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 솔 그늘에 접는 안락의자 펴고 한나절 /오태진
책 몇 줄 읽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졸다 자다 깨다 맥주 홀짝인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옥빛 바다를 바라본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어루만진다.
간간이 숨을 막을 듯 몰아쳐 머리카락을 쓸어 눕힌다. 여름 해변에 시간이 바람처럼 흘러간다.
몸도 마음도, 얽히고설킨 시름도 잡생각도 다 내려놓는다.
7월 중순 여수 돌산 방죽포에서 휴가 한나절을 보냈다.
돌산대교 건너 섬 동남쪽으로 한참 내려가 향일암 길목에 들어앉은 해수욕장이다.
길이 150m, 너비 30m 아담한 해변이 항아리 속같이 옴팍하다. 물이 방죽처럼 잔잔하다.
이른 더위에 보름 전 개장했지만 한낮 바닷가는 한산하다. 뙤약볕 백사장이 텅 비었다.
'수영 가능'이라고 쓴 깃발만 펄럭인다. 사람들이 왔다가 썰렁해서 돌아설까 봐 꽂아놓은 모양이다.
얕은 물에서 첨벙대는 아이들 네댓뿐, 방학 앞둔 평일이라곤 해도 철 지난 바다 같다.
외진 방죽포까지 찾아간 것은 언젠가 봐뒀던 솔숲에 끌려서다.
이백 살 넘은 방풍 송림이 해변을 에워싸고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 100여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찼다.
접는 안락의자 둘을 차에서 꺼내 그늘에 폈다.
팔걸이 달린 알루미늄 뼈대에 천을 대 가벼우면서도 꽤 편안하다.
접는 탁자도 펴 책이며 주전부리며 캔맥주를 올려놓는다. 안경 벗어두고 선글라스 낀다.
몸을 의자에 깊이 묻는다. 솔 그늘에서 솔 내음 맡으며 솔바람 쏘인다.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은 흉내도 못 내게 시원하다. 금세 잠이 든다.
솔숲 곳곳에 통나무 의자가 있다. 중년 한 쌍이 나란히 앉아 바다를 본다. 얘기는 주로 여자가 한다.
목소리가 낮아서 더 보기 좋다. 남자가 박자 맞추듯 이따금 고개를 끄덕인다.
바람에 두 사람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저쪽 나이 지긋한 장년 남자는 자리 펴고 신발 벗고 누워 뒹군다. 모든 게 멈춘 듯 정밀(靜謐)한 여름 낮이다.
원래는 출출해지면 남쪽으로 잠깐 내려가 이름난 전복죽을 사 먹고 오자고 했었다.
그런데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만사가 귀찮다. 바로 옆 음식점에서 솜씨 서툰 통닭 배달받아 때운다. 바람에 몸을 내맡긴 채 또 졸다 자다 한다. 지루하기는커녕 시간이 어찌 가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해가 기울면서 바다에 눈부신 은비늘을 띄웠다. 파도가 적신 백사장도 은빛으로 반짝인다.
그제야 일어나 카메라 메고 해변으로 나간다.
아이들만큼 좋은 피사체도 드물다. 할머니와 손녀가 손잡고 물가를 걷는다.
아기는 걸음마 뗀 지 얼마 안 됐는지 뒤뚱거린다. 할머니 손을 놓더니 혼자 아장아장 걸어 물에 발을 들이민다. 얕고 순한 파도가 종아리를 때리자 신이 나서 두 팔 벌리고 웃는다.
해초 주워 할머니께 건넨다.
할머니도 고개 젖혀 웃음을 터뜨린다. 젊은 할머니에게 이보다 행복한 순간이 있을까.
엄마가 지켜보는 앞에서 딸아이가 튜브 끼고 물장구를 친다.
'딸 바보' 아빠와 두 딸이 주저앉아 모래성과 추억을 함께 쌓는다.
가족이 있어 한결 평화롭고 아름다운 바다다. 서쪽 산 그림자가 해변에 길게 누웠다.
의자 접고 짐 챙겨 일어섰다. 방죽포의 오후 한나절이 달콤했다.
[오태진의 길 위에서] 해변 솔 그늘에 접는 안락의자 펴고 한나절 / 오태진
몇 년 전 오토 캠핑에 눈독을 들인 적이 있다. 텐트며 갖가지 살림살이를 차에 싣고 가 자연 속에 차려놓고 즐기는 캠핑이다. 용품 가게를 기웃거리다 맨 먼저 접는 안락의자부터 한 쌍 장만하고는 캠핑을 포기했다. 워낙 텐트 짓고 살림 차릴 손재주가 없고 나이 든 사람에겐 캠핑이 안 맞는다 싶었다. 남은 건 접는 의자였다.
흔히 '릴랙스 체어(relax chair)'라고 하던데 '폴딩 암체어(folding armchair)'쯤이 맞는 이름이겠다.
딱히 쓸모를 염두에 둔 건 아니지만 의자를 묵히기 아까워 여행 길에 싣고 다녔다.
비 오는 휴양림 '숲 속의 집' 테라스에 펼쳤다. 망상해변 '모빌 홈'에 묵으며 밤 백사장에 펴놓고 별을 봤다.
그러던 작년 8월 말 늦은 여름휴가 마지막 행선지 거제에 갔다.
하루를 온전히 해안 드라이브로 보내기로 하고 섬 서남쪽 저구항에서 출발했다.
선착장 남쪽 해안도로 모퉁이를 돌자마자 작은 해변을 만났다.
바닷물 맑고 모래 고와 명사(明砂)해수욕장이라고 했다. 바닷가에 우람한 낙락장송이 늘어섰다.
그 아래 널찍한 나무 데크가 길게 깔렸다.
당장 차에서 접는 의자를 갖고 와 소나무 아래 폈다. 철 지난 바닷가는 한적하고 파도 소리만 철썩였다. 바람 솔솔 부는 그늘에선 남도의 늦더위 노염(老炎)도 힘을 못 썼다. 더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다. 낙원을 두고 가기 아까웠다. 그날 일정이 거기서 멈추고 끝났다.
여행하면서 계획을 꼼꼼하게 짜는 편이다. 어느 식당에서 어떤 음식 먹을지도 궁리해 코스를 정한다.
일정이 빡빡할 수밖에 없다. 기름값 무서운 줄 모르고 쏘다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즐거움에 눈을 떴다. 한곳에 오래 머물며 오래 기억할 하루를 보냈다. 거제 명사해변과 돌산 방죽포해변 솔숲 덕분이다. 그보다 기특한 것이 접는 안락의자다. 뒹굴뒹굴 빈둥거리며 깨달았다. 휴가란 이런 것이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