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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사회건설을 향한 다짐
- 세 번째 철이 들면서 -
코뮤니스트좌파 활동가 오세철
들어가며
책의 부제로 「세 번째 철이 들면서」를 제목으로 하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지난 10년간 쓴 글들에 걸맞은 제목을 붙이는 것이 거창하더라도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사회건설을 향한 다짐」으로 정했다. 최종판단은 이를 읽는 이들의 몫이다.
부제인 「세 번째 철이 들면서」부터 시작해보자. 내 이름인 세철(世澈)의 원래 뜻은 인간 ‘세’, 통할 ‘철’이니까 인간을 통한다는 말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요즘 아재 개그로 세 가지 철로 해석하니 주위 동무들이 박장대소하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내 삶은 철이 드는 단계로 정리하는 것이 설득력 있다고 보았다.
나이에 대해서도 나는 회갑을 돐이라 부른 지 오래됐다. 한 바퀴 돈 나는 스무 살이라고 하고 이제 성년이 됐다고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이제 시작이라고. 지금까지 세계혁명운동에 함께한 동무들은 5년 전에 돐잔치를 함께했고, 돐이 안된 동무들에는 돐(시작)을 준비하는 햇수가 얼마 남았는가로 해석했다. 시작을 준비하는 날이 많을수록 새로운 시작인 혁명운동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1. 첫 번째 철이 들 때
내가 첫 번째 철이 든 것은 돐 때였다. 돐 되기 1년 전 2002년은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내가 초대 대표였던 「노동자의 힘」을 탈퇴한 후 「사회주의정치연합」을 제안한 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점부터 분명하게 “혁명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중도주의 세력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그전까지 비공개 영역에서 열심히 사회주의 운동을 해온 세력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의 원칙과 기풍을 바로 잡고 국제주의에 굳건히 서서 세계혁명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사회주의노동자연합」도 건설되었고, 사회실천연구소도 만들어졌다. 정년을 5년 남기고 명예퇴직하면서 시도했던 「맑스주의 대학원」은 실패한 실험으로 남았지만, 이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았다.
34년 몸담았던 대학 생활을 접고 철이 들어 본격적인 혁명적 사회주의(맑스주의) 운동의 현장으로 나가게 된 것은 그때까지 경험해왔던 사회주의 운동의 경험과 반성이 주춧돌이 되었고 너무 늦었지만, 결단할 때라고 생각했다. 1987년 이후 내가 몸담았던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역사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 협의회」(민교협)의 민중당 창당 개입, 그리고 탈당, 「민중회의」 설립과 1992년 민중후보 전술, 그리고 「민중정치연합」 건설, 1997년 좌파결집과 「정치연대」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 마지막으로 1999년 「노동자의 힘」으로 이어졌다.1) 이 과정에서 나는 자기 조직을 가지지도 않았고, 오히려 각 정파가 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왔다. 이른바 서클주의의 병폐 중 고질적인 활용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십여 년의 과정에서 홀로 남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혁명적 사회주의의 원칙을 지켜왔고, 그것이 조직의 원칙이 되지 않는 한 과감하게 조직과 결별했다.
이렇게 첫 번째 철이 들면서 2003년 나는 그 전까지의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형태로 사회주의 운동을 모색하기로 했다. 이는 두 가지 흐름으로 구분된다. 1990년 대안 언론으로 「대학정론」을 공동으로 창간했던 시절 「사회주의 정책연구소」를 구상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 후 연구소들도 이른바 정파들의 근거가 되는 연구소들로 분화되었고, 맑스주의자의 종합연구소의 건설을 방해하는 부정적 존재가 되기도 했다.
2004년 2월 연세대학교를 명예퇴직했다. 5년을 남기고 명예퇴직한 경우는 내가 처음일 것이다. 다른 교수들과 달리 대학에 있으면서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전면에 섰던 내 경우는 드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오래전에 학교를 그만두고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활용대상이 되고 방패막이가 된 것이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2003년 「노동 과정론」 , 「맑스주의 조직이론」 등을 연구한 제자들과 함께, 그리고 「사회주의정치연합」과 연관을 맺는 연구소 「사회이론연구소- 빛나는 전망」을 만들었다. 바로 이 연구소를 통해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를 연구한 연구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맑스주의자들이 얼마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지를 스스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최규진과의 만남은 사회과학과 역사학 만남의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 「사회실천연구소」(사실연)와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준비위」(사과대)의 기반이 되었다.
「빛나는 전망」 연구소의 내부 토론회는 연구소 회원뿐만 아니라 역사연구자 그리고 노동자평의회에 관심을 가진 활동가들이 함께했다. 다양한 토론을 통하여 유럽의 코뮤니스트 운동에 대한 역사를 폭넓게 검토하게 되고,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운동이 러시아 중심의 편향적 영향으로 왜곡되었는지도 인식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정치연합」과 다르게 「노동자평의회를 향한 전국모임」이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평의회주의, 평의회 코뮤니즘, 좌익코뮤니즘 등의 입장이 섞여 있었고 연구모임의 성격이 강했다. 「사회주의정치연합」은 자신을 정파로 인식하여 자기확대를 하는 정치조직이 아니었다. 「노동자의 힘」을 탈퇴하면서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매개 역할에 「사회주의정치연합」의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5년 3월 나는 비공개 활동에서 공개 활동으로 영역을 넓힌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에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을 제안합니다”라는 제안을 했다.2) 공개 영역에서 활동해왔던 조직에는 제안하지 않았다. 「노동자정치협회」(노정협)만 빼고는 모든 써클이 내 제안에 동의하고 그 대표가 개인 자격으로 모임에 참여했다. 이 모임이 기반이 되어 2008년 2월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이 발족하게 된다. 「사노련」 활동과 관련해서는 「다시 혁명을 말한다」를 참고하기 바란다.3)
사회실천연구소가 자리를 잡으면서 2007년 봄학기부터 사회과학대학원의 실험 강의가 시작되었다. 「사과대」와 관련해서는 「사실연」이 주도한다는 비난이 있었고, 이는 여러모로 정치적 의미가 담겨있는 반응이기도 했다. 강의과목은 충실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사노련」의 운영위원장으로서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사과대」의 책임은 김수행이 맡았다. 김수행과는 1977년 창간한 「현상과 인식」 때부터 교류한 지기이기도 하고, 2000년 초 「진보적 지성과 양심의 소리」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발표하고 토론하는 맑스주의 동지이기도 하다. 「진보적 지성과 양심의 소리」는 학계와 종교계의 원로들이 정세에 관한 토론을 통해 입장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는 내 제안에 따라 만든 원로모임이었다. 학계에서는 김진균, 김수행, 오세철 등이, 종교계에서는 홍근수, 문정현 등이 참여했다. 이 모임은 제일 먼저 「사과대」의 설립을 지지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2008년 봄학기부터 세 학기 정도 실험 운영을 한 후 「사과대」에서 나뿐만 아니라 김수행도 손을 떼게 되었다. 이 실험은 실패한 실험으로 평가한다.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우선 연구자들의 문제이다. 초기에 「사과대」를 준비하면서 소장 연구자들의 결단 없이는 그 설립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내가 볼 때 제도권 진입에 대한 환상과 욕망을 버리고 평생 맑스주의 교육에 헌신하겠다는 연구자는 별로 없다. 그러한 결단을 하는 연구자 없이 「사과대」의 실현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연구자들이 진정 분과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맑스주의자인가에 대해서도 큰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팀티칭 교과목의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양성의 대상이 되는 학생들의 문제였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수강한 학생들은 대부분 김수행의 「자본론」 강의를 듣는 학생이었고, 나머지는 자율주의에 관심이 있는 학생, 그리고 학생 시절 운동권 경험이 있으면서 소시민으로 사는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혁명적 맑스주의자가 되어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려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소수 학생은 「사과대」 운영에 개입하여 취지를 훼손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결국 맑스주의 교육이 맑스주의 연구에 기반을 두면서도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혁명적 실천과 결합하는 맑스주의자를 양성하지 않는 한 여전히 제도권 밖의 자위행위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아마 머지않은 미래에 맑스주의 종합연구소가 만들어지고,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세계혁명당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또는 목적의식적으로 맑스주의 교육기관이 설립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2008년 늦은 봄부터 여름 내내 주말이면 촛불 집회에 참여했고, 억수 같은 빗속을 새벽까지 뛰어다녔다. 주중에는 「소련은 무엇이었나」라는 글을 우리말로 옮기던 중이었고, 「좌익공산주의」는 원고를 거의 다 정리하여 책을 출간할 예정이었다. 가을학기 개강도 며칠 남지 않은 8월 26일 점심상을 차리던 중이었다. 초인종 소리가 나더니 남대문서 보안과 형사 다섯 명이 긴급체포영장을 보이면서 들이닥쳤다. 그럴 가능성을 열어놓긴 했지만, 예상보다 빨리 온 것이다. 보통 수갑을 먼저 채우고 휴대전화를 빼앗는다고 들었는데, 우리 집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종로서 유치장으로 가기 전까지 나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나는 사회실천연구소 최규진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변호사에게 연락해달라는 부탁했다. 문건과 서적, 컴퓨터를 압수했는데 내가 제일 안타까웠던 것은 아직 번역을 끝내지 않은 원고 「소련은 무엇이었나」의 압수였다.
옥인동 분실에서 조사받는데 남대문서 보안과장이 늦게 인사를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공 수사 30년 베테랑이란다. 그가 내게 한 말은 “저는 선생님을 잘 압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못 넘어갑니다.”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적어본다. 이미 질문내용이 정해져 있는데 모두 단답형 질문이었다. 사실에 관련된 질문은 주로 촛불 집회에서의 사진 채증과 위치추적, 이메일 압수수색 내용이었는데, 그것은 묵비할 필요가 없었고 사상적 입장이나 정치적 태도를 묻는 것은, 이미 「사노련」이 홈페이지에 모두 공개한 내용이라 대답하지 않고 모든 내용이 공개되어 있으니 그것을 보라고만 했다. 계속해 같은 형식이 되풀이되어 나는 수사관에게 작성요령을 말해주고 시간을 아끼자고 했다. 나는 시간이 많이 남았고 수사관은 일일이 같은 답변을 치느라 시간이 걸렸다.
종로서 유치장으로 민변의 김도형 변호사가 면회를 왔다. 김변호사 주례는 내가 봤다. 그는 99% 구속이 될 것 같다며 1% 혹시 양심 있는 판사를 만나면 구속영장이 기각될 수 있다고 하면서 구속적부심에서 노력해 보겠다고 했다. 국가보안법 사건을 많이 다룬 경험이 있는 변호사가 그러니까 나는 아예 나갈 생각도 포기했다. 따로따로 조사받았기 때문에 「사노련」의 다른 동지들을 만날 수 없었는데 영장실질심사를 받는 법원 대기실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동지들은 경력이 있어서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웃으며 편안해하니까 안심하는 듯했다.
영장실질심사를 담당하는 판사에게 나는 「사노련」이 공개적인 사회주의 운동단체이므로 수사도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하지 말 것을 지적하면서 불구속 수사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 위반 사실이 없음을 조목조목 부인했다. 현행 집시법 위반에 대해서는 악법이므로 개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외로 판사는 내 말을 제지하지 않고 귀담아들었는데, 마지막 그 내용을 잘 정리하는 것을 보고 혹시 영장이 기각될 수도 있겠다는 약간의 가능성을 보았다. 유치장에 돌아와 9시 뉴스까지 보았는데 심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포기하고 잠이 들었는데, 11시쯤 기각되었다는 전갈이 왔고 남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던 동지들이 종로서까지 와서 경찰서 앞에서 구호도 외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2차 구속영장 신청도 기각되었다.
검찰 조사가 시작되었다. 체포영장을 신청하고 나중에 공소장을 작성한 담당 검사는 이태승 검사인데, 알고 보니 연세대 85학번이었다. 경찰 조사보다는 더 체계적인 질문으로 짜여 있었다. 답변하지 않고 재판과정에서 말하겠다고 하니까 첫날은 1시간 만에 끝나고 조사 내용을 더 연구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검사에게 말한 핵심은 「사노련」 정도의 활동은 세계의 사회주의 운동조직의 일상적 활동이라는 것, 이러한 단체가 수만 개 있다는 것, 그리고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용어, 폭력혁명, 국가전복, 프롤레타리아혁명, 등등에 대한 올바른 해석, 의회, 선거와 의회주의, 선거주의의 구분이었다.
검찰 조사가 끝나고 2009년 4월 안에 기소가 결정될 것으로 보였다. 그 안에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신영철 대법관 사건, 천성관 검찰총장 청문회, 그리고 용산 투쟁, 쌍용자동차 투쟁이 있었고, 노무현의 죽음이 있었다. 검찰 진용을 새롭게 짜고 쌍용자동차 투쟁이 마무리된 8월 11일 검찰은 「사노련」 8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내 공소장의 일부를 발췌하여 몇 가지 소개한다.4)
1) 범죄사실
가. 신원동향 관계 (학 ․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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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11 민중당 창당 노원지구당 위원장
‧ 前 민중정치연합 대표
‧ 前 사회주의정치연합 대표
‧ 前 노동자의 힘 대표
‧ 現 노동자민중회의 고문
‧ 전교조 대학위원회 위원장
‧ 서울민중학교 교장
‧ 민중정치연구소 소장
‧ 14대 국회의원 출마 낙선
‧ 노동자평의회 서울회의 회원
‧ 現 사회실천연구소 연구위원
‧ 現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운영위원장 등
학, 경력을 통하여 확인된 바와 같이 지식인으로 국가안보를 위해 할 목적으로 하는
다수 단체를 결성 지도적 임무에 종사, 현재에 이르고
○ 연세대학교 경영대 교수로 재직하는 과정에서는
- ’87. 파시즘의 대중심리
- ’93. 맑스주의, 조직의 정치경제학, 한국사회변혁
- ’99. 21세기 자본주의와 한국사회의 변혁 등
안보위해 문건 다수를 도서출판, 판매를 통하여 한국사회변혁을 위한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 ’06.10월 말 사회주의정치연합 대표로 활동 당시 “국제공산주의흐름” “국제주의전망”
등 세계 사회주의 조직을 초청 서울회의를 개최하고 「“사회주의정치연합 (Socialist Political Alliance) SPA 표현은 극동에서 좌익공산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최초의 표현」이라고 주장하고 「한국으로부터의 국제공산주의 선언」제하를 발표, 국제공산주의자임을 천명하고
○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정치연합 등 5개 극좌 안보위해 단체를 구성, 총괄하면서 한국사회변혁을 획책하는 등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되어 확고한 정치 신념을 포지하고
○ ’07.10초 4개 극좌조직을 주도적으로 규합, “사회주의노동자연합”준비위원회 (약칭: 사노련)를 결성하고, 준비위원장으로 인선된 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노련” 조직노선인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당” “사회주의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선전 ‧ 선동하면서 동조세력을 규합하고
○ ’08.2.23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운영위원장으로 추대되어 조직을 총괄하면서 “맑스주의 대학” 건립을 준비하고 있는 자이다.
2) 국가변란 선전 ‧ 선동 목적 및 위법 인식 관계
○ 피의자는 남한 사회는 자본가들과 국가권력이 결탁하여 노동자계급을 억압 ‧수탈 ‧ 착취하는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자본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오직 혁명적 사회주의뿐이라는 신념 하에 사회주의 정치그룹과 혁명적 선진노동자 투사들이 결합, 혁명세력을 지도할 전위당으로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 후, 남한의 부르주아 통치기구를 철저히 파괴하여 노동자 국가권력을 수립,
사회주의(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고 북한 노동자계급을 지원, 북한 정권 타도 후, 통일사회주의 노동자 국가를 건설한 후,
국제사회주의 원칙에 입각, 국제적 연대로 세계 연속혁명을 통해 전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혁파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실천방법을 모색해오던 자이다. (이하 생략)
혁명적 맑스주의(사회주의) 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조직화 된 첫 번째 단계로서 「사노련」의 결성이 있었다면, 또 하나의 흐름은 노동자평의회 운동이었다. 2006년 10월 23일 서울과 울산에서 열린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는 그 만남의 국제적 표현이었다. 대회를 주관한 「사회주의정치연합」은 2002년부터 노동자평의회운동을 하는 동무들과 만나 토론하고 학습하는 과정에서 안톤 판네쿡의 「노동자평의회」를 번역 출간하고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었고, 「노동자평의회를 향한 서울 모임」과 「전국모임」에서 함께 했다. 코뮤니스트 혁명운동이 노동자평의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혁명당 중심의 사회주의 운동의 편향과 한계를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를 외국의 코뮤니스트좌파 정치조직들과 함께 공동으로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위협에 대항하여 한국으로부터의 국제주의자 선언」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선언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의 핵실험에 관한 소식에 이어, 서울과 울산에서 만나는 우리들, 코뮤니스트 국제주의자들은: 1. 또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의 새로운 핵무기개발을 비난한다. 핵폭탄은 제국주의자들 간의 전쟁에서 최종적인 무기이다. 그 유일한 기능은 일반 민간인, 특히 노동계급의 대량학살이다. ... 7. 자본주의 아래 인류를 엄습하는 야만주의,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핵 파괴 위협을 영원히 종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들의 전 세계적인 투쟁임을 선언한다.
노동자들에게 있어 수호해야 할 조국은 없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그 후 2008년 우리는 함께 좌익 코뮤니스트 그룹인 「LCG」(Left Communist Group)을 결성했다. LCG 규약에서 목적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과 투쟁을 위해 활동하며,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과 인터내셔널 건설을 목적으로 하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활동한다.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을 향한 운동, 인터내셔널 건설을 향한 혁명세력의 재조직화, 자본주의 사회관계 폐지(임금노동, 상품생산, 화폐)”라고 적시했다.
코뮤니스트좌파인 「좌익공산주의 그룹(LCG)」은 성원 일부를 「사노련」에 파견하는 결정을 했고, 조직결성에서 코뮤니스트좌파 그룹임을 분명하게 선언하면서 우리의 정치원칙과 사상의 기조를 관철하려 노력했다.
그 후 「사노련」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조직사건으로 기소되고 재판에 회부 되었으며, 장장 3년여의 재판을 거쳐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2~3년, 집행유예 2~3년이라는 판결로 확정되었다.
「사노련」이 혁명적 맑스주의(사회주의)와 세계혁명당 건설을 공개적, 대중적으로 선언하고 계급투쟁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실천은 새로운 시도로 한국 코뮤니스트 운동사에서 획기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사노련」은 서클 연합으로 출범했기 때문에, 결합하지 못한 서클과 혁명주의자, 그리고 중도주의 세력 속의 혁명인자들이 다시 한번 공동실천을 통해 한 걸음 전진하자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 결성 제안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며, 1년 반 동안의 공동실천은 결국 강령, 조직, 전술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종지부를 찍는다.
「사노위」와 분화된 세력이 「노동자혁명당추진모임」과 「노동해방」으로 각개약진하고 「사노련」의 잔존그룹은 「혁명적노동자당건설현장투쟁위원회」로 각각 실천하게 된 것은 혁명세력의 분열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적인 실천을 하면서 계급으로부터 검증받는 과정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12년 총선 선거 전술 문제로, 「노동자혁명당추진모임」에서 코뮤니스트좌파 흐름이 분화한 것은 ‘종파적 철수’가 아니라 ‘정치적 차이’의 결과였다. 그 차이는 혁명당 건설을 둘러싼 정치활동의 전망에 있었다.
2. 두 번째 철이 들 때
첫 번째 철이 들고 10년 동안 나를 포함한 코뮤니스트좌파 동무들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이른바 혁명당 건설과 노동자평의회 운동을 향한 혁명적 맑스주의 운동의 진전 속에 개입하고 동참하면서도 스스로 정립한 사상노선과 정치원칙으로 독립하여 실천하지 못했다는 한계와 아쉬움이 있었다. 물론 세계 코뮤니스트좌파 그룹들과 공동으로 국제대회를 열고 국제주의자들로서 역사적 임무를 실천하게 된 것은 다행이었고 보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LCG를 넘어서서 더 확고하게 우리를 규정하고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다짐하게 되었다.
바로 그것이 「국제코뮤니스트전망」(Internationalist Communist Perspective)의 건설이었다. 나를 두 번째 철들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수련회와 여러 차례 토론회를 거쳐 2012년 10월 12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창립대회를 열었다. 출범 문서에서 몇 가지를 인용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자본주의 위기가 눈앞에 진행되고 있으며,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부활 과정을 보고 있다. 파업과 거리 투쟁을 통해서 동지를 찾아내고,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서 새롭게 올라오는 대중의 잠재적 힘을 주목해야 한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다시금 혁명운동의 정치원칙을 강인하게 사고해야 할 때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반대하는 존재’가 아니라, 한국에서 ‘국제주의’ 관점에서 코뮤니스트 운동을 생성해나가려는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려고 한다.” “노동계급 스스로 통제하는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과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치가 결합하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하자!”
“코뮤니스트 정치원칙은, 한국에서 2005년 이후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 사노련, 사노위, 노혁추 과정에서 벌인 강령토론, 사상투쟁의 성과와 한계를 반영하면서 출발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맑스와 엥겔스의 코뮤니스트 연맹 이후, 1920년대 코민테른에 이르기까지 혁명적 맑스주의 연속 선상에 있었던 코뮤니스트들과 코뮤니스트좌파 분파의 공헌, 그리고 오늘날의 혁명적 맑스주의의 살아있는 연속성이자,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의 형성에 이바지할 코뮤니스트좌파, 국제주의 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5)
2012년 11월은 내가 열 살(우리 나이로 고희)이 된 날이다. 그야말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탄생의 축복을 받아 열 살이 되고, 제대로 두 번째 철이 들게 되었다. 그 축하 모임에 우리 동무들은 물론이려니와 몇몇 동무가 함께했다. 전체 사회는 신병현, 서평과 토론은 김수행, 김진업, 최규진, 시 낭송은 조성웅, 노래는 이민환이 나섰다. 이때 내가 낸 책은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와 「비판적 교양인을 위한 오세철 강의」였다. 첫 번째 철과 두 번째 철의 연결고리라고 할까?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은 그 이후 한글 명칭을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nternationalist Communist Perspective)으로 바꾸었다. ICP와 출범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은 기관지 「코뮤니스트」(Communist)이다. 기관지는 중요한 실천 중의 하나이다. 이번의 내 책에는 「코뮤니스트」에 실린 내 글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국내외 코뮤니스트좌파의 사상이론, 관점과 논쟁 그리고 상호비판, 그리고 세계 노동계급의 투쟁기록이 담겨있다. 창간호부터 17호까지 발간사 일부를 옮겨본다.
“애매모호한 진보 좌파, 노동 정치에 대한 허상을 깨고, 코뮤니스트의 이념과 원칙을 위해!” (2012년 10월, 「코뮤니스트」 창간호 발간사 중에서)
“우리는 수술대 위에 오른 자본주의 쇠퇴 상황에서, 과거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면서, 어떠한 사상이론이 필요한가를 계속 문제 제기하면서 발전시키려 한다.” (2013년 4월, 「코뮤니스트」 2호 발간사 중에서)
“이번 호는 故 남궁원 동지 추모특집으로 만들었다. 모두에게 아픔의 시간이었지만, 코뮤니스트를 만드는 동안 모두가 남궁원 동지가 되어 함께 만들었다.” (2013년 8월, 「코뮤니스트」 3호 발간사 중에서)
“박근혜 정권이 저물고 새로운 부르주아 야당 정권이 들어선다고 노동자의 삶과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4년과 촛불 투쟁의 경험은 오히려 야만의 자본주의를 넘어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유일한 목표가 코뮤니스트 혁명임을 증명하고 있다.” (2017년 4월, 「코뮤니스트」 5호 발간사 중에서)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은 실패했고, 당 건설 운동에 나섰던 세력은 노동자주의, 반자본주의 좌파당 수준으로 후퇴하고 있거나 선전그룹으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비록 소수일지라도 혁명주의 세력과 토론하고 실천하면서 코뮤니스트당 건설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 우리가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 길이 먼 것이다!” (2019년 5월, 「코뮤니스트」 9호 발간사 중에서)
“자본주의 쇠퇴기-코로나19 재앙의 시대에 「코뮤니스트」를 발행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코뮤니스트 정신을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제대로 부활시킬 것을 다짐한다.” (2020년 11월, 「코뮤니스트」 12호 발간사 중에서)
“창간 10주년을 맞이한 「코뮤니스트」 16호는 자본의 무자비한 공세와 다양한 위기에 맞선 세계의 노동자 투쟁과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을 담고자 했다. ...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국제적인 계급투쟁만이 노동자 희생과 지구 파괴를 멈출 수 있다!
생계비 위기, 사회적 참사, 전쟁, 기후재난... 자본주의가 원인이다!
혁명을 통한 코뮤니즘이 대안이다!” (2022년 11월, 「코뮤니스트」 16호 발간사 중에서)
“「창간 10주년 특별호」는 한국의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투사들에게 코뮤니스트좌파 이론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현실 투쟁에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운동을 전망하기 위해 발행했으며, 과거 기사를 엄선해서 엮었다. 앞으로 이 작업은 더욱 심화한 이론과 다양한 주제로 확대할 예정이다.” (2022년 11월, 「코뮤니스트」 특별호 발간사 중에서)
“「코뮤니스트」 17호는 여전히 민족주의, 선거주의, 조합주의 세력에 포위된 노동자들에 국제주의 원칙을 강조하고자 한다. 제국주의 전쟁과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계급투쟁 전망과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조직(세계혁명당) 건설의 기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계급전쟁으로! 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계급전쟁으로!” (2023년 5월, 「코뮤니스트」 17호 발간사 중에서)
이처럼 두 번째 철은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의 설립, 「코뮤니스트」 의 발행과 함께 들기 시작했고, 둘이 10주년이 되면서 나는 세 번째 철이 드는 스무 살이 되었다.
3. 세 번째 철이 들면서
성년이 되어 세 번째 철이 드니까 우리 나이로 80살이 되었다. 언제까지 살지 모르지만, 네 번째 철들 일은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 놓치지 않고 부여잡고 있는 맑스주의 사상이론과 혁명적 실천을 굳건히 지키면서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세계혁명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사람 이름에 주의(ism)를 붙이는 것을 나는 반대한다. 어떤 동무가 나에게 그러면 당신은 맑스에는 왜 주의를 붙이냐고 되물은 적이 있다.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사상을 최초로 말하고 실천한 사람이 맑스와 엥겔스이기 때문이다. 그 뒤를 따른 혁명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붙였던가, 아니면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이름을 내세워 부쳤던가 그것이 맑스와 엥겔스를 대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맑스주의자들이 「코뮤니스트좌파」라고 규정할 때 특정한 인물을 내세우지 않는다. 코뮤니스트 혁명운동을 한 유럽과 러시아 등의 나라에 공동의 정치원칙과 실천을 한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맑스와 엥겔스 이후 그 백 년 동안 이른바 코뮤니스트 혁명운동의 역사에서 혁명적 맑스주의 보편적 원칙을 전도시킨 스탈린주의의 반(反)혁명 세력, 초기의 보편적 원칙과 실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혁명 이후 보여준 민족과 당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국가사회주의(자본주의)에 대한 혼란을 보인 레닌주의, 그보다 더 원칙에서 벗어난 트로츠키주의, 수많은 자본의 좌파 세력들은 여전히 코뮤니스트 사회건설을 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실천을 오도하고 왜곡시키며 가로막고 있다.
한국에서 「코뮤니스트좌파」라고 규정하고 국제주의 세력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의 미래는 우리의 실천에 달려있다. 여기서 특별히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의 코뮤니스트좌파 세력 사이의 노선 차이, 실천 방법론의 차이에 대해 격렬하게 토론하고 차이를 넘어 연대하는 기풍을 키우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그것이 ICP의 구체적 계획과 실천으로 이어질 것을 약속하고 싶다.
그 보기로 2023년 11월 11일 노동자대회에 참가한 우리(ICP, NWBCW 한국위)의 전단에 있는 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글을 마치려 한다.
혁명을 통한 코뮤니스트 평화 세상을!
전쟁이냐 혁명이냐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자본가 정권 타도!
중동에서의 대학살에 맞서, 민족주의를 넘어 지배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을!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민족주의 반대, 대량학살 체제 타도!
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계급전쟁으로!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국제적 계급투쟁으로 전쟁을 멈추자!
<주>
1. 자세한 내용은 (오세철. 「다시, 혁명을 말한다」, 빛나는 전망 실천총서, 2009년 9월, 28~49쪽) 참고
2. 이 제안문은 위의 책, (오세철. 「다시, 혁명을 말한다」, 빛나는 전망 실천총서, 2009년 9월, 152~156쪽) 참고
3. 위의 책, 381~467쪽
4. 더 자세한 것은 위의 책, 402~413쪽을 볼 것.
5. 2012년 10월, ‘코뮤니스트 조직의 정치원칙을 세우며’ 「코뮤니스트」 창간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