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억 년의 역사를 추정할 만한 지질층으로 이루어진 그랜드 캐니언. 지구의 나이테가 깊게 새겨진 거대한 땅덩어리를 한 번에 둘러보는 건 불가능하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를 뛰어넘는 광활한 자연을 실감하며, 서쪽 언저리에 작은 발자국을 남겼다.
이렇다 할 설명 없이 ‘어디의 그랜드 캐니언’이라는 표현이 종종 쓰인다. 인터넷 검색창에 그랜드 캐니언을 검색해보면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 ‘하와이의 그랜드 캐니언’, ‘캐나다의 그랜드 캐니언’ 등 진짜 그랜드 캐니언보다 가짜 그랜드 캐니언에 관한 이야기들이 페이지를 점령하고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알 정도로 유명해서, 굳이 묘사하지 않아도 그저 ‘그랜드 캐니언’ 자체가 형용사가 되고 부사가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진짜 그랜드 캐니언을 마주할 때야 깨닫는다. 엄청나게 거대하고 광활한 자연이 거칠고 극적인 모습으로, 지구의 역사를 제 몸에 깊게 새기고서 대지 위에 서있으니. 사람들이 자꾸만 어딘가를 ‘그랜드 캐니언’에 빗대는 건 그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대단한 감탄을 위한 최선의 표현 방법일 테다. 하지만, 그 표현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진짜 그랜드 캐니언에 다녀온 이들뿐이다. 사진으로도, 또 글로도 묘사할 수 없는 직접 봐야만 느낄 수 있는 자연의 힘은 오로지 그곳에만 존재하므로.
협곡 위로 1200미터 공중에 떠있는 스카이워크. 아찔한 전망대를 걷기 위해 사람들은 그랜드 캐니언 중에서도 웨스트 림으로 향한다.
보통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 여행은 네바다주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시작한다. 자동차를 가지고 직접 운전해서 가는 경우도 많지만,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원데이 투어를 이용하면 편하게 그랜드 캐니언 감상이 가능하다. 보통 새벽 6시 30분쯤 호텔에서 픽업해 후버댐을 지나 그랜드 캐니언을 둘러본 후 저녁 8시경 라스베이거스로 다시 돌아오는 코스다. 그렇다고 해서 그랜드 캐니언 감상이 쉬운 일은 아니다. 양측이 무려 32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탓에 단 하루의 시간으로 두 곳을 둘러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물론 며칠씩 트레킹을 하고 산장에서 잠을 청하는 모험가 스타일의 여행자들도 많지만, 현실적으로 그랜드 캐니언을 살짝 만나보는 정도가 시간이 부족한 여행자들의 보통 패턴이다. 인기 있는 코스는 하이킹을 할 수 있는 사우스 림South Rim과 좀 더 조용하고 야생화가 많은 노스 림North Rim이나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그랜드 캐니언과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건 웨스트 림West Rim이다.
건조한 기후의 풍경들. | |
라스베이거스에서 출발하는 원데이 투어는 중간에 후버댐을 경유한다. | 그랜드 캐니언의 웨스트 림에는 옛 서부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건물과 사람들이 있는 휴게소가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
라스베이거스에서 가깝다는 이유 말고도 웨스트 림을 찾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2007년 새롭게 선보인 스카이 워크Sky Walk에 오르기 위해서다. 그랜드 캐니언 협곡의 1200미터 공중에 둥둥 떠서 아찔한 협곡을 더 짜릿하고 스릴감 있게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 스카이워크는 절벽 끝에서 바깥쪽으로 21미터가량 말발굽 모양으로 튀어나와 있고,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어 콜로라도 강물이 흐르는 협곡의 한가운데를 발밑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얼마 전 지구촌 뉴스에 ‘세계에서 가장 아찔한 청소는?’이라고 화제가 되었던 사진이 바로 스카이워크에 매달려 40여 장의 강화 유리판을 청소하는 장정들이었다. 아무리 튼튼하게 설치된 전망대라고 해도 그 아찔한 높이에 다리가 후들거려서 팔짱 끼고 휘파람 부는 제대로 된 풍경 감상은 불가하지만, 그랜드 캐니언의 협곡의 광대한 크기를 가늠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수단이다.
웨스트 림은 개인 소유 차량은 출입할 수 없고, 공원에서 운영하는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특별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것이 단점이면서 장점이다. 전망대와 전망대 사이를 버스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탓에 직접 걷는 거리가 짧은데다가 다소 수동적인 프로그램이라 그랜드 캐니언의 속살을 원하는 만큼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장엄한 풍경에 감동받는 일만큼은 변함없이 같은 크기다. 그랜드 캐니언이 주는 전체적인 감동의 크기가 이미 어마어마하니까.
“지구의 나이 46억 년, 그랜드 캐니언의 나이 20억 년. 지구의 나이테의 반을 품고 있는 붉은 땅 위를 걷는다. 비와 바람과 강물이 남긴 풍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땅.”
미국의 남서부, 애리조나 주 북부에 있는 거대한 협곡. 그랜드 캐니언은 콜로라도 강이 콜로라도 고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곳에 형성된 대협곡으로 1919년 미국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록되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강에 의해 침식된 협곡, 색색의 단층, 바위산과 기암괴석이 붉고 짙게 광활한 고원을 가득하게 채우고 있다. 그 사이를 흐르는 유유히 흘러가는 콜로라도 강이 장엄한 파노라마에 한 획을 긋는다. 단순히 멋지다거나 숨이 막힌다는 표현 정도로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 그랜드 캐니언은 지질학의 교과서다. 20억 년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긴 역사를 제 몸에 깊게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테처럼 진하게 드러나는 그랜드 캐니언은 비와 바람과 강물이 남긴 풍화의 흔적과 지구의 역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장엄한 광경이다.
안타깝게도 그랜드 캐니언에 갔던 날 안개가 자욱하고 비까지 내렸다. 새파란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 아래로 붉게 타오를 스펙터클한 협곡을 상상했으나 다소 침착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에 처음엔 살짝 실망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셔틀버스에서 내려 그 땅 위에 직접 올라서니 가슴이 이상하게 먹먹해지더라. 유리 창문을 사이에 두고 보았던 그랜드 캐니언을 비로소 마주하니 광활하고 원시적인 아름다움이 똘똘 뭉쳐서 품 안에 굴러들어왔다. 밝은 태양빛 하나 없이도 이렇게 숨이 멎을 것 같은데 해가 뜨고 질 때 암석 위로 내리쬐는 빛과 그림자의 변화까지 더해진다면 얼마나 감동적일지. 역사 속의 대단했던 예술가들을 다 불러 모아 힘을 합친다 해도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예술작품일 테다.
땅이 위로 융기해서 고원이 형성될 때 힘센 콜로라도 강줄기에 미로 같은 협곡이 만들어졌는데, 그 길이만 443킬로미터에 이른다. 끝을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크기. 이 계곡이 현재 형태를 갖추기까지 겪어온 엄청나게 긴 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겨우 두세 시간을 투자해 둘러보는 그랜드 캐니언 투어는 어찌 보면 코웃음 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위대한 자연 앞에 놓인 인간의 진짜 모습이다. 버스를 타고 호핑 하듯 전망대를 둘러보는 그랜드 캐니언이라도, 잠시나마 작은 돌무더기에 앉아 고요하게 자연과 마주하는 순간은 하찮은 인간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공간적인 감동,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적인 감동까지.
20억 년의 나이를 먹은 절벽 위에 올라서는 일.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참으로 아찔한 경험이다. | 붉은 땅과 대조되는 검고 윤이 나는 큰 까마귀. 그랜드 캐니언의 전망 포인트마다 눈에 띈다. |
지구과학시간에나 들어봤던 암석들이 그득한 그랜드 캐니언은 지구 지질학의 교과서다. | 웨스트 림은 공원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포인트라고 불리는 전망대를 몇 군데를 도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콜로라도 강. 협곡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랜드 캐니언은 전 세계에서 건조지역의 침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질의 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이곳의 암석들은 20억 년이라는 지구 지질학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지구의 나이가 46억 년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그랜드 캐니언은 지구 인생의 반을 함께 한 대단한 동반자인 셈이다. 협곡자체로는 500~600만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랜드 캐니언의 깊은 중심부에 노출되어 있는 고대의 암석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이다. 협곡의 벽을 구성하는 층은 5억 7천만 년 전에서 2억 4500만 년 전인 고생대에 형성된 것이며, 그 벽 아래로는 10~20억년의 나이를 먹은 오래된 암석이 자리한다. 조로아스터 화강암층, 비슈누 편암층, 타핏 사암층, 무아브 석회암층, 수파이 층군, 브라인트 엔젤 사암층, 토로위프 지층 등등. 아니 이건 지구과학시간에 교과서에서나 접했던 용어들이 아닌가. 그랜드 캐니언은 책 속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오랜 지구의 과거를 마주할 수 있는 위대한 장소다. 타임머신을 타고 셀 수도 없이 먼 옛날로 되돌아가 보는. 비록 몇 시간밖에 투자할 수 없는 바쁜 몸이었고, 셔틀버스나 타고 전망대나 둘러본다고 툴툴대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랜드 캐니언의 땅 위에 발을 디뎌볼 수 있는 건 행운이었다. 지구가 살아온 반평생을 마침내 만날 수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