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종일 비가 오거나 흐린다는 예보완 달리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상쾌할 정도로 청명하다. 장마철이라 지난 주 내내 많은 비가 쏟아지고 그치기를 반복하며 개일 틈새조차도 없었다. 비가 세차게 올 것을 고려해 산행을 포기하거나 동대문 역사공원에서 시작해 시청으로 연결되는 지하도로를 선택하려고 했었다. 날씨가 대단히 맑아 비나 흐릴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우산을 챙길까 말까로 고민스럽다. 뜨거운 여름에 야외에서 움직일 땐 거추장스러운 어떤 물건도 지니지 않는 게 상책이다. 아내의 조언과 오후 3시부터 비가 내린다는 신뢰할 수 없는 예보에 따라 마지못해 우산을 챙겨 문을 나선다.
요즈음 자주 빈손으로 와 빈손으로 간다는 말을 곰씹는다. 3일 터울로 삶을 마감한 재진의 부인과 우석이 인생의 무상함을 소름끼치도록 일깨워준다. 두 사람 모두 산행과 바둑에 열성적으로 참여했기에 그들의 빈 터가 아픔을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가온다. 비록 너무 빨리 생의 끈을 놓았지만 추모하고 그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의 이승의 삶은 가치가 있었고 저승의 삶 또한 행복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살아생전에 악착스럽게 쫒던 부와 명예는 죽으면 부질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더 깊게 각인시켜준다. 떠난 사람들의 쌓아온 정의 무게에 따라 애도와 그리움도 걸맞게 표출된다. 바꾸어 말한다면 살아있을 때 꾸준히 맺어온 교분이 죽음 뒤에 남는 유일한 영롱한 자산이다.
노년은 추억이 있어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그런 추억 중에 가장 빛나는 건 순진하고 맑았던 학창시절에 쌓았던 우정과 사랑이라고 본다. 냉철한 경쟁의 사회에 발을 들여 얻어진 자산은 거의가 버리고 싶을 정도로 인간미가 결여되어 있다. 우리도 이젠 노년기 초입에 들어섰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만나 학창시절의 정을 더 다지며 최고의 추억을 더 값지게 만들어야 한다.
만남의 장소에 닿으니 이미 대여섯 명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곧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재진이 나타난다. 항상 접한 웃는 부처 같은 모습이 아니라 아픔이 베어있는 무심한 표정이 가슴을 찢어놓는다.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도 실제론 겉치레한 인사일 뿐이다. 모두 12명이 모여 푸른 녹음에 감싸인 안산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재진이가 부인과 함께 이 둘레길을 자주 찾았던 걸 생각하니 고인이 더욱 눈에 그려지고 서글프다. 게다가 작년 봄에 이 길을 마지막으로 걷고 가을에 떠난 진동이가 떠오르니 이슬이 눈가에 맺혀 발길을 떼기가 힘들다.
깊은 상념에 걷다 보니 어느새 쑥쑥 뻗은 메타세콰이어에 휘감긴 만남의 숲 터에 도착한다. 해맑은 하늘과 푸르다 못해 밝게 빛나는 숲을 배경으로 기년사진을 찍으려고 뒤처져 오는 친구들을 기다린다. 시간이 되었다 싶었는데도 5명의 친구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길로 빠진 거다. 산행을 하다보면 길을 헤매는 건 다반사다. 하지만 안산 둘레길은 표지만 제대로 파악하고 따라가면 된다. 길을 놓치는 건 하늘에서 별 따는 것처럼 대단히 힘들다. 더욱이 길을 놓친 친구들 중 산을 매주 타는 프로급의 알피니스트도 있고 몇 번 왔던 단골도 있어 황당하기 짝이 없다. 다행히 꾸준히 연락해 홍제천이 흐르는 산 밑에서 만난다. 1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인공분수가 폭포 물을 쏟아내는 아름다운 광경을 배경으로 뜨겁게 비추는 햇빛 때문에 급히 추억의 사진을 찍고 회식장소로 서두른다.
예약이 없이 들어간 탓에 세 테이블에 나뉘어 회연을 갖는다. 충만하게 들고 마시며 잡스러운 얘기를 나눈 뒤 일어선다. 고맙게도 재진이가 모든 걸 지불했다. 그러나 내색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힘쓰는 가운데도 느껴지는 재진의 진한 아픔이 마음을 내키지 않게 한다. 근처의 카페에서 커다란 양재기에 푸짐하게 담아놓은 팥, 망고 빙수를 들며 끝이 없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다사금 풀어나간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니 3시쯤이다.
살아있는 모든 친구들이 건강하게 노년을 보내며 더욱 서로 아끼고 배려하기를 기원하며 갖은 아쉬움에 잡혀있던 하루를 마감한다.
함께한 친구들: 강윤구, 김세진, 김승열, 김영후, 김희택, 박재진, 방건영, 서규석, 이승권, 이원식, 이재묵, 최원석