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을 축하하며
김천봉 연출은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테렌스 영 감독과 공동 연출한 한재수 선생이 원장이던 한일배우전문 아카데미 2기 수석졸업생이다. 88올림픽 촬영감독으로 참가했고, 한때 대구에 정착해 연출로 대구 연극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2013에는 액팅노트.를 출판하기도 했다. 금번 현대극과 관련된 서적을 출판하기에 자랑스러운 마음이다.
현대극은 자연주의의 정점에 다다른 사실적인 근대극에 대해 20세기 초에 시작된 다양한 반사실적(反寫實的) 연극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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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현실이라는 환상의 파괴와, 사실적인 무대형식, 전통적인 드라마를 부정하는 혁신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1910년경부터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표현주의, 이탈리아의 미래파나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기타 상징적 ·추상적인 연극운동들에 공통되었다. 예를 들면, 스위스의 무대미술가 아피아가 시도한 연극공간의 입체화, 영국의 연출가 크레이그가 주장한 무용 ·제스처의 강조 등은 새로운 연극형태의 선구적인 뜻을 가진다. 현대연극은 고전 ·중세 등의 극형식의 재평가를 시도하여 연극의 제사성(祭祀性), 혹은 동양연극으로의 환원 등을 실험하였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히어로(hero:연극의 영웅적 주인공)의 소멸, 개성의 상실, 극의 줄거리나 허구성의 포기, 감정정화와 동일화의 부정, 소외 현상에 수반하는 대화의 독백화 등 드라마 자체의 해체현상이 진행되었다. 이미 20년대의 L.피란델로의 작품에서는 작중 인물들의 통일성이 없어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연극에서는 르포르타주나 조서(調書)의 사실성(事實性)만이 중시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극의 혁신운동은 무엇보다도 속화(俗化)된 시민적 연극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것이 곧 강한 사회성을 띠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반적으로 전위극 운동이 후퇴하였으며, 전후에는 프랑스의 J.지로두, J.아누이, 미국의 E.오닐, A.밀러, 테네시 윌리엄스, 영국의 엘리어트, C.프라이, 독일의 추크마이어, 그리고 실존주의 입장에서 연극에 참여한 프랑스의 사르트르, 카뮈 등의 작품이 많이 상연되었다. 이와 같은 작품들 가운데는 고전극이나 근대극으로부터 이어받은 수법과 새로운 시도가 뒤섞인 경우가 많다. 50년경부터는 반연극(反演劇)이 프랑스의 이오네스코, 영국의 베케트 등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부조리연극(不條理演劇)이라고도 불리는 이 운동은 현대에 살고 있는 인간의 불안 ·고독이 표출되고 있으며, 줄거리나 개성이 무시되고 나아가 주제까지도 거부되었다. 같은 무렵, 독일의 B.브레히트는 서사연극(敍事演劇)을 주창했는데, 이는 비(非)아리스토텔레스적인 연극이라고도 불리며 카타르시스를 부정하고 관객에게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고취시키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한편, 프랑스의 클로델과 A.아르토를 선구로 하는 전체연극(全體演劇)의 이념은 연극의 모든 요소를 종합하여 무대 위에 소우주를 구성하고 제전의식(祭典儀式)으로서의 연극성을 도취에 의해 고조시키려는 것이며, 최근 바로 등에 의해 부활되고 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기록연극은 키프하르트의 《오펜하이머 사건》 초연(1965) 이후 보급되었고 다큐멘터리식 고발극의 성격을 띠며, 신즉물주의 연극과 비슷하지만 사실에 기초를 둔 작자 자신의 명료한 방향설정이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호흐후트의 작품은 다시 극적인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을 보이며, 와이스의 경우에는 사실에 의식적인 추상화(抽象化)가 첨가되어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경향과 더불어 통속극의 유행과 같은 복고현상이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영국의 J.오스본 등의 신좌파(新左派) 연극 등 새로운 사실주의 연극의 흐름이 있는가 하면, 가두연극(街頭演劇) ·해프닝 등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돌아가려는 실험도 진행되었다.
프랑스의 현대극은 1920년까지는 조르주 페이도, S.기트리, M.P.파뇰 등의 불바르극(劇)이 풍미하여 흥미 위주의 상업극이 판을 쳤으나, 한편에서 연출가 J.코포는 ‘비외콜롱비에 극장’(1913∼24)을 개관, 간결한 상설무대에서 양식미(樣式美)를 추구하는 가운데 문학적 향취 높은 빌드라크 등의 희곡을 상연했다. 모두 코포의 제자들인 감각파의 뒬랭과 지적(知的)인 주베는 각각 반사실주의적(反寫實主義的)인 연출로 나중에 불바르 연극의 대가로 성장한 아샤르, 풍자희극의 J.로맹을 소개하였다.
그 밖에도 뒬랭은 사회와 신(神)을 응시하는 살라크루를, 주베는 천재적 시인 J.콕토의 다채로운 연극을 발굴하였다. 특히 주베는 《지크프리트》(28)에서 시작되는 H.J.지로두의 희곡을 통하여 시정(詩情) 넘치는 무대미(舞臺美)의 창조에 성공함으로써 한 시대를 빛낸 연극인의 자리를 누렸다.
11월혁명(구력 10월) 후 프랑스에 정착한 러시아 출생의 피토예프 역시 마찬가지 입장에서 활동을 벌이는 가운데 청춘과 반항의 작가 장 아누이를 등장시켰으며, J.B.M.G.바티는 무대형상(舞臺形象) 중심의 새로운 연출 수법으로 르노르망의 심리극을 소개하였다. 이상 네 사람의 연출가들이 거느리는 4개의 전위극단을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연극은 활기차게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심리극의 E.부르데와 P.제랄디, 그리고 불바르극의 드발 등이 이 시기를 통해 활동하였으며, 아르토의 연극론은 앙티 테아트르[反演劇]의 선구적인 예술창조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에 의한 연극이 전개되면서 아울러 카뮈와 아누이의 반항의 연극이 고개를 들었고, 연출가 J.L.바로가 재발굴한 클로델의 우주적(宇宙的) 상상력에 입각한 시극(詩劇)이 나란히 프랑스 연극의 주류를 이루었다. J.빌라르가 주재하는 TNP(국립민중극장)와 각 지방의 연극센터가 연극 보급에 이바지하는 한편, 문학계에서는 에메, T.모니에, 사강 등이 연극에 참가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이름을 떨친 작가는 《산티아고의 기사장(騎士長)》(47)을 쓴 몽테를랑이었다.
50년대부터는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女歌手)》(50),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53) 등으로 대표되는 앙티 테아트르가 소극장운동과 연결되면서 기성연극의 구조를 부정하고 가속도적으로 공전(空轉)하는 환상을 무대화하였다. 이 반연극파에 속하는 유력한 작가로는 아다모프, 비에두, 뒤라스, 주네, 가티 등을 들 수 있다.
박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