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욕망은 필요와 결핍과 가난과 괴로움에서 일어난다. 욕망을 충족시키면 그것을 일단 진정시킬 수 있으나, 한 가지 욕망이 충족된 반면에 충족을 느끼지 못하는 욕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계속되며, 욕구는 무한히 전개되는 반면에 향락은 짧고 적은 분량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욕망을 충족시켜 쾌락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쾌학은 한갓 외형적인 환상에 불과하며, 그 후에 제2의 쾌락이 대신 나타나면 전자는 소실되어 버리고 후자는 후자대로 환상이 계속되는 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의지를 진정시켜 잠재우거나 계속해서 붙잡아 매어 둘 힘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운명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선물도, 거지의 발 아래 던져진 푼돈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목숨에 풀칠을 하여 그 괴로운 생존을 내일까지 연장시킬 따름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욕망의 지배와 의지의 주권 아래 놓여 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희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한, 계속해서 안식이나 행복을 손에 넣을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내면적 조화의 불가사의한 혜택으로 잠시나마 끊임없는 욕구의 급류에서 벗어나, 정신을 의지의 대상에서 떠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은 욕구의 색소를 잃고 탐욕의 대상이 아니라 몰아적인 관조의 대상으로 자기의 모든 이해 관계에서 떠나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에게 욕망이 일어나 그것을 헛되이 추구해도, 언제나 도망을 치던 마음의 안정이 거의 스스로 나타나 흐뭇한 평화를 한아름 안겨 준다.
에피쿠로스가 찬양한 최대의 선(善), 즉 제신(諸神)의 최고의 행복도 실은 고통을 초월한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의지의 무거운 압제에서 벗어나, 의욕이라는 강제적 부역을 면하고 안식을 즐길 수 있다. 이때 저물어가는 태양을 궁전 들창가에서 바라보나, 감옥 철창에서 바라보나 느낌은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조화를 이루고 순수한 사상이 의지를 능가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이 점을 실제로 입증한 것은 네덜란드의 화가들이다. 그들은 사소한 지엽적인 사물도 객관적으로, 올바로 바라볼 수 있다. 그들의 정신이 정의(情意)를 떠나 아늑한 안식을 지닐 수 있다는 증거로 저 불후의 대작을 남겨놓은 것이다. 그들의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은 반드시 깊은 감명을 받으며, 작자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심경과 보잘것없는 사물에 주목하여, 그만큼 세심한 필치로 묘사하기까지의 아름다운 심경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며, 이 평온한 심정을 지녔던 화가와 언제나 불안과 욕망으로 마음이 흐려지고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자신을 비교해 볼 때, 지금 말한 바와 같은 주장은 한층 명백해진다.
인간과 인생의 모든 면에 대하여 초탈한 눈으로 보고 그것을 펜이나 연필로 묘사해 놓으면 그것은 흥미와 매력에 가득 차서 고상하고 유현하게 보인다. 그러나 인간인 한, 언제까지나 이런 순수한 감흥 속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괴테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어지러운 인생도 그림으로 그려 놓으면 아름다워 보이나니...."
나는 젊었을 때 자신의 행위를 마치 남의 일처럼 하나하나 적어 둔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자신의 행위를 한층 더 세세히 감상하고 즐기려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 같다.대체로 모든 사물은 우리들의 이해 관계를 떠날수록 아름답다. 그러나 인생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결코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시의 거울에 비쳐서 반사된 인생의 그림뿐이며, 이 그림이 유난히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미처 모르던 청년 시대의 일이다.
영감에 의해 삶이 시의 형태를 이룬 것이 이른바 서정시이다. 그리하여 참된 서정시인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완성된 모습과 깊은 내면 세계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대에 속한 무수한 인간들이 비슷한 환경에서 경험하는 느낌은 한 편의 시 속에 생생하고 성실하게 표현된다. 시간은 세계적, 보편적인 것이며, 인간의 마음속에 복받치는 모든 것과, 인간이 환경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과, 인간이라는 허망한 생물에 숨어서 발동하는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 되므로, 그 범위는 자연 전체에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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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인간의 거울이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것을 밝은 영상으로 묘사하는 것이 그의 큰 임무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에 대하여 좀더 고결하다거나 초탈하다거나 도의적으로 올바르다거나 신앙적으로 믿음이 돈독하다거나,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명령조로 요구할 수는 없다.
훌륭한 시는 모두가 몸서리치는 인간성이나 커다란 고뇌, 인간의 우환, 악의 승리, 우연의 지배, 옳고 순결한 자의 파멸 등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세계의 성능과 존재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말해 준다.
비극 작품의 내용은 어떠한가. 그 속에는 그 귀한 인물이 오랜 구투와 수난 끝에 지금까지 애써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단념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햄릿>의 주인공 등 이 그것이며, 햄릿의 친구인 호레이쇼는 자진하여 그와 죽음을 함께 하려고 했으나, 그의 최후를 후세에 전하여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이 고뇌에 충만한 세계에 잠시 머물러 있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오를레앙의 쳐녀>의 무셀, <메시나의 신부>의 주인공도 같은 종류의 비극적 인물들이며, 그들은 모두 고뇌로부터 정화되어, 그 속에 내포된 살려는 의지가 멸망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죽어 간다. 비극의 참된 죄과가 아니라 유전의 죄과, 즉 존재하는 것 자체의 죄라는 심오한 견해가 표현된 데 있다고 하겠다.
비극의 셩격과 목적은 인간을 체념으로 인도하여 생존의 의지를 포기하는 데 있지만 반대로 희극은 우리를 사주하여 생존을 원하게 하려는 것이다.
희극도 물론 인생의 모든 시적인 묘사와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고뇌와 염세적인 무서운 장면도 그려 보여 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해악으로 마지막 환희에 용해되고, 드디어는 희망과 성공과 승리의 교향악으로써 해소된다.그리하여 세상에는 아무리 불쾌한 일이 충만해 있더라도 언제나 재미있고 우스운 일이 있어 웃움꽃을 피울 수 있음을 묘사하여, 독자나 관객들이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쾌활한 기분을 북돋아 주려고 한다. 예컨대 몹시 재미있고 우스운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그 즐거운 마지막 대목에 이를 즈음에 빠져나와 결말에 가서는 별일 없이 원만히 끝나게 마련이다.
서사시나 희곡을 쓰는 시인은 자기가 운명 자체이며, 따라서 운명과 마찬가지로 에누리가 있어서는 안 됨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또한 인간의 거울이므로, 그 시가 희곡이나 소설에 사악(邪惡)한 자, 때로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 즉 바보나 못난이, 정신박약자를 등장시키는 한편, 이지적이고 신중한 인간, 때로는 선량하고 정직한 자,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는 고귀하고 관대한 인물을 등용해야 할 것이가.
호메로스의 시에는 선량하고 성실한 인물은 많이 나오지만 참으로 고귀하고 관대한 사람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는 이런 인물이 한둘 묘사되어 있으나, 그 고귀성은 초인간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코멜리아와 코라이아란 두 사람이 이에 해당되며, 그 밖에는 찾아볼 수 없으나, 다른 부류의 인물들은 수두룩하다. 레싱의 《민나 폰 바른헬름》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주로 정직하고 관대한 성격의 소유자로, 괴테가 묘사한 주인공을 한데 묶어놓아도 포자 후작과 같은 너그러운 성격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인간의 행동은 자체가 특유한 의의를 갖고 있으며, 관념은 행동을 통하여 여러모로 스스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생의 모든 광경이나 회화의 소재가 된다.
네덜란드파의 오묘한 그림에 대하여 대부분이 다만 뛰어난 기교만을 찬양하면서 그것이 대체로 일상 생활의 모습을 묘사할 뿐, 인생의 중대한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기교 외에는 볼 것이 별로 없다고 멸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감상법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어떤 행위의 내면적인 의의와 외면적인 의의는 서로 관련이 없으며, 때로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들은 알아야 한다. 어떤 행위의 외면적인 중요성은 현실에 미치는 영향과 결과에 의하여 측정되지만, 내면적인 중요성은 인간성에 빛을 던지고 인간 생활의 특수한 면을 발굴하여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예술에서는 행위의 내면적 의의만이 중요하고, 역사에서는 외면적 의의가 소중하다. 이 양자는 서로 분리되기도 하고 결합되기도 하지만 실은 독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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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행위도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에 불과한 경우가 있으며, 반대로 사소한 일상 생활도 인간의 내부에 빛을 던져주는 한 커다란 가치를 갖고 있다. 인간의 행위는 대체로 목적과 결과가 무엇이든간에 본질적으로 동일하다.예컨대 몇 명의 장관이 지도 위에 머리를 맞대고 그 영토나 주민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과, 백성이 술집에서 카드나 트럼프의 승부에 대하여 아옹다옹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행위이며, 장기를 둘 때 금제 포나 목제 포가 마찬가지인 것과 같다.
음악은 외부의 현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현상의 내면적인 본질, 즉 의지 자체를 표현하는 것으로, 특수하고 일정한 기쁨, 괴로움, 두려움, 걱정, 쾌학이나 안식 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쁨 자체, 비애, 고뇌, 공포, 쾌락, 안식 자체를 표햔하는 것이다. 즉 음악은 모든 동기(動機)나 상태를 떠나 기쁨이나 괴로움의 추상적, 일반적 본질만을 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표현된 추상적 정수에 의하여 그것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음악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일종의 내면적 비밀을 전달하여 우리에게 친근하면서도 좀처럼 가까이 할 수 없는 순간적인 하나의 낙원을 보여준다. 음악의 선율은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음악이 우리의 가슴 속에 움직이고 있는 의지의 몸부림을 표현하면서도 우리의 여러 가지 사정이나 처지에 대하여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 표현에 고뇌의 그림자를 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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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심포니는 겉으로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리듬 속에는 놀라운 균형이 들어 있다. 거기에는 또 아름다운 조화로 끝맺는 치열한 난투가 있다. 그리하여 조화를 이루지 못한 사물이 생멸하는 무수한 형체와 헤아릴 수 없는 소음을 통하여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공간을 횡단하는 이 세계의 본성을 완전하고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그리고 이 심포니 속에는 인간의 모든 감정과 격정,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절망과 희망을 무한한 뉘앙스를 통하여 추상적인 방법으로 흑백을 가리지 않고 표현해 놓았으므로, 흡사 형체가 없고 영혼만이 충만한 하늘 나라와 같은 느낌을 준다.
나는 오랫동안 음악의 본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 나머지, 모든 향락 중에서 가장 미묘한 음악을 즐길 것을 권하고 싶다. 세계의 참된 본성을 심각하게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으로 음악만큼 강렬히 작용하는 것은 없다. 웅대하고도 화려한 하모니를 들으면 정신이 미역 감는 느낌이다.이리하여 정신을 모든 오물을 씻어 버리고 사악하고 비열한 것을 제거할 수 있다. 이런 하모니는 인간을 한결 높은 데로 끌어올리고 가장 고귀한 사상과 융합하므로, 거기서 우리는 자기의 참된 가치와 의의, 아니 자기가 지닐 수 있는 모든 가치와 의의를 분명히 느끼게 마련이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 언제나 모든 인간의 생애(그리고 나 자신의 생애)는 어떤 영원한 영혼의 꿈 ㅡ 선악과 그 밖의 여러 가지 꿈 ㅡ 이며, 죽음은 이 꿈이 깨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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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특히 서사시나 희곡에는 미를 제외한 하나의 특질인 '흥미'라는 것이 있다. 예술 작품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인간의 이데아를 분명히 재현하여 우리에게 이데아를 인식시키는 데 있다. 작품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뚜렷한 개성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켜 사건을 전개시킴으로써 이 인물들이 그 개성을 나타내어 내면 세계를 헤쳐 보일 수 있는 특수한 환경이나 입장을 마련하는 것으로, 인간의 이데아는 이런 묘사를 통하여 전모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술적 미를 인식할 수 있는 이데아의 고유한 특질로서, 다시 말하면 그 안에 하나의 이데아가 인식되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왜냐하면 미는 하나의 '이데아'가 명백히 표시되어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희곡이나 소설이, 그 묘사된 사건이나 행위에 의하여 공감을 갖게하여, 실제로 그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 느끼게 되면, 우리는 이 소설이나 희곡을 재미있다고 한다. 이때 거기 묘사된 인물의 운명이 우리 자신의 운명과 같은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긴장된 마음으로 사건의 결말을 기다리며 진행을 주시하는 중 위난이 다가오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이것이 최고조에 이르면 가슴의 고동이 그치다가 주인공이 갑자기 구출되면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여 끝까지 읽기 전에는 책을 손에서 놓기가 어렵다. 주인공의 비운에 동정하여 마치 자기 자신이 당하기나 한 것처럼 밤을 새우며 읽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니, 이런 작품에서 위안이나 즐거움만이 아니라 현실이 우리들에게 가끔 경험하게 하는 모든 고통, 적어도 악몽에 사로잡혔을 때와 같은 고통까지도 느끼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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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는 문예의 제2 목적일까, 나이면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가, 또는 아름다움의 속성으로서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는 스스로 나타나는 것인가? 흥미는 아름다움이라는 중요한 목적과 부합될 수 있는가, 혹은 아름다움과는 반대로 그 장애물이 되는가? 그런데 흥미는 희곡이나 소설과 같은 작품에만 나타나며, 조형 미술이나 음악이나 건축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이런 종류의 예술은 흥미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다만 어떤 특수한 감상가(鑑賞家)가 개성적인 흥미를 느끼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가령 어떤 상상화가 자기의 애인이나 원수의 얼굴을 닮았다든가, 어떤 건축물이 자기가 복역하고 있었던 감옥 같다든가, 혹은 어똔 음악은 결혼 행진곡이라든가, 자기가 싸움터로 쳐들어가는 행진곡이라든가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흥미는 예술의 본질과 목적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 아니, 예술의 본질에서 한눈을 판다는 점으로 보아 장애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예술적 흥미에 대하여 어느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결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흥미는 시적인 묘사에 대한 독자의 동감이 실제 사건에 대한 그것과 같이 느끼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묘사가 한동안 독자를 매혹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예술적인 매혹은 자신을 통해서만 작용하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예술이 존귀한 것은 그것이 진실을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며, 시의 묘사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진실해야 한다. 그리고 본질적인 특성을 강조하며, 묘사된 자기 표현을 요약하여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 즉 우연이 가미된 것을 제외함으로써 '이데아'를 하나의 이상적 진실로서 자연 이상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에 진실이 매혹하는 것이므로 흥미는 진실을 통해서 이와 공존할 수 있다.
그러면 제2의 의문을 생각해 보자. 즉 흥미는 미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일까? 만일 그렇다면 흥미 있는 시는 동시에 아름다워야 할 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어떤 희곡이나 소설이 흥미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끌지만, 그 가운데 예술로서의 아름다움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읽고 난 다음에 시간 낭비를 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작품에는 특히 희극이 많다. 그 중에는 인간의 본성과 생존의 진상에 대한 순수한 묘사가 전혀 없고, 표현은 허위이거나 과오로 천성에 어긋난 이상한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지만, 사건의 진행과 갈등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주인공의 처지가 독자의 마음을 끌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갈등이 해소되고 주인공이 안전지대로 옮겨지기까지는 호기심이 가라앉지 않는다. 또한 막과 막 사이의 이동이 기술적으로 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언제나 다음 장면에 마음이 쏠리며, 그 결과가 예측을 불허하므로, 초조한 심경은 기대와 경이로 충만한다. 이런 흥미에 끌려서 독자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는 것이다.
코체부(독일의 극작가)의 희곡에는 이런 작품이 많다. 순수한 인식이 아니라 심심풀이를 원하는 다수의 인간들에겐 이런 작품이 적합하다. 아름다움은 인식에 속해 있으므로, 그 감수력은 지적 능력과 마찬가지로 차이가 있다. 대다수의 인간에게는 세계의 내면적인 진실, 즉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가 하는 점은 관여할 바가 아니다. 그들은 표피만으로도 족하므로, 인간성이 알맹이를 발굴해 보여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런데 흥미 본위의 묘사는 되풀이하며 읽으면 효과를 잃어, 벌써 그 다음의 장면에 대하여 별로 큰 기대를 갖지 않게 되며, 이것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되면 독자나 관객들은 그 희곡을 무미건조하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아름다움의 가치는 작품을 거듭 읽을수록 독자의 이해를 도와 더욱 큰 예술적인 효과를 거둔다.
이 대중적인 희곡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이 통속 소설이다. 이탈리아의 베니스나 나폴리 거리에서는 모자를 벗어놓고 지나가는 사람을 모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여 흥미를 불러일으킨 다음, 흥미가 최고조에 달하여 사람들이 군침을 흘리게 되면 다음을 계속하기 전에 미리 청중으로부터 잔돈을 털어낸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부류의 값싼 천재가 그런 직접적인 방법을 쓰지는 않지만, 출판사나 라이프치히 시장이나, 대본점(貸本店)이 한몫 끼여 있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동지들처럼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그 상상의 귀공자들의 글은 소설, 야담, 낭만적 장시(長詩)나 사화(史話) 등의 초라한 표지 속에 수록되어 있다. 대중들은 그것을 사다가 잠옷 바람으로 난롯가에 앉아 뱃속 편하게 읽고 좋아한다. 이런 값싼 작품은 거의 모두가 아무런 가치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흥미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읽으려고 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서 흥미가 저절로 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그렇다고 아름다움이 자연히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밖에 사건의 갈등을 일으킨다거나 스토리를 복잡 다단하게 꾸미거나, 또는 갑자기 극적으로 해결을 하여 독자의 흥미를 끌 필요는 없다. 셰익스피어의 명작을 보더라도 흥미는 극히 적으며, 사건이 줄기차게 진행되지 않는다. 《햄릿》은 중간에서 침체되어 있고, 《베니스의 상인》은 궤도에서 벗어났으며, 《헨리 4세》에서는 흥미가 직선적으로 연속되어 있는데, 장면과 장면 사이가 원만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희곡은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극의 요건 가운데 행동의 통일은, 곧 극의 흥미에 관련된 것이지 ㄱ결코 미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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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셰익스피어에 대하여 말한 것을 그대로 괴테의 희곡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그의 《에그몬트》는 줄거리에 아무런 갈등도 전개되지 않으므로 대다수의 관객들은 구미에 맞지 않을 것이며, 《탓소》와 《이피게니아》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 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흥미로 독자를 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걸작의 소재로 거의 모두가 이미 일반인에게 알려진 사건, 또는 전에 극으로 공연된 사건을 택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여기 그리스인들이 이에 대하여 얼마나 날카로운 감수성을 갖고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미를 즐기기 위해 뜻밖의 사건이나 희귀한 사건으로 흥미를 느끼는, 그런 문학의 조미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옛날 걸작을 보더라도 흥미라는 특질을 갖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 호메로스는 세계와 인간의 전체성을 표시하고 있으나, 사건에 갈등을 일으켜서 독자의 흥미를 자아내거나 예상 밖의 미궁으로 이끌어 독자를 놀라게 하지 않았으니, 이야기의 흐름은 침체되기 일쑤요, 장면마다 침착하고 순서에 따라 훌륭히 묘사하도록 유의하였을 뿐 결코 흥미 본위로 붓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호메로스의 작품을 읽으면 어떤 격정적인 공감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순수한 인식의 입장에 서게 되며, 독자의 의지가 어떤 자극을 받지 않고 고요히 가라앉아 큰 긴장을 느끼지 않으므로 언제나 서서히 읽어 내려갈 수 있다 이런 경향은 단테에게 더욱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는 아닌 게 아니라 서사시가 아니라 서술시를 썼을 뿐이다.
그렇다고 걸작은 반드시 흥미 없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쉴러의 작품은 대단히 재미있어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도 그렇고, 서사적인 걸작으로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도 여기에 속하며, 고도의 흥미가 아름다움과 병존되어 있는 실례로는 월터 스콧의 명작 《나의 영주 이야기》 제 2편이 있다.
스콧의 이 작품은 가장 재미있으며, 그것을 읽으면 내가 지금까지 흥미에 대하여 말한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재미와 동시에 대단히 아름답다. 거기에는 놀랄 만큼 진실하게 인생의 가장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고, 등장 인물들의 상반되는 여러 가지 성격이 정확하고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흥미가 아름다움과 공존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으로 제 3의 의문이 풀린 셈이다.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흥미만 가미되면 충분하며, 예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름다움이지 흥미는 아니다.
그러나 희곡이나 소설은 어느 정도 흥미가 가미되어야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흥미가 사건 자체로부터 스스로 우러나오게 마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가 흥미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려 갈 필요가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공감이 가지 않는 인식 능력 안으로 장면에서 장면, 정경에서 정경으로 옮겨가는 동안 독자나 관객이 싫증이 나서 지쳐버리기 때문이다. 하기는, 사건의 줄거리가 있는 한 독자는 공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며, 이 공감은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길잡이가 되어 독자의 마음을 이끌어 작자가 묘사한 모든 장면을 보여 준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것은, 흥미가 이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정도면 된다는 것이다. 흥미는 작자가 우리들에게 '이데아'를 인식시키려고 묘사한 정경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다시 말하면, 실에 많은 구슬을 꿰어 염주라는 전체의 형태를 이루도록 하면 그만이다. 따라서 흥미가 도를 지나치면 아름다움은 곧 침해를 당하게 마련이다. 흥미가 너무 강한 공감을 일으키거나 각자가, 하나하나의 장면에 필요 이상으로 상세한 서술을 하거나 또는 등장 인물에게 긴 감회를 늘어놓으면, 독자는 민망하여 사건을 빨리 전개시켰으면 하고 작가를 회초리로 때리고 싶은 심정을 갖는 경우가 있다. 서사시나 희곡에서 아름다움과 흥미가 병존될 때 흥미는 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시계의 태엽에 견줄 수 있다. 그 태엽이 조절해주지 않으면 시계는 몇 분 안 되어 결딴이 난다.
한편 아름다움은 사건의 흐름을 떠나 하나하나의 내용에 대한 상세한 묘사나 관념과 친하게 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므로 태엽의 동체(胴體), 즉 시계의 문자판에 비할 수 있다.흥미는 시의 육체요, 아름다움은 혼이다. 서사시와 희곡의 사건과 행위에서 자연히 일어나는 흥미를 물질이라고 본다면, 아름다움은 형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아름다움이 존재하려면 전자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