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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지대 / 홍성원
그해 여름과 가을을 우리는 무사히 보냈다. 한 달 전, 그러니까 시월(十月)중순이던가 모포 두 장을 덮고 자던 동필(東必)은 잠결에 옆사람의 모포속으로 기어들어가며 문득 겨울이 왔구나 생각했다. 그날 첫 얼음이 언 뒤로 겨울은 서서히 그러나 완강하게 강원도(江原道)골짝을 차츰 점거하기 시작했다. 강원도 중에서도 이 최전방 P촌은 계절을 거의 무시하고 대개 달포 전에 먼저 겨울이 오는 것이다.
동필은 방금 초소(哨所)교대후 움막(사실은 우리 잠복조(潛伏組)의 막사다)으로 돌아간 정상병(鄭上兵)의 발자국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눈이 오다가는 한 시간 후면 허리까지 눈이 쌓일 것이다. 그는 어깨에 맨 「M1」 총을 「FOX HOLE」 벽에 기대놓고 파카 주머니 속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더듬어 찾았다. 라이터는 방금 움막밖에서 쬔 싸릿가지 모닥불의 온도를 그냥 지니고 있었다.
"한 대 구워 볼 텐가?"
벽에 기댄 채 철모를 벗어 깔고 앉았던 형태(亨泰)는 말없이 손을 뻗쳐 담배 한 대를 받았다.
"오늘 토요일이지?"
"성탄절이 나흘 후니까."
"화이트 크리스머스는 틀림없지. 눈이 이정도루 오구선…"
"신통하구나 자넨, 크리스마스 생각을 다하구…"
"케익 센터에서 만나기루 했는데…"
"아, 고 투우사 말인가?"
"투우사?"
"진홍색 스웨터의 아가씨 있잖나…"
형태는 목을 더 깊이 움츠리며 후후 웃었다.
"멍들었어… 각상께서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걸세…"
각상이란 김하사(金下士)의 별명이다. 사단장(師團長)을 각하(閣下)라고들 부르는데 김하사는 사단장보다 높다고해서 각상(閣上)인 것이다.
"언제 말을 했더랬군?"
"어젯밤 곰보집에서."
"막걸리를 아꼈군, 자네?"
"아니 그렇지두 않았는데… 좌우간 출장이야긴 말라는 걸세."
"예감이 맞군, 그럼."
"무슨 예감?"
형태는 소총을 지팡이 삼아 짚고 일어섰다.
"두 가지 예감일세…"
"뭔구?"
"엊그제 ??8GP??에서 사고가 났다는 거야."
"또 목 베어간 얘긴가?"
"저쪽(이북)친구가 이쪽(남쪽)지역에서 유유히 산보를 하더라나…"
"허어?"
형태는 눈으로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여러명이 우루루 추격을 했는데 결국 수확은 놈이 흘리구간 털모자 하나 뿐이라는군. 그런데."
"뭔가 또?"
"우리 빵빵 한놈이 다리에 경상을 입었어."
"쐈군. 그치가?"
"천만에. 그치가 끌구온 똥개한테 물렸다는 이야길세."
"그거 완전히 코메딘데?"
동필은 담배 꽁초를 눈 속으로 튕겨 던졌다.
"빵빵 군번이 망신이지."
빵빵 군번이란 학보병 군번이 영영(零零)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생긴 호칭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
형태는 철모를 썼다. 그리고 고개를 내밀어 호(壕)밖을 바라보았다. 무수한 설편(雪片)들이 불티처럼 공간에 자욱하다. 그는 혀를 내밀어 그 중 낙하되는 한 놈을 겨냥했다. 거의 코 앞에까지 날아 내리던 눈은 대개는 겨냥을 밖으로 벗어나 얼굴이나 목덜미로 따금한 냉기를 피부에 전한다. 그는 겨냥을 포기하고 동필을 다시 바라보았다.
"또 무언가 한가지 예감은…"
"자네 손목에 찬 투가리슬세."
"이게 왜?"
"그걸 각상이 여간 탐내지 않더군."
"뭐야?"
"좋은 인상 꾸기지 말게나. 그저 그렇단 이야기지…"
"쌍놈으 새끼."
"케익 센터의 약속을 포기하든지 자네 투가리스를 포기하든지 양자택일이지."
"안되는 흥정 아닌가 이건."
"왜? 시계 뒤딱지에 새긴 글자 때문인가?"
형태는 잠잠했다. 동필은 순간 좀 심했구나 생각했다. 형태의 투가리스는 작년 학교 재학시 전국영어웅변대회 때 총장상으로 얻은 것이다. 투우사 아가씨는 그 대회때 「E」대학 출전 연사로 같은 총장상을 탄 인연이 있는 것이다.
"군대가 좋지… 누구를 위해선가, 자네의 그 열띤 웅변은…"
연극의 대사를 외우듯 동필은 유머러스하게 형태를 바라보았다.
"각상을 위해선가 결국…"
형태의 우는 듯한 표정 속에서 동필은 벌써 투가리스의 임지가 바뀐 것을 알았다.
"흥정은 열흘간이 쌍방에 무난하군…"
동필이 이번에는 철모를 깔고앉았다. 눈은 여전히 고만한 정도로 내렸다.
"사냥 안 갈텐가?"
"간행물 수령가는 건 내일루 미루려나?"
"정훈부에 연락하지, 눈이 와서 비상도로가 불통이라구…"
"내일은 휴무렷다…"
"토깽이 두 마리면 곰보집 막걸리와 제격인데.."
"각상 이 새끼가 보내줄는지? 어젯밤 나일론 뻥에 백 이십 원 차용증을 그리구는 완전히 의기소침이던데…"
"투가리스 있지 않나, 내일 쉬었다가 모레 새벽에 첫차를 타게. 찡(휴가증)은 스페어를 쓰면 되구."
동필은 흙벽을 두 팔꿈치로 밀고 그 반동으로 일어났다. 그는 철모를 머리에 얹고 호 밖으로 나왔다. 멀리 ??P촌??쪽을 바라보았으나 시야에는 회색빛 공간만이 보일 뿐이다. 왼쪽 ??7??부능선을 따라 움막으로 뻗은 비상도로는 커다란 구렁이가 산허리를 기어가는 형상이다.
그는 작업복 바지의 앞단추를 끄르고 아주 조그맣게 위축된 섹스를 무수히 껴입은 내복속에서 더듬어 잡았다. 섹스는 마치 망가진 고무 인형의 팔다리처럼 초라해 있었다. 곧 노란 액체의 기둥이 눈속에 쏴하니 묻히자 더운 목간통에 김이 솟듯이 작은 증기의 덩어리가 눈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는 배설을 끝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이, 교대 때에는 눈 속으루 헤엄을 쳐야 될까보다!??
??토끼란 놈 뵈지도 않겠는걸!??
??전번에 놓친 돼지 한 번 추적해보지! 잡아서 중대본부에 운반하면 특별휴가 깜이다.??
동필은 「F0X HOLE」로 기어들어 가면서 군화에 묻은 눈을 굴러서 털었다.
??뵈기만 뵈면 솜씨 보여줄 텐데.??
??백근은 넘었지, 그 놈.??
??이번엔 이걸루 들구가세.??
형태는 「M1」의 노리쇠를 뒤로 후퇴시키며 약실(藥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 P촌 사람들 겨울엔 무얼 먹구 사는 지 굴뚝에 연기 오르는 걸 보면 신통하거든…??
두 사람은 나란히 철모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처음 이곳으로 보충왔던 일을 생각했다. 팔개월 전이었다.
사단보충대에서 삼일을 묵은 후 ??RCN??으로 특명을 받고 3/4톤차에 흔들리며 이곳 P촌에 왔을 때는 사월도 중순이었으나 아직 O산과 H봉에는 앨프스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눈부신 잔설(殘雪)이 덮여있었다.
P촌은 원래 화전민(火田民)의 부락이었다. 사변 전에는 K군이 위치했다는(지금은 타다 남은 주춧돌과 구들장만 잡초에 묻힌 폐허다) Y까지는 그래도 하루에 세 차례 서울 공기를 실어오는 뻐스가 왕복한다. Y리에는 초가집의 다방이 둘 있고, 너댓의 양철지붕을 한 군인 상대의 잡화점이 있으며 군대밥 특유의 화근내를 풍기지 않는 우동과 국밥을 파는 밥집도 있다.
더구나 일요일이나 봉급때가 되면 멀리 C군에서 육군하사를 제일 좋아하는 색시들이 원정을 오기도 하는 민가 백여호의 번화가다. 그런데 P촌의 경우는 좀 다르다. Y리에서 불과 팔구킬로의 거리를 두었으나 공병대에서 임시로 놓은 검정 콜타르의 단행교(單行橋)를 지나면 귀가 갑자기 멍하도록 스산한 공포가 전신을 엄습한다. 그 공포는 대개의 경우 늘 단독무장(單獨武裝)을 하고 다니는 두 세명의 ??DMZ??근무병을 보았을 때 비롯된다. 이 단독무장의 사병들은 거의 표정이 없다. 어깨에 멘 ??CAR??소총의 멜방을 잡은 손이 너무 꼭 쥐어서 핏기가 없으며 ??파이버?? 밑 그늘 속에 숨은 두 눈은 항상 수면부족과 ??바이타민 A??의 과잉소모로 눈물과 눈꼽을 달고 있는데 그들의 흐느적한 걸음걸이 속에는 산토끼가 가해자의 불시 습격을 대비할 때 보이는 그러한 민첩함이 스며있는 것이다.
동필과 형태는 3/4톤차가 콜탈의 단행교를 건너가 문득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다. 그 웃음은 거의 패배를 자인하면서 시합에 나가는 선수에게 응원석에서 보내는 그런 격려의 웃음이었다. 저녁 늦게 ??RCNHQ??에 도착하여 일보(日報)를 잡고 고참병 눈치속에 식사를 끝낸 동필은 변소 앞에서 무슨 중대한 선언을 하듯 천천히 말했다.
??우린 지금부터 서서히 소년척탄병처럼 영웅이 되는 거다…??
P촌을 정말 있는 그대로 보는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점호를 끝내고 변소를 신축하라는 인사계(人事係)님 말씀을 따라 사방으로 싸리나무를 베러 갔다.
인사계님은 출발직전에, 잘 닦아서 반짝이는 상사(上士)계급장을 태양으로향하여, 간단한 지형설명을 일러 주었다.
??막사 뒷산은 00고지로 대공초소가 있으니 등산하는 기분으로 올라가면 ??케리바 50??이 귀관들의 지옥행을 대대적으로 환영할거다. 삼각형의 붉은 표지는 지뢰 매설지대이므로 헬리콥터를 타고 후송가고 싶은 사람은 들어가도 좋다. 끝으로 ??남방한계선?? 이상을 넘어가면 귀관들은 고(故)아무개가 되어 일계급 특진의 영광을 가진다, 알겠나???
인사계님의 훈시가 끝나고 두 사람은 위병소를 멀리 우회하여 P촌으로 내려왔다. 마을은 뜨물과도 같이 뻑뻑한 안개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개울 폭 칠팔미터의 계류가 촌락 복판을 지나고 그 양편에 이십여개의 민가가 조밀하게 놓여있으며, 멀리 빙하시대에 흙을 씻어 보낸 듯한 암석의 단애가 그리스 신화의 거인족처럼 계류변에 열병자세로 늘어서 있었다.
??이쯤되면 이 마을은 전쟁과 전혀 무관한 사이였어야 옳지 않을까???
문과(文科)의 동필은 혼자 중얼거렸다. 형태의 시계가 아홉시를 가리키자 안개는 차츰 썰물이 빠지듯 계곡 하류로 흘러갔다. 두 사람은 마을 복판에 징검다리를 건너며 각기 어젯밤 불침번 시간에 써두었던 서울행 엽서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이게 제대루 임자를 찾아 갈까???
??도대체 우체통이 뵈질 않는군.??
??빨리 가세, 사람이 기다리겠는걸.??
「야전상의」에 털모자를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민간인이 빈 지게에 낫을 들고 이쪽에서 건너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 우체통이 어디 있습니까???
민간인은 낫을 들어 계곡 하류를 가리켰다.
??우체통은 없구 저 돌담집에 편질 맡기슈. Y리서 사흘에 한번씩 자전거 탄 배달부가 옵니다.??
??오늘이 그 사흘짼가요???
??웬걸요. 어제 다녀갔는데…??
동필이 다음 말을 계속하려는데 2가 1/2톤차가 타이어 밑으로 자갈을 튀기며 이쪽으로 굴러왔다. 차에는 쌀가마와 드럼통과 콩나물이 실려있었다.
??부식찬가???
??응, 하루에 한번씩 다닌다는군. 그런데 겨울철에 눈사태라도 나면 보름도 좋고 한 달도 좋고 오지 않을수도 있다는거야.??
??그럼 이곳 친구들은 굶어죽기 마련 아닌가???
??그럴수야 없지! 월동준비용으로 삼개월분 비상식량이 준비됐다는 일종계님의 설명이야.??
두 사람은 돌담집에 편지를 맡긴뒤 산으로 싸리를 베러가는 대신, 민가에서 베어 놓은 나무 두단을 사서 메고 부대로 돌아왔다. 부대에는 다음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밤 ??RCN??에는 「번갯불에 콩볶아먹는」 ??CPX??가 있었다. 지뢰지대에 산화(山火)가 일어나 밤을 새우고 매설된 지뢰가 터졌던 것이다. 진화작업은 다음날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작은 구릉(丘陵)하나를 다 태운 산화는 우리 부 대지역을 벗어나 인접부대로 옮아가서 우리는 진화작전을 하는 대신 새로운 지뢰매설작업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ORD??사병의 지시에 따라 작업은 삼일간 계속되었고 동필과 형태는 작업이 끝나는 그날 저녁에 ??HQ??사무실에서 서무계(書務係)님의 말씀을 듣고 잠복초소(潛伏哨所)로 자기들이 파견된 것을 알았다. 서무계는 그동안 얻어먹은 막걸리때문에 동필과 형태에게 필요이상의 따뜻한 악수를 청하며 오만한 고참병의 자세로 말했다.
??특과다 거긴. 종종 놀러 오나.??
??예, 감사합니다.??
??길은 알겠지? 김하사가 인솔차 오기루 했는데 그 근처에 ??불온문서??가 발견되어서 사단 ??G-2??로 보고하러 갔다. 너희들은 빵빵이라 ??고향앞으로 갈 것??같은 소동은 없으리라 믿고 걸려보내는 거다. 다시한번 길을 일러준다. 여기 P촌에서 서북방으로 한 이 킬로쯤 가면 자붕을 잡초로 덮은 독립가옥이 나타난다. 그집이 유명한 곰보집인데 너희들이 가끔 술 신세를 져야할 곳이다. 호주머니가 허락하면 술 한 서너되쯤 들고 들어가서 신고하는 게 좋다. 김하사는 이름난 술도깨비니까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아차, 한가지 중요한 경고를 잊고 있었구나. 곰보집에 댕기머리의 처녀가 하나 있다. 김하사 앞에서는 절대로 처녀를 아는 체 하지마라. 김하사가 종종 ??꼬질대??수입을 하는 처지니까 말이다. 이상!??
두 사람은 그후 칠개월간 줄곧 이곳에서 잠복근무를 했던것이다.
눈송이가 차츰 뜸 해지며 바람이 자기 시작했다.
??그칠 모양인가… 이 정도면 토끼사냥은 딱 좋은데.??
??동상예방??을 위하여 발을 구르던 형태가 파카 깃을 올리며 하품을 했다. 동필은 일주일전치 K신문의 연재소설을 보다가 여자 주인공의 정부(情夫)가 되는 자기자신을 머리속에 그리며 어깨를 추스르고 일어섰다.
??교대시간은 아직 멀었나???
??이십분 초관데, 점심 여물(식사)먹고 올라 오겠지.??
발 끝에 감각이 차츰 멀어져서 이젠 멍한 통증만이 전해왔다. 그때 두 사람은 멀리 스피커 소리를 들었다.
??또 왕왕대기 시작인가보군.??
스피커 소리는 거의 알아들을수 없었다.
??저 소릴 몇 명이나 듣구 공산주의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꼬???
이 스피커 소리는 그들이 보충 온 이래 사흘에 한번씩 조석으로 듣는 북한의 ??대남방송??이었다. 놈들은 자기네 높은 ??GP??에 직경 삼사미터의 스피커를 장치하고 Y리, C군, P촌의 순서로 스피커 방향을 번갈아 바꾸며 꾸준히 북한 선전과 남한의 욕을 들려주는 것이다.
??요즘 애드벌룬 공세가 잠잠하니 희한하군.??
??풍향이 나빴던게지.??
놈들은 때때로 남동풍이 불때면 애드벌룬에 붉고 푸른 색색의 인쇄물을 실어서 이쪽으로 날려 보내기도 한다. 인쇄물에 실린 활자 내용은 한결같이 북한은 ??패러다이스??고 남한은 ??소돔성??이라는 것을 강조한 문귀로 일관해 있다.
??전화연락해서 빨리 오라구 하지. 교대시간 삼십분 초과 아닌가.??
??연락했자 새까만 쫄병, 말이 많다는 핀잔밖에 없네.??
동필이 전화기에서 물러서자, 형태는 등뒤에 걸린 ??TS-10??을 떼어 귀로 가져갔다.
??독수리 하나, 독수리 하나, 여기는 독수리 둘이다. 감 잡았으면 세 번 불어라 이상…??
응답은 즉시 왔다. 김하사의 바리톤 목소리가 옆에 섰는 동필의 귀에도 또렷이 들렸다.
??야, 독수리 둘! 귀찮은 일거리 생겼다. 임마! 곧 올려 보낼테니 조금만 더 동태 되라.??
??무슨 일거립니까???
??비상도로의 제설작업을 하라는거다.??
??그걸 왜 우리가 합니까???
??밤송일 까라면 깠지 빵빵놈의 새끼가 말이 많다!야 임마, 중대병력은 엊그제 ??8GP??에서 놓친 무장간첩 사냥을 가고 제설작업을 할 병력이 한놈두 없다는 거다. 아까 다섯놈 삽 들려서 보냈으니까 곧 끝내구 올거다. 정 추우면 비워놓구 내려와도 좋아!??
??고맙습니다 각상!??
아차 실수를 했구나 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김하사의 전화는 벌써 끊어져 있었다.
움막에는 김하사 홀로 난로가에 앉아있었다. 월동용 연탄을 거의 다 소모했기때문에 나무를 때고 있는 난로는 매캐한 연기를 두 간 넓이의 움막안에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이 M1총을 총걸이에 세우고 무릎과 군화에 묻은 눈을 털자 김하사는 연기로 지저분해진 얼굴을 들어 문밖을 턱짓했다.
??나무 좀 안구와라. 마른 놈으루 말이다.??
동필이 밖으로 나가자 형태는 난로 앞에 철모를 깔고 앉았다. 난로 위에는 항고 한 개가 끓고 있었다.
??무업니까???
형태가 항고를 가르키자 김하사는 한 손으로 흐르는 콧물을 훔치며 말했다.
??감자다.??
??곰보집에서 바꿔왔어요???
??외상이야.??
바꿔왔다는 뜻은 주 부식으로 나오는 쌀이나 된장으로 민가에서 물물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동필이 나무를 안고 들어오고 형태는 항고를 난로에서 내려놓았다. 감자는 충분히 삶겨 있었다.
??야 미안하다. 밥맛이 없어서 미치겠구나. 너들은 저기 여물 두 그릇 있으니 올려놓구 데워 먹어라.??
김하사는 항고 거리에 나뭇가지를 끼어들고 ??매트레스??쪽으로 건너갔다. 동필이 밥과 국이 짬빵으로 담긴 미식기를 난로위에 올려놓자 막사 문이 열리고 야전삽과 싸리비를 든 제설작업반이 돌아왔다.
??수고했습니다. 정상병님!??
??천만에, 어서 식사하시오.??
모교 이년 선배요 ??하니문??중에 입대했다는 정상병은 손에 든 야전삽을 ??관물대??밑으로 던지고 털모자를 벗었다. 땀에 젖은 짧은 머리카락이 넓은 이마에 착붙어 있었고 두 볼은 잘 익은 홍옥빛을 하고있었다.
??중대에서는 난리 났더군요.??
??왜???
김하사가 감자를 입에 문채 정상병을 바라보았다.
????8GP??에 나타났던 간첩 때문입니다.??
??잡았어???
??이 눈 속에 잡긴 어딜 잡습니까… 사단에선 기동타격부대가 다 출동했어요. 간첩이 끌구왔던 개는 쏴서 잡았답니다.??
??어느 쪽으루 튀었길래???
????6GP??쪽이라나요.??
??이쪽으루 왔으면 팔자 고치는 구찐데.??
??포로만하문 한 밑천 잡죠.??
서비스공장에 다녔다는 박일병이 말했다.
??어이 빵빵, 회보(回報)에 얼마라고 되었나???
????A??급이 삼십만환이던가요.??
동필이 스푼을 미식기에 꽂고 벽에 걸린 회보철을 떼어왔다.
??읽어보라우.??
김하사는 감자 그릇을 밀어놓고 난로앞으로 왔다.
??A급이 생포가 삼십만환, 사살이 이십만환, 참모총장 표창, 일계급 특진, 특별휴가 십 오일, 간첩이 휴대한 공작금과 소지품은 반분하여 그 반은 간첩 생포자에게 주고 그 반은 국고로 귀속됨, 대강 이런 정돕니다.??
??히야! 간첩 하나만 잡으면 당장 제대하는 거다. 에누리 해서 오십만환은 틀림없는거 아닌가!??
김하사는 손바닥에 묻은 감자 가루를 싹싹 비볐다.
??그치 이 쪽으루 오지 않구 왜 ??6GP??쪽으루 갔을까.??
동필은 갑자기 입에 문 밥풀을 튀기며 쿡쿡 웃었다.
??왜 웃나 빵빵!??
동필은 기어이 밥을 흙바닥에 뱉었다.
??일계급 특진하면 중사가 될 텐데 왜 제대를 하십니까???
??하긴 그래, 중사면 봉급이 삼만환이 넘지…??
김하사는 난로 ??로스톨??을 군화로 찼다. 동필과 형태는 빈 미식기를 들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눈이 그치고 햇빛이 구름사이로 눈부시게 쏟아졌다.
??여긴 좀 살 것 같군.??
??움막은 공기가 탁하다 그말인가???
??그렇지, 권태라는 연기가 자욱하거든.??
??쫄병 주제에 어려운 말 쓰지말게.??
??사냥이나 가는 게 건강에 좋을 것 같군.??
두 사람은 옹달샘에서 미식기를 씻었다.
??지금 들어가서 투가리스 흥정을 할까???
??기회를 보게, 지금 사방이 떠들썩하지않나…??
??밤에 이야기 하지. 자네 옆에서 지원사격 좀 해줘야겠어.??
막사에 돌아오니 황일병과 박일병은 ??FOX HOLE??로 올라가고 없었다. 정상병이 김하사의 편지를 대필해주고 나머지 사병들은 다음 교대를 위하여 모포를 덮고 자고 있었다.
??김하사님 저녁에 술 좀 하시죠.??
편지 내용을 열심히 설명하던 김하사는 허리를 펴며 동필을 바라 보았다.
??술? 거 좋지! 어젠 나일룡 뻥에 멍잡았어. 오늘은 일진이 좋아서 끗발 날거야.??
??아니 술은 우리가 낼테니까요.??
??안주를 담당하라 그 말씀이시군???
??천만에, 안주두 우리가 내죠.??
??야, 야! 시시한 소리 마라. 이젠 곰보집에 김치두 떨어진 모양이더라.??
??우리 김치 같은 식물성 좋아 안합니다. 동물성으루 하죠, 근사한!??
??며루치 말이냐???
??시시합니다, 김 하사님.??
??그럼???
??카빈 실탄 한 케이스만 하구, M1 실탄 한 구리프만 주시면…??
??야, 쌔끼들, 또 사냥이가???
??이런 눈 속이면 토끼는 손으루두 잡힙니다.??
??너들, 도대체 그 동안 토끼 몇 마리나 잡았나?…겨우 내 토끼 세 마리에 비둘기 두 마리 잡구선…??
??사정이 다르죠, 그땐.??
??야간 교대 때 졸지 마시구 일찌거니 ??해골 모시지??.??
??이번엔 틀림 없이…??
형태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바보처럼 웃었다.
??사냥이 그렇게 좋은가? 너들.??
??심심해서요.??
동필은 문득 이 심심하다는 표현이 좀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덧붙였다.
??숨이 막히거든요. 여기 이런 근처가 …??
잠잠하던 정 상병이 대필 편지를 접으며 말했다.
??보내 주시죠.??
??그래, 키마이다! 그렇지만, 오늘두 빈손으로 오면 빠따로 모실테니 알아서 기어라.??
??넷!??
산은 조용했다. 사십「센티」 두께로 쌓인 적설(積雪)은 모든 음향을 차단하고 있었다. 가끔 약하지만 날카로운 바람이 나뭇가지 끝을 흔들어 그 위에 쌓인 눈가루를 날려서, 햇빛에 반짝이는 금속의 가루처럼 보이게 했다. 방금 온 눈의 푹신한 표면을 군화가 지나가자 눈을 흠뻑 뒤집어 쓴 나뭇가지 속에서 작은 굴뚝새들이 풍구 소리를 내며 떼를 지어 날았다. 이 작은 새들은 겨울이 되면 대개 다래 덩굴이나 뱀딸기 덩굴속을 들쥐가 풀 속을 기듯이 낮게 날아 다닌다. 비상도로와 연결된 산등성이를 올라 와서 두 사람은 잠시 망설였다. 맞은 편에 보이는 바위산은 전 날 돼지를 놓쳤던 산이다.
산 중허리 오부 능선을 따라 「추럭」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길이 나 있었다. 괴뢰군이 보급추진을 위하여 ??K군??군민들을 동원하여 놓았다는 도로다. 지금은 사태와 잡초가 무성하여 도로가 있었던 흔적만 보일 뿐이다. 도로가 끝나는 곳에 지도상에 이름이 오른 ??H봉??이 시작되고 그 봉의 북쪽 산록이 적과 마주한 아군의 ??9GP??다.
??돼지를 쫓느냐, 토끼를 잡느냔데…??
??우선 H봉 쪽으로 가보지.??
두 사람은 장탄된 소총을 거꾸로 메고 십 오도 정도의 비탈길을 내려갔다. 그늘 쪽을 벗어나 태양을 향하고 걷는 그들 앞에 키를 약간 넘는 관목(灌木)숲이 시작되었다.
??토끼라도 있음직 한데???
십 여년을 사람의 발이 미치지 못한 이곳은 눈이 아니라도 발이 무릎까지 빠지는 가랑잎이 쌓여 있었다. 관목의 가지를 어깨로 스칠 때마다 눈 가루가 목과 얼굴로 톱밥처럼 무겁게 뿌렸다. 약간 거리를 두고 앞서 가던 동필은 간단히 비둘기 두 마리를 튀기고 멍하니 섰다.
??지금 난 거 뭔가???
??평화를 상징히는 샐세.??
비둘기는 허공에 직선을 그리며 그들의 ??FOX HOLE??쪽으로 내려 앉았다.
??안전 장치를 풀어야겠어.??
동필이 말하자 형태는 털모자 앞 창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은 다시 완만한 오르막 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렵법 초보라두 읽어 두는 건데.??
두 사람은 지난 가을철에 싸리버섯을 따던 습지에 도착했다. 지금은 얼음이 엄청난 두께로 얼어서 그 밑으로 흐르는 물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발 밑을 조심하게, 빙판인걸.??
동필이 뒤를 돌아보자 형태는 벌써 눈 위에 주저 앉아 있었다.
??경고가 늦었어.??
활짝 웃던 형태의 시선이 갑작기 동필의 어깨 너머로 초점을 모았다. 동필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으나 천천히 어깨에서 CAR를 내렸다.
??돌배 나무 둘째 가지를 보게…??
??비둘긴가???
??비둘기라면 너무 작아. 박새 아닐까???
??갈겨 보세.??
??자네 총으로 갈기게. 이걸루 때리면 고기가 하나두 안남을걸.??
??좋아!??
동필은 서서히 총구를 올리며 ??앉아쏴??자세를취했다. ??가늠쇠??를 통한 ??가늠자??위에 목표물이 나타나면 되는 것이다. 방아쇠를 건 장갑 낀 손가락이 너무 투박했다. 그는 다시 총구를 내리고 장갑을 벗었다. 박새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가지 사이로 비취는 햇빛 속에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태연하구나 그놈… 지옥행 십초 전!??
총성이 울리자 사방에서 눈 가루가 날리고 목표물은 줄 끊어진 저울추 처럼 수직으로 낙하 되었다.
??정통이다!??
두사람은 돌배 나무 밑으로 갔다. 서너개의 회색빛 새 털이 눈 위에 흩어졌고 목표물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집어 든 박새는 어디를 맞았는지 분간할 수 없도록 엉망이 되어 있었다.
??고기는 하나두 없군…??
망가진 두 날개를 흔들며 형태는 서운한 표정이었다.
??버리게. 원래 고기 보구 쏜게 아니잖나.??
??다리에 살은 그냥 있어.??
??박새두 먹나???
??먹으면 먹는 거지… 각상은 까마귀두 구워 먹더군.??
??그렇게 아깝다면 크리스머스 선물로 투우사 아가씨에게 소포로 보내게나.??
??기발한 선물이지, 칠면조 대신으로 .??
형태의 투가리스가 열네시를 가리켰다. H봉 계곡은 좀 더 눈이 깊어서 두 사람은 눈 속을 툭 툭 차며 걸었다. 여러 겹의 내복 속에 끈적한 땀이 내 배고, 반사되는 직사광선에 눈이 아프기 시작했다. 여름 철에 폭포가 걸렸던 커다란 암벽 밑에서 그들은 투명한 고드름을 깨어 먹으며 쉬었다.
??여기서부턴 완만한 고개턱인데…??
??돼지를 쫓는 편이 수월할 걸 그랬군.??
산은 너무 조용했다. 그 흰 백색의 뼈대를 드러내고 조용히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알싸한 금숙류의 눈(雪)냄새가 온통 그들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자기그림자의 목부분을 겨누고 오줌을 누던 형태는 문득 바위 밑 아늑한 곳에서 토끼 똥을 발견했다.
??근사한 발견일세, 동필이.??
??뭔가???
형태는 토끼 똥을 소중하게 집어 들었다.
??보게나, 여긴 분명히 어젯밤 토씨(兎氏)의 숙소다.??
??그렇다면 오늘 새벽 눈오기 전에 여기서 출타하셨겠군.??
??시속 오마일속도로 산보를 해도 이 똥 임자는 별로 머릴 못갔을 걸세.??
그들은 토끼 똥을 원위치에 놓고 각기 총을 집어 들었다. 폭포 밑에는 원형의 작은 웅덩이가 있고, 웅덩이 주위로 늘어 선 바위들은 마치 웅크린 짐승의 등처럼 두꺼운 눈의 털외투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폭폭 밑을 우회하여 칡 덩굵이 관목 키를 완전히 덮은 차일(遮日)속을 조심스레 걸었다. 발 끝에 나무 기둥이 차일 때마다 칡 덩굴의 차일이 흔들려서 그 엉성한 덩굴 사이로 떡 가루 같은 눈이 쏟아지곤 했다.
??여긴 토씨의 양식이 풍부하구나.??
??칡덩굴은 돼지군의 비상 식량도 되는데.??
덩굴의 차일을 벗어나자 다시 직사광선이 눈을 자극했으나, 그들은 털모자를 숙여 쓰고 간단한 전방 관측을 했다. U자형으로 굽어 든 골짝은 밋밋한 경사를 유지하여 산 오부 능선까지 삼백평 정도의 개활지(開豁地)를 이루었다. 십 오시(오후 세시)의 강원도 햇빛은 개확지 전체와 좌측 산록에 쏟아졌고, 우측 산록은 이미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폭포가 시작되는 좌측골짝을 따라 위험한 바위의 단애(斷崖)가 늘어서있고, 그 단애 밑으로 작은 암석들이 눈 속에 검은 반점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저 바위 밑이면 토씨가 쉼직한데…??
동필은 CAR를 오른손으로 옮겨 잡고 암석 하나 하나를 실눈을 한 채 바라보았다.
??야, 형태, 저건 방금 눈을 까뭉긴 흔적아닌가???
동필은 탱크의 포신처럼 공간을 찌르고 섰는 한 노송(老松)의 밑을 가리켰다.
??분명하군… 토끼라면 저 정도루 눈을 치우진 못하네.??
??돼질까???
??글세.??
??자네 ??M1??이 필요하게 됐어.??
두 사람은 가벼운 흥분을 느끼고 발 소리를 죽이며 노송 밑으로 접근했다.
??이상하다. ..??
앞서 가던 동필은 목표물 사오십 미터 전방에서 우뚝 섰다.
??사람이야.??
??움직이는데-.??
목표물이 누웠던 몸을 세우고 옆에 놓인 무기를 집어 들자 동필과 형태의 소총이 동시에 ??노리쇠??소리를 울렸다.
??무기가 다르잖나.??
??총을 다시 내려 놓는군.??
동필은 ??서서쏴??자세에서 식지(食指)를 건 채 천천히 걸어갔다.
??손들엇!??
엄청난 메아리가 개활지를 울렸다. 간첩은 의무적으로 두 손을 쳐들고 앉은 자세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서라!??
형태의 적의에 찬 고함에 간첩은 비틀거리는 자세로 일어나 소나무 밑둥에 등을 기댔다.
??십보 앞으로.??
??………??
??앞으로 나오란 말이다.??
??걸을 수가 없소.??
사십대의 침착한, 그러나 피로한 음성이었다. 형태가 총을겨누고, 동필은 간첩에게 다가갔다. 짧게 깎은 머리 위로 눈가루를 쓴 간첩은 주인이 내다 버린 병든 가축처럼 조용히 몸을 떨고 있었다. 동필은 문득 간첩의 여읜 몸에서 적의를 느끼는 대신 고사리나 도토리 비슷한 냄새를 맡았다. 그는 간첩이 깔고 앉았던 작은 갈색의 뤽색을 집어 들었다.
??뭐가 들었소???
??열어 보시오.??
??무기는 없소.??
??저것 뿐이오.??
간첩은 옆에 놓인 소제(蘇製)SMG를 눈으로 가리켰다. 탄창에는 총탄이 그냥 남아 있었다.
??몸에는???
??입은 것 뿐이오.??
몸수색은 간단이 끝났다. 간첩은 들었던 손을 내렸다.
??앉아두 좋소?…??
??건방지구나, 이 새끼!??
뒤따라 올라 온 형태가 갑자기 군화로 간첩의 복부를 찼다. 간첩은 눈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놔 두게! 손발이 동태처럼 얼었네!??
소제 SMG를 집어 든 동필이 급히 형태의 다음 동작을 막았다.
??당신이 어제 ??8GP??로 넘어왔소???
??….??
간첩은 하복부를 움켜 쥔 채 동필을 돌려 보고는 잠잠했다.
??엊그제 이 쪽으로 넘어 왔느냐 말이오.??
??예…??
??이 새끼, 몸뚱이 전체가 공산주의루 됐구나! 맞아야 입을 열 모양이냐!??
??형태!??
??저런 치는 매가 약이다!??
??흥분하지 말게!??
동필은 형태가 쳐든 육중한 개머리판을 몸으로 막았다.
??상대는 우선 공산주의 보다 동사(凍死)직전이 아닌가!??
간첩은 얼어서 원형보다 훨씬 비대해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 얼굴의 피부가 누르면 뭉개질 것 같이 투명했다.
??걸을 수 있겠소???
간첩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사흘 밤을 산에서 잤소…??
형태의 식지는 아직도 방아소에 걸려있었다.
??여기 이 눈속에서 말이냐???
간첩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청동색의 피부로싸인 가는 목줄기로 유난히 큰 울대가 오르내렸다.
??총살을 원하오. 나는 군관이오.??
형태는 문득 간첩의 핏발 어린 피로한 눈동자에서 적의가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는 동필을 바라보았다.
??장교라는데?…??
동필은 묵묵히 파카 주머니에서 라이터와 담배를 꺼 냈다. 장끼 한 마리가 맞은 편 그늘 곳으로 요란한 날개 소리를 울리며 내려 앉았다.
??담배 피겠소???
??나는 첩자가 아니오.??
간첩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빠른 동작으로 그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순간 동필의 주먹이 간첩의 얼굴을 덮쳤다.
??뱉으시오! 뱉으란 말이다!??
동필은 필사적으로 간첩의 입에 손을 밀어넣었다.
??살 수 있다, 너는. 바보짓 마라!??
간첩은 볼에 동필의 주먹을 맞고 즉시 반항을 포기했다. 입술 사이에서 흐르는 피가 턱 밑으로 진한 팥죽처럼 흘러 내렸다.
??뭔가, 그게.??
형태는 동필의 손바닥에 쥐어진 완두콩 크기의 침 묻어진 알약을 바라보았다.
??자살용 극약일세…자네 저 주머니를 다시 뒤져 주게.??
동필은 자기의 맥박 소리를 귀로 들으며 친절이 배반 당한 듯한 증오를 느꼈다.
??이것 뿐일세.??
형태가 작은 지도 한 장을 동필에게 털어 보였다.
??일어서시오??
동필은 자기의 음성을 먼 거리의 타인의 음성으로 착각하며 거칠게 간첩의 팔을 잡아 끌었다.
??여기가 좋소. 아무데라도 상관없소…??
간첩은 입술 사이로 진한 피의 포말을 튀기며 완강히 다음 동작을 거부했다.
??여기서 총살해 달란 말이오!??
산은 조용히 다가오는 놀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필은 간첩의 팔을 잡은채 울컥 치미는 설움 같은 것을 목으로 삼켰다.
??우린 당신을 죽일 권리 같은 게 없소. 이 산 속에는 당신을 죽일 아무것도 없단 말이오. 죽고 사는 문제는 저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이야기 하시오!??
간첩은 갑자기 허탈한 시선으로 멀리 폭포 쪽을 바라보았다.
??고문으로 내 입이 열리진 않을거요…??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다리가 얼었소. 당신들 힘을 빌려야겠소…??
동필은 파카를 벗어 SMG와 함께 형태에게 주었다.
??어쩔 셈인가???
??업구 가려네??
산은 그 웅장한 등과 허리를 드러내고 평안한 자세로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필은 보기보다 가벼운 간첩의 체중을 등으로 느끼며, 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인간의 자세가 누구 때문인가를 잠시 생각했다.
폭포 앞에서 그들은 쉬었다. 마을 쪽에서 산 위로 부는 찬 바람이 그들의 얼굴에 잿빛의 텁텁한 눈 가루를 뿌렸다.
??내 파카를 빌려 주게.??
형태는 간첩의 머리 위로 동필의 파카를 씌워주었다.
??주객이 전도되는군! 이 가당찮은 친절도 저 마을에서는 통하지 않을 껄…??
대남방송의 마이크 소리가 다시 들려 오기 시작했다. 동필은 간첩을 업었다.
??고향이 어디오???
??서울이오…??
??언제 월북했소???
??사변 때요…??
동필은 등과 등으로 전해 오는 따뜻한 체온에 처음으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산에서 내려 올 생각은 없었소???
그는 문득 자기의 질문이 소학생의 구구법처럼 너무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자수할 생각 말이오??
간첩은 잠잠했다. 코에서 뿜는 불규칙한 호흡이 동필의 목덜미를 끈적하게 했다.
??어쩌면 당신은 살 수도 있소…??
??…??
??우리가 삼십만환과 일계급 특진을 포기하면 말이오…??
??자수하라는 말이오???
??그렇지!??
세 사람이 비상 도로로 들어서자 간첩은 옮겨 업힌 형태의 등에서 말했다.
??자수하면 살 수 있읍니까???
???…??
동필은 어둠 속에서 파카 외투에 묻힌 간첩의 눈썹이 직선으로 몰리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막사 안에서는 자욱한 연기 속에 난로가 <크래커>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동필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한등을 복판에 두고 ??나일론 뻥??을 하던 김 하사가 마주 앉은 사병들의 어깨 넘어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야, 빵빵 아저씨들 일찍 오시는구나! 오늘두 빈 손인가, 응???
??토끼 대신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뒤 따라 들어선 형태가 난로앞 <매트레스>위에 간첩을 내려 놓았다. 등불 속에 반짝이는 여러 개의 시선이 일시에 간첩의 몸뚱이를 수색했다. 김 하사는 손에 들었던 화투장을 놓고 한 등을 간첩의 얼굴로 가져왔다.
??이거 ??8GP??그치 아닌가???
??그런 모양입니다??
??어디서 잡았나???
??폭포 뒤에서 모셔 왔죠??
김 하사는 혀 끝으로 두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갑자기 동필을 향해 짧은 목을 바로하고 공격자세를 취했다.
??너들은 내 부하다. 사냥을 내 보낸 것두 나다…. 반드시 토끼 사냥만 하라구 내 보낸 건 아니다…. 이걸 나중에라도 분명히 해 둬라….??
??그럴 필요두 없게 됐습니다??
동필은 소제 SMG를 김 하사에게 건네 주었다.
??산에서 우릴 보구 걸어 오더군요??
??걸어 와?… 제발루 말이가???
??본인한테 물어 보십쑈??
??잔소리 마라, 빵빵놈으 새끼야!??
그는 동필에게서 시선을 옮겨 간첩을 바라보았다. 먹이를 앞에 둔 맹수의 눈길처럼 김 하사의 눈동자에는 자신과 살기가 충만해 있었다.
??너 바른대루 대라, 이 빨갱이 새끼!??
입술 사이에 경유처럼 찐득한 침을 바른 김하사는 갑자기 두 손을 들어 간첩의 얼굴을 후려쳤다.
??바른대루 안대문 죽여줄 테다!??
그는 <매트레스> 위에 쓰러진 간첩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간첩은 얼굴 전체로 피를 번쩍이며 몇 시간전 산에서 보였던 그 언어가 불통하는 표정으로 굳어졌다.
??맘대루 하시오…??
??맘대루 하라구?…??
간첩은 김하사의 발길을 안고 다시 <매트레스>위에 쓰러졌다. 동필은 눈을 감았다. 귀와 콧구멍을 무수한 타음(打音)과 신음(呻吟)소리가 울리고 그는 점점 높아지는 자기 맥박소리를 귀로 헤아리고 있었다.
??여길 나가야 한다…이 풍성한 언어의 벽을 너는 뚫고 나가서 바람을 쐬라…??
그는 간첩을 둘러싼 사람의 울타리를 벗어났다. 전혀 뜻이 없는 형태의 시선이 그를 지켜 보고 있었다.
??어딜 가나???
??세수 좀 하려네…??
동필은 수건과 빈투를 찾기 위하여 관물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득 김 하사의 교환대를 차는 전화 소리를 들었다.
??에드벤, 에드벤, 여기 독수리 하나에 김 하삽니다. 중대한 보곱니다… 저, 다름 아니구요, ??8GP??에서 놓쳤던 간첩을 잡았읍니다. 예, 예! 장소는 ??9GP??서남방삼킬로구요, 시간은 십 칠시 현잽니다. 예? 간첩은 무사합니다. 제가 인솔한 아이들이 잡았습니다. 무기요? 소제 SMG 일정 뿐입니다. 예, 예, 감시는 철저히 하고 있읍니다. 참모님 하구 같이 오신다구요? 예, 기다리겠읍니다. 예, 예-. 염려 마십시오-. 이상입니다!??
김 하사는 ??EE-8??의 리시버를 놓고 다시 간첩에게 돌아왔다.
??너, 분명히 자수한 건 아니지???
??….??
??자 피 닦아라.??
김 하사는 자기의 장갑을 간첩에게 던져주고 동필을 손잣해서 불렀다.
??좀 나갈까???
??…??
두 사람은 막사 밖으로 나왔다. 달빛이 푸룬 색으로 눈위에 비췄다. 대남방송은 아직도 계속되었다.
??야, 박 일병!…??
김 하사의 손이 동필의 왼쪽 어깨 위에 놓여졌다.
??제대 몇 개월 남았나???
??한 반년 남았죠.??
??…………??
김 하사는 담배 두 대를 꺼내어 한 개를 동필에게 주었다.
??부탁하네… 상금은 서루 반타작 하구, 일계급 특진은 내가 해야겠어…??
동필은 담배 연기를 길게 빨아 들였다.
??그렇겐 안될 겁니다…??
??왜???
김 하사의 손이 어깨에서 내려왔다.
??간첩은 자수했다니까요…??
??자수가 아닌 것 같던데???
??여기선 매 때문에 그렇게 꾸미지만 높은 데 가선 딴 소릴 할 겁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지!??
김하사는 동필의 팔을 끌고 막사 문을 들어섰다.
간첩은 「매트레스」 위에 누워 있었다. 김 하사가 일으켜 세우자 그는 다음에 올 폭력을 기다리고 눈을 감았다.
??야, 빨갱이 새끼. 여길 봐라!??
??….??
??너, 분명히 잡혀왔지???
??….??
간첩은 형태와 정 상병의 부축을 받은 채 눈을 떴다.
??좋아!??
김 하사는 갑자기 관물대 쪽으로 걸어가서 철모 한 개를 들고 왔다.
??말해라, 빨갱이 새끼야 넌 자수가 아니지???
동필은 호흡을 크게 했다. 갑자기 엄청난 분노가 기관차처럼 요란하게 정맥 속을 지나갔다.
??말 못해???
육중한 철모가 머리 위로 떨어지기 직전에 간첩은 입귀를 움직였다.
??그렇소, 난 자수하지 않았소. 잡혀 온 거지 내 발로 걸어 온 건 아니오.??
순간 동필은 실 떨어진 연처럼 허탈한 심정으로 간첩의 옆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다시 한 번 말해라, 이 인간아. 너만 잘하면 사는 수두 있는 거다.??
간첩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동필에게 향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그렇게 구구하겐 살구 싶지 않았소. 약을 뺏은 것은 역시 당신의 잘못이었소…??
동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간첩의 웃는 얼굴에서 다시 한 번 깎아 지른 절벽과 같은 엄청난 거부의 자세를 읽었다. 그는 그 절벽에 계란(鷄卵)을 던지는 기분으로 간첩의 짧은 머리털을 움켜쥐고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네 일생을 일분이라두 밑질 필요는 없다. 세상은 아직 살아서 좋은 곳이다. 구구하게 아니라 구걸을 해서라두 살아야 한다. 자, 말해 보라, 죽을 테냐, 살테냐.??
동필은 그때 요란한 자기 내부의 소음 소리를 들었다.
??야, 빵빵놈으 새끼, 연극하지 마라…제법 영화배우 꼴이구나. 하하…??
김 하사는 동필의 덜미를 뒤로 잡아 젖혔다.
??곧 참모 님이 오실 거다. 미리 일러 두는데, 또 지금처럼 되잖은 여물통(입)놀리면 그땐 내게두 생각이 있다. 저리 구석자리루 꺼져서 기다려라.??
??꺼지죠, 꺼지구 말구요… 여물통두 이렇게 조용할 겁니다… 그런데…??
그는 김 하사의 너무나 건강한 아래턱이 갑자기 부럽다고 생각했다.
??참 튼튼한 얼굴입니다….??
동필은 느닷 없이 오른 손 주먹으로 김 하사의 아래턱을 후려쳤다.
??어? 이 새끼 눈에 뵈는게없나???
흑색의 철모가 동필의 전 시야를 가로막았다. 뒤미처 무수한 구둣발이 몸위로 부딪치고, 그는 쓰러진 채 무릎으로 기었다.
??여길 나가야 한다. 우선 이 막사를…??
그는 연이어 부딪치는 충격과 통증을 의식하며 한사코 기는 동작을 계속했다. 잠시후 뒤따라 오던 구둣발의 충격이 멎고, 그는 차츰 회복되는 혼미한 시력으로 자기자신이 눈(雪)속에 파묻힌 것을 알았다.
??목이 타는구나…??
그는 혀끝으로 사방의 눈을 더듬어 핥으며 몸을 번듯하게 하늘을 향하여 누웠다.
보기에 딱할 정도로 무관심한 달이 구름 사이를 뱅글뱅글 굴러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