥나도록 임대료를 내지 못해 어쩌다 가게 앞으로 지나가는 주인의 눈길은 화살이 되어 가슴을 찔렀다. 처자식을 고사시킬 수 없기에 남편은 다시 회사로 나가고 나 혼자 오도카니 가게를 지켰다.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쪽 문을 열어 준다는 신(神)의 말이 사실일까. 마음은 보따리를 싸고 문 닫을 일만 남았다고 여길 즈음 그토록 기다려도 불지 않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관청과 기업의 전산화를 선두로 바람은 가정까지 파고들었다.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사람들도 우리 가게를 잊지 않고 있었다. 값싸고 성능 좋은 컴퓨터가 인기를 끌던 때라 남편은 부품을 직접 조립해 자신이 고안한 상표를 붙여 판매했다. 우리 가게가 가지를 뻗고 도토리를 조롱조롱 맺자 주변에 컴퓨터 가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나 생존경쟁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가게들이 사후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유명 회사 컴퓨터로 돌아섰다.
남편도 변화를 따라야 했다. 몸집을 크게 불리자니 자본금이 턱없이 모자랐으나 기왕 시작한 일이라 욕심을 부려 보기로 했다. 그동안 도토리 줍듯 모은 적금과 여기저기에서 자금을 긁어모아 전문 회사 대리점을 열었다. 번듯한 매장은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배가 불렀다. 열매가 주렁주렁 열어 곳간이 가득해질 것만 같았다. 전문 회사라는 배경까지 받쳐 주었으니 웬만한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다고 생각한 남편은 사장 흉내를 제법 냈다.
꽃바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려웠던 때 마음을 잊고 자만하는 사이 사람들은 부품을 사서 컴퓨터를 직접 조립했고, 인터넷 쇼핑몰도 손님을 낚아 갔다. 설상가상 대리점들은 가격 인하 경쟁을 벌였다. 그것은 제가 서 있는 토양을 깎는 일이었다. 흔들리던 가게는 결국 뿌리를 드러내고 고사할 처지가 되었다. 세상의 생태계에도 먹이 사슬의 원리가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작동된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것이다.
컴퓨터 장사가 질렸는지 남편은 주점이나 식당으로 힐끗 곁눈질하기도 했다. 하지만 타고난 성정으로 보아 향기 뒤에 가시를 품는 아카시나무가 될 수도 없다. 현란한 자태로 남을 유혹하는 장미과도 아닌, 투박한 몸으로 자그마한 도토리를 맺는 참나무과다. 그것도 우람한 굴참나무가 아니라 가진 것이라고는 기술뿐인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 다른 일을 하려니 덜컥 겁부터 나는 졸참나무다.
작은 가게였지만 기술로 도토리가 열릴 때는 사람 사는 숲에서 한몫을 한다는 자긍심이 있었다. 그런 자양분이라도 먹고 살자 싶어 예전처럼 작은 매장을 열었다. 살림을 알뜰히 꾸려야 하기에 가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남편 손으로 해결한다. 불황 탓인지 에누리하는 손님이 많고 외상값을 못 받는 경우도 더러 있다. 짜증이 날 만도 하지만 남편은 웬만한 것은 무료로 고쳐 준다. 입소문을 듣고 손님이 조금씩 늘어날 때마다 인심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실감한다.
남편은 문득, 지난 일이 생각나거나 손님과 마찰이 생기면 평정심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누그러진다. 아직 세상 앞에 포효할 나이인데, 처자식 생각으로 속을 삭이는 것 같아 안쓰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한때 잘나갔다는 추억만 우려먹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쓰러진 마당에 체면도 겉치레도 삭이면 자양분이 될 터이다.
이제, 남편도 나도 한줄기 희망을 살려 작은 열매가 열리는 법을 다시 배우는 중이다. 우람하게 자라 돋보이고자 하는 욕심보다는 그저 푸른 숲을 이루는 일원으로 이웃과 도토리를 나누며 오순도순 살고 싶은 마음이다. 운에 맡기지 않고 노력한 만큼 배당 받고 사는 삶도 좋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진리였다.
얼마 전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남편의 등을 산으로 떠밀고 뒤를 따랐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오히려 남자가 그리 약해서 쓰겠냐고 타박을 하면서 산을 올랐다. 봄바람에 나무들은 나 보란 듯 신록을 뽐냈고 하나 남은 졸참나무 가지도 소생의 잎을 팔랑이고 있었다. 졸참나무를 턱으로 가리켰다. 뭔가 싶어 바투 다가간 남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아침 일찍,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남편이 나보다 먼저 부스럭거린다. 별일이다 싶지만 짚이는 게 있기에 평소대로 도마질을 하며 아침 준비를 한다. 식탁 가득 반찬을 차려 놓고 남편을 기다린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을 들어선 남편이 등산화를 벗는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물으니 그냥 씨익 웃는다. 얼마 만에 보는 하얀 웃음인가. 저 천진한 희망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
사이즈
"당신 사이즈 얼마고?"
전화 저쪽에서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린다. 뜬금없는 소리에, 그것도 잠결이라 얼른 알아차릴 수 없다.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남편이다. 선물을 사려고 속옷 가게에 들렀단다.
남편은 며칠 전 내 생일을 그냥 지나쳤다. 결혼 후 몇 년간은 수첩에 적어 두고 잘 기억하더니 언제부터인지 까맣게 잊었다. 잡혀 온 물고기에게는 떡밥을 주지 않는다는 말을 즐겨 했는데 그 물고기가 나였나 보다.
하는 수 없이 대책을 세웠다. 생일이 있는 달이 오면 잘 보이는 달력에다 붉은 사인펜으로 표시를 해 두었다. 보름달만 하게 동그라미를 쳐 두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다 한 달 전부터 갖고 싶은 것을 은연중에 흘려 놓으면 백발백중 내 꾀가 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일이 지나가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서운한 마음을 누르고 있었는데 내 낯빛을 읽은 걸까.
남편은 내 윗옷 중에 가장 먼저 입는 것의 사이즈를 묻고 있다. 돌발적인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다. 가게 문을 닫으려 하니 빨리 알려 달라고 재촉을 한다. 내일 사 달라 해도 당장 사 오겠다고 어린아이같이 떼를 쓴다. 술 취한 남편의 생각을 좀처럼 꺾을 수가 없다.
얼른 서랍을 열어젖혔다. 가지런히 누워 있는 것들을 있는 대로 꺼내 살펴보지만, 여러 번 세탁을 해서 치수를 알아볼 수가 없다. 희미해진 글자처럼 기억도 뚜렷하지 않다. 사이즈를 도통 모르겠다.
그 사이즈라는 것도 내 성격으로는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가슴의 가장 봉긋한 부분의 수치에다 밑 가슴둘레를 빼서 그 차이만큼 A, B, C컵으로 나눈다. 알파벳과 숫자로 표기해 놓아서 골치가 아프다. 일 년에 두어 번 사는 물건의 사이즈를 기억하고 있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회사마다 크기가 조금씩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전화를 걸어 예전 방식대로 사 오라 했다. 예전에는 사이즈를 묻지도 않은 채 사 오고는 했다. 바꾸러 가지 않은 걸 보면 그럭저럭 맞았던 것 같다. 남편은 사이즈를 알려 주는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양손을 각각 오므려 동그란 것을 잡는 모양을 만들며 요만한 것을 달라고 말을 보태서 사 왔다. 또 다른 방법은 가게 주인의 가슴께를 힐긋 보며 그에 준해서 작거나 큰 것을 사 왔었다. 남편은 알아서 사 오라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이번에는 당장 나오라고 성화다.
어쩔 수 없이 동네에 있는 가게라 해서 그곳으로 갔다. 가게 주인은 늦은 시간에 술 취해 들어온 손님을 달래서 보내려 했지만, 고집을 부리는 통에 난감했던 눈치다. 내가 들어서자 먼저 가슴 쪽을 쏘아본다. 시간이 늦어서 어서 팔고 가려는 생각인지 아니면 직업의식인지 얼굴보다 가슴으로 먼저 눈길을 보낸다. 그 눈빛이 너무 따가워 얼굴이 화끈거린다. 머뭇거리는 내게 딱 맞는 사이즈라며 잽싸게 골라 준다.
집으로 돌아와 사 온 것을 서랍에 있는 것과 견주어 본다. 이상하게도 다 새로 사 온 것보다 크다. 약간 큰 것도 있지만 눈에 띄게 차이 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가게 주인이 잘못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그럴 리가 있겠나 싶기도 하다. 한참 동안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가다가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는 실제보다 큰 사이즈를 착용하고 있었다. 가슴이 작은 것에 왠지 자존심이 상하고 큰 사람 옆에서는 주눅이 들었다. 크다면 얼마나 당당해질까 싶어 커 보이고 싶었다. 더 큰 것을 하고도 모자라 한 겹의 볼륨을 넣어 불룩하게 했다. 겉옷을 입으면 속내가 감추어졌다. 누가 보자 하지 않으니 신경 쓸 게 없었다. 거울을 보면 정말로 큰 것 같아 만족스럽고 기분이 우쭐해졌다. 크게 보이는 것에만 신경 썼으니 진짜 사이즈를 모르는 게 당연했다.
주어진 대로 만족하지 못하고 키우려고 한 것이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터무니없는 고지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고자 버둥거리며 살아왔다. 이를테면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의 부인이 되고 싶어 남편을 부추겨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 맘대로 목표를 정해 두고 밤이 이슥해서야 아이들을 자리에 들도록 했다. 스스로도 자신 있게 명함을 내밀기 위해 힘에 부치도록 여러 일을 하며 경주마처럼 달려왔다.
그런 세월이 흘러 지천명이 코앞이다. 쉰 살쯤에는 하늘이 만물에게 제각각 부여한 몫이 있음을 알 때라고 성인은 말씀하셨다. 성인이 아니더라도 비행기를 타고 아래를 보면 큰 건물이나 집조차도 그저 점처럼 보인다. 아무리 바동거려 봐도 별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 자각도 잠시, 나는 아직도 자아실현이라는 핑계를 대고 더 커지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미혹하면 욕망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하였는데 나는 언제쯤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날이 언제일지 헤아려지지 않는다. 다만 고지를 향해 달려가는 짓이 외줄 타듯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마음 한구석에서 불편하다고 신음 소리를 낸다. 그러면 다른 한쪽에선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고 부추기며 욕망은 가지를 뻗는다. 언제나 나를 부풀리고 번쩍거리게 포장하고 싶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아마도 나는 조물주께서도 포기할 욕심 덩이가 아닌가 싶다.
*
<신인상 심사평>
몸엣 미학, 실존적 파토스 / 신인 엄옥례의 경우
심사위원
박 양 근 (수필가. 문학평론가. 부경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최 원 현 (수필가. 문학평론가)
한 상 렬 (수필가. 문학평론가. 계간 『에세이포레』 발행인)
『수필세계』의 진정성은 무엇보다 신인 선발에 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작품으로 승부하고자 하는 편집 태도가 빛난다. 이는 신인으로 등단한 작가의 면면만을 살펴보아도 넉넉히 증명된다. 이번 상반기에도 단 한 사람의 작가를 탄생시킨다. 타 문예지와 차별화된 『수필세계』만의 아름다운 성채(城砦)다. 이런 경향성은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의 진실일 것이다.
2014년 상반기 신인상에 당선된 엄옥례의 다섯 편의 수필인 「솔개」, 「응석」, 「통(通)」, 「졸참나무」, 「사이즈」가 평자에게 전해졌다. 이들 작품들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사유의 깊이를 보여 주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수필문학은 자기 얼굴 그리기요, 성 쌓기에 이르는 구도의 과정일 것이다. 하기에 엄옥례의 수필은 그만의 얼굴 그리기요, 성 쌓기라 해도 좋겠다. 아니, 작가 자신의 의미 있는 초상(肖像)일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지멜(Georg Simmel)은 "타인에 대한 해석, 타인의 내적 본질을 분석하는 것을 억제하기란 쉽지 않다." 고 말한 바 있다. 때문에 우리는 의미 있는 초상화를 볼 때마다, 그 표상 뒤에 어떤 속내가 숨겨져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독심술과도 같은 유혹에 속절없이 빠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엄옥례의 수필은 "몸"을 통한 존재미학과 소통의 변주를 감지하게 한다.
문학은 철학의 명제처럼 논리적인 언어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모순적이고 비약적인 언어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문학은 파괴된 내면을 조심스럽게 깁고 피 흘리는 상처를 닦아내는 데 더 효과적인지도 모른다. 소용돌이치며 아우성치고, 그러나 그 위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인간의 온갖 모순된 삶을 싸안고 흘러간다. 그래 때로는 갇혀 있던 슬픔의 물꼬를 조금씩 틀 수 있는 게 문학인지도 모른다.
엄옥례의 일련의 수필들이 보여 주는 의식의 내면 풍경은 다채롭다. 그의 사유는 일상의 한 단어, 그 기표가 갖는 기의에 천착하고 있다. 그렇다고 기상천외한 철학적 담론은 아니다. 일상적이지만 작가의 시선이 본질 찾기에 닿아 있으며, 그의 시선은 열려 있다. 그는 사물을 눈에 들어오는 대로 관찰하고, 그 결과를 직핍하지 않는다. 사물과 대상을 자기 나름의 프리즘에 의해 굴절시키고, 용해하여 자기화하고 있다. 이는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혜안일 것이며, 철학적 바탕 위에서 구축된 자기만의 성(城)일 것이다. 바로 실존적 파토스이다.
한마디로 엄옥례의 수필들은 "몸엣 미학'과 '실존적 파토스'로 무장되어 있다. 행간에 담겨진 언어의 기의와 기표가 갖는 해석상의 깊이가 무진하다. 그렇기에 삶을 철학으로 무장하지 않고서는 그의 수필 세계로의 진입이 그리 쉽지 않다. 이만한 깊이의 수필을 만난다는 것은 수필 읽기의 행운인지도 모른다.
작품 「솔개」는 '몸'으로부터 단초가 열린다.
"잠시 머리가 핑 돌더니 코피가 떨어진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일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몸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마음의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바닥에서 몸을 세웠던 그때처럼."
이 수필은 '몸'으로부터 열린다. 여기, 몸은 화자의 창작에 있어 출발점이자, 귀착지이다. 그 몸이 알게 모르게 혹사당한다고 여길 무렵, 그의 갈등과 자각은 비로소 '몸엣' 의미에 천착하게 한다.
"계절의 수레바퀴가 스물 몇 번 돌았어도 나는 집 안에서만 맴돌았다. 그저 내조가 최선이라는 소신으로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에만 마음을 두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남편도 부상을 입어 고통이 심했겠지만 나는 더 깊은 내상內傷을 입었다."는 자각과 이를 통한 내면적 갈등은 고공비행하는 솔개에 환치된다.
늘 고공비행만 하는 솔개도 고비가 있는 법이다. 팔십 수년을 사는 솔개는 생을 반쯤 살면 발톱이 무뎌져 먹이를 낚아채기 힘들다. 먹이를 잡아채더라도 부리가 굽어 쪼아 먹기 어렵다. 게다가 날개마저 두꺼워져 높이 날지 못해 도태와 생존을 가르는 벼랑 끝에 선다.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은 솔개로 하여금 두려움과 고통을 안고 산꼭대기에 서게 한다. 허기에 몸을 휘청거리고 피를 흘리면서도 헌 부리를 바위에 쪼아 부수어 새 부리가 돋아나면 낡은 발톱과 깃털을 뽑는다. 마침내 새 발톱과 깃털을 갖추고 또 한 번 창공을 향해 힘차게 비상한다.
―「솔개」에서
위에서 보듯, 일상의 삶에서 내상을 입었음에도 그가 재기할 수 있었던 실존적 자각의 인자는 다름 아니라 초월을 통한 자기발견에 있다. 화자로 하여금 두려움과 고통에서도 산꼭대기에 서게 한 동인은 "휘청거리고 피를 흘리면서도 헌 부리를 바위에 쪼아 부수어 새 부리가 돋아나면 낡은 발톱과 깃털을 뽑는", 비상을 향한 몸부림,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런 자각은 '몸엣' 의미의 새로운 해석이자, 화자의 존재 인식에 대한 열정 곧 파토스와 접맥된다. 화자의 일신(日新)에의 의지이다. 파괴된 내면을 조심스럽게 깁고 피 흘리는 상처를 닦아내는 화자의 긍정적 삶의 태도가 독자를 사로잡는다. 금빛 날개를 가졌어도 공기의 저항이 없다면 날 수 없듯, 삶도 날갯짓과 저항이 균형을 이루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리.라는 우회적 어조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몸엣 미학은 여기에 있다.
"청둥오리도 강한 상승 기류를 타고 높디높은 히말라야를 넘는다지 않는가. 이리저리 부딪히며 나를 비우다 보니 그 자리에 일이 들어왔다. 새로운 바람을 만나면 새가슴처럼 조마조마한 마음이 앞서 잠시 기우뚱거리지만 이내 중심을 잡는다. 인생사 다 그러하듯, 바람을 타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화자의 언술은 상황의 변화, 부정을 긍정으로 변화시키는 그만의 성 쌓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각과 이에 따른 변화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세상으로 나가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아직도 그 맛은 맵고 쓰다.는 해석은 화자로 하여금 보다 견고한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대나무 살을 깎고 문종이를 자르는 소년처럼, 나를 깎고 잘라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하리."라는 독백과도 같은 결미가 이 수필의 주제 설정에 있어 설득력을 갖게 한다. 이렇게 엄옥례의 실존적 파토스는 여린 듯하면서도 강한 톤으로 독자에게 다가간다.
화자의 몸엣 미학은 「응석」에서도 나타난다. 이 수필은 남편의 응석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고정관념으로 보면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다. 하지만 노모에게 자식은 언제나 유년이다. 세월을 잊은 노모의 사랑이 전편에 융화되어 원초적인 '몸'에 초점이 모아진다.
남편도 뚜비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날이 있다. 퇴근길, 소주에 붉게 취할 때면 안방으로 오지 않는다. 술 냄새 난다는 나의 타박을 피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본능적으로 위층을 향한다. 계단에서 구를까 걱정이 되어 손을 잡아당겨도 아무 소용이 없다. 엉금엉금 오르면서도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 손에 든 비닐봉지를 놓지 않는다.
팔순이 넘은 어머님은 잠결에도 남편과 내가 벌이는 실랑이를 알아차리고, 기다렸다는 듯 아들을 맞아들인다.
"아이쿠! 내 강생이 무슨 술을 이래 많이 마셨노?"
어머님이 삭정이 같은 손으로 남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 남편은 그제야 손에 든 봉지에서 사탕을 꺼낸다. 옛날, 어머님이 공사판 일을 마친 후 사 오시던 눈깔사탕이다. 남편은 아기처럼 입을 동그랗게 모아 아 하며 어머님의 입에 사탕을 넣어 드린다. 어머님의 얼굴은 목단처럼 화사해진다. 사탕으로 나누는 어머님과 남편의 교감은 시작부터 달콤하다.
―「응석」에서
이 수필은 서두에서 애완견인 뚜비와 남편의 동일시로부터 열린다. 전자의 수필 「솔개」에서 솔개에게 감정 이입이 되었다면, 「응석」은 애완견 뚜비의 어리광을 남편의 어리광으로 이입, 치환하고 있다. 화자의 이런 비유적 상상이 신선하다.
팔순이 넘은 노모에게 있어 아들은 언제나 유아이다. 모자의 대화는 사뭇 유아적이다. 퇴근길 술에 취한 남편은 귀가하자마자 노모의 방으로 직행한다. 남편의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다. 노모가 옛날 공사판 일을 마치고 사 오던 눈깔사탕이다. 여기서 '사탕'은 노모와 남편을 이어 주는 매개물인 동시에 정서적 등가물로 두 사람의 교감의 매체이다. 앞의 인용문은 다분히 유아적 장면이다. 두 사람 사이엔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남편의 파토스는 그저 '몸'만으로도 충분하다.
수필문학은 이렇게 자기 관조와 성찰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수필은 자잘한 일상에 포커스를 맞춰 객관적 사실을 자기화하면서 의미화를 지향하게 된다. 이런 언술은 수필이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으며, 작품을 통해 작가의 얼굴과 만나게 된다는 데 있다. 이 경우 일상이란 늘 낯익거나 통속적이고 타성적이어서 감동을 지니기가 그리 쉽지 않다. 다만 동일한 대상과 사물일지라도, 이를 작가 자신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어떻게 새롭게 직조하느냐에 작품의 성패가 달려 있을 것이다.
화자의 '몸엣' 말은 아들에게 전이된다. '응석 깨우기'가 그것이다.
"나도 어머님처럼 우리 강생이'를 연발하며 아들의 배를 슬슬 문지른다. 아들이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면 다리까지 꾹꾹 주물러 준다. 그랬다.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은 말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이 몸짓보다 더 그윽한 언어가 어디 있을까. 햇살보다 따뜻한 체온과 가나안의 땅보다 깊은 믿음이 흐른다."고 했다.
이는 화자의 실존적 자각일 것이다. 화자는 이제 존재 사태에 있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자각한다. 사르트르는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주는 것을 실존이라 했던가. 그래 존재 그 자체로서의 기쁨에 대한 사유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엄옥례의 수필의 자리는 이렇게 존재 사태의 사유에 있다. 몸엣 미학이요, 실존적 파토스일 것이다.
수필 「통(通)」 역시 몸엣 미학을 엿보게 한다. 남편과 아들 사이의 불통의 벽 허물기가 이 수필의 착상의 동기일 것이다. 이 수필의 서두는 이렇다.
"새로 단장한 두리봉은 들머리부터 말끔하다. 계단을 한 발 한 발 오르며 마음을 다스리고, 가파른 길에서는 로프를 붙잡아 중심을 잡는다. 구름다리를 건너며 견우와 직녀의 순수한 사랑도 느껴 본다. 햇살 바람에 팔랑이는 이파리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새소리에 오감을 맡기다 보면 내 마음도 열린다."
화자는 두리봉 들머리 계단을 오르고 있다. 가파른 길이다. 로프를 붙잡고 중심을 잡는다. 등반길이 결코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는 한 발 한 발 오르며 마음을 다스린다. '몸'의 의미에 천착하게 하는 장면에 설명하기를 덧붙이고 있다. 창작 의도를 간파하게 한다. 계절은 봄이지만 잔뜩 웅크린 아들을 볼 때마다 화자는 신경이 곤두선다. 그 아들이 자기 방에서 두문불출이다. 남편 또한 이에 뒤지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불통(不通)의 벽이 가로놓여 있다.
화자는 이내 두 사람 사이의 전령사가 되어야 한다. 남편이 화자에게까지 벽을 세운다. 두리봉에 오르게 한 빌미다. 길이 통하면 마음까지 통하는가. 두리봉에 오르는 길은 어느 길이든 막힘이 없어 가슴에 숨구멍이 트이는 것 같다. 이제 벽을 허무는 작업이 서서히 시작된다. 남편의 닫힌 마음을 열어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 며칠 뒤 남편이 먼저 등산화를 찾아 신었다. 두리봉을 오르는 길은 벽을 허무는 화해의 장이요, 각성의 공간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등산은 어울림이 아니라, 각개에 지나지 않는다. 몸과 몸의 부딪힘은 저만치 있고, 벽은 쉬 허물어지지 않는다.
이윽고 주말 아침 억지 춘향으로 아들과 합세한다. 하지만 아들은 목줄에 끌려오듯 묵직한 발걸음이다. 서로 부대끼며 마음을 통하고 싶었던 화자이건만, 셋은 제 힘 닿는 대로 걸었다. 간격이 차츰 벌어져 남편과 아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산마루에 닿을 즘 고개를 들어 보니 남편이 혼자 내려다보고 있었다. 봉우리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고 있자니 한참 후에 아들이 모습을 보였다. 아들은 남편과 내가 오른 길과 다른 방향에서 오고 있었다. 했다. 몸이 몸과 통하고 실존적 파토스가 일어나야 하건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뒷날도 그다음 날도, 셋은 말없이 땅만 보고 산을 올랐다. 묵언 수행을 오래 하다 보니 도를 깨친 걸까. 남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길을 잘못 들면 산속을 헤매니 잘 보면서 가! 그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대화가 트이자 아들은 저가 선택한 길이 자신 없다고 털어놓았다.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이 쉽지 않다는 걸 먼저 경험했기에 말렸다. 그래도 기왕 선택한 길이니 잘해 봐라. 비록 짧은 대화지만 그 효과는 컸다. 서로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통(通)」에서
화자의 마음이 드디어 통했던가. 어렵사리 대화가 트이고 서로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화자의 진정성이 통한 것인가. 삶의 희열은 이렇게 서서히 찾아온다. 관조와 사유 끝에 드디어 만나게 되는 희열의 순간. 존재의 체험을 통해 체득되는 몸의 미학, 일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언어미학적으로 창조한 미적 관조의 산물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은 모방이나 재현에 있는 게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는 데에 있다고 했다. 그래 모든 존재자의 아래에 묻혀 뇌리를 떠난 존재의 체험을 일으켜, 우리를 존재 망각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한다. 미셀 푸코의 언술과 같이, 사유의 전 지평을 산산이 부숴 버리는 존재의 의미를 해석해 냄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삶의 진실에 눈뜨게 된다. 요즘엔 부자가 나란히 산길을 오른다. 당겨 주고 밀어 주고 장난도 스스럼없이 치는 걸로 보아 마음의 벽이 다 걷힌 것 같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속을 산책하듯 두리봉 길을 걷는지도 모른다. 트인 마음으로 스며드는 산 공기가 상쾌하다.는 결미의 경쾌한 진술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몸의 미학을 통한 실존적 파토스일 것이다.
수필 「졸참나무」나 「사이즈」 역시 몸을 의미화함으로써 사물의 본질 찾기에 성공한 작품들이다. 작품의 성공 여부는 대상에 대한 통찰의 여하에 달려 있다. 전자의 수필들에서 간파했듯, 엄옥례의 일련의 수필은 몸엣 추적을 통한 실존적 자각에 있다.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진 나무 둥치가 화자의 시선을 끈다. 졸참나무다. 이 수필은 단순한 제재를 선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유의 깊이가 있다. 구성 또한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미시적 관찰을 통해 존재 규명이라는 상상과 사유의 공간으로 독자를 유인한다.
지난여름에 쓰러진 졸참나무다. 등산로를 넓히느라 뿌리가 드러나, 태풍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우람하지는 않아도 제법 실팍하고 도토리까지 조롱조롱 달고 있었다. 고만고만한 삶을 위안 받으러 가끔 산을 오를 때면 가난한 마음을 채워 주던 나무다. 만져도 보고 흔들어도 보고,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세파에 쓰러져 번성했던 가지도 다 버리고 희망 한줄기를 살리려는 남편이 보이기 때문이다.
―「졸참나무」에서
지난 여름에 쓰러진 졸참나무 비록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진 나무 둥치건만 칼바람이 물러가자 동면에서 깨어나 분주히 수액을 빨아올리고 있다. 새순을 내민 가지 하나. 화자는 그에게서 희망 한줄기를 살리려는 남편의 모습을 본다. 발상이 참신하다. 사물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열려 있다. 화자의 예민한 촉수는 표피적 현상에 대한 평면적 서술에서 입체적 사유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예시와 의미화의 두 축으로 진행된 이 수필은 삶이라는 현상학적 상황에서 자신을 건져 올리려는 진정성을 엿보게 한다. 몸에 천착한 화자의 사유는 이 수필에서 다시 산행과 연접하게 한다. 얼마 전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남편의 등을 산으로 떠밀고 뒤를 따랐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오히려 남자가 그리 약해서 쓰겠냐고 타박을 하면서 산을 올랐다. 봄바람에 나무들은 나 보란 듯 신록을 뽐냈고 하나 남은 졸참나무 가지도 소생의 잎을 팔랑이고 있었다. 졸참나무를 턱으로 가리켰다. 뭔가 싶어 바투 다가간 남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이런 역발상의 착상이 이 수필의 맛에 길들이게 한다.
엄옥례의 몸엣 미학은 「사이즈」에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당신 사이즈 얼마고?라는 남편의 혀 꼬부라진 목소리는 파토스적인 사랑을 감지하게 한다. 아내의 생일 선물을 고르는 남편의 유아적 언술이 이 수필의 재미를 보태고 있다. 내일 사 달라 해도 당장 사 오겠다고 어린아이같이 떼를 쓴다. 술 취한 남편의 생각을 좀처럼 꺾을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사이즈를 이내 답할 수 없는 화자에게 있다.
주어진 대로 만족하지 못하고 키우려고 한 것이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터무니없는 고지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고자 버둥거리며 살아왔다. 이를테면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의 부인이 되고 싶어 남편을 부추겨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 맘대로 목표를 정해 두고 밤이 이슥해서야 아이들을 자리에 들도록 했다. 스스로도 자신 있게 명함을 내밀기 위해 힘에 부치도록 여러 일을 하며 경주마처럼 달려왔다.
―「사이즈」에서
수필은 이런 본질 찾기에 있다. 일상을 통한 그 진술의 철학은 바로 실존에 대한 의미화일 것이다. 특히 이 수필은 생일 선물을 매개로 하여 부부 사이에 벌어진 화제의 전말이 사뭇 해학적이다. 여기서 화자의 몸은 곧 사이즈이다. 화자의 진솔한 삶의 형상화가 수필 읽기의 재미를 더한다. 이렇게 한 편의 수필 속에는 작가인 화자의 진솔한 삶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으며, 대상에 대한 작가의 사상이 녹아 있다. 이런 경우 화자의 체험과 삶에 대한 해명이 진지하면 할수록 독자들은 그 한 편의 작품을 통해 삶의 깊은 메시지를 감지하게 된다.
앞의 논의에서 밝혀졌듯, 신인 엄옥례의 일련의 수필들은 일상성에서 벗어난, 몸엣 미학, 실존적 파토스의 자리에 있다. 2014년 상반기를 기록하게 할 신인의 탄생을 축하한다. 『수필세계』의 보람이요, 한국 수필 문단의 결실이기도 하다. 그에게 거는 신인의 행보를 지켜볼 일이겠다. 심사평│한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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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당선 소감>
수필, 나의 실꾸리 / 엄 옥 례
경북 봉화 출생
경북 문화체험 전국 수필대전 입상
대전시 수필 공모전 특상(2010)
독서심리 상담사
사랑회 책나누기 운동본부 강사
찻잔을 들고 창가로 간다.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등단, 한때 그것은 로망이었지만 막상 단에 오르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창으로 불어 오는 바람이 커튼을 흔들어도 나는 바깥을 내다보기만 한다.
입문할 때가 떠오른다. 실의에 빠져 세상이 싫어질 때, 나를 격려하던 선배가 글을 쓰러 가자고 했다.
글? 감성이 예민한 시절, 한 선생님이 네 글재주는 영 아니다고 했다. 그것을 낙인으로 받아들인 나는 불혹이 넘도록 일기조차 쓰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쓰다니, 선배의 권유에 매번 꽁무니를 빼다가 끝내 치맛자락을 잡혔다.
예의 치레 반 호기심 반이라는 심산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처음엔 서먹했지만 강의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내 안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얼마나 끙끙거렸는지 모른다. 굳어 버린 머리에서 좋은 생각이 나올 리가 없고, 언어의 곳간이 빈 내게서 감성적인 글이 짜일 리가 없었다. 의외로 교수님은 내가 쓴 글 가운데 한 문장을 가리키며 감각 있네?라고 하셨다. 귀가 번쩍 열렸다. 다산 선생이 소년 황상에게 용기를 북돋우던 말과 같았다.
글을 짜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일, 억울한 일, 아쉬운 일, 가슴속에 엉킨 실 뭉치를 풀어 글을 지었다. 코를 놓치고, 너무 촘촘하고 또 쓸데없이 느슨하고, 무늬까지 성근 글이지만, 그렇게라도 풀어내자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삶이 차츰 달라졌다. 글쓰기와 관련된 일이 조금씩 생겼다. 잡힐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우는 일도 거머쥐었다. 한동안 물 만난 고기처럼 세상을 헤엄치는 재미가 그만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빼앗기는 바람에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미궁에 빠져들었다. 미궁에 갇힌 테세우스에게 아리아드네의 실꾸리가 필요했듯 내게도 나를 구해 줄 실꾸리가 필요했다. 일도 좋지만 나를 풀어 뭐든 짜는 것이 내 실꾸리였다.
한 분야에 5년 몸담으면 취미가 되고 10년이면 전문가가 된다고 한다. 이쯤이면 수필은 내게 취미를 넘어 가(家)를 이루는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일가(一家)를 이루기가 어디 쉬운가. 오늘을 전환점으로 진정한 수필가가 되도록 더욱 정진하겠다.
<수필세계>에 이름을 새기게 해 준 심사위원께 깊이 감사한다. 걸음이 느린 제자를 끝까지 놓지 않은 두 교수님의 따뜻한 손 잊지 않겠다. 아울러 문학회 선후배 문우에게 내 소임을 다하겠다고 약속한다. 집안일 못 챙겼는데, 불평을 삭인 가족이 고맙다. 응원해 준 모든 분께 감사의 말 전한다. 하나하나 짚어 보고 돌아보니 나는 빚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