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든 잔혹동화
---반칠환의 「즐거운 동티-멸종의 기쁨」
배옥주
당산나무를 베고 마을길을 넓혔어. 산을 깎아 산신의 거처를 헐고, 바다를 메워 해신의 궁전을 없앴어.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리면 더 풍요로워진다는 걸 알았어. 별처럼 꽃처럼 많던 신들이 실업자가 되었어. 사람의 땅에는 백 년 만에 처음이라는 축제가 날마다 벌어지고 있어. 얼음 땡! 수만 년 술래였던 빙하가 풀리고, 낮은 자존의 바다가 높아져 뭍으로 넘치고 있어. 투발루 총리가 연설하며 두 발로 힘을 주니 섬 행세 하던 작은 섬이 가라앉고 있어. 목마른 아라비아 사막에 눈이 내리고, 불모의 시베리아 영구동토에 꽃이 피고 있어. 우리가 만든 동화의 세계야. 최후의 한 생명까지 피안으로 건네주는 뗏군 호모 니르바나스여, 건배!
- 반칠환, 「즐거운 동티-멸종의 기쁨」(『애지』 2024년 봄)
벚꽃 없이 벚꽃 축제가 개막됐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지레 피었던 꽃나무들이 까무러친 봄의 문턱. 폭설에 갇힌 산사에선 숨어버린 꽃을 찾느라 풍경소리만 부산하다. 봄은 연일 재촉하는 비에도 주춤주춤 삼월을 지나고 있다. 어떻게든 봄은 오고야 말겠지만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는 기후 위기의 시대. 우린 어쩌면 혹서와 혹한의 계절만을 견뎌야 할지도 모를 전지구적 비상사태를 맞고 있다. 지구온난화의 경고를 무시하며 살아온 교만하고 오만방자한 인간을 향해 벼랑 끝의 자연이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아메겟돈’에서 22,000mile/sec의 속도로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소행성처럼.
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기후 위기를 염려한 지 오래. 극단적인 이상기후를 앞세워 역습을 감행하는 자연의 위력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가 되었지만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일상이 이어진다. 문명의 편의가 안겨주는 안락함에 젖어 환경오염을 애써 외면하는 우리에게 생태적 감수성의 확장이 필요한 지금, ‘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는 반칠환 시인의 「즐거운 동티-멸종의 기쁨」이다. 「즐거운 동티」는 무분별한 개발로 파괴된 자연과 숨가쁜 생태계의 위태로운 현상을 시종일관 아이러니한 조소의 어조로 끌어가는 시의적절한 시다. 그렇다면 ‘시’는 이토록 잔혹한 동화의 세계를 어떤 목소리로 들려줄까.
자연개발과 파괴, 인간문명의 폭력성은 오래전부터 시인의 관심을 받는 대상이 되어 왔다. 박남수의 「새(신태양, 1959. 3.)」나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범우사, 1969.)」 등이 있었고, 이형기의 시 「석녀들의 마을(문학사상 1992. 7.)」에서는 생태환경주의자이자 녹색운동가였던 ‘레이첼 카슨(1962년 전 세계에 살충제 남용의 위험성을 널리 알린 『침묵의 봄』을 펴냈다)’여사가 벌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 파괴된 자연현상 앞에 새파랗게 질려있음을 직설화법으로 토로한다. 가을에 사과가 열리지 않을 것을 염려하지만 수입하면 그만이라는 반어적 어조로 자연 파괴의 심각성을 에둘러 강조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인들은 자연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문명에 대해 경고의 화두를 던졌다. 근래에도 무분별한 개발로 파괴되는 환경문제에 참여하는 리얼리즘 시들이 발표되고 있다. 한 단체에서는 문학이 지닌 예지의 역할을 잊지 않고 기후시집을 출간했다. 참여한 시인들은 난간에 매달린 지구의 위태로움을 통해 공존의 가치를 상실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려는 도전을 감행했다. 시는 감동과 즐거움(재미)을 주는 문학 장르이지만, 문학 효용론의 차원에서 사회적 문제나 고통을 시의 언어로 전달하고 질문하는 것 또한 시인의 책무라 할 것이다. 기후 위기에 대해 시인들이 보여준 일련의 움직임은 긍정적인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반칠환의 「즐거운 동티-멸종의 기쁨」는 표제에서부터 지구에 들이친 재앙을 돌아보게 만드는 짧지만 강한 힘을 가진 산문시다. 촌철살인의 함축으로 긴장의 여운을 깊게 만드는 시인의 미학적 시편들을 접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새해 첫 기적」이 그렇고, 「삶」이 그렇다. “벙어리의 웅변처럼, 장님의 무지개처럼, 귀머거리의 천둥처럼(「삶」)” 이라는 삶에 대한 미학적·철학적 인식의 확장은 시를 대하는 이에게 사유의 세계를 맘껏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속도에 대한 명상을 통해 문명 비판과 생태적 각성을 촉구했던(「웃음의 힘」) 터라, 이번 애지가 선정한 「즐거운 동티」는 그 연장선에 있는 문제적 시라고 할 수 있다.
가치 있는 시는 유기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오래 사유했을 때 창작할 수 있다는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말처럼, 감수성의 자질을 타고난 반칠환은 잘 훈련된 사색의 정신적 습관에 의해 감정의 분출이나 심오한 사상 또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시인이다. 특히 이번 시 「즐거운 동티-멸종의 기쁨」에서는 시인의 감각적 체험에서 비롯된 사상이나 정신적 깨달음을 통해 시를 읽는 사람을 서로 묶어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반칠환의 「즐거운 동티-멸종의 기쁨」은 보편적 진실성 확보로 깨달음의 목적성을 지닌 시이지만 “우리가 만든 동화의 세계”라는 반어의 진술로 실소失笑를 끌어낸다.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라는 반어를 통해 문제점을 제기하고 화자가 전하고자 하는 비판과 각성의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당산나무를 베고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는 짓을 감행하면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아이러니한 경고가 섬뜩하다. 북극의 온난화로 수만 년 술래로 꼼짝 않던 빙하가 설쳐대고, 낮은 자존의 바다가 뭍으로 침범하는 21세기. 해빙으로 육지에 발이 묶인 북극곰은 사냥을 못해 기아 위기에 직면했다. 북극의 얼음이 줄어드는 만큼 멸종위기는 당겨지고 있어 북극 생태계의 위험신호가 켜졌다. 사하라사막에 내린 눈이 한낮까지 녹지 않고 영하권을 유지하거나 영구동토인 불모의 시베리아에 꽃이 피고 툰드라가 사라지는 것뿐만이 아니다. 당장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섬나라 투발루는 해수면이 매년 4mm씩 상승해 9개의 섬 중 2개가 가라앉았다. 지구 가열화의 진행속도로 볼 때 2100년엔 국토 전체가 수몰된다는 끔찍한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투발루 총리가 연설할 때마다 “작은 섬이 가라앉”는다니, 나라를 지키기 위해 총리는 허공을 딛고 연설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모아이석상으로 알려진 이스터섬 또한 고고학자의 유적발굴로 인한 문명파괴로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
즐거운 동티는 반어적 장치를 활용해 한방 제대로 뒤통수를 치는 시다. 지신地神이 노해서 재앙을 당하는 동티가 어찌 즐거울 수 있으며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멸종이 어떻게 기쁠 수 있나. 반칠환의 시 한 편이 주는 효용성은 깨달음과 환기다. “우리가 만든 동화의 세계”는 잔인한 잔혹동화라는 진실을 일깨워준다. 카우아이섬으로 떠밀려온 향유고래 사체에서 그물과 낚싯줄, 플라스틱을 보며 잠시 놀라다가 이내 잊어버린다. 우리는 환경파괴가 울리는 경종에 귀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써내려가는 잔혹 동화는 멸종과 멸망의 이야기다. “최후의 한 생명까”지 깨달음의 세상으로 건네주는 뗏군은 열반에 든 “호모 니르바나스”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화자는 뼈아픈 건배제의를 한다. 최후의 한 생명까지 크레바스 안으로, 더러는 물구덩이·불구덩이 속으로, 갈라진 땅속으로 사라질 지도 모를 그 곳은 피안이 아니라 차안임을 이미 알고 있다. 백년 만에 처음이라는 몰락의 축제가 날마다 벌어지는 사람의 땅에서 해탈하고 열반에 들지 않고서야 어찌 디스토피아가 유토피아로 둔갑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만든 동화의 세계에”서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축제는 미열을 훌쩍 뛰어넘어 고열난로로 켜고 사는 우리 앞에 열리는 혼돈의 파국이다. 생태계 파괴를 일삼고 자연의 비명을 묵과하던 이들은 단두대를 펼친 자연의 심판대에 올라 뎅겅, 언제 목이 잘릴지도 모를 일이다. 동티의 징후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인간들이 봉착한 차안의 세계. 즐거운 동티와 멸종의 기쁨에 젖어 날마다 즐기는 피의 축제를 기억해야 한다.
금기를 어긴 즐거운 동티라니!
약력
배옥주
2008년 《서정시학》 시 등단
2022년 《애지》 평론 등단
시집 『오후의 지퍼들』, 『The 빨강』
연구서 『이형기 시 이미지와 표상 공간』
평론집 『언어의 가면』
《부경대학교》 문학박사, 《애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