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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정교한 일을 하게 함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곧 회막과 증거궤와 그 위의 속죄소와 회막의 모든 기구와 상과 그 기구와 순금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제사 직을 행할 때에 입는 정교하게 짠 의복 곧 제사장 아론의 성의와 그의 아들들의 옷과 관유와 성소의 향기로운 향이라 무릇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출31:1~11).”
가. 정교한 일을 연구하게 함
정교한 일이라는 것은 아주 세밀하게 고안하고 계획하고 발명한다는 뜻이다. 건축은 아주 정교한 일이다. 성막의 건축도 정교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부정적인 의미로는 계교, 모함이라는 뜻도 있다. 사탄은 교묘하게 그의 계교를 통해서 교회를 변질시켰다. 성막이 정교하게 건축된 것과 같이, 그것을 변질시키는 것도 아주 정교한 방법으로 변질시켰다.
우리가 아는 대로 1세기를 지나면서 교회는 점점 교리화 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4세기에 와서는 국교화가 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보면 기독교가 정착을 하고 자리를 잡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 속에 뿌리를 박고 거기서 세력을 얻고 인정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교회를 교묘하게 변질시킨 것이다.
세상과 적당히 어우러져서 비슷하게 만들어가고 그리스도와는 상관없이 하나의 종교를 만들게 되었다. 그 결과가 지금 유럽에서 기독교가 지나간 다음에 예수는 없고 기독교만 있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건축은 아주 정교한 일이다. 아주 정교한 일 중에서 정교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지혜롭다는 것은 분별이 있다, 빈틈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도 부정적으로 사용되면 간교하다는 뜻이 된다. 지능범과 같은 경우이다. 멍청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죄를 짓는데, 아주 지식이 많고 똑똑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아주 지능적어서 증거를 남기지 않고 완전범죄를 하려고 한다. 지혜가 좋게 사용되면 분별이 있고 빈틈이 없는 것이 되지만, 나쁘게 사용되면 간교한 것이 될 수 있다.
1)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듦
새긴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자르고 갈고 제어한다는 뜻이다.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든다고 했는데 이것은 금은세공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전부 다 신성, 즉 그리스도에 관계된 것이다. 금은 신성한 생명을 의미하는데, 성막의 내면은 금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성막의 내용은 신성이다. 영원한 생명, 그것이 성막의 내용이 된다.
은은 금 판자를 받치는 받침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구속을 상징하는 것이다. 동은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방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바깥은 모두 동으로 되어 있다. 성막은 동에서 은으로, 은에서 금으로 건축되어져 간다.
성막의 내용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 생명을 받치고 있는 것이 구속이다. 오늘 우리는 그 구속을 통해서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 구속이 없이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구속은 심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완전한 방어력을 갖고 있다. 만일 심판이 없이 우리를 구속하셨다면 우리는 불완전한 자가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봐주셨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심판을 통해서 구속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봐주신 것이 아니고 정당한 입장에서 구속이 된 것이다. 성막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제단이 나온다. 그 제단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야지, 제단이 없이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심판을 통해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볼 때 금 은 놋으로 만드는 일은 아주 정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왜 변질되었는가? 이 코스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변질된 것이다. 심판이라는 제단을 통하지 않고 십자가를 단지 어떤 고행으로 만들어 버렸다. 십자가하면 고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고난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요즘 천주교에서 고행을 한다든지 수행을 한다든지 이런 게 많은데 여러 가지 종교가 고행을 장려하고 있다.
그것은 고행을 통해서 자기를 비우기 위한 것이지만 알고 보면 자기를 오히려 강화하는 길이다. 거꾸로 가는 것이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심판을 받고 들어가는 길인데 이 심판을 고행으로 만들어 버려서 자기 강화로 만들어 버렸다. 기독교 안에 유명한 사람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런 어려운 고행을 통해서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유명한 사람이 된다. 그 길은 비슷한 것 같아도 아주 다른 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다. 그러다 보면 어떤 사람이 나오겠는가? 고난을 통해서 승리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히 소수이다. 그런 극히 소수의 사람들로는 교회를 건축할 수 없다. 이렇게 교묘한 방법으로 교회를 변질시킨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가 건축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는 심판을 통해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교회와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만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변질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라고 하신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2) 보석을 깎아 물림
두 번째로 보석을 깎아 물린다고 하였다. 보석이라는 것은 원석을 캐서 그냥 그대로 두면 가치가 없다. 그것을 어떤 각도로 깎느냐에 따라 빛이 반사되기 때문에 깎는 각도가 가장 중요하다. 어떻게 각도를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보석의 값이 비싸지거나 싸지게 된다. 각도,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위치이다. 어떤 위치에 있느냐? 이 문제이다. 빛이 아무리 온다고 하더라도 위치가 틀리면 빛이 반사가 안 된다. 그 위치가 정확해야만 빛을 제대로 반사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반사하도록 지어진 존재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의 위치에 정확하게 있어야 사람으로서의 빛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각도가 틀어져 버리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원래의 목적대로 빛을 반사한 것이 아니라 다른 빛을 반사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대단히 훌륭하다. 지혜도 있고 지식도 있고 능력도 있고 온갖 것이 다 있다. 그 온갖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각도에서 반사하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 반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왜곡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가 오셨지만 사람들이 제 위치에 있지 않으면, 구속의 위치에 있지 않으면 그 분을 제대로 반사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각도로 반사해 버린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심판을 고난으로 반사시켜 버린 것이다.
마치 예수님을 자선사업을 하는 분처럼 반사시켜 버렸다. 선을 행하러 오셨다, 좋은 일을 행하러 오셨다, 이렇게 반사시켜 버렸다. 그것은 세상의 필요이지 하나님의 필요가 아니다. 선을 행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세상의 필요이지 하나님의 필요가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사람의 위치를 바르게 해서 하나님을 반사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런데 그 각도가 틀어져버리면 다른 것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열심 기도 충성 믿음 이런 것들을 기독교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자신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속고 있다. 열심에 속는 것이고 정열에 속는 것이고 힘에 속는 것이고 능력에 속는 것이다. 어디서 큰 능력이 나타나서 병을 고친다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능력이지 예수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열심으로 뭔가를 했다면 그것을 쫒아간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는 아니다.
이렇게 묘하게 각도가 비틀어지면 다른 것을 반사하게 된다. 그런데도 그것을 보고 예수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을 반사하는 것이 얼마나 왜곡되게 반사해 놓았는지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을 사시고 우리의 구속을 위해 완전하도록 그렇게 일생을 사셨지만 그것이 완전하게 반사가 안 되고 다른 각도로 반사되고 만 것이다.
또 하나의 종교를 만드는 것으로 반사가 되어 버렸다. 믿음의 종교, 그것으로 반사가 되었고 고난의 종교, 그것으로 반사되었다. 기독교를 십자가의 종교라고 하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고난을 받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십자가는 희생이 아니다. 심판이지 희생이 아니다.
심판을 피하려고 사람들은 십자가를 희생이나 사랑으로 표현을 해 놓았다. 성경에 찾으면 그 근거가 다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이렇게 되어 있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런 영향으로 박애주의가 나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불교에는 박애주의가 없는가? 불교에는 기도가 없는가? 당연히 있다. 불교에는 능력이 없는가? 당연히 있다. 서양에서는 기독교만 있어서 그것이 통하지만, 동양에는 다른 종교도 많아서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이상한 것이 되고 만다.
중국에서 공자의 사상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지 모른다. 공자의 사상이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의로우며 얼마나 옳은 것인가? 그러니 그런 예수를 왜 믿겠는가? 자기들의 신앙을 버리고 그것을 믿겠는가? 인도에 가면 왜 또 기독교를 믿겠는가? 거기에 가면 얼마든지 믿음도 있고 기도도 있고 신비도 있고 능력도 있고 다 있다. 그러니 왜 예수를 믿겠는가? 서양 사람들이나 믿는 것이지 동양 사람들에게는 사실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제 위치로 돌아오지 않으면 예수님이 오셨어도 그것을 자기 각도에서 반사해버려서 다른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기독교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모른다. 오늘날 교회에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믿음, 열심, 성령의 불, 은사, 선행과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선행을 해야 참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선행을 하지 않는데 무슨 기독교인이냐? 이렇게 생각한다. 좋은 것 같은데 그것은 왜곡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것 때문에 오신 분이 아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각도 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에게서 반사된 하나님처럼 그렇게 우리에게도 반사되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그는 본체의 형상이요 영광의 광채시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반사하는 광채여야 하는데 각도가 틀리면 그 광채를 발휘할 수 없다.
보석을 깎아 물리는 일은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심판을 통해서 들어가야 변화가 되지 심판이 없이 고난을 통해서, 열심을 통해서 들어가면 자기 의가 생긴다. 그런 것들이 생겨서 결국 교회는 분열되고 분파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나쁜 것으로 교회가 분열된 것이 아니라 아주 그럴 듯한 것으로 분열되었다.
믿음이라는 것으로 분열되고, 성경의 교리라는 것으로 분열되며, 열심이라는 것으로 분열되었다. 나쁜 것으로 교회가 분열된 것이 아니다. 나쁜 것으로 분열되었다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런데 나쁜 것으로 분열된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것들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고전1:12)” 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3) 나무에 새김
세 번째는 나무에 새긴다는 것이 나온다. 나무에 조각을 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인격을 상징한다. 인성을 상징하고 인격을 상징한다. 그래서 새겨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떤 것이 육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맨 처음에 모세에게 하나님 말씀을 돌 판에 새겨 주셨다. 그 다음에 신약에 오면 심비에 새긴다.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3:3)”고 되어 있다. 새긴다는 것은 각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 했는데 기념한다는 것도 각인한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했다. 이것은 자기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각인되었다는 뜻이다.
베드로의 서신을 보면 그에게 “보배로운 피”가 각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9).” 십자가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떠났던 베드로에게는 그를 구속하기 위해 흘린 그 보배로운 피가 깊이 각인되었다.
사도 요한에게는 어린양이 깊이 각인되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서신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어린양의 혼인 잔치(계19:9)”가 나온다. 그에게는 예수가 어린양으로 새겨지고 각인된 것이다. 그리고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집(고전3:9)”으로 각인되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예수가 나에게 어떻게 각인되느냐? 그 문제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볼 때 얼마나 열심이 있는가, 얼마나 선을 행하는가, 얼마나 사랑이 있는가, 하는 각도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안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각인 되었는가 그것을 봐야 한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결국 기독교가 변질된 것처럼 변질되고 만다.
오늘날 유럽에는 예수는 없고 기독교 문화만 남아 있다. 자선 사업이 남아 있고, 선을 행하는 것이 남아 있고, 종교가 남아 있고,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에 각인된 그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 사람에게 무엇이 각인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서 만일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면 그에게 무엇이 각인되어서 나타나는 것인가를 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구속되고 변화되고 새겨진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건축된다. 신령한 것이나 천사나 능력이나 은사로 교회가 건축되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있거나 은사가 있으면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교회는 아니다. 교회는 구속되고 변화되고 새겨진 그 인성으로 건축되는 것이다.
성막의 모든 재료들은 이것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성막이 그런 재료들로 건축되어진 것처럼 교회는 이와 같은 인격으로 건축된다. 절대로 다른 것으로 건축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선교에 이득을 가져오기도 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능력을 행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믿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효과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을 해 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꼭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다. 그래서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어떤 신앙심이 될 뿐이다.
한 나라의 수준은 민도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수준도 교회를 구성하는 인적 요소에 의해서 좌우된다. 어떤 사람들로 교회가 구성되느냐에 따라서 그 교회의 수준이 좌우된다. 예를 들어 은사로 말미암아 교회가 구성된다면 교회는 은사 집단이 된다. 심지어는 그런 것들이 잘못 지나치게 되면 꼭 무슨 무당들이 모인 것처럼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귀신들의 집단처럼 그렇게 된다. 매일 꿈을 꾼 이야기나 하고 환상을 봤다는 이야기나 하고 입신을 했다는 이야기나 하고 이런 이야기만 할 뿐이다. 교제한다는 것이 그런 것 밖에 없다. 인간이 모인 곳이 아니라 영물들이 모인 것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나라의 수준은 그 나라의 민도에 달렸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수준도 그 교회의 구성원인 인격에 달려있다. 어떤 인격이 만들어지느냐에 따라서 교회의 수준이 결정된다. 교회의 간증은 교회의 수준에서 나오는 것이며 다른 간증이 나올 수 없다. 어느 교회는 병이 나았다는 간증만 하는데 그 수준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어느 교회는 풍파가 잔잔해졌다는 간증만 계속 하고, 어느 교회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봤다는 간증만 계속 한다. 이런 것들은 교회라고 할 수 없다.
4) 성막의 덮개인 천을 만들고 수를 놓음
네 번째로는 덮개를 만드는 재료를 만드는 일이다. 실을 꼬는 것은 실을 뽑아낸다는 뜻이다. 우리가 예전에 목화솜을 가지고 실을 물레에 잣아 내었다. 목화 그것은 실이 안 되는데, 그것을 물레에 잣아서 돌려내면 꼬아지면서 실이 된다. 그것은 쓸모없는 것을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냥 널려져 있는 것은 소용이 없지만 그것을 꼬아 놓으면 실이 된다. 그것이 원료가 되어서 큰 천이 되기도 하고 밧줄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실을 만드는 방적하는 일이다. 삼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 해서 실을 만들고, 누에고치도 그렇게 실을 만들고, 그렇게 해야 비로소 쓸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은 사람도 처음에는 목화솜과 같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으로 잣아지고 돌려지면 실로 뽑아져서 어디에 쓸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옛날에 시골에는 집집마다 물레가 있어서 돌렸는데, 한쪽에는 솜이 있고 한쪽에는 만들어진 실이 감아져 있었다. 실 꾸러기가 감겨져 있는 그것이 유용한 것이다. 인생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래야만 유용한 것이 되지 타고난 대로는 유용하게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천을 짤 것이다. 엮는 것이다. 엮는 것이 바로 건축이다. 실을 서로 엮어서 천을 만든다. 여러 개의 실이 동시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역어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므로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연합이다. 이렇게 연합이 돼야만 덮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성막 위를 덮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연합을 해야 덮개가 된다. 갈라진 것으로는 지붕을 덮을 수 없다. 지붕 방수가 어려운 것은 두 조각으로 지붕을 덮어 놓으면 아무리 잘 붙여 놓아도 그 사이로 늘 비가 새기 때문이다. 성막의 덮개는 한 덩어리로 되어 있다.
오늘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실로 만들어서 천을 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연합되어서 하나의 덮개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베로 짜여 질 때는 어느 쪽만 두껍게 짜여 져도 안 되고 어느 쪽만 얇게 짜여 져도 안 된다. 가늘고 고른 실이 제일 좋은 실이다. 가늘수록 더 좋은 실이다. 40수 30수 20수라고 하는데 그 굵기를 이야기한다. 속옷을 보면 40수는 아주 가늘고 고른 것을 이야기한다.
천은 넓게 펴서 덮기 위한 것이다. 연합이 되어야 그리스도가 덮어지고 한 덩어리가 된다. 연합이 안 되면 아무리 한 사람이 훌륭해도 안 된다. 어느 한 쪽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전선에서는 연합 전선이 중요하다. 전선이 같이 가야 한다. 왜 38선을 돌파해서 위에까지 못 올라갔는가? 동부전선에서는 한국군이 계속 올라갔지만 서부전선에서 미군들이 안 올라갔다. 연합 전선이 안 되어서 못 올라간 것이다. 그래서 지금 휴전선이 삐딱하게 되어 있다. 그 때 미군이 같이 올라갔으면 같이 올라갔을 것이다. 그런데 미군은 휴전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의 휴전선이 되고 말았다.
전쟁은 연합을 해야 되지 혼자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혼자 뛰어 들어가면 오히려 진이 파괴되어 구멍이 뚫리게 되고 그러면 적이 들어오고 만다. 나 혼자 잘났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나 혼자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 연합이 되어야 하고 같이 가야 한다. 함께 갈 수 있어야 하지 혼자 뛰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연합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늘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아무리 잘한다 해도 연합이 안 되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전열을 파괴하게 되고 만다.
그 다음에 수를 놓는다고 하였는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를 놓는다. 성막의 내면, 성막의 천정은 천에다 세 가지 색의 실로 수를 놓아서 덮게 되어 있다. 홍색은 생명을 상징하는 피의 색으로 구속을 상징하고, 청색은 하늘의 색으로 신성을 상징하며, 자주색은 왕이 입는 옷의 색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격을 의미한다. 이것으로 수를 놓았다.
수를 놓는 일은 아주 정교한 일이다. 예전에 여자들이 수를 많이 놓았는데 수를 놓으면 그 속에 박히는 것이다. 실이 천속에 박혀서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박힘으로써 아름답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를 놓으면 아름답다. 박히므로 아름답다. 우리가 천속에, 연합 속에 완전히 박히고 고정되어야 꽃도 되고 아름다움이 된다. 완전히 박히지 않으면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다.
자기의 어떤 것을 따로 주장하거나 자기만의 것을 따로 가지고 있으면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다. 빨간 것은 빨간 것으로 꽃을 만들어야 하듯이, 그렇게 해서 아름답게 수가 놓아져야 되는 것이지 나 혼자 잘났다고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교회는 정말 정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나만 잘났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색으로 수 놓여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동물의 가죽을 다룸
그 다음 다섯 번째로 동물의 가죽을 다루는 일이 나온다. 성막의 덮개는 해달의 가죽과 염소의 털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이것은 동물성 재료다. 가죽은 벗겨서 기름을 씻어내야 한다. 가죽을 다루는 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기름을 제거하는 것이다. 기름을 제거하지 않으면 가죽이 썩어 버리거나 털이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름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가죽을 염색해야 한다. 빨간 염소털(출25:5)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염색을 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동물의 가죽을 다루는 일인데 이것은 연단에 해당된다. 우리의 인격은 연단되어야만 쓸모 있게 된다. 연단되지 않은 것은 쓸모가 없다.
자연 상태로 있는 것은 어느 것도 하나님 나라에 쓸 수가 없다. 집을 지으려면 자연 상태의 나무를 가지고는 집을 지을 수가 없다. 자르고 깎아서 규격을 맞추어야 집이 될 수 있다. 그냥 그대로는 집이 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연단이다. 하나님의 집이 되려면, 하나님의 건축이 되려면 자기의 생각과 관계없이 건축자의 의도에 따라 다듬어져야 한다.
소나무가 자기 생각대로 있어서는 재료가 될 수는 없다. 낙락장송은 되지만 건축은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잘려져서 깎아지고 쪼개지고 다듬어져야만 집이 될 수 있다. 방주를 지을 때 판자로 지었는데 판자는 자연 상태의 통나무가 아니라 잘려지고 쪼개지고 다듬어진 것들이다.
자연적인 인성 속에도 좋은 것이 많다. 어떤 사람은 참 열심이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참 착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참 순한 사람도 있다.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자연적인 인성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가 나쁜 것들은 구별해 내기 쉽지만 좋은 것들은 구별해 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좋은 것도 연단되지 않으면 사용할 수가 없다.
에서와 야곱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에서는 천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소탈하고 남자답고 호인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성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연단을 받고 한 사람은 연단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야곱은 쓰임이 되었고 에서는 버림이 되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천연적인 상태, 자연적인 상태로는 하나님 나라에 쓰일 수 없다. 그것이 열심이어도 방해가 되고, 선한 것이어도 방해가 되며, 착한 것이어도 방해가 되고, 온유한 것이어도 방해가 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 나라를 세울 때는 모두 방해가 된다. 깎아지고 다듬어진 것만 유용하다.
이 원리는 대단히 중요한 원리이다. 천연적인 것은 쓸 수 없다. 동물의 가죽은 천연적일 때 훨씬 좋다. 해달의 가죽은 물속에 있을 때는 얼마나 안전하고 좋은 가죽인가? 그렇지만 성막의 덮개로 쓰이려면 그냥 쓰일 수 없고 반드시 연단해야 쓸 수 있다.
교회를 통해서 연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 건축이 될 수 없다.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교회 건축에 쓸 수 없다. 교회의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교회를 무시하겠다는 것이고, 무시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연단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건축이 되려면 잘라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냥 놔두면 그냥 쓸 수가 있는데, 건축을 하려면 아무리 좋은 나무라도 자르고 다듬어야 한다. 교회가 왜 자꾸 연단하는가? 그것은 건축에 쓰려는 것이다. 건축에 쓰지 않으려면 연단할 필요가 없다.
나 혼자 살면 나에게 뭐라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누군가 나에게 좋다고 하든지 싫다고 하든지 하는 것이다. 좋다고 하든지 싫다고 하는 것을 통해서 연단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무시해 버리면 그 사람은 천연적인 상태의 나무와 같아서 교회가 될 수 없고, 성막이 될 수 없다.
6) 향품을 만듦
여섯 번째는 향품을 만드는 일이다. 이것은 헌신에 해당된다. 향품은 기도하기 위한 것이다. 먼저 관유를 만들어서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향품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향단에다 향을 넣어서 불에 사르기 위해 필요하다. 이 두 가지 목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전부 헌신에 해당된다.
성막의 모든 기물에 전부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하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이 하나님께 헌신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사장의 의복과 온 몸에다 그것을 바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해서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향 가루를 만들어서 분향단에서 태우는 것은 마지막 기도에 해당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기 위한 기도인데, 이 기도는 헌신적인 기도를 의미한다. 내가 헌신해야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여지지, 내가 헌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보좌는 움직일 수가 없다. 하나님의 행정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려면 내가 제공되어야 한다. 내가 제공될 때 하나님이 움직이시지, 내가 제공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움직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손도 없고 발도 없어서 그러하다. 나의 손과 발이 제공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행정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향단은 최종적인 봉사이다. 제단에서 심판을 받은 그 불로 향단의 향을 태우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향단의 향은 결국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 비록 그것이 성소에 있는 것이고 휘장에 의해 가려져 있지만 다른 것은 모두 들어갈 수 없는데 그 향기만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 아무리 가려놓아도 연기만은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이신 지성소의 법궤를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된다.
나. 교회건축은 아주 정교한 일임
건축은 대단히 정교한 일이다. 왜 세공을 해야 하는가? 생명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정교하다. 생명을 다루어서 하나님의 건축이 되려면 세공 중의 세공이어야 한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모두 사람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 온다. 너무나 정밀하기 때문이다. 물건 같으면 손으로 깎으면 되는데,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 속이 너무나 정밀하기 때문이다. 정밀한 기계일수록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출생에서 성장과 헌신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다루어야 한다. 거듭나는 것은 반드시 십자가 안에서 나야 거듭나는 것이지 교리나 믿고 성경을 믿었다고 해서 거듭났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출생해서는 안 된다. 비슷한 것 같아도 다르다. 출생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개구리로 출생하느냐? 두꺼비로 출생하느냐? 처음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천지 차이다. 개울가에 보면 도롱뇽의 알과 개구리의 알이 비슷하게 생겨서 떠다니는데 나올 때 보면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출생했다, 거듭났다는 말을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하신 그 자리에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십자가에서 끝나고 다시 나지 않으면 참된 출생이 안 된다.
출생 자체가 잘못 되어 버리면 처음에는 모르지만 점점 크면서 달라져 버린다. 조그만 할 때는 토끼 새끼인지 쥐새끼인지 잘 몰라 구별이 안 되지만 크면 쥐하고 토끼하고 갈라져버린다. 오리새끼와 병아리가 다른 것이 별로 없지만 크면 클수록 달라져 버린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기독교는 그 시초를 잘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르지만 가면 갈수록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나왔다. 결국은 문화만 남는 기독교가 되고 말았다.
출생이 정상적으로 되어야 성장도 정상적으로 되고 성장도 제대로 되어야 헌신이 제대로 된다. 성장되지 않은 것은 헌신될 수가 없다. 제물은 그냥 마음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일 년 동안 키워야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일 년의 기간은 성장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성장이 제대로 되어야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 성장이 안 되면 드려질 수 없다. 교회 안에서 교회의 건축에 헌신되어지는 것은 나의 성장에 달려 있다. 자기가 성장한 만큼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데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위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각도를 바꾸는 것이다. 회개라는 것은 어디로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가다가 돌아서는 것이며 유턴 하는 것이며 각도를 바꾸는 것이다. 해를 등지고 가던 사람이 유턴을 하면 해를 보고 가야 한다. 그러면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회개는 각도를 바꾸는 일이다. 회개를 했다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계속 교정되고 개선되어야 한다. 유턴을 했다고 해서 그냥 바로 가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도 운전을 계속 주의해야 한다.
또 해를 등지고 가다가 유턴을 해서 해를 마주보고 가면 눈이 상해서 선글라스를 써야 한다. 그런 식으로 위치를 바꾼 다음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로 개선되고 그리스도로 교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를 통해서 교정되는 것이지 자기 혼자 교정되는 것이 아니다. 연합의 원칙에 의해서, 연합을 위해서 교정되는 것이며 연합 안에서 교정되어야 하지 자기 혼자 교정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 다음에 각인하는 일, 새기는 일이다. 다듬어진 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겼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무에 새길 때도 천연적인 나무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다듬어진 나무에 새겼다. 다듬어진 인성에 그리스도가 새겨진다. 아무 데나 새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아무 데나 전파한다고 다 새겨지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준비되어야 도장이 새겨지지 그렇지 않고는 새겨질 수가 없다.
사도 바울은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였다. 새겨졌다는 것인데 어떻게 새겨졌는가? 그 사람의 다듬어진 인성 안에 새겨진 것이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다듬어진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열심을 가지도록 다듬어진 사람이다. 거기에 예수가 각인된 것이다.
마지막은 연합이다. 덮는 것이다. 성막을 다 세우면 덮개로 덮어야 한다. 이 덮는데서 또 한 번의 건축이 생긴다. 실을 고르게 해야 된다. 균형 맞춰서 고르게 해야 된다. 우리의 인성은 고르게 되어야 한다. 고르게 되는 것은 어디서 심판을 받는가? 교회 안에서 심판받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불거진 것은 다 깎아내져야 한다. 실이라는 것은 우둘투둘한 부분은 깎아져야 한다.
옛날에 보면 실로 좋은 베를 짜려면 중간에 잘못된 곳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 그 위에 풀칠을 하고 베를 짠다. 고르게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짜여 져야 한다. 혼자 실이 아무리 좋아도 40수가 아니라 60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자기 혼자 실로 있으면 아무 가치가 없다. 짜여 져야 천이 될 수가 있다. 나는 누구하고 교회로 짜여 져야 덮개가 될 수가 있지 짜여 지지 않으면 덮개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위에 수놓은 것은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짜여 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워져야 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법궤를 덮을 수 있다.
이렇게 연단되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 헌신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성막 건축의 재료로서 그 안에 드려지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하나 판자가 되어서, 하나하나 기물이 되어서 그 안에 헌신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되어야 완전한 건축이 된다. 우리의 헌신이 완성될 때 그 때 성막은 완성된다.
정교한 일을 연구하게 하였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출31:2~5)”고 하셨다. 이 사람들로 인해 성막은 건축된다.
그 전까지 성막에 대한 계시가 나왔는데, 이제부터는 진짜로 성막을 건축하는 도면이 나와서 건축하는 일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그런 사람들을 뽑아야 한다. 결국 성막을 건축할 수 있는 기술자가 뽑아지게 되었다.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전3:10).”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건축은 지혜와 총명으로 입혀지고 채워진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건축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분별이나 총명이나 재주나 지혜가 없다면 엉성한 것을 만들어서 이상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건축은 생명의 건축이기 때문에 이 건축처럼 정교하고, 이 건축처럼 온전하고, 이 건축처럼 아름다운 건축이 없다.
이 건축은 살아 있는 건축이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2:5)”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산돌이신 것처럼 우리도 산 돌 같이 영적인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교회 건축은 살아 있는 건축, 인격의 건축이다. 교회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한 덩어리가 되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게 된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생을 목화처럼 그냥 버려져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선별하고 뽑으시고 부르셔서 짜고 염색하고 수놓아서 하나님의 집에 사용되도록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인생은 타고난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건축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손길을 통해서 우리가 다듬어지고 새로워질 때만 하나님의 건축에 필요한 사람들이 되기 때문에 어차피 우리는 제 2의 인생이 필요하고 다시 남이 필요하고 다시 성장함이 필요하고 다시 연단됨과 다시 교정됨이 필요합니다. 주의 손길이 우리 모든 사람에게 임하셔서 건축에 합당하고 유용하고 필요한 재료가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