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다
언제나 어느 때나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아무런 고통이나 근심도 없다. 만약 어떤 문제나 걱정거리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겉에 드러난, 나를 치장하고 있는 껍데기에서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것은 갑옷처럼 단단하며, 혹은 어떤 유니폼처럼 그것을 입고 있는 나를 규정짓고 내가 바로 그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 껍데기는 이를테면 내 성격이라고 해도 좋고, 내 몸이라고 해도 좋고, 내 느낌, 욕구, 생각, 견해, 집착일 수도 있다. 나아가 내 직업, 외모, 경제력, 지위, 학력 등일 수도 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나’라고 규정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모든 문제며 근심 걱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이와 같은 껍데기들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이 곧 ‘나의 괴로움’이라고 착각하고, 그런 괴로움들에 일일이 관여하고 결박당하며 꽁꽁 묶여 꼼짝달싹 못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내가 누구냐고 했을 때 나의 성격을 내세우곤 하지만, 성격이 어찌 결정적인 나일 수 있겠는가. 성격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가 살아 온 환경 속에서, 또 나의 경험 속에서 인연 따라 만들어 진 것일 뿐이다. 만약 다른 경험과 환경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나의 성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또 언제라도 지금의 내 성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매 순간 순간 성격은 변화에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언제나 성격은 현재진행형이며 종착역에 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어느 한 순간을 선택해 그것이 ‘나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 그것을 나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몸뚱이가 나인가? 이 몸 또한 다만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어제의 내 몸과 내일의 내 몸은 전혀 다른 몸일 수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이 발견해 낸 진리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느낌들이 나인가. 느낌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변한다. 어떤 특정한 경험 속에서 느낌이 규정되어지기도 하고, 똑같은 조건 속에서도 느낌은 달라질 수 있다. 욕구도, 생각도, 집착도, 관념이나 견해들도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지, 그것들이 나일 수는 없다. 인연 따라 욕구도 집착도 생겨나고, 인연 따라 온갖 생각이나 관념, 견해들도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제 있던 욕구가 사라지고 오늘은 또 다른 새로운 욕구가 생겨나기도 한다. 어제의 깨지지 않을 것 같던 관념들도 새로운 어떤 조건에 의해 완전히 깨지면서 전혀 새로운 관념과 신념에 의해 무장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외모나 경제력, 직업, 지위, 명예 등이 나일 수도 없다. 그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조건 따라, 상황 따라 끊임없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생성소멸을 반복할 뿐이다. 거기에 어떤 변치 않는 결정적인 ‘나’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껍데기를 ‘나’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내가 괴롭다’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어떤 괴로워보이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지, 나의 삶이 괴로운 것은 아니다. 거기에 주체나 주제자는 없다. 다만 삶이라는 어떤 영화 한 편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 방송중에서
첫댓글 삶이라는 영화 한 편이 상영되고 있을 뿐이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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