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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본문: 요나서 4장
머리말. 종교개혁은 회개 운동이다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당에 중세 로마교회의 타락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면서 유럽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를 회복하신 것을 감사하면서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교회에 은혜 베풀어 주시길 간구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보통 개혁이라고 하면 급진적이고 기존 질서를 철폐하는 과격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집회를 하고, 기득권 세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개혁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개혁 운동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종교개혁을 이루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제1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자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신자들의 생애 전체가 참회하는 삶이 되기를 요구하셨다.” 루터는 신자의 삶의 본질이 회개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우리는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중세 로마교회가 잘못된 직분제도를 운영하고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있어서 참된 회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매주 미사에 참여하면 모든 죄가 용서받고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참된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타락한 예배를 개혁하고 교회의 직분을 개혁해야 했습니다. 종교개혁의 본질은 참된 회개로 나아가기 위한 회개 운동입니다.
오늘 우리가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예배를 드리면서 이 회개의 정신을 계승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배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교회 운영 전반이 모든 신자들을 참된 회개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삶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죄용서 받은 이 은혜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런 점들을 깊이 돌아보고 필요한 점들을 계속해서 개혁해 나갑시다. 그럴 때 우리는 종교개혁을 진정으로 기념하며 계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요나서 본문은 이런 종교개혁의 본질, 참된 회개가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요나 1-2장)
먼저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요나서 1-2장의 전반적인 내용을 통해 요나 선지자의 회개와 죄용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그들이 악하다고 외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고 도망갑니다. 니느웨는 동쪽에 있는데 서쪽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높으신 하나님의 눈길을 피해서 욥바로 내려가고, 배로 내려가고, 배의 가장 밑바닥으로 또 내려갑니다.
하나님께서 바다에 큰 폭풍을 일으키십니다. 이방인 선원들이 두려워 떨면서 폭풍의 이유를 찾기 위해 제비를 뽑습니다. 제비가 요나를 가리킵니다. 요나는 선원들에게 자신이 여호와로부터 도망갔다는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선원들은 폭풍을 피하기 위해 요나를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보내서 요나를 삼키도록 하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게 됩니다. 오늘날로 치면 고래와 같은 짐승이 아니었을까 짐작하는데, 뱃속의 위액 때문에 요나가 녹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곳에서요나의진정한회개가이루어집니다. 요나는하나님께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나를바닷속에던지셔서지금죽게되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께서이기도를들으시고반드시나를끌어올리실것입니다. 구원이오직하나님께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물고기에게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요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과 모든 인연을 끊고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자기를 살려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어떻습니까? 너무 얌체같지 않습니까? 자기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요나의 회개라도 하나님께서는 받아 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심판을 거두어 주시고 어려움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과거에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순간 요나가 진심어린 애통함과 후회로, 또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함으로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회개의 진정성을 인정해 주시고 받아들여주신 것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이토록 큽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나는 본문을 하나만 꼽자면 바로 출애굽기 34장 6절일 것입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십계명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지금 모세가 시내산에 남아서 여러 계시들을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시내산 아래에서는 아론과 나머지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우상을 여호와라고 부르면서 뛰고 소리지르면서 우상숭배 제사를 벌였습니다. 마치 오늘날로 치자면 결혼식이 막 끝나고 축하파티를 하고 있을 때 신부가 몰래 빠져나가서 옛 애인과 불륜을 저지른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을 다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간절한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며 다시금 사랑으로 품어주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 구절입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혹시 이 자리에 죄의 문제로 괴로워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비참한 상황 가운데 고통받고 후회와 자책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분들이 계십니까? 혹시 죄를 용서받고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하지만 계속해서 다시금 무너지고 미끄러지고, 왜 나는 변화되지 않는가 자책하고 낙심하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다시금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와 비참함보다 더 큽니다. 요나의 불순종을 용서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죄악이 계속해서 반복될 때도, 지금 이 순간 드리는 우리의 눈물의 회개를 그 자체로 진실된 것으로 받아 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주 크고 진한 그림자를 우리에게 드리웁니다. 예수님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그 어떤 죄의 어두움도 모두 가려지고 감춰집니다. 면목 없지만, 다시 십자가 그늘 아래로 나아갑시다. 그 그늘 아래 피합시다. 은혜와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로 이 시간 다시 한 번 더 나아갑시다.
신자들의 평생의 삶은 계속해서 회개하는 삶입니다. 계속해서 죄 짓더라도 계속해서 회개하면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죄에서 떠나 말씀에 순종하게 해 달라고 주님 은혜를 간절히 구합시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다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조금씩 조금씩 정결하게 변화시켜 가실 것입니다. 이 말씀 의지하여 계속해서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하길 원하십니다(요나 3-4장)
지금까지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두 번째 말씀을 듣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용서하신 뒤에 다시금 사명을 맡기십니다.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두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 뜻에 순종해서 니느웨로 갑니다.
그런데 그 순종이 아주 철저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니느웨는 그 크기가 3일쯤 걸어야 다 돌 수 있는 큰 성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루만 걸어가며 외칩니다. 성 중에 3분의 1 정도에만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말도 매우 간단합니다. “40일 후에 니느웨가 뒤집어진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금식을 외칩니다.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모두가 베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이 소식을 듣고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습니다. 사람은 물론 짐승들과 가축들도 모두 금식하고 베옷을 입게 합니다.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모든 폭력을 거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회개를 보시고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정된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당장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단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빈 것입니다. 이후에 니느웨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결국은 멸망당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니느웨의 회개는 진실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회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누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그 순간에는 그 사과를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받아 주어야 합니다. “너 또 그럴 거잖아” 하면서 미래를 미리 예측하면서 지금의 사과를 진실된 것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말씀을 선포해서 큰 구원이 임했으면 우리 생각으로는 참 기쁘고 보람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오히려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고향에서 부르실 때부터 이럴 줄 알았다고 합니다. 자기가 처음에 도망간 것도 사실은 니느웨가 구원받는 게 싫어서였다고 속내를 털어 놓습니다. 하나님 뜻을 거스르기 위해 도망갔다고 합니다.
니느웨는 당시 중동의 패권국가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앗수르는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다른 민족들을 정복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공격하는 중이었습니다. 즉 요나는 지금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가 죄 용서받고 구원받는 게 싫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1장 9절에 선원들에게 자기 민족을 히브리인이라고 밝히면서, 히브리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장에서 회개 기도할 때도 성전에 대해 두 번이나 언급하면서 자신이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드리는 언약 백성에 속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나는 지금 왜 이방 민족 니느웨를 구원해 주셨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애가 크신 분”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약간 냉소적으로 따지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인애, 히브리어로 헤세드는 언약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언약적 사랑이 아닙니까, 왜 언약 백성이 아닌 니느웨 사람에게도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까 하고 따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을 살리시려면 자신의 영혼을 취해 가시라고 합니다.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은 죽기보더 더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성냄이 옳으냐?”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자신의 악함을 스스로 깨닫도록 해 주시려고 어떤 상황을 만들어 가십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의 동쪽 편으로 올라갑니다. 초막을 만들어서 그림자를 만들고 그 아래에 앉아서 여유있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려고 합니다. 아마 자기가 이 정도 따졌으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악행을 심판하실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마 큰 메뚜기나 흑암, 아니면 지진이나 불벼락과 같은 자연 재앙이 내릴 것을 기대한 것 같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덩굴을 급속도로 자라게 하셔서 요나의 머리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십니다. 요나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 같은 상쾌한 느낌이 들면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음날 새벽에 벌레를 보내서 덩굴을 갉아먹게 하십니다. 덩굴이 다 말라 비틀어졌습니다. 태양이 떠오를 때 무더운 동풍을 보내셨습니다. 더 이상 그늘이 없으니 햇빛이 요나의 머리에 곧바로 내리쬐었습니다. 요나는 탈진해서 하나님께 처라리 죽여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덩굴 때문에 화냄이 선하냐?” 이것은 일종의 비유적인 가르침입니다. 요나는 저절로 하룻밤만에 나고 자란 덩굴도 이렇게 불쌍히 여기고 아낍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12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과 많은 짐승들이 있습니다. 그 성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은혜를 베푸셔서 번성하게 하신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고 아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니느웨 사람들은 좌우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3장 9절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에게 심판을 거두실지 누가 알겠는가” 하면서 돌이켰습니다. 단 하루 말씀을 배웠지만 그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확실하게 깨닫고 회개하며 주께 매달렸습니다.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하나님께서 지혜 주시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습니다.
반면에 4장 2절에서 요나는 많이 아는 것 같습니다. 선지자로서 성경의 말씀을 잘 암기하고 있다가 인용합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 말씀 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닮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이방인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잔인함이 그 속에 있었습니다. 말씀의 원칙을 칼처럼 휘두르면서 죄인은 심판받아 죽으라고 저주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언약 백성들 뿐만 아니라 모든 죄인을 향한다고 알려줍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 다니는 성도들과 그 가족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 관악 지역과 서울경기 지역에 사는 모든 주민들, 하나님을 모르고 악을 행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기 쉽습니다.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너그럽고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은연중에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화를 내면서 반드시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회개와 죄용서의 은혜가 사라지고 교만과 정죄가 가득한 재판정와도 같은 곳이 될 것입니다.
요나와 니느웨 중에 누가 참으로 어리석습니까? 죄인을 향해서 화내고 미워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그럽게 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죄인들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악인들과 원수들이 회개하고 죄용서 받도록 기도하고 도웁시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그 섬김을 사용하셔서 악인들도 구원받고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3. 죄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을 따라 다른 죄인들을 불쌍히 여깁시다
마지막 말씀을 듣겠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고 이방인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며 회개의 열매를 맺읍시다.
마태복음 9장 12-13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요나와 똑같은 논리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바리새인 같이 모범적이고 경건한 사람들만 예수님과 함께 어울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러분은 스스로 건강하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혹시 여러분 주변에 정말 죄인이고 구제불능이다, 저 사람은 정말 가망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죄인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사실 스스로 의롭고 문제없다,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 진짜 큰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영적인 환자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없는 죄인입니다. 부디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으시고 회개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2장 39-41절에서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을 인용하십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있다가 다시 올라온 것 같이 예수님도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 요나의 표적은 단지 예수님의 부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더 깊은 메시지가 문맥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을 인용하신 것은 마태복음 12장 앞부분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민 것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마음 속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이 당시에 니느웨와 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지만 영적으로는 이방인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소망 없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요나보다 탁월하고 능력있는 선지자입니다. 불순종한 요나와 달리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건성건성 말씀을 전한 요나와 달리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증거하셨습니다. 죄인을 미워하던 요나와 달리 죄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능력있는 사역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먼 데 있던 죄인들이 회개하고 죄용서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니느웨의 회심과 같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이 요나의 표적은 죄인을 회개케 하시는 예수님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증거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들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버리셨습니다.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는 그 죄의 무게와 결과를 대신 감당해 주셨습니다.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쉽고 가벼운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랑입니다. 죄인을 위해 세상의 모든 모욕과 수치, 불명예를 감당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께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으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얻은 자입니다. 우리는 요나의 모습을 보면서, 또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중심적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런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무능한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용서해 주시고,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세워 가십니다.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요,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회개하고 용서받은 자로서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회개의 열매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나는 내 주변에 가족들과 직장 동료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며 살아갑니까? 죄인들에게 화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본받아서 그들의 죄를 함께 짊어져 줄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어리석은 자로구나. 참 불쌍한 사람이다. 내가 예수님을 가르쳐 줘야겠다.” 이런 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나와 별 관계가 없는 죄인들을 무심하게 대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무관심도 사랑 없음의 또다른 표현입니다. 소망 없어 보이는 이 세상의 수많은 불신자들도 복음을 듣고 회개해야 할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입니다. 이 세상의 악함에 가슴아파 하면서, 회개의 기회를 허락해 주시길 함께 기도하고 우리 교회를 통해 복음이 더욱 왕성하게 전파되도록 도웁시다.
맺음말. 주님을 의지하여 먼저 회개하고 다른 죄인들도 회개하도록 도웁시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세 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죄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을 따라 다른 죄인들을 불쌍히 여깁시다.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죄인에게 화내는 것이 옳으냐?” 하지만 이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나오지 않습니다. “열린 결말”로 끝납니다. 이러한 결말은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내가 먼저 회개하고, 다른 죄인들도 회개하도록 돕는 일이 종교개혁을 계승하는 우리 각자와 이 교회에 맡겨주신 주님의 사명입니다. 부디 주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받아 주시고, 우리의 기도와 헌신을 사용하여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끝)
어린이 말씀
오늘이 무슨 주일일까요? 혹시 아는 사람? 맞아요. 종교개혁 기념주일이에요. 지금부터 한 500년쯤 전에 유럽에서 교회를 개혁하는 운동이 일어났어요. 루터, 칼빈, 이런 사람들 이름 들어 봤어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지도자들이에요.
예전에 중세 교회에 문제가 많았어요. 성경 말씀은 별로 안 가르치고, 여러 예식들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교황과 사제들이 성도들 위에서 높임을 받으면서 헌금으로 자기 재산을 불렸고요. 구원 받는 것이 사제들의 손에 달렸다는 식으로 아주 교만하게 행동했어요. 그러니까 성도들 입장에서는 사제들 눈치만 보고, 정작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배하지 못하게 된 거에요.
종교개혁에서 바로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한 거에요. 사람은 다 죄인이다. 오직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라. 이렇게 바로잡았어요.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서 성경을 잘 배우고, 예수님을 믿으면서 즐겁게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종교개혁 때문이에요. 참 고맙죠?
오늘 성경에서는 요나가 나오는데요. 이 요나의 모습이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정신을 잘 가르쳐 줘요. 그건 바로 회개에요. 요나가 선지자였는데, 참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선지자였거든요.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해라, 하셨는데 싫은데요? 전 니느웨 싫어하는데요? 하면서 안 갔고요. 동쪽으로 가라 하니까 오히려 서쪽으로 도망갔어요.
이렇게 하나님 말씀 안 들으니까 하나님이 폭풍을 보내서 요나를 혼을 내셨거든요. 물고기 뱃속에 앙 잡아먹혔어요. 그러니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랬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살려 주셨어요. 물고기가 퉤 하고 땅에서 요나를 뱉어냈어요.
이게 바로 회개에요. 진심으로 잘못을 빌고 용서해 달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세요. 여러분도 혹시 잘못한 게 있나요? 그러면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회개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거에요. 혹시 부모님께도 잘못한 게 있으면 회개하세요. 부모님도 여러분을 용서해 주실 거에요.
이렇게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중요한 특징이 있어요. 바로 나에게 잘못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거에요. 형제자매나 친구들이 잘못할 때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는 거에요. 왜냐하면 나도 옛날에 다 잘못해 봤거든요. 그 마음을 다 알고 이해하니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해 줄 수 있는 거에요.
우리 어린이들이 앞으로도 하나님과 부모님께 많은 사랑을 받길 바라요.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주변에 다른 잘못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는 우리 어린이들이 되길 바라요!
설교개요
결론: 먼저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다른 죄인들을 불쌍히 여깁시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제1조
“우리의 주님이자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신자들의 생애 전체가 참회하는 삶이 되기를 요구하셨다.”
1.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요나 1-2장)
출애굽기 34:6-7 (구약 134쪽)
2. 하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하길 원하십니다(요나 3-4장)
3. 죄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을 따라 다른 죄인들을 불쌍히 여깁시다
마태복음 9:12-13 (신약 12쪽)
마태복음 12:39-41 (신약 19쪽)
로마서 5:8 (신약 245쪽)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질문>
1. 오늘은 무슨 기념주일인가요? 종교개혁의 계기가 된 사건이 무엇이었나요?
2.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이 무엇인가요?
3. 요나는 왜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에 대해 화를 내었나요?
4.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고난받으시고 목숨을 바치셨나요?
5. 우리는 다른 나쁜 사람을 볼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개인 묵상과 소그룹 토론을 위한 질문>
1. 나는 어떨 때 화를 냅니까? 최근에 화를 냈던 경험 또는 화가 났지만 참은 경험에 대해 서로 나누어 봅시다.
2. 예수님께 나의 죄를 용서받은 감격이 있습니까? 죄 용서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경험을 돌아봅시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주님을 찬양합시다.
3. 내가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어야 할 죄인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을 참된 회개와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